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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C 시.
C 시 진입로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는 2차선 아스팔트가 곧게 뻗어 제법 상가가 형성되어있었다. 그리고 아스팔트길 양편으로 아름드리 ‘프라타나스’ 가로수가 줄지어 빼곡히 서있었고, 한여름 그 울창한 프라타나스 나무에선 매미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시원한 프라타나스나무그늘 아래 평상은, 점방을 지키던 동네 아저씨들이 소일거리로 내기 장기를 두며 막걸리를 마시던 쉼터였으며, 가을엔 프라타나스 낙엽이 아스팔트를 온통 뒤덮어, 동네는 아주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곤 하였다.
이쯤이면 동네조무래기들에게 재미난 놀이겸 일감이 생기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떨어진 낙엽을 마치 뻥튀기 과자처럼 차곡차곡 길게 새끼줄에 꾀어 집으로 가져다 쌓아 놓는 일이었다. 그 당시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연탄난방을 하였지만 집집마다 마당에 솥 단지 하나씩을 걸어 놓았었다. 그래서 솥단지에 빨래를 삶거나 혹은 무청을 삶아 시래기를 만들 때, 불쏘시개로 바삭 잘 마른 프라타나스 나뭇잎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그 시절 시래기 만드는 일은 김장만큼이나 중요한 일년지대사였다.
프라타나스 나무는 꼬맹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그네뛰기도 하였고 축 늘어진 가지에 줄을 매달아 타잔 흉내를 내기도 하였지만, 타잔은 아무나 하나? 그러다 떨어져 다친 다리로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다.
프라타나스 나무에선 방울도 열렸다. 그 방울로 또래 녀석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도망을 치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프라타나스 나무는 마치 버짐이 핀 것처럼 껍질이 벗겨져 버짐나무라고도 불렸는데, 우리 조무래기들은 벗겨진 나무껍질과 잎을 모아 불을 피워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날은 어김없이 이불에 오줌을 싸, 키 쓰고 동네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가야만 했다. 그러나 소금을 빌려주기는커녕, 동네 아줌마들은 조무래기들의 엉덩이만 두들겨 팼다.
프라타나스 나무는 철학의 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이름도 철학자인 플라톤에서 유래가 되었다 하고, 플라톤을 비롯해 고대 아테네 많은 철학자들이 프라타나스 나무 그늘에서 철학을 논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철학자가 되지 못했을까? 나도 프라타나스 그늘에서 동네 조무래기들과 자주 삶을 논하곤 했었는데……?! 아기는 어떻게 생기고 어디로 나오는 것일까? 여자가슴에서는 어떻게 젖이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동네 이쁜이 문숙이 누나는 왜? 동만이 형이랑 밤이면 밤마다 으슥한 벽돌공장에서 나오는 것일까? 기타 등등…….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 철학자 된 사람 한 사람도 읍~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는 각종 생필품과 과자, 그리고 문구따위의 잡화를 파는 ‘ㅁㅁ당’이라는 점포를 운영했다. 그 당시 나는 엄마 몰래 주머니가 불룩하게 눈깔사탕을 쎄비가, 동네 아이들에게 곧잘 인심을 썼다. 그 덕에 아마 내가 골목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우리가게 우측엔 국수가게, 자전거포, 중국집이 있었다. 그리고 좌측 안 동네로 가는 길 건너편엔 상규형네 쌀가게가 있었는데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했던 상규형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쌀 배달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규형의 자전거 타는 솜씨가 천하일품이었다. 짐받이자전거에 어린 내 키만큼 쌀가마를 싣고 한발로 페달을 ‘탁 탁’ 구르다 ‘휙~’ 올라타는 상규형를 보고 동네 어른들은 “ 천하의 엄복동이가 울고 가겠구먼~ “ 했다.
(*엄복동-일제 때 조선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해 일본인들의 콧대를 납짝하게 만든 자전거 왕으로서 마라톤 손기정과 함께 조선의 영웅)
상규 형은 쌀 배달 나갈 때 곧잘 나를 앞자리에 태우고 다녔다. 갈 때는 엉덩이가 몹시 아팠지만 돌아올 때 언덕길을 내려오는 짜릿한 속도감에 매료된 나는 즐겁게 따라 다녔다.
상규 형의 팔뚝엔 끔찍한 화상 자욱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다니는 탓에 유난히 땀을 많이 흘려, 그 땀을 식히려는 듯이 배달을 마치고 언덕길을 내려 올땐, 자전거핸들에서 손을 떼고 양팔 벌려 몸을 좌우로 크게 틀며 균형 잡는 묘기를 곧잘 부렸다. 그 묘기가 어린 나에게는 아찔아찔한게 아주 무서워, 상규형에게 "그만! 그만!"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나는 그 스릴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폭주족 원조가 우리....?!)
오늘따라 상규 형이 보고 싶다.
"상규 헝아! 이제 많이 늙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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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태어나 맨 처음 사귄 친구. 그 아이와 나는 말도 배우기 전부터 무수히 싸우면서 사귀었을 것이다. 싸울 때 나는 그 아이를 ‘똥종이’ 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우리 둘이는 온 동네를 빨빨거리며 헤집고 다녔다. 우리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종이는 시내에 있는 중국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종이는 화교였다. 중국집이 그의 집이었다.
내게는 이웃이 중국집인 게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종이네 중국집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짜장 볶는 냄새......그러다 가끔 종이 엄마가 우리 집으로 화급하게 뛰어 온다. 손님이 많을 때 볶음밥에 쓸 밥이 떨어져 우리 집으로 밥을 빌리러 오는 것 이었다. 그런 날은 정말 행복한 날! 빌려간 밥 대신 짜장 면을 가져 오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그냥 짜장만 가지고 올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짜장 밥을 해먹으면 되었니까……
종이 아버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곤조통이었다. 60년대 중반, 그 당시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넝마주이고 또 하나는 상이용사였다. 그 상이용사도 종이 아버지를 만만하게 보지 못할 정도로 종이 아버지는 한 성깔 하였다.
그 시절 팔 다리없는 상이군인은 우리 같은 어린 조무래기들에겐 진짜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쇠갈고리 의수.......
6,25 전쟁이 끝난 후,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과 도움을 못 받은 상이군인이 전국에 넘쳐났지만 가난한 나라로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그들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외로웠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팔 다리를 잃었지만 돌아오는 건 멸시와 냉대.... 일자리는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고…… 그래서 그들은 늘 반항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경찰마저도 그들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팔 다리를 나라에 바친 그들을 경찰이라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리라.......(물론 상이군인 전체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부디 오해 없으시길.........)
우리 동네에 자주 나타나는 상이용사가 한 명 있었다. 영화배우 ‘잭 파란스’를 영화에서 처음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었다. '잭 파란스'와 그 상이용사가 너무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영화 속에서 ‘잭 파란스’를 보면 그가 생각나기도 한다.
목다리를 집고 쇠갈고리 한 그가 나타나는 날에는 동네의 선술집이 무지 시끄러운 날이었다. 그는 점포마다 돌아다니며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였다. 마치 자신의 팔 다리 값을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주었지만 종이 아버지에게만큼은 얄짤없는 일이었다.
종이아버지는 화가 나면 중국말로 고함치듯 말을 한다. 나는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지 못하지만 종이는 파랗게 질린다. 더욱이 종이아버지가 술 취하는 날엔 종이네 식구가 우리 집으로 피난을 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양반이 우리 엄마 말은 참 잘 들었다. 우리 집까지 쫓아와 종이엄마를 팰라치면 엄마가 나서서 조근조근하게 말로 진정시키며 들어가 그만 자라고 하면 말을 잘 들었다. 물론 엄마가 집주인인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우리엄마의 '한 미모'가 한 몫했을거란 생각도 든다.^^
종이아버지는 전과가 있었다. 내게 기억이 없는 아주 어렸을 때, 그는 한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감옥에 갔었다. 동네 형들에게 전해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중국집에서 종이아버지와 외지인 여러명과의 싸움이 벌어졌는데, 중국집 의자가 획- 획- 날아 다니고,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그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아무튼 대단했다고 한다. 그 때, 화를 못이긴 종이아버지가 한 사람의 허벅지를 화재진압용 갈고리로 팍- 찍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식당 현관입구 빨간 드럼통 안에 물과 모래를 항시 채워놓고 역시 빨갛게 페인트 칠한 게시대에 삽이며, 도끼, 갈고리같은 방화도구를 위무적으로 걸어 놓았던 시절이었다.
그날 종이아버지는 처음엔 도끼를 들었었는데, 게시대에서 도끼를 빼어든 순간 도끼날이 자루에서 쏙 빠졌다고 한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도끼날이 안 빠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설적인 ‘종이아버지 10(?)대1 다구리’ 가 끝나고,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이 종이아버지를 수갑 채워 백차(그 당시 경찰순찰차인 하얀색 지프)에 싣고 떠나려는데 그는 동네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유유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홍콩영화 ‘영웅본색’이 그의 전설을 패러디 했다나 어쨌다나.…… 어쩜 주윤발처럼 성냥개비를 지근거렸는지도.......)
<에필로그>
뒤에 알려진 싸움의 원인은 타지 사람들이 종이아버지를 ‘짱꼴라’ 라고 불러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첫댓글 대문을 이쁘게 리모델링 해준 '수석운영자' 내 칭구 맘팅에게 ......"따봉!" 을 외칩니다.
낙엽을 새끼줄로 어찌 엮어놓는지 참 궁금한 광경입니다. 엄복동에 대한 주석까지도 친절하게 달아놓으시고 ㅎㅎㅎㅎ..상규형의 팔뚝에 난 화상은 무슨연유로 생긴것인가요? 우리동네는 시골동네였음에도 상이군인이 왔었답니다. 군복을 입고 다니셨는데 제게도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라에서도 일부러 상이군인들의 행적을 눈감아 줬었지요?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줄수 없었으니..그 분들의 마음역시 지금은 이해가 갑니다. 유년시절의 기억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가요? 파스텔님? 어쩜 영화화면을 보듯 그 시절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엮는게 아이고 꾀는 것임.
구슬 꾀듯이.....
"유년시절의 기억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가요? "
술 한잔하면 그렇소.^^
상규형아의 화상은 왜 생긴것인지요...음...전 왜 그것도 궁금할까요,,,
남 아픈 상처에 왜그리 관심을 갖는다요......?!!!!
내 기억으론 뜨거운 주전자가 엎어져서 그랬던 것 가트요.
궁금해결?
한번 궁금하기 시작하면 알게 될 때까지 그 생각을 하게 돼서요...
파스텔님의 어렸을 때는....
불구경, 싸움구경 재미있는 일이 많네요^^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어릴 때 재밌거나 무서웠거나 신나는 일들이 많던데...왜 저는 별로 기억나는 일들이 없는지...
가끔씩은 혹시 내가 아주 큰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옛날을 기억하지 않고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옛이야기 들으면서 가물가물 막혀있는 저의 옛날로 한 번 떠나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