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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重要 史實
(年代) |
選定 理由 |
1 |
삼별초의 대몽항쟁
(1219) |
삼별초는 무인정권의 군사적 뒷받침이 되어왔다. 삼별초는 몽고
에 대한 항쟁의 선두에서 유격전술로 몽고의 침략군을 괴롭혔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몽고와의 항쟁을 꿋꿋이 지탱해왔고, 진도에
서 싸우고 남하한 뒤 제주도까지 들어와 저항을 꾀하였다. 하지
만 제주도도 함락되고 전후 4년에 걸친 반항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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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무신정변
(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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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고 군인들의 불평 또한 한층 높
아있을 무렵 무신들은 난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종 24년
에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장군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은
군인들에게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모조리 죽이라” 고 선동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무신과 군인들의 합류는 이 반란을 쉽사리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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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몽고와의 항쟁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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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와 같이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이후에 몽고의 지나친 공물요구에
두나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더구나 몽고의 사신이 국경 근처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나라의 힘이 약해져 있던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결국 강화
를 요청하고 많은 공물을 바치고 내정간섭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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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
(936) |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의 폭정으로 민심이 떠났을 때 사람
들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뒤, 먼
저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고 곧이어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후삼국 통일
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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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묘청의 난
(1135) |
묘청은 이자겸의 반란에 궁성이 불탄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중흥의 공신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
다. 그러자 개경 출신 문신들은 도읍지가 바뀜으로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게 될 것을 보고 수도 천도에 반대하게 된다. 이로서 개경파와
서경파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묘청은 평양에서 난을 일으킨다. 나라 이
름을 대위국으로 하고 연호는 천개로, 그 군대를 천견충의 군이라 칭하
게 된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1년 만에 서경이 함락되고
난은 진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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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민란의 발생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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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귀족들을 위한 공물의 징수나 역역의 동원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유민들은 때로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각지를 소란케 하고 있었다. 이렇
게 동요하던 농민들이 무신란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을 받아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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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이자겸의 난
(인종 1122~1146)
(의종 1146~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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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은 그의 두 딸을 왕의 부인으로 들여놓고 당당한 세도를 누리게
되고도 차츰 딴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엔 왕의 독살을 감행
하지만 실패하자 난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심복이
었던 척준경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 딸은 귀양을 가게 된다. 이
자겸의 난은 이로써 막을 내렸지만 그 후로 고려 문벌 귀족 사회가 붕
괴하기 시작하였다. 이자겸의 반란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강대
함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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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광종의
노비안검법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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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권의 안정은 광종의 개혁으로 인해 비로소 새로운 전망이 서
게 되었다. 그 첫 착수가 노비안검의 실시였다. 후삼국의 혼란기에 여
러 장군과 호족들은 포로나 전재민 등을 강제로 노비로 삼았었다. 이
노비의 증가는 그들의 경제적 / 군사적인 세력의 증대를 말하는 것이
다. 이러한 세력의 증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노비의 수를 감소시켜야
만 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본래 양인이던 자를 조사하여 방량케 한 것
이 노비의 안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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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조계종의 성립
(?) |
무인정권 시대 이후에 조계종이 크게 융성한 것은 고려 불교의 내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경의 가르침에 의한 공덕을 쌓음으로써 현
실 세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교종의 기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는 또 왕실 및 문신귀족과 결탁한 세속적인 불교의 부인이었다. 이리하
여 조계종은 무인정권의 일정한 옹호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
척해나갔다. 또한 심성의 도야를 강조함으로 해서 장차 성리학을받아
들일 수 있는 터전을 닦아 주는 구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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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공민왕의 개혁
(1351~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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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연락기관인 정동행성을 철폐하고 기철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
고 옛 관제를 복구시켰으며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그 지역
을 다시 회복하였다. 후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동녕부를 공격하기도 하
였다. 대외적으로는 친명반원정책을 쓰고 대내적으로는 각종 개혁으로
권문세족의 세력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또한 정방을 폐지하고 왕권을
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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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발표자 : 조 은 정
다음 발표 주제 : 붕당정치는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가?
수정하였습니다.^^ 계속계속 단단해지는 못이 되도록 노려하겠습니다.^^
삼별초의 자주정신은 고려라는 나라의 탄탄한 기틀로부터 나온 것이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과 애국심이 돈독했기 때문에 그들은 삼별초를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심을 얻었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민중들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민중들을 위해, 나라가 행하여졌다는 말이겠죠.?????
* 박세나 : 삼별초의 자주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4) 지켜낼수 ->
오혜림 학우의 말처럼 고려라는 탄탄한 기틀에서 나온다는 것에 공감하지만 민중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별초에서 자주정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삼별초의 끈질긴 대몽항쟁을 보며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상을 잘 알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3년동안이나 항쟁을 계속 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려라는 나라가 지배층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닌 국민들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나라라는 자주의식이 강하기 심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상이 비단 고려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기상을 다시 한번 잘 볼 수 있는 기회는 임진왜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박윤석 : 1) 우리민족에 -> 2)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3) 그렇게 된것이라고 ->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의병들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기상이 일제 강점기 시대까지 내려와서 3.1운동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우리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 3 .1운동까지 내려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비판을 하고 싶은 점은 지금입니다. 삼별초의 정신이 맥을 이어져 왔지만 현재상황에서는 그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실상은 형식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시의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도의회에 관심을 가진단 말입니까?
* 박윤석 : 4) 3.1운동 까지 -> 5)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관심을 가졌을 때 비로소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독도문제 및 동북공정’ 이것은 총성없는 전쟁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총대를 매지 않고 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진정 독도가 우리 것이고 고구려가 우리나라의 역사라면 우리가 반드시 할일은 있을 것입니다. 수 많은 중국사료와 수 많은 사람들, 혹은 로비가 있더라도 삼별초의 정신처럼 우리가 우리 것을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대로 앉아서 그 동안 투쟁의 역사를 빼앗기고 말 것인지는 지금 우리의 역할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며 댓글을 마칩니다.
* 박윤석 : 삼별초가 가지고 있던 '주인이라는 의식'은 어떻게 길러진 것인지 자료를 찾아 보충하도록 하세요.
자주의 정신에서 시작하여 진정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셨군요^^ 지금의 우리 국민들도 역사를 다시 한 번 비추어보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ㅜ
* 박지은 : 1) 해야할 일이 ->
수정하였습니다^^^^^
* 박윤석 : 6) 가졌을때 -> 7) 이 뿐만 아니라 -> 8) 해야할 일은 -> 9) 수많은 중국사료와 수많은 -> 수 많은 중국 사료와 수 많은
삼별초가 세운 정부는 이전의 고려 정부나 그때 개경에 있던 정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혁명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는 일이었습니다. 삼별초가 노비 문서를 불태운 것은 노비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지만,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들의 다수가 농민 또는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개경 정부의 환도에 맞춰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킨 삼별초는,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뒤 그해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 들이 주도해서 새 독립 정부를 세우고, 11대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기의 직계 후손인 승화후 온을 황제로 받들었습니다. 이들이 개경 정부와 대립해서 수도를 따로 만들고 새로운 황제를 받들어 세운 것은 이전의 봉기들과는 다른 특징입니다. 물론 이들은 고려 왕조나 봉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지닌 역사적 한계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봉기와는 달리 외세에 굴복한 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의 봉기를 단순한 항거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대안으로 보여주는 차원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의식이 어떻게 길러진 것인지는 찾아보지 못했구요. 삼별초의 항쟁속에 담겨있는 자주의식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댓글을 모두 수정하였습니다. 교수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3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서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고려 정부는 삼별초 항쟁의 전 시기동안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자력으로 난을 수습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항상 몽골의 군사적 원조를 받았으며, 육지의 농민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하였습니다. 나라에 전쟁과 같은 극심한 어려움이 있을수록 전 계층이 하나로 똘똘 뭉쳐 화합하는
조화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정신적 근원 또한 중요하겠지요. 10년전 우리나라가 IMF를 겪었을 때 전 국민이 하나로 마음을 모아 어려움을 이겨 낸 것이 좋은 예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던데 발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 김두레 :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게 되었는지 자료를 찾아 답을 하도록 하세요.
조화의 원리를 도출했군요^^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때는 바로 어려울 때라고 합니다. 그럴수록 함께, 같이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은 것이고요^^ 삼별초가 그 좋은 예가 되었네요~
삼별초가 진도에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대몽 전쟁에 들어갔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삼별초 정부를 지지하는 많은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경남 밀양의 당시 지명은 밀성이었는데, 1271년 1월에 이곳 밀성 사람들이 봉기해서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와 선산에까지 진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명분은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개경에서도 봉기가 모의됐습니다. 관아의 노비들이 무리를 모아 관직자를 죽인 뒤, 진도에 가서 삼별초가 세운 정부에 합류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개경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대부도에서도 민중들이 봉기를 일으켜, 당시 여기에 주둔 중인 몽고병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 박지은 : 1) 좋은 것이구요 ->> 좋은 것이고요
수정하였습니다.
오혜림, 박지은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고려를 중세로 분류하는 기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으나, 삼별초항쟁에 대해 토론하면서 고려의 중세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에서 벗어나 점점 사회의 기층세력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모습에서 고려의 중세적 모습을 확인했고, 그만큼 우리 민족의 경제,문화적 발전이 이루어 졌음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민중은 어려운 시기에 더욱 똘똘 뭉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지배층은 원에 굴복하였으나, 민중들은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 이선녀 : 1) 똘똘뭉치는 것 ->
수정하였습니다. ^^
우리 민족의 이러한 면모은 일제시대라는 민족적 위기앞에서도 끝까지 정체성을 지키기위해 노력했고 결국 독립을 맞이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현재에도 이러한 일이 반복될 수 있을지 반문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생이 눈 앞에 보이는데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계속 관철시켜 나가는 것은, 자신의 신념와 의지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거겠죠^^ 이선녀학우와 저를 비롯한 모든 수강생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값진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더 없이 행복한 것일거에요^^
왕은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삼별초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에 왕은 몽고의 강대한 무력의 힘으로 강경한 태도를 취합니다. 왕은 삼별초가 곧 자기의 해산명령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별초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정부·반몽고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일제히 봉기합니다. 이는 정부와 몽고의 이중적인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 압력의 해방자로서 민중들은 삼별초에 큰 기대를 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됩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고와 강화한 뒤 민란으로 인해 민중들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되고, 반정부·반외세의 기치를 걸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민중들 입장에서 그들이 원하는 몽고에서의, 정부에서의 해방을 삼별초가 해주겠다고 하니 반가울 수 밖에 없겠죠. 그러니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고 그들을 믿고 따르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고와의 항쟁에서 소수의 삼별초의 의견과 주장이 민중들의 생각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오랜 기간의 싸움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죠^^
* 서향순 : 공동 삶의 원리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민족과역사]의 댓글로는 부족합니다. 보완하도록 하세요.ㅡ_ㅡ;;;
* 오혜림 : 1) 반가울 수 밖에요. -> 2) 될 수 밖에 ->
수정하였습니다~
고려사회는 정신적·물질적인 힘이 컸던 사회로, 몽고족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즉 자부심과 실질적인 정신과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는 계층들의 활발한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높은 생산력, 뛰어난 기술력, 상당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적극적이고 실제적인능동적인 참여를 통해서 문화의식을 높이고, 기술력을 겸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수님, 보충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