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덕 산문집 p215-216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따른다면 물을 담으면 물병이요, 꽃을 담으면 꽃병이요, 꿀을 담으면 꿀병인데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아닌가. 무엇을 담느냐는 오직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일렀지. “밉게 보면 잡초 아닌 것이 없고, 좋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나니 그대는 자신을 꽃으로 보시게.”
#긍정적 사고와 낙관주의 : 몇 년 전 뉴욕 근교에 한 달 동안 머물 때였다. 그 옛날 당시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했던 석유왕 록펠러 소유였다는 고래등 같은 근교의 야산을 오르락내리락 아침 등산을 했다. 근처에 살고 있던 동서 내외의 안내로 며칠간 즐기면서 록펠러의 일생을 되짚어 볼 기회가 있었다. 알다시피 그는 잔혹한 독점자본가의 행태를 보여가면서도 석유사업을 통해 33세에 백만장자가 되고, 43세에 미국 최대 부자가 되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으나 행복을 느끼기는커녕 돈 버는 데만 지나치게 몰두하여 각종 스트레스와 소화불량 및 우울증에 걸려 1년 시한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훨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를 지나가던 록펠러의 눈에 우연히 띄인 것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글귀였고, 또 하나는 완치될 수 있는 병을 수술비가 없어 죽어간다고 울부짖는 소녀였다. 그래서 그가 수술비를 대어 주자 소녀는 거뜬히 살아남았다. 이를 본 록펠러는 크게 깨닫고 자선사업가로 돌변하였으니 그때 나이 55세, 그때로부터 그는 긍정적, 낙관적 사고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가 내놓은 사회환원재산은 당시 일본정부예산의 8배에 달하는데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러한 긍정적 낙관적 모드는 자기의 몸도 자꾸 좋아지게 함으로써 97세까지 생존하여 43년간을 더 수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았다지 않는가.
*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0-12-18 03:00
바다에서 만난 횡재와 악재[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42〉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해구를 잡았다. 선주의 몸보신용으로 바치려고 높은 곳에 달아서 말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해구가 없어졌다. 야단이 났다. 도저히 누가 범인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보름 정도 지나자 원로 선원 한 명의 머리카락이 일부 하얗게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심했다. 그는 결국 해구를 먹었다고 실토했다. 해구를 먹으면 남자들의 정력에 도움이 된다는 낭설이 바다에는 떠돈다. 그런데 잘못 먹으면 머리카락에 이상 반응이 나타난다.
나는 다른 이유로 해구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 중국에 입항하자, 미국에서 실은 원목 위에 해구 한 마리가 발견됐다. 콜럼비아강에서 원목 작업 시 인부들이 죽은 해구를 우리 배에 실었던 것이다. 중국 당국이 위생법 위반으로 상당한 금액의 벌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내가 납부해야 했다. 원로 선원에게 해구는 횡재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불운이었다. 황당한 일이 또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선원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선박으로 돌아왔다. 경찰이 따라 선박으로 왔다. 그를 체포해야겠다고 했다. 술집에서 폭행했다는 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선원은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곧 출항해야 했다. 갈 길이 바쁜 선장은 보석금을 주고 선원을 풀어서 데리고 왔다. 선원의 선상급을 그만큼 깎았다. 선원은 선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자신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왜 합의금을 주었냐는 것이었다. 선장은 “당신을 외국에 남겨두고 우리만 출항해야 했느냐”고 했다. 떠나야 할 일정이 있기에 따질 겨를도 없어져 억울해지는 것이 바다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운명이기도 하다.
선박의 연장을 도난당하고 동일한 것을 사야 하는 일을 당하면 참으로 황당하다. 로프가 몇 다발 없어졌다. 법정 부속이라서 이것이 없으면 출항을 할 수가 없다. 동일한 것을 살 수도 없어 안절부절 못했다. 출항에 임박하여 현지 대리점이 우리 배의 로프를 보여주더니 상당한 돈을 주면 팔겠다고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 것을 돈을 주고 회수한 다음 출항에 나섰다. 그 항구를 떠나면서 허공에 대고 저주를 퍼부었다.
바다에는 이렇게 불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목선에서 횡재를 한 적도 있다. 같은 화주의 원목을 반복해 실어주었다. 화주 감독이 나를 부르더니 그동안 고생했으니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그가 지름 2m에 두께가 1m 정도 되는 원목 뿌리를 건넸다. 그는 옹이나무(그루터기)라고 하면서 한국에 가져가면 비싸게 팔 수 있다고 말했다. 고참 선원이 나에게 말했다. “1항해사님, 고기 굽는 집에 가면 식탁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에 200만 원은 족히 받습니다”라고 했다. 5개이니 합이 1000만 원이다. 10명의 갑판부 선원과 나누면 각 100만 원가량의 용돈이 생긴다. 대만에 들어갔다. 개당 200만 원에 팔아서 선원들과 나누어 가졌다. 1등 항해사인 나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으면서 나는 하선하여 즐거운 휴가를 가졌다. 이런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있으니 바다 생활은 견딜 만했다. 그래서 휴가를 갈 때에는 “이제 바다생활은 마지막”이라고 각오를 다지지만 휴가를 마치면 다시 바다가 그리워진다.
* 오늘의 묵상 (220702)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단순히 ‘단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전통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모습에서 순수한 궁금증보다는 묘한 우월감과 비판 의식이 느껴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신앙생활을 정해진 규범과 전통을 따르는 정도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왜 요즘 여성 신자들은 미사보를 안 쓰나요?” “왜 요즘 신자들은 묵주 기도를 무릎 꿇고 바치지 않나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앙의 핵심을 마주합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규칙과 전통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다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새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따르는 규칙과 전통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끔 규칙과 전통으로 이루어 놓은 개인과 공동체를 찢어지고 터지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슬퍼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닿는데도 어떤 찢어짐이나 터짐이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고요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김인호 루카 신부 대전교구도룡동성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