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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고저 2016.6.3.
안방에 있는 작은 서가에 더 이상 책 꽂을 공간이 없었다. 그중에는 당장 읽지도 않으면서 나중에 볼 요량으로 구입하여 꽂아놓은 책들도 좀 있었다. 그러다 꽂은 책 위의 빈 공간으로도 끼워 넣어야 할 책들이 늘어나면서 서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장가치가 떨어지는 책을 점차 없애기로 했다. 없앨 책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버릴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 어떻게 해서 들어와 꽂혀 있는, 그러면서 보지도 않던 책 한 권을 뽑았다. 그게 ‘경봉대선사1) 일기(鏡峰大禪師日記)’였다. 앞표지에는 ‘삼소굴 일지(三笑窟 日誌)’라 되어 있는 종이색이 누렇게 바랜 일기책이었다.
남의 일기를 읽어 본다는 것. 그것은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도 꾸미지 않은 자기고백 또는 자기모습을 엿보는 것일 게다. 그러나 남의 일상이나 개인적 일에 별 관심도 없거니와 그러려니 하는 막연함으로 그냥 지나치기만 하였다. 장식용 목적은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대략이라도 훑어보게 되었으니, 문화적 허영이었나 해도 할 말이 없는 셈이었다. 휘리릭 넘겨보니 대부분 한시(漢詩)를 번역(역주 釋明正)해 놓은 글이라 당초의 의도에도 맞겠다 싶었다.
짧은 글의 연속이라 보기에 편했다. 훑어보다가 맘에 드는 내용이 있으면 또 읽어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보다 보니 버려야 하는 게 맞을까라는 주저감이 스멀스멀 들었다. 선사의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일기의 특성이었을까, 일화(逸話) 중심의 소설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서문을 보면 일기는 19세부터 85세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라 하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중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 하지만 몇 달 또는 몇 년을 쓰지 않았을 때도 있으려니와 어쩌다 들춰보면 그 내용의 치졸함으로 적이 유치한 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것이 그때의 나였고 모습이며 수준이었음을. 그냥 내 지나온 흔적을 남긴다는 의미, 그 뿐이었다.
경봉대선사
책에서는 1927년(36세) 12월 7일부터 시작하였다.
오후 2시경에 화엄산림 불사를 하기 위하여 극락암에 와서 쉬다.
거의 100년 전 산속 스님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더구나 통도사 극락암 이라면 가 본 곳 아닌가. 극락암 뿐만 아니라 일기에서 보이는 암자들 역시 낯설지 않아 편한 느낌이었다. 금강경 법회인유분의 부처님 행태와 비슷한 광경이 연상되며 마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일기의 많은 부분이 한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법담(法談)이라고 하였고 어떤 부분은 일상의 소회이기도 했다. 스님뿐 아니라 재가자들과 주고받은 편지 역시 한시였는데, 당시 지식인들의 표현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장엄스런 누각 속진을 멀리 벗어/ 산수는 고요하여 인적마저 없구나/ 한 빛이 홀로 삼천계를 비추니/ 만물이 온통 스스로 새롭구나 (’27.12.8.)
樓閣莊嚴脫物染塵 水空山寂亦無人 一光獨照三千界 物物頭頭總自新
의발(衣鉢)생애의 심경 물처럼 맑으니/ 법계 명성이 원근에 퍼지오/ 오랜 세월 영축산에 주석하시니/ 우뚝한 전각 추녀엔 흰 구름 걸린 듯/ 서로 작별한 뒤 자주 꿈에서 뵙는데/ 산창의 달을 보고 얼마나 정을 보냈는지/ 스님을 좇고 싶은 생각 누를 길 없건만/ 그저 세속일에 얽매여 어쩔 수 없군요
한 폭의 보내온 시 뜻이 맑으니/ 남북으로 떨어져 사나 도는 같구나/ 산들바람에 학은 춤을 추고 매화 향기 진동하는데/ 달은 봄 정자에 비추고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참 소식이란 한 글자도 없는 것(消息眞傳無語字)/ 인연이 있다면 정은 절로 솟아(因緣相在起心情)/ 만약 여기에 두 눈 뜨이면/ 범의 굴과 마왕구전이라도 살길 열리리
(하성오 거사가 보낸 시에 회답하는 시, 한시 원문 생략, ’45.1.22.)
스님은 36세 되던 해인 ’27.12.13. 깨우침을 얻었다. 일기 전문을 보면,
오전 2시 30분에 조사선의(祖師禪義)를 깨닫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
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간혹 보는 선사들의 오도송(悟道頌)은 한시와 한글 번역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당연히 그 속내의 일부라도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일기를 통해 눈에 보이듯 연상되는 스님 일상에서의 어느 날의 대오는 그 전의 오도송과는 다른 실제적인 느낌으로 와 닿았다. 마침 노래 내용도 다소 익숙하였으니, 눈앞에 나타난 주인공을 찾은 그 희열과 거침이 없었을 대자유의 경지에 부러운 축하를 드렸다. 다음 날의 일기를 보면 ‘설법·정진하다’, 다음다음 날은 ‘정진. 별다른 일이 없었다.’ 라고 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크게 변했을 모습을 기대한 철없는 범부를 나무라듯 평소와 다름없는 여여한 일상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러나 ‘백억의 하늘과 땅을 삼켰다 토하는 이가 명리와 영화 따위야 아랑곳이나 하랴(’28.3.30.)’ 라는 대목에서는 깨달은 자의 웅혼하고도 무량한 기개가 느껴지니, 이른바 깨달았다는 자들의 그 품은 도량이 못내 부럽다.
’28.4.13.의 일기에서는 참나를 찾은 그 여유가 한껏 묻어난다.
극락암에서 낮 차를 먹고 오다.
나와 주인공 문답 시
문 쯧쯧 무정한 나의 주인공아/ 지금에야 만났으니 어이 그리 늦었노 답 하하 우습다 내가 그대의 집 속에 있었건만 네눈이 밝지 못해 이렇게 늦었을 뿐이네
問 咄咄無情我主公 至今逢着豈多遲 答 呵呵我在君家裡 汝眼未睛如此遲
스님이 만난 주인공은 어떠했을까. 내 안에 있을 주인공 또한 어떠할까. 세상의 때에 절어 찾거나 보지 못하는 본래 나의 부처, 진면목, 그 주인공 찾기에 게으르지 말기를 늘 배우고 듣는데도, 제대로 흉내조차 내지 못하면서 마음만 공연히 바쁘다.
다른 스님과 주고받는 선문답(禪問答)은 나의 경계로는 헤아리기가 힘들다.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어째서 그런 답이 나올 수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치를 알면 그리 되나 싶은데 겉멋만 든 나로서는 화두가 따로 없구나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생활하다 문득 한번쯤은 ‘왜 그랬을꼬’ 생각이라도 해보게 옮기기라도 해 보자 싶었다.
전라도 백학명 선사의 다섯 가지 물음에 답하다. 일. 눈이 와서 온 누리에 덮혔는데 어째서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게 서 있는가. 답. 벌떡 누우니 발이 하늘을 가리킨다.(’29.3.18.) 도솔열 화상의 문. 숲을 헤치고 선지식을 참배하러 다니는 것은 다만 견성(見性)을 도모함이니 지금 상인(上人)의 자성(自性)은 어느 곳에 있는가. 답. 동래 팥죽이 반은 푸르고 반은 붉도다(’60.1.18.)
또한 수좌들의 공부 정도를 체크하거나 법을 청하는 불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따끔한 충고도 하고 있으니 법을 구함에 추상같은 스님의 기상을 마치 옆에서 보는 듯하였다.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고 물으니 철 수좌가 일어나 춤을 추거늘 묵은 버릇은 버리기 힘드는구나 다시 일러라 하니까 머뭇거려 생각하기에 한차례 또 때려주다.(’41.12.28.)
석왕사 내원선원의 대중(大衆)에서 법을 묻는 편지가 왔다. 고봉(高峰)화상 사구게 가운데 능히 살리고 능히 죽이는 구(句)가 있으니 어느 구절에 해당됩니까. 엎드려 바라오니 가르쳐 주소서.
답. 억! 고봉을 더럽히지 말고 밤으로 설봉산이나 바라 보거라. 추신. 조사의 뜻을 배우려는 사람이 한 조각 엽서에 적어서 우체부에 붙였으니 그 뜻이 출발부터가 희론이라. 그러나 묻는데 답하지 않음은 도리가 아니기에 회답을 하는데 그래도 만약 모른다면 불에 뛰어들고 눈 속에 설 각오로 다시 와서 묻기를 바라노라. 어찌 능히 주고 능히 빼앗는 것은 묻지 않는고.(’42.8.7.)
향봉·도원 두 수좌가 왔는데 서로 만나는 것이 7년만인지라 7년동안 무엇을 하였는지 내어 놓으라고 하니까 도원이 방에 꽉 찼다고 하고 향봉도 그렇다고 하기에 방에만 찼지 겉에는 차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답이 없기에 내가 등을 탁 치면서 그동안 선방(禪房) 밥값놀이를 못하였으니 밥값 내놓으라고 하였다.(’54.3.6.)
수좌가 와서 인사를 하기에 이름을 물으니 일호(一毫)라 하므로「털을 하나 가지고 되겠는가」하니「나는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너의 몸에 지금 있는 털은 너의 물건이 아닌가.」하니 답이 없었다. 그 수좌가 또 묻기를「어떻게 공부를 하여야 잘 합니까.」「밥을 잘 먹을 줄 알면 되나니라.」하였다. 그 수좌가 그 말의 낙처(落處)를 잘 모르고 갔다.(’66.2.22.) 그러면서도 수행방법에 대해 일러주시기를 잊지 않으시니, 그리 해보리라 하는 지키지 못할 결심 하나만 더 늘어났다.
빛과 소리에 생각을 흩어지게 하지 말고 또한 모양을 보고 분별하지 않고 수행하면 자연히 활로를 얻어 격식에서 뛰어 넘는 대장부가 되리니 진중(珍重). 비록 그러나 공부를 이룬 뒤엔 바루의 손잡이 같은 쓸데없는 말이니 모름지기 불에 넣기를 바라노라.(’62.9.4.)
기독교에 대해 나는 편견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을 강조하는 가치에는 동의하지만 유일신과 창조론 등은 수긍하기 힘든 신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스님은 성경에서 진리는 하나인 것을 단번에 간파하셨다. 걸림이 없었고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보여주셨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울산교당에 머물다가 이규명의 집에 가서 예수 성경을 보니 진리는 하나인고로 이렇게 영찬하다.(’31.4.15.)
스님의 일기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재미있는 요소는 개인 생활은 물론 당대의 시대상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스님의 그 시기는 일제 강점기 등 민족의 아픔과 격변기의 중심에 있는 때이기도 하였다. 일기를 보면, 20~40년대에는 스님들이나 또는 속인들도 함께하는 시회(詩會)가 여러 번 있어 이채로웠다. 시를 읊는 모임이 그때까지는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통도사에서 정구대회가 열렸으며(’28.8.), 공립학교 졸업식에서 내빈축사를 하기도 하였다(’33.3.). 어머님 제삿날인데 참석치 못하여 멀리서 절하는(’42.9.) 자식의 면목도 있었다. 광복 후에는 선학원 이사장, 통도사 주지 등 여러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 오늘날의 조계종 종단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도 알 수 있었다. 싱가폴(新嘉波)함락에 하북의 전면민이 축하하다(’42.2.) 하고, 주재소 최 순사 등 5인이 와서 미곡을 조사하고 갔으며(’42.5.), (전쟁 물자용의) 놋그릇 회수에 대하여 본사회의에서 헌납하기로 하고 돌아왔다(’42.12.) 하였다. 그러다 ’45.8.16.에는 14일 일본 천황이 조서로써 사국선언(四國宣言)을 수락하고 만세에 태평을 연다는 방송이 있었고 8월 15일에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일제 시기에 그 나름의 순응된 질서에서 스님들이나 사찰에서 광복 관련이나 민중 계몽 등의 활동은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쉬웠달까. 어쩌면 비폭력 또는 자기 수양의 불교적 특성이기도 했을 것이며,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을 터이다. 스님이 일본의 경도 청수사(淸水寺)에 가서 산천을 관람하다가 조선불교의 부진과 부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비관하여 눈물이 흘렀다(’41.4)는 심정 역시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광복 이후의 모습에서도 적극적 사회 참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홍에 휩싸여 그럴 여력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이웃종교와도 대비되어 오늘날까지 불교세의 약화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75세이던 ’66.4.22.
수의(壽衣)를 짓던 날 일편(一片) 감상. 부산 제자 이대각심이 나의 수의를 오전에 다 지었다. 의복이라도 수의라고 칭하게 되니 대중의 마음도 이상하게 섭섭한 감이 든다하고 나도 생각에 본래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지만 세상인연이 다해 가는 모양이니 무상(無常)의 감이 더욱 느껴진다. 그동안 부고(訃告)를 타인에게 받은 것을 대략 쳐보니 6백 40여명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다 갔는지 한번 가곤 소식이 없구나.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 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古佛也恁麽去 今佛也恁麽去 來耶去耶 靑山立 流水去 何者非 何者是 咄 夜半三更見燭舞
나고 죽음에 무어 끄달림이야 초탈하셨으리라. 그러나 수의 짓던 날 이렇게라도 무상의 감이 더욱 느껴진다 하시니, 수행자 이전의 인간적 감상에 따뜻해졌다. 어떨까.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할 때의 그 공성(空性). ‘죽음’은 흥미있는 주제이다. 아니, 흥미 보다는 어쨌든 관심이 있다는 게 더욱 적확할 것이다. 단멸론(斷滅論)은 사도(邪道)라 한다. 그럴까? 이웃종교 역시 사후 세계의 존재에 긍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 주제에 대한 몇 권의 책과 읽고 있는 ‘죽음학 강의’ 역시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정확히 나의 관심은 무엇일까. 좀 더 두고 정리해 볼 과제이다.
일기는 85세이던 ’76년의 4월 8일 석가여래 성탄 시로 끝맺음 하였다.
여래는 뉘신가/ 오셨는가 가셨는가/ 꽃 피고 새 우니/ 푸른 못에 달 비치네
如來阿誰 來耶去耶 花笑鳥歌 月印碧潭
일기는 그렇게 끝났으나 연보를 보면,
’82년(91세) 7월. 미질(微疾)을 보이던 중 시자가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하고 물으니 사(師) 웃으시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하고 입적하시니 오후 4시 25분이었다.
무소의 뿔처럼, 걸림없는 바람처럼 살아오신 자재무애의 생애가 마지막 순간에서도 느껴졌다. 무릇 나도 웰-다잉(Well-dying) 할 수 있을까.
스님이 저기 걸어가시는 듯 하고, 법상(法床)에서 주장자 들고 계심이 마치 보이는 듯하다. 더군다나 범부로서 접할 수 없었던 법력 높으신 큰스님의 일상도 알 수 있어 괜찮았던 책이었다. 책이 어떻게 왔는지 알 길이 없어 집사람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몇 년 전에 스님이 되신 여고(女高)선생님께서 주신 것이라 하였다. 바람결에나 들었을 경봉대선사를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묘했다. 法天
산속 생활 이미 어려워/ 오며 가며 묻혀 사는 여기에서/ 너와 나의 여래장 각자 있음을/ 글에서 말에서 한잔 술에서 찾겠습니다. - 法天
1)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우리나라 근현대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큰 스승이었다. 통도사 극락암에서 90평생 동안 수행 정진하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