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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8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장 15절-20절
파스칼의 팡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집 앞에 가지가 활기차게 뻗고, 잎도 무성한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밖에 나와 보니 아이들이 나무 잎을 하나하나 따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쇠털처럼 많은 나무 잎 몇 개를 따 낸다고 해서 나무가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주인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느티나무에 그 많은 나무 잎을 어디로 가고 나무 잎 몇 개만 그 큰 나무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야 부랴부랴 나무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무는 죽고 말았습니다. 젊어서 의미 없이 인생을 허비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노년을 맞고 당황한다는 인생의 허무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곧 잘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그 중에 백향목과 종려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또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로도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시나무로도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포도나무로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나무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람은 동물이고 나무는 식물이지 않습니까? 특히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만물의 영장이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나무를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 사실은 사람과 나무는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사람과 나무는 한번 심겨지면 쉽게 옮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한번 어떤 사상이나 생각이 자리 잡게 되면 다른 방향, 다른 생각으로 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이단에 빠지면 거기서 빠져 나오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그것들이 바뀌려면 누군가 특별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변하고 옮겨질 수 있습니다.
또한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사람도 반드시 자기의 열매를 맺는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열매, 어떤 사람은 나쁜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부러워할만 한 열매를 맺으며 삽니다. 그리고 사람과 나무가 맺은 열매는 그 주인에 의해서 평가 받는다는 점이 사람을 나무로 비유할 수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주인의 평가에 따라 귀하게 평가될 수도 있고, 불 속에 던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바로 사람을 나무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
주님은 두 종류의 나무와 두 종류의 열매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 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한 나무는 나쁜 나무입니다. 그리고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나쁜 나무는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맺을 수 있으며 엉겅퀴가 어떻게 무화과를 맺겠느냐? 좋은 나무가 어떻게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나쁜 나무가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도 아닌 제자들을 모아 놓고 산상수훈의 결론을 말씀하시면서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좋은 나무라고 다 좋은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 자신과 이웃 사람들이 좋은 나무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저는 나무, 꽃등 식물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제 나름대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무의 형태로 봐서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그 나무에 어떤 열매가 달려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어찌 사과를 모르겠으며, 어찌 배와 포도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열매만큼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무는 무엇이고, 나쁜 나무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좋은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구원자로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나무는 당연히 ‘작은 예수’라는 좋은 열매를 열매로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나무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바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들도 진리로 위장하고 사랑인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양을 잡아먹는 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호시탐탐 양을 덮치려는 이리들이 목장 주변에서 배회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바로 이러한 이리 같은 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의 주변을 맴도는 것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 심령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신천지’라는 이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단들과 다르게 교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교회를 어지럽고 심각하게 파괴합니다. 이 ‘신천지’는 이만희라는 사람을 재림 예수로 믿는 사람들 십사만 사천 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루는 나라가 경기도 과천인데 그곳이 ‘신천지’라고 이야기하며, 십사만 사천 명의 반열에 들어가려면 열심히 알곡을 추수해야 하는데 그들이 파괴하기로 목표로 삼은 교회는 ‘추수 밭’, 기성 교회에 파고 들어가서 알곡을 추수하는 사람들을 ‘추수 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구원의 진리로 믿으며 열심히 추수 꾼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한 노회의 목사님도 호되게 당했습니다.
등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가 목사님과 사모님을 조용히 뵙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천만원을 헌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헌금한 것을 비밀로 해 주시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마침 전도사님의 사택을 구하려 했던 터라 헌금으로 사택을 임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일이 터졌습니다. “목사님이 자기에게 빌려간 돈을 갚지 않는다.”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문제가 된 것은 당연합니다. 작은 교회가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입니다. 바로 그 문제의 성도는 신천지의 추수 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 교회에서는 새로운 성도가 와도 별로 반가와 하지 않는 형편이 되었답니다. 혹시 추수 꾼이 아닐까?
그러므로 주님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나쁜 나무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나무가 나쁘다는 말씀은 나무의 질이 근본적으로 좋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들은 근본이 잘못 된 사람들이요, 중생이나 회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입만 요란할 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제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이 간혹 엄청난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큰 집단을 인도하기도 하고, 사회에서 존경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때로는 귀신을 쫒아 내며, 병자를 고치는 등 많은 능력을 행하기도 한다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오늘 날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냥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조심하면서 신앙생활 하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 사역자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요, 나의 구원자요, 나의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은 작은 예수라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좋은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쁜 열매를 맺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16절 말씀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라고 하신 18절 말씀에서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복해서 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복하시므로 강조하신 것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렇게 안타까운 삶을 살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좋은 나무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심겨졌는데 어떤 나무는 건강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어떤 나무는 결코 좋은 나무에서는 맺을 수 없는 열매를 맺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모든 신앙인의 문제는 겉모양이 아니라, 속 사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그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은 무엇입니까? 마음(heart)입니다. 그러나 마음(heart)은 감정(emotions)의 자리가 아닙니다. 인간됨을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이요, 구원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작은 예수라는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마음에 그리고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구원자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자로써 맺어야할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겉모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속마음은 거짓 선지자의 영, 거짓 선지자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열매를 맺게 되면 이것이 자라서 거짓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양을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은 존재 즉 예수 팔아먹는 사기꾼이 되는데 까지 자라난다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의 마지막은 19절 말씀대로 마침내 엄청난 심판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 원칙은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6만 정도의 한국 교회에 2014년 통계로 분쟁하는 교회가 4천여 교회가 된다 합니다. 그 중 서울 천호동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목사는 아들도 목사였지만 세습하지 않고 사랑하는 부목사에게 담임 목사 직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는 아주 이상적인 세대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담임 목사 직을 물려받은 후임 목사는 은퇴 목사를 홀대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찬밥 신세로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은퇴목사는 자신의 칠순 잔치에서 몇몇 하객들에게 서글픈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결국 은퇴목사를 사랑하는 분들이 후임목사에게 항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후임 목사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후임 목사는 영특하게도 히든 카드(hidden card)를 꺼내 놓았습니다. 그 히든 카드(hidden card)는 바로 녹음 테이프였습니다. 그리고 그 녹음테이프를 틀었습니다. 그러자 지난 날 은퇴목사가 자신에게 털어 놓았던 장로들에 대한 험담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테이프를 듣고 장로들이 곧바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은퇴 목사를 옹호하는 편과 후임목사를 지지하는 편으로 갈라서게 되었고, 급기야 교회가 둘로 쪼개지게 되었습니다. 한 교회 건물에 두 교회가 예배 드리게 되었고, 결국 후임목사는 아직도 교계에 막강한 파워를 지닌 은퇴목사가 속한 교단을 떠나 다른 교단으로 옮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분들은 신나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급기야 서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깡패를 동원하였답니다. 깡패의 일당이 40만원입니다. 한 쪽에서 깡패를 앞세우고 나오니 상대편에서는 지지 않으려고 더 많은 깡패를 대동하고 나왔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250명을 데리고 나왔답니다. 그러니 하루 인건비가 1억이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이기기만 한다면 차지할 수 있는 재산에 비해 그까짓 1억 원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융자라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크리스천으로서 해야 될 일이 있고,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교회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며, 교회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교회라고 하면서, 크리스천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거나, 교회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좋은 나무답게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까?
한 철학자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을 떠나 보내면서 마지막 수업을 합니다. 마지막 수업은 특별히 들판에 나가 제자들을 둥그렇게 둘러 앉히고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바라보게 하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들판에 보다시피 잡초가 이렇게 무성하다. 어떻게 하면 잡초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느냐?” 제자들은 학식이 뛰어 났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그리고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삽으로 땅을 갈아 덮으면 됩니다.” “불로 태워버리면 됩니다.” “뿌리째 뽑아 버리면 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철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수업이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 한대로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 보거라. 만일 마음속의 잡초를 없애지 못했다면 일 년 뒤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 결국 일 년이 지났지만 제자들은 마음속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어쩌지 못하고 다시 그곳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전에 잡초로 가득했던 그곳이 곡식이 가득한 들판으로 바뀐 것입니다. 서로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스승은 보이지 않고 이런 글귀가 적힌 팻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들판의 잡초를 없애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바로 그 자리에 곡식을 심는 것이다.”
성령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내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 따뜻한 마음, 아름다운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따뜻한 열매, 사랑의 열매, 아름다운 열매 즉 작은 예수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프랜시스 드 세일즈(Francis e Sal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마음에 계신다면 그분은 당신의 몸짓에도, 당신의 눈에도, 당신의 입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크리스천이란 입으로 주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말로 자기를 변호하고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자기 진실을 보여 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예수란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소중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성령으로, 주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가득 채워 좋은 열매를 단 한 번뿐인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많이 맺는 것만이 내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고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내가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 교회와 모든 형제자매들이 평가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잘못된 삶 때문에 공동체가 평가 받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나 혼자만의 내가 아니랍니다. 나는 우리 모두의 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내가 잘 살아야 하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