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하늘 위에]에 대해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 위라는 설(고후 12:2)①이나, 유대인들의 관념인 일곱 하늘 위라는 설(신 10:14, 왕상 8:27 등)②으로 국한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창조된 모든 세계를 초월하는 그분의 본래의 위치 곧 ‘하나님의 우편’(1:20의 주석을 보라.)에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하신 목적에 대해, 바울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다. 특히,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서 교회에 필요한 은혜(11절)를 채워 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M. Henry, W. Hendriksen).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충만케 하시기 위해 주신 다양한 은혜에 대해서【엡 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된 직분은 교회에서의 고하(高下)의 순서를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참조: 고전 12:28).
[사도]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로서 일반적으로 ‘보냄받은 자’, ‘대리자’, ‘파송된 자’, ‘전권 대사’를 뜻하고, 또한 특수하게 예수님의 12제자 등을 가리킨다.
[사도]란 (1) 지상의 예수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자(마 10:5, 28:29. 비교: 갈 1:1), (2)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이 사실을 증거한 자(행 1:21, 22), (3)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자(요 14:26, 16:13, 고전 2:10), (4) 그러므로 그들의 권세는 지상에 있고(마 18:18, 20, 요 22:22-23), (5) 표적을 행하는 권능을 받았으며(행 2:43, 5:15), (6) 그들의 복음 전파의 범위는 우주적이었고 무제한이었다(고후 11:28).
사도란 칭호를 들은 이들은 12제자 외에도 바울과 바나바(행14:4, 14), 실루아노와 디모데(살전 2:6) 등이 있다. 또한, {70제자들(눅 10:1 )도 사도로 일컬어졌다는 기록이 있다(Irenaeus, Tertullian). 사도직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직위이었다(엡 4:11, 고전 12:28). 본질적으로 사도의 직분은 그를 보내신 분의 위엄을 떠나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A. J. Mason)}(살전 2:6의 주석).
킬케골은 천재와 사도를 잘 구별하였다. 천재가 되는 것은 그의 내재적 목적 때문인데, 그는 민중과 구별되며 천재임을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도는 전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초월적인 근거인 하나님의 권위를 입고 존재하며, 자기에게 배치되는 역리적 목적 때문에 사도로 만들어진다고 하였다.(in 전경연).
[선지자](프로페테스, προφήτας: 복수)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πρό(‘앞으로’, ‘밖으로’)와 φημί(말하기)가 결합된 말이다.······그리고 선지자(예언자)가 앞을 향해, 또는 밖을 향해 말하거나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다. 그는 선포자이지, 반드시 예고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살전 5:20의 주석).
여기에 언급된 선지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가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렌스키(R. C. H. Lenski)는 2:20의 주석에서 “예언과 예언자는 이미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언자는 교사이기도 하며, 전도자요, 목회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행 21:9-10)과 같은 예언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장차 오는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 계시를 전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는 물론, 신약성경의 사도들보다 하위에 위치한다. 그들의 기능은 부수적이며, 그들의 계시는 어쩌다 있었으며, 또한 그 수에 있어서도 소수에 불과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신약 시대나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계시의 본질적 사명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격적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할 예언자들을 일시적이며 기계적인 도구로 취급하시지 않고, 먼저 그들을 불러 인격적 만남을 통해 사명자로 세우시고, 그들의 개성과 재능과 행동으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들의 특성과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박해 시대에 제일 먼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으며, 심지어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였다.
(2) 선지자들이 문젯거리가 되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서 지역적인 조직이 발달되었다. 모든 교회가 개 교회만을 위한 담임 목회자를 가질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지역만을 위한 행정 체제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조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담임 목회자들은 자신의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순회 선지자들의 개입에 대해 분개하기 시작하였다.
담임 목회자들은 언제나 순회 선지자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게 마련인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점차 선지자들은 없어지고 담임 목회자가 우세하게 되었다.
(3) 선지자의 직분은 쉽사리 남용되기 쉬운 것이었다. 순회 선지자들은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직분을 남용하여 그들이 방문하는 교회의 비용을 가지고 매우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바울의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를 각 교회에 전하였었다. 그러나 이런 순회 선지자가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떨어지게 되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 중에는 그들의 직책을 여지없이 추락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존재는 점차 사라져 버렸다.
[복음 전하는 자](유앙겔리스타스, εὐαγγελιστάς)는 직책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니라, 초대 교회의 순회 전도자(선교사)와 복음 설교자들을 가리키는 칭호이었다.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이 전도자로 일컬어졌고(행 21:8), 디모데도 바울에게서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권면을 받았다(딤후 4:5).
“초기에는 의심할 것 없이 사도들의 활동이 복음 전하는 자들의 활동과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cf. 갈 1:8, I Clem. 42, Barn. 8:3). 후기에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사도들의 제자 또는 그들의 본을 따르는 자들로 생각하였다(Euseb. Hist. Ⅱ. 3:1. Ⅲ. 37:2 그리고 Ⅴ. 10, 2-3. 여기서는 2세기의 알렌산드리아 교리 문답 학교의 설립자인 판테이누스(Pantaenus)가 복음 전하는 자로 간주되어 있다)”(Shepherd).③ 위의 세 부류의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교회에 적용되는 데 비해, [목사와 교사](ποιμένας καί διδασκάλους)는 특히 개체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목사와 교사에 대해 전혀 다른 직책이라는 설④과 같은 직책의 두 가지 역할이라는 설⑤이 있다. 두 낱말이 한 관사에 의해 수식된다는 점과 목사(문자대로의 뜻은 목자)의 기능이 교회 회중(양 무리)을 통치하고 보호하며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참조: 요 10:1-18, 히 13:20, 벧전 2:25, 5:2, 4)이라는 점을 보아 후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목사] 또는 [교사]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또는 사상 등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관한 영적 지식을 가르치는 자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자이다. 동시에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교훈하는 자이다.
러셀(Russell)은 “기독교 교육이란 인간들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참여하는 것이다.”⑥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사란 기독교 교육의 시작과 진행과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마 28:16-20).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교사에게 필수적인 것은 대 교사인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사는 다만 자신의 입과 행위를 통해서 피교육자를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의 주께서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직책을 주신 목적에 대해, 바울은【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목적의 내용인 세 구에 대해 (1) 병행구로 보는 설(J. A. Bengel, “Chrysostom”⑦), (2) 상호 관련이 없는 독립구로 보는 설(Grotius, Koppe),⑧ (3) 나중의 두 구(εἰς가 있는 구들)는 병행하여 첫 번째 구(πρὸς가 있는 구)의 목적을 지시한다는 설⑨ 등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이 무난하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의 온전케 하며]는 카타르티스몬(καταρτισμὸν)인데, ‘수리하다’(마 4:21), ‘실수와 죄로부터 바로잡다’(갈 6:1),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다’(살전 3:10, 벧전 5:10), ‘깨어진 조화를 회복하다’(고전 1:10), ‘선한 일에 온전케 하다’(히 13:21) 등을 의미하는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ζω)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그 말은 외과 의사들이 수족의 골절을 다시 맞추고, 어긋난 관절을 다시 제자리에 끼워 맞추는 경우에 사용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정부의 일이 잘되어 나갈 수 있도록 대립되는 당파를 합칠 때에 사용되었다”(W. Barclay). 특히, 여기서는 절대적 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목적에 대해 바울은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교회의 공직이나(T. K. Abott, 이상근) 기독교인의 대 사회적 봉사(R. P. Martin)가 아니라, 기독교인 상호간의 봉사를 의미하고 있다.
봉사의 일을 하는 올바른 자세는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처럼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다(눅 17:7-10). 그 다음으로는 “보상을 바라는 대신에 봉사 그 자체를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O. Wedel).
성도를 온전케 하는 또 하나의 목적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1:23의 주석을 보라.)으로 교회의 성장 또는 부흥을 성전을 세우는 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카터(C. W. Carter)는 “교회란 고착된 제도가 아니라, 항상 성장하고 발달하는 영적 조직체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블레이키(W. G. Blaikie)와 폴크스(F. Foulkes)는 구체적으로 “믿는 자의 수가 증가하고, 각 교인의 영적 생활이 증진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해)서에서 인용하는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가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에 주를 달았음. 1) “Harless”(in 이상근). 2) T. K. Abott, W. G. Blaikie, F. Foulkes, “Westein”(in 이상근). 3) M. H. Shepherd, Jr., in. IDB., Vol. 2, p. 181. 4) “Theophylact, Theodoret, Ambrose, Beza, Grotius, De Wette, Stier”(in 이상근), G. H. P. Thompson. 5) “Augustine, Chrysostom”(in T. K. Abott), J. A. Bengel, “Jerome, Oecumenius,, Harless, Eadie, Davidson, H. A. W. Meyer”(in 이상근), T. K. Abott, W. G. Blaikie, R. P. Martin, F. Foulkes, A. S. Wood, A. Martin, F. F. Bruce, W. Hendriksen. 6) L. M. Russel, Christian Education in Mission.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p. 35. 7) in 이상근. 8) 상동. 9) H. Alford, A. Barry, “Olshausen, Harless, H. A. W. Meyer”(in 이상근), “De Wette”(in T. K. Abott), R. C. H. Lenski, W. H. Taylor.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