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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5일(주일) 누가복음 2:8~20 '우리를 위해 나신 구주' 새찬송가 122장 참 반가운 성도여
오늘은 누가복음 2:8~20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를 위해 나신 구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살펴보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에게 주의 사자 곧 천사가 나타나 주의 영광을 두루 비추게 되니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그 때에 그 천사는 10절에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선포하며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 때 수많은 천군천사도 홀연히 나타나서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한 대로 구주나심의 기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천사가 전한 소식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성탄절입니다. 함께 옆 사람과 함께 서로 기쁨으로 인사해보실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유래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으로 보는 시각과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전통으로 보는 시각을 살펴보면은요, 1세기와 2세기의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사건으로만 기록되었을 뿐 정확한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수태일이 3월 25일이라고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태 일을 기준으로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전통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역법인 ‘율리우스력’에 의해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기념되었다고 합니다. 그 날은요, 동지를 지나고 난 후부터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힘을 얻어 만물이 소생할 수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하고 기념했다고 기록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율리우스력의 12월 25일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인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데요.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을 의미하는 ‘christ’와 ‘모임’을 의미하는 ‘mas’를 합성하여 만든 영어 단어입니다. 또한 X-mas로서 불리우는 데요. 여기서 ‘X’는 ‘크리스토스’(kristos)라는 그리스어의 첫글자를 따고 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인 ‘메리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성탄절’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라별로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데요. 프랑스에서는 ‘노엘’(noel)이라고 하구요. 찬송가에서 이미 익숙한 말이죠, 독일에서는 ‘바이나흐튼’라고 하고, 스페인에서는 ‘나비닷’이라고 한답니다. 캐롤송에 보면 ‘펠리스 나비다’라는 노래를 들어보셨을텐데요. 펠리스는 스페인어로 ‘행복’이라는 뜻이구요. 여기에 ‘나비닷’(navidad)을 붙여서 ‘행복한 성탄절’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요즘은 미국에서 유대인등 타종교인을 배려해서 ‘메리크리스마스’ 대신에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현대 사회에 이르러 기독교의 이미지를 지우려는 그런 의도로 해석이 됩니다.
대략 성탄에 대해서 일반적인 상식적인 수준에서 살펴보았는데요. 성탄에 대해서 오늘 천사는 목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란 말에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목자 만이 아니라, 우리 온 인류를 위하여 구주 즉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성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나신 구주’이십니다.
오늘 천사는 먼저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주의 영광을 비추며 그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목자’는 하층민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밤에 일하는 목자’는 사람들 중에 가장 낮은 지위에 속했습니다. 하필이면 주의 천사가 로마 황제와 같이 유명하고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낮고 천한 목자들에게 구주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한 것은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나타냅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서 그들의 목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다시 한 번 고백해보실까요? “메일 크리스마스” 할렐루야!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다고 하셨는데, 우리의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주요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님 오심을 기뻐해야 할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성탄케익을 예약하고 주문해서 나눠 먹고, 서로 성탄카드를 주고 받고, 성탄선물을 주고 받고, 각종 모임을 가질까요? 정작 그들은 이 날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면서도 정작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상에서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그 목적도 모르고 하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좋지 못한 행동 몇가지를 말씀주셨는데요. 그냥 편하게 들으세요. 1. 일어나자마자 커피 마시기 2. 너무 빨리 먹기 3. 밥먹으면서 TV보기 4. 식사 후 물 한잔 마시기 5. 플라스틱 용기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5. 마트에서 산 음료수 캔 씻지 않고 먹는 것 6. 토마토 실온에 보관하기 7. 햄버거를 한 방향으로 먹기 등등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그저 성탄절을 즐기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독교들을 위해서만 오셨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를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오셨다면 무슨 유익을 위해서 오셨을까요?
첫째는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막혀 있는 담을 허시고 다리가 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막혀 있는 담은 바로 우리들의 죄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 땅에는 수많은 관계가 깨지게 되었고, 그로 인한 아픔과 상처와 절망과 고통만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모든 아픔과 고통과 상처의 근본원인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거룩하고 악이 없고 순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날 밤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를 그들이 거주하는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의식을 행하도록 명하십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고 했습니다. 이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리운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장자의 죽음을 이기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지나갔습니다(pass over). 그러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이집트의 장자들은 위로는 바로왕의 장자로부터 모든 평민들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문설주에 뿌려진 죽음을 피하는 ‘어린양의 피’는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상징합니다. 또한 레위기에서 모세는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를 속함받는 ‘속죄의 원리’를 알려줍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피는 육체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이유는 죄를 범한 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제단에 제물로 드려진 희생제물로 인하여 제사자의 죄가 속함을 받게 됩니다. 이 피를 뿌리는 구약의 희생제사는 앞으로 다가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의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는 대속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일년에 몇 차례씩 드리는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의 대속의 진리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성탄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려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탄의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치욕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심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서로 인사해 보실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이제 메리 크리스마스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랬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탄생하신 목적이 바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 21)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되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심판 받아 지옥가야 마땅한 인생임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나를 죄와 저주와 심판에서,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흔히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어쩌구 저쩌구’ 다 붙이면서 말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르되 나를 구원해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그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이 죄악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그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 싱(Sundar Singh)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신학 교수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힌두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는데 힌두교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선다 싱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수는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는 당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종교와 다른 특별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르침이나 교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개종시킨 것은 바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교수는 두 번째 대답에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선다 싱 선생님, 내가 질문하려는 의도가 당신에게 충분하게 전달되지 못한 것 같군요. 내가 묻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가운데 힌두교와 다른 철학, 즉 당신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신봉하도록 만든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다 싱은 이 질문에도 역시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허락된 것은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40편 2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하며 과거에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1-2절)”.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다윗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아멜렉 군을 쫓아가서 그들을 진멸하고 처자식을 다시 구해왔고, 많은 전리품을 빼앗아 왔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 다가와도 구원을 주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기다려야 합니다. 성탄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 땅의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뿐 아니라 우리를 궁극적인 죄와 사망의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수 있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기 예수님이 계신 베들레헴에 도착한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 아기예수를 보고, 천사에게 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인 간난 아기였지만,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 구주로서 세상을 구원하실 분임을 알립니다. 이 목자들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처음으로 전한 영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들은 말씀을 사실로 믿어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찾아가 전할 수 있는 목자와 같은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실 구주되심과 나를 구원하신 구주되심을 믿으십니까? ‘메리 크리스마스’는 우리끼미만 외쳐야 하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