접동새
김소월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접동새설화
【해설】
계모에게 구박받던 처녀가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동물 유래담. 구전설화로 변신담(變身談)에 속한다. ‘까마귀와 접동새의 유래’로도 불리고 있다. 구전설화로 전국에 널리 분포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채록된 설화는 많지 않은 편이다.
이 설화는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진 못된 계모형 가정비극 설화이다. 이 설화는 까마귀와 접동새의 생태계내의 관계와 접동새 울음소리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못된 계모를 둘러싼 가정비극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소재는 비단 설화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문학작품의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하여 많은 계모형 소설들을 형성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유형은 김소월(金素月)의 시 <접동새>의 직접적인 소재적(素材的) 원천으로서 우리 문학의 비극적 정서환기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내용】
『옛날에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은 어느 부인이 죽었는데, 후처로 들어온 계모는 전실 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구박했다. 혼기가 찬 처녀는 많은 혼수를 장만해놓고 구박을 못이겨 갑자기 죽고 말았다. 아홉 오라비(오랍동생)가 슬퍼하면서 누나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는 아까워하며 태우지 못하게 말렸다.
이에 격분하여 그 계모를 불 속에 밀어 넣었더니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접동새가 된 처녀는 밤이면 오랍동생들을 찾아와 울었는데,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까닭은 까마귀가 죽이려 하므로 무서워서 그런다고 한다.』
『옛날 어느 부인이 아들 아홉과 딸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후처로 들어온 부인이 딸을 몹시 미워하여 늘 구박하였다. 처녀가 장성하여 시집갈 때가 되었으므로 많은 혼수를 장만하였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아홉 오라버니가 슬퍼하면서 동생의 혼수를 마당에서 태우는데 계모가 주변을 돌면서 아까워하며 다 태우지 못하게 말렸다. 화가 난 오라버니들이 계모를 불 속에 넣고 태우니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처녀는 접동새가 되어 밤만 되면 오라버니들을 찾아와 울었다. 접동새가 밤에만 다니는 이유는 까마귀가 접동새를 보기만 하면 죽이므로 무서워서 그렇다고 한다.』
『옛날 진두강가에 10 남매가 부모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의붓어미가 들어왔는데, 의붓어미는 아이들을 심하게 구박하였다. 생모의 유품을 모두 치워버리고 전실 자식들에게는 끼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외출마저 금지시켰다.
큰누이가 과년해지자 박천의 어느 부잣집 도령과 혼약하여 많은 예물을 받게 되었다. 이를 시기한 의붓어미가 그녀를 친모가 쓰던 장농에 가두었다가 불에 태워 죽였다. 동생들이 슬퍼하며 타고 남은 재를 헤치자 죽은 누이의 화신인 새 한 마리가 날아 올라갔다. 관가에서 이를 알고 의붓어미를 잡아다 불에 태워 죽였는데, 재 속에서 까마귀가 나왔다.
접동새는 동생들이 보고 싶었지만 까마귀가 무서워 야삼경에만 와서 울었다.』
설화를 차용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설화를 새삼스럽게 시로 썼다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설화를 빌려다가 무엇인가를 표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그 ‘무엇인가’에 해당하는 것은 단순히 ‘설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한(恨)’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현재 우리의 한(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현재 우리의 한(恨)’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화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연은 접동새 울음소리로 시작합니다. 다음 몇 가지 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선 한(恨)을 상징하는 접동새 울음소리로 시작하여 작품 전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한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마지막 행의 ‘아우래비’는 ‘아홉 오래비’라는 뜻으로, ‘오래비’는 남자 형제를 가리키는 평안북도 방언입니다. 이 표현은 설화의 내용과 연결되어 한스러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둘째, 민요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AABA 구조로 되어 있어, 리듬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독자를 자연스럽게 옛날로(민요, 설화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셋째, 세 번의 울음소리를 각각 하나의 행으로 처리하여 산을 옮겨가며 우는 접동새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행을 나누는 것은 끊어 읽으라는 의미로, 세 번의 울음소리 사이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이는 마지막 연의 ‘이 산 저 산 옮아가며’라는 표현과 어우러져 이 산에서 ‘접동’, 울고 저 산에 가서 ‘접동’ 우는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 접동새 울음소리를 찾아 들어보니 ‘접동’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합니다. -
2연에서는 설화 속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나’라는 표현과 ‘웁니다’라는 현재시제가 사용된 것으로 봤을 때 화자는 설화 속 동생들로 보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1연의 접동새 울음소리는 설화 속 접동새의 울음소리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연에서도 설화 속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연에 오면 화자를 설화 속 동생으로 보는 게 맞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에도 ‘누나’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 / 먼 뒤쪽의’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면 화자를 설화 속 동생으로 보기 보다는 ‘현재의 누군가’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4연입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라는 표현으로 봤을 때 화자는 ‘현재의 누군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설화 속 진짜 동생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을 테니까요. 이 표현을 통해 ‘현재의 누군가’는 설화 속 동생들과의 일체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행의 ‘우리 누나는’이라는 표현이 단적인 근거입니다. 왜 둘 사이에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설화를 차용한 효과가 분명해집니다. 이런 식의 정리가 가능합니다.
‘현재의 누군가’는 한스럽다. 얼마만큼 한스러운가 하면 독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접동새 설화에 나오는 동생들이 가지는 한스러움 만큼.
화자는 설화 속 동생들과 일치됨으로써 ‘오오 불설워’라고 격해진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불설워’는 평안북도 정주 방언으로, 불쌍하고 쓸쓸한 정경이 사람의 마음에 깊은 느낌을 주는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 연입니다. 1, 2연을 내용 면에서 반복한 듯합니다. 흔히 말하는 수미상응 기법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수미상응 기법이 주는 반복과 안정감을 주는 마무리의 효과는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오랩’은 남자 형제를 가리키는 평안북도 방언이라고 하니, 설화 속 동생들을 가리킵니다.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는 설화 속 상황일까요? 아니면 현재 상황일까요? 둘 모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설화 속 상황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쳐 온 3. 4연의 화자를 고려했을 때, 이제 과거 설화 속 인물과 이야기는 현재와 합쳐지고 있으니까요. 2연에서 한 설명과 달리 ‘웁니다’라는 현재시제가 사용된 우는 행위는 설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행위이며, 동시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보면 1연의 접동새 울음과 2연의 누나의 울음도 과거의 것만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연의 화자 역시 과거 설화 속 동생들로 국한지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시인은 한스러움의 상징과도 같은(?) 접동새 설화를 작품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런데, 이 한스러운 이야기가 단지 옛날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즉 현재도 옛날처럼 한스럽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시인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설화 속 동생들과 ‘현재 우리’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