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함께 차차차
/ 시골 주지 귀사일기
작년 송년회 때 부를 노래를 고르고 골라 연습하느라 분주했다. 제목은 다함께 차차차.
내가 저런 노래를 연습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지만 송년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우선 가사 외우기 쉬운 노래를 택했다.
이 노래를 택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나보다 가사를 더 못 외우는 태진이를 위해서였다. 태진이는 중학교때 운동장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말이 어눌하고 균형감각이 없어 평지에도 쉽게 넘어지는 아이다. 태진이가 우리절에 와서 지낸지도 벌서 1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에는 발음도 분명하지 않고 손도 많이 떨었는데 차츰 차츰 나아져서 요즈음은 말도 제법 잘하고 손도 떨지 않는다. 그런 태진이와 같이 부를 노래는 많치 않았다.
노래를 연습할수록 ‘아! 나는 그동안 뭐 하느라고 노래하나 못 외우고 살았나’ 하는 강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는 노래는 서서히 다 까먹었고 모르는 노래는 새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아는 사람은 하나둘 멀어져 가거나 사라져 가고 새로운 사람은 사귀기 힘들듯이 화려한 꽃과 열매의 시기를 지나 나의 인생도 시들어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노래없는 인생이라 그랬는지 지나온 삶이 퍽퍽했던 것 같다.
태진이와 내가 뚜엣으로 부르기로 한 노래였지만 태진이가 워낙 배우는 속도가 느려서 노래는 내가 다하고 태진이는 후렴부분인 ‘차차차’ 만 따라 하도록 선처하였다. 그 쉬운 부분도 태진이에게는 어려웠나 보다. ‘차차차’하고 크게 또박또박 끊어서 경쾌하게 발음해야 하는데 태진이는 힘없이 맥빠지는 소리로 ‘차차차’하고 말았다. 아예 고음불가의 불가사의한 목청이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자신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 노래의 가사가 “어차피 잊어야할 사람이라면 돌아서서 울지 마라 눈물을 거둬라 내일은 내일 또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 거야” 인데 정말 가사처럼 이유도 영문도 없이 정말 내일은 새로운 바람이 불 거라는 희망이 움트는 것 같았다. 새로운 바람이 분다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뭐 시간이 약이라는 이야기’ 혹은 ‘다시 좋은 사람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인가 하는 해석을 해볼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이런저런 생각없이 무작정 그렇다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부르게 되었다. 무작정 희망을 가져보는 거, 무작정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 보는 거, 그런 작용들이 내 마음에도 작동하게 된 것이다. ‘노래라는 것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노래가 곧 기도구나!’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난 언제든 너의 편이야!” “걱정마! 모든 일이 다 잘 될거야” 이런 대책없는 말들이 때론 대책없는 위안을 선사하듯이.
그처럼 다함께 차차차를 부르는 동안 희망에 차 있었다. 거기다가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슬픔을 묻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라며 차차차를 연발하면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태진이가 할 부분이지만 내가 도와 준답시고 그 부분까지 크게 불렀다. 어쨌든 태진이도 웃으며 차차차를 따라하니 노래를 부르며 오가는 산책길이 즐거웠다. 비록 송년회때 이 노래를 부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번 송년회는 일요법회와 사찰순례, 울력과 봉사등의 1년간의 활동을 회상하는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동영상 시청한 소감을 말하고 내년에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말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소감을 말하는 부분이 너무 성황을 이루어서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급기야 송년회를 마칠 때는 개인 별 노래자랑은 생략하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하는 ‘만남’을 합창하며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태진이와 연습해온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노래를 안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뒤따르고 있었다. 음주가무에 능한 백의민족이라고 하는데 나는 몽고나 시베리아계통의 후손인지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영 어색하였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얼마나 어색하던지 대중 앞에서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득해졌다. 오죽하면 초등학교때 어찌어찌하여 학급부장에 선출되었는데 소감발표 하러 앞에 나갔다가 연단앞에서 5분동안 한마디도 못하고 얼굴만 빨갛게 되어 서 있다가 다른 아이가 학급부장이 된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제는 누가 노래하나 해보라고 부추기면 천연덕스럽게 ‘어차피 잊어야할 사람이라면’하고 들이댈 수 있으니 송년회가 내게 준 선물에 만족한다. 노래를 하고 있으면 ‘그래 사는게 그렇치 뭐’하는 느긋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든다. 가사처럼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가 되는 것이다. 대중가사가 법문아닌 것이 없다더니 우리네 희노애락이 우리가 마주해야할 법(法)이요 보살이 딛고 살아가야 하는 땅인 것이다.
일요법회때 즉문즉설의 활발한 이성불교도 좋지만 노래와 율동으로 채워보는 촉촉한 감성불교도 우리에겐 꼭 필요하리란 생각이 든다. 사람이 모여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끝판에는 노래한마디로 끝나는 일이 허다하듯이 노래는 우리를 어루만져주고 달래주는 누이의 손길 같은 것이리라. 이제는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노래하는 나를 보면 “또 부른다. 또 부른다”하고 태진이가 인상을 찌푸리지만 나는 그런 태진이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노래를 즐긴다.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울지 말고 그래 그렇게 다함께 차차차’
첫댓글 좋은글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잘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