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를 논해야 할까.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 데리다는 차연(differance)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차연은 불어에서 차이와 지연을 합쳐서 만든 단어다. 차이는 다르다는 것이고 지연이라는 것은 연기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차이가 지연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래도 어렵다. 무슨 차이가 어떻게 지연되는가?
우리는 어휘, 혹은 단어가 절대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이라 함은 그 단어의 뜻에 모든 이들이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꽃이 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단어는 곧 그 단어가 가리키는 사물 혹은 속성을 말한다는 것이다. 단어의 뜻은 단어가 만들어친 때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부여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단어는 수없이 많아 어느 언어건 그 언어가 가진 단어를 모두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어는 끊임없이 태어난다. 어휘가 인간의 생각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탓이다. 오늘날 단어는 기존 단어들을 비틀거나 합성하거나 타문화권에서 들여오거나 혹은 데리다처럼 철자 하나를 바꾸거나 해서 탄생한다. 데리다가 철자 하나를 바꾸었을 때는 그는 두 단어의 뜻과 울림을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그 단어가 생겨난 근원을 찾았을 것이며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그 과정은 '해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는 왜 거슬러 올라갔는가. 그의 시대에 아니 모든 시대의 단어들에는 이미 의미가 주어져 있고 형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단어는여전히 새로 태어난다. 그래서 '차연'이 필요한 것이다.
한 가족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고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가족, 아름다운 어머니와 대학 교수인 아버지, 음악을 사랑하는 영리한 아들 그리고 이제 마악 자기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어린 딸아이. 딸을 제외한 가족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교수로서 아들인 아론은 이미 히브리어를 읽을 안다. 어머니 또한 교수가 실적을 탐 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어머니는 가족들을 태워 각기 직장으로 학교로 데려다 준다. 아버지, 아들, 딸이 각기 차에서 내리고 어머니는 그 이후에야 비로소 자기 직장으로 향한다. 이 순서를 기억해두자. 이 순서는 권위와도 통하니까. 그렇다면 가족을 데려다주고 난 다음에야 자신의 일터로 향하는 어머니의 위치는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권위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한다. 아내보다 일찍 들어오니까 요리한다는 아주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는 유대교, 카발라를 전공한 교수이기도 하다.
도입부분에서 아들 아론과 아버지의 관계는 아주 돈독해보인다. 딸인 엘리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다소 뒤에 물러나 있는 듯 보인다. 엘리자가 자신이 학교에서 우승했으며 지방의 철자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담은 편지를 아버지의 방문틈으로 밀어넣었을 때 아버지는 그 편지를 보지 못한다. 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은 후에 엘리자가 철자 대회 나가 승승장구하면서 아버지의 관심을 온통 독차지하게 되었을 때 한번 더 일어난다. 이번에는 소외당하는 대상이 아들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
이제 철자 대회가 왜 이토록 중요한지 알아보자. 영어 단어는 우리글과는 다르다. 알파벳이 모여 단어를 이루고 이 알파벳은 우리처럼 읽혀지지 않는다. 즉 철자와 소리가 다른 것이다. 철자와 소리가 다르므로 철자 대회는 중요하다. 물론 철자와 단어가 다른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18세기 이전 영어 단어는 동일한 뜻을 가진 단어일지라도 쓰는 사람마다 철자가 달랐다.(물론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마다 달리 쓴 것을 당대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어느 한 나라에서만 생겨난 단어가 아니므로 다르기도 하다. 즉 영국 사람만의 어휘가 아니라 라틴어, 그리스어 등에서 단어가 흘러들어왔고 주변국가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지에서 어휘가 들어와 영 단어를 풍성하게 만들었을 뿐 더러 히브리어도 어휘 축적에 한몫했던 것이다(물론 여러 가지 변형을 거쳐서다. 성경이 라틴어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철자 대회가 중요한 것은 소리와 철자가 달라서이지만 특히 아버지가 이 철자대회를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왜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는 유대교 종교학자다. 유대교의 출발은 성경이다. 성경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유대교, 기독교의 출발은 말씀, 로고스다. 우리가 흔히 말씀으로만 번역하는 이 '로고스'에는 거대한 의미가 숨어 있다. 창세기는 말씀으로 세계가 태어나는 과정을 묘사한다. 말은 곧 힘이었던 것이고 말은 곧 창조였던 것이다. 말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말에 그만한 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말과 고대의 말이 지닌 힘은 다르다. 고대어가 지닌 힘을 믿었기에 고대인들은 말을 두려워했고 주문을 무서워했으며 신탁을 믿거나 예언을 믿고 따랐던 것이다.
말에서 힘을 앗아간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영 단어에서 '명예'와 '귀족'이 분리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18세기 이전 '귀족'은 곧 '명예'를 뜻했고 믿음은 신뢰를 뜻했다.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혹은 상응하는 대상은 곧 하나였고 따라서 말과 대상은 동일했으며 그만큼 말은 힘을 지녔던 것이지만 역사와 더불어 말은 대상과 분리되었다. 혹은 형용사 수식어와 분리되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말은 의미로만 남았고 속성을 가리키는 구실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족과 명예를 분리시킨 것은 귀족들 자신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들고 일어난 사건, 면죄부 사건은 또 하나의 예다. 교황은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했던 것이고 그 믿음은 그의 권위에서 왔으며 말, 교리는 곧 힘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알면 그까짓 종이 한 장을 위해 온 재산을 바친 사람들이 이해가 갈 것이다.
카발라와 아불라피아는 유대교 신비주의자 정도로만 넘어가자.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카발라는 대천사 라지엘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가르친 비의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즉 카발라는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13세기 스페인 학자 아불라피아는 세피로트 교의, 문자, 숫자를 결합한 카발리즘을 만들어낸다. 그 카발라와 아불라피아를 전공한 아버지가 철자 맞추기에 능한 딸에게 신과 접촉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자는 철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문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호는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이므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휘가 나온 근원에 접하게 되고 그 근원은 인간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있는 신과 접하고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인 것이다. 그가 평생토록 탐구했지만 도달하지 못한 단계.
아버지가 엘리자에게 카발라에 관해 가르칠 때, 신을 만나는 법을 가르칠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거꾸로 쓰기이다. 엘리자는 알파벳을 거꾸로 쓰고 카메라는 무수한 기호가 그녀가 그어내는 획으로 모여드는 영상을 보여준다. 기호와 문자가 해체되는 과정은 곧 인간의 의식의 해체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의 의식 근원에는 천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신과 맞닿아 있는 곳, 신과 교류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 아버지의 열망이며 어머니가 열망해온 것이기도 하지만 기실은 모든 인간의 열망이기도 한.
그래서 해체가 시작된다. 알파벳을 거꾸로 쓰는 해체부터 시작해 가족이 분열되고 붕괴되어 간다. 어머니가 숨겨왔던 아픔이 드러나고 아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표면화한다. 빛을 희구했다고 어머니의 말은 아픔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는 소망의 은유다.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체포된 그녀는 집이 아닌 정신병원을 택한다. 아론은 아버지에게 반항해 다른 종교,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안식을 얻는다. (사울과 미리암, 아론이라는 이름은 상징적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들이름들은 하나의 알레고리가 되어 현대의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였고 아론 또한 모세의 형이었다. 사울은 다윗 이전 왕었다.) 가장 가까웠어야 할 부부는 그렇게 해서 속에 있던 응어리를 드러낸다. 가장 근접했던 것처럼 보였던 아들과 아버지는 각기 다른 종교로 서로의 근원적인 알력을 드러낸다. 사랑의 부재라고? 사랑속에 숨겨져 있던 갈등이다.
어쩌면 사랑은 또 하나의 폭력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가득해야 할 사랑의 표징인 행위들이 의미를 잃은 껍데기만 남았을 때 그 사랑은 속성을 잃은 것이다. 가족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구어진 공동체, 알파벳이 단어의 근원이듯 가족은 사회의 근원이며 삶의 근원이다. 가족이 삶의 근원이듯 신과 함께 하는 삶은 삶의 목적이며 삶의 과정이다. 신에게 다가서기 위해 쌓아왔던 세월은 기존의 의미들을 축적해왔던 가족과도 같고 단어와도 같다.
어휘는 인간의 삶을 이루고 세계를 확장시켜 주며 지식을 넓히지만 어휘 자체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사울은 수십년간 신과 가까워지기를 추구하면서 지식을 쌓았고 그로 인해 사울의 삶의 내용은 풍성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처럼 간절히 원하는 세계에 다가서지 못한다. 오히려 평범한 엘리자가 신과의 접촉을 느끼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엘리자는 신에게 다가선다. 순수함으로. 엘리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표면의 삶이 지닌 의미.
가족은 새로 태어난다.
그래서 '차연'이 필요하다. 차연은 해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기존 의미가 여전히 여운을 남기는 가운데 새로 태어나므로 필요한 것이다.
첫댓글 25시와 비슷한 의미입니까? 고매하신 강의 잘 들었습니다. 역시 학자의 글은 깊이가 다르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이 영화 곧 개봉하는 겁니까?
아, 작년인가에 개봉했던 영화랍니다. 깊이라뇨. 그저 주절주절에 불과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다른 시각이 나올까요. 이 영화도 할 말이 무척 많아서 분석하면 이십 페이지는 나올 것 같군요. ^^ 이 정도나마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제목부터 주눅드는데 이렇게 잘 이해하시고 풀어내시니 대단하십니다. 영어의 differance 정도면 어떻게라도 함 끼워 맞춰 보겠지만 완벽해 보이던 한 가족의 해체까지...... 신체적인 행동발달은 단지 아이들 개개인의 차이일 뿐이지만 아이들의 언어 발달과정을 보면 그 아이의 지능이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어린 엘리자가 언어의 기본인 철자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에서 학자이신 아버지는 그 아이의 비범함을 내다보신거겠죠. (시네큐브에서 상영했을법한 영화) 이 영화 꼭 보고 싶네요. 희야님의 글 참고하면서요... 고맙습니다. ^^
^^ 종교적인 관점으로 풀어야 하는 것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안다고 해서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이가 철자 대회에서 이겨나가는 과정이 뭐랄까 구도 과정처럼 느껴지도록 그렸습니다. 아이는 누군가 불러준다고 하더군요. 원작을 보지 못해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믿음과 순수함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경우였답니다.
어렵습니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기독교의 출발은 말씀, 곧 로고스. 힘이고 창조라는 건 성경에서도 본 듯합니다. 사랑은 또 하나의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건 아주 젊은 시절 '폭풍의 언덕'을 읽고 실감했습니다. 잊혀지지 않아요.
아, 하도 영화가 어렵다고들 해서 도움을 주려고 써봤는데 더 어려워졌나요? 더 분석하면 쉬워질까요. 기초만 썼습니다. 후반부는 건드리지도 않았답니다. 사실은 무척 재미있는 영화랍니다. 딸과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 인물 분석을 하면 훨씬 더 실감날텐데. 시간 나는대로 다시 써볼게요. 시간이라...그 시간이 언제 난담. ㅠ.ㅠ
저는 우선 이 영화부터 볼랍니다. 추석연휴에...고맙습니다. 영화를 보고싶다는 동기를 부여해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