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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최보따리의 최후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해월 최시형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해가 1894년이니까 올해(2019)로 벌써 125년이 지난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십년도 이십년도 잠깐이더라. 그렇다면 백년이 넘었다 해도 그게 뭐 대수라고, 잠깐 한눈 팔고 딴짓 하다보면 훌쩍 백년이지. 불현듯 다시 생각나 손을 뻗치면 손끝에 잡힐 듯 말듯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는 어젯일이 바로 그젯일이 아니더냐? 이제 연로하시거나 엊그제 돌아가신 우리 어버이, 한어버이 세대에겐 그 역사가 다 그분들의 어린 시절이며 청년시절 이야기다. 그 난리 통에서 살아난 생존자들로부터나 한 다리 걸치고 두 다리 걸쳐서 생생하고도 심심찮게 듣고 자랐거나 어쩌면 그 한 자락 서슬에 몸이 끼어 몸소 겪어 낸 일이 바로 동학란이요 동학운동이며 또한 동학농민전쟁이며 혁명이 아니더냐!
그 너무나도 가깝고 한 풀 벗기면 바로 내 몸에 내 살에 와닿던 그 처참한 역사적 사실, 흰옷 입은 백성 삼만 내지 오만이 쓰러질 때 왜군 한 명 꼴로 죽었다는 그 속 터지는 현장, 이리하여 도합 삼십만 내지 오십만 명의 이 땅의 농투성이들이 죽어 가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그 꿈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이제 까마득히 잊혀 가고 그저 남의 일인 양 대중의 기억 저편에 아스라이 묻혀 간다. 그 뿐이랴? 그 가늠자 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얹어놓고 마음대로 방아쇠를 당기던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려 이제는 대놓고 피아를 헷갈리게 하는 세작들의 준동이 또다시 민중의 판단을 흐려 놓는다.
동학
그런데 얼마 전에 동학과 천도교에 대해 뒤적일 일이 있어 이것저것 살피는데 그 초창기의 많은 일들과 중요한 언설이 일어난 무대에 내 고향 경북 흥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내 눈에 삼삼하고 익숙한 그곳 산마루며 들판이며 마을들이며 사람들의 모습이 그 역사적인 태동의 배경이 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고는 적잖이 현장감을 느끼며 속울림을 받았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청소년이 될 때까지 자랐고 그 후로도 여태 이런 저런 연고가 남아 있어 특히나 홀로 고즈넉한때면 어느덧 마음 한 구석이 곧장 그곳으로 훤히 맞뚫레를 트고 만다. 그런데 이때도록 단 한 번도 그곳 누구에게서나, 한때 수백만의 마음을 사로잡고 여러 생령이 기꺼이 몸을 던지게 했던 동학과 그 가르침, 그 처절한 몸부림의 자리터가 되었던 그 역사적 사변과 그곳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인간은 집단적인 망각의 동물이던가, 아니면 그 망각 또한 성주괴공 생주이멸(成住壞空 生住異滅)의 하찮은 마무리에 다름이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애절함과 무위, 극과 극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나 하나 되는 것일까? 소월의 싯귀가 떠오른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그렇지, 생각이 스스로 떠난 건지 아니면 내가 생각을 내보낸 건지 알 수 없지만 긴 세월에 장사 없다고 서로 밀고 밀치며 빛이 바랜 것이로구나. 그런데 이 순간 문득 기억의 저편 너머에서 바람결에 사라졌던 어떤 목소리가 시금털털하고 따스무리한 입김과 함께 기적같이 목덜미를 스친다. 그때는 잘 모르고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 고향 흥해에서 비학산(飛鶴山) 쪽으로 파고들면 신광(神光)이라는 작은 면소재지가 있고 거기서 다시 오른녘을 파고들면 내가 국민학교 2학년까지 몇 해를 살았던 외가 동네인 반곡(盤谷)이 있다. 거기서 더 오른쪽 골짜기 두메산골로 들어가면 마북(馬北)이라는 산골 마을이 있고 이 마북 마을에서 쳐다보면 저 멀리 겹겹이 솟아 있는 산허리 어디쯤에 땅뻐디이(땅버딩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한 때 최보따리가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다. 어릴 때 외가 동네 어느 뒷방에서 흘려들은 것 같은데 예순 해를 지난 이 저녁, 최면도 걸려 있지 않은데 의식의 물위로 몰록 떠오른다.
최보따리? 최보따리가 누구인가?
남겨진 흑백 사진 한 장. 일흔두 살 늙은이의 장작처럼 마른 몸과 벗겨진 이마, 구레나룻과 멋대로 자란 짙은 염소수염. 퀭하지만 형형한 두 눈에 겨우 끌어당겨 여민 바지저고리. 부어올라 짚신도 제대로 꿰지 못해 밟고 있는 두 발과 피떡지에 덮힌 듯한 투박한 손, 소매 밑에 감춘 다른 한 손. 1898년,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 ~ 1898)이 서울 감영에 잡혀와 조선과 일제 관헌의 조리돌림 모진 고문 끝에 사형 집행을 앞두고 찍은 사진이다. ‘동학괴수최시형(東學首魁崔時亨)’이란 한문 세로 딱지를 붙인 역사의 벽 앞에 서다.
수운 최제우
그런데 이 남루하고 깡마른 노인이 없었다면 오늘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천도교는 물론이고 거기에서 가지 치거나 볕과 그늘을 서로 기댄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 이 겨레의 많은 민족종교는 물론이고 고유성에 바탕한 한국 정신문화의 커다란 숲이며 넝쿨이 통째로 밑둥치가 잘려 사라질 뻔했다.
이 일자무식의 성실하고 치밀한 구도자는 이를테면 고졸의 대통령인 줄 빤히 알면서 중인환시리에 대학 학번을 물어보는 책상물림 먹물의 허세 따위를 무색케 하는 직관과 영감의 지도자다. 신출귀몰하는 도피와 불가사리 같은 생환과 복구로 살아남고 번지는 조직의 천재, 불굴의 사명의식과 실천력으로 무에서 유를 되살리는 영도력. 과연 그는 물려받은 가르침의 충실한 전수자이자 세상의 근본을 뒤엎는 혁명가요 시대와 세태를 거스른 반항아이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에 순응하여 목숨 바쳐 엎드린 숭고한 순교자다. 돌아보라. 자고로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성인이나 지도자란 다름아닌 후계자를 잘 둔 이들이며 수운 또한 밝은 눈으로 해월을 택하였으니 그도 살고 그의 가르침도 살았다.
그렇다면 이 초라한 노인에게서 우리가 진 빚은 자명하다. 시대와 지역을 좁혀 해월 이래로 이 한반도의 근세사를 훑어보자. 밤하늘의 별같이 명멸한 각지의 의병들, 독립투사들, 게다가 산적들, 빨치산들, 도둑들까지, 학생운동가들, 조폭들, 노동운동가들, 사회운동가들, 각종 확신범들, 그리고 공상가들, 꿈의 설계자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선 자리와 눈높이에 따라 그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어떻게 단죄하든 말든, 그들이 어떤 면에서 성공하고 실패하고 어떻게 평가를 받았든 말든, 그들이나 당신이나 우리나 해월의 행적과 지침, 사상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면 일생에 크나큰 놓침이 있었음을 깨달아야 하리라.
최보따리가 왜 최보따리인가? 해월은 스물네 시간 보따리를 챙겨 곁에 두었다. 여차하면 들고 튀어야 하니까. 동물적인 감각으로 일촉즉발의 순간에 몸을 퉁기어 위기를 모면한 후 새 자리에 숨어들어 숨도 고루기 전에 그는 꿩새끼들처럼 흩어 모인 요원들 앞에 보따리를 풀었다. 교조의 가르침을 다시금 일깨우고 생존과 포덕의 지침을 내리며 촌음을 쪼개 경전을 짜모으고 어렵사리 이를 외우고 베끼고 목판에 새겨 어쨌거나 동학의 2대 경전인 한문 투의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우리말 가사풍의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찍어 펴냈다. 초인적인 살아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물리적이요 기술적인 문제에 한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보다는 그의 이런 믿지 못할 행적은 불굴의 정신과 사명감, 그리고 현실감 있는 실천력의 드러냄에 다름 아니었다.
해월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부득이 그의 사표이자 숭앙의 살아있는 대상인 동학의 교주,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생애를 다시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중요한 인물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억하기 귀찮아하고 싫어하며 인물 그 자체를 꺼리거나 심지어 적대시하는 이들마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AD 354 ~ AD 430)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D 1224/25? ~ AD 1274)의 이야기를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BC 4? ~ AD 30?)의 생애를 일일이 되짚을 필요가 없고 용수(龍樹 नागार्जुन, Nāgārjuna 150? ~ 250?)의 중관철학(中觀哲學)이나 달마(菩提達摩 बोधिधर्म Bodhidharma ??~??)의 선불교(禪佛敎)를 이야기하면서 고타마 싯다르타(釋迦牟尼सिद्धार्थ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BC 563/480 – BC 483/400)의 일생을 처음부터 다시 들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동학은 1824년 경북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난 수운 최제우가 나이 서른일곱이던 1860년 4월 5일에 한울님의 목소리를 듣고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달아 시작된 종교다. 동학에서는 하느님이나 하나님 대신 한울님을 일컫는데 나 자신과 이 우주만물이 한 울타리안에 있으며 이 울타리 안팎 어디에나, 부분으로나 전체로 있으며 이 모두를 다스리는 범신론적인 존재를 한울님이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가난한 시골 선비였던 수운의 아버지 최옥(崔鋈)은 느지막이 마을의 과부 한씨(韓氏)를 맞아 나이 예순셋에 수운을 낳아 아이 이름을 복술(福述)이라 불렀다. 때는 조선의 말기로 나라 정책의 근간인 전정(田政: 토지세 정책), 군정(軍政:군복무 대신 세금으로 갈음하는 정책), 환곡(還穀: 보릿고개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걷이 후 갚게 하는 정책)이라는 삼정(三政)은 극도로 문란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의 배들, 이른바 이양선은 심심찮게 출몰하였으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조선 천지가 괴로움과 두려움과 혼돈에 휩싸인 말세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수운은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 살에는 아버지를 따라 한문 공부를 시작하는데 총명이 뛰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으로 열세 살에 밀양 박씨(密陽朴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세상의 괴로움과 조선의 운명에 민감하였던 소년 신랑에게 밀월은 없었다. 그는 곧 팔도를 유람하며 인심과 풍속을 살펴보고 세상의 어두움과 어지러움을 탄식한다.
무릇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백년에 하나 날까 말까하는 성인(聖人)이다. 이는 하늘이 내는 것이고 타고나야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싹수가 다른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근본적인 밑바탕에 닿아 있으며 동시에 한없이 넓은 지평을 넘나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일신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현인(賢人)이다. 이들은 남달리 배우기를 즐기고 스스로 공부하여 깨친다. 약간의 길잡이만 있으면 혼자서도 고요하고 치밀하게 이치를 따지고 매듭을 풀며 거슬러 진리를 찾아간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나머지 대다수는 우중(愚衆)이 채운다. 이들은 가르쳐 줘도 뭐가 뭔지를 모른다. 좋은 학교 다니고 학위가 주렁주렁해도, 권력과 지위, 세속의 칭송이나 겉치레 명예가 높아도 소용없다. 이들도 우중이다. 듣는 데서는 맞다고 맞장구 쳐놓고도 돌아서면 옛날 그대로 고집을 피우거나 딴소리 한다. 자신이 속는 줄도 모르고 세상을 속이려들며 속였다고 믿는다. 아는 듯 하다가도 금방 잊어먹고는 원위치,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 속을 헤맨다. 복술이 소년은 떡잎부터가 달랐다.
그는 이러한 천하주유의 도중에 서학(천주교)도 접한 것 같다. 본래 유학자의 자제인데다 길지 않은 일생 동안 절이나 스님, 불교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서학은 물론 이러한 기존 종교에서도 수운은 세상을 건질 실마리를 찾지 못하였다.
이상하리만치 경직화, 교조화되어 당파싸움의 흉기로 쓰이고 있던 공자의 가르침, 그리고 오랜 핍박으로 산중에 숨어들어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한 결과 급박한 세계정세를 대충이라도 파악하는 혜안은 고사하고 민간신앙 수준으로 떨어져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조선의 불교에서 그가 희망의 빛을 보지 못하였음은 넉넉히 이해가 간다. 용담유사에 실린 교훈가(敎訓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그런데 누가 있어 오늘날에도 이러한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면 그것은 마지막 희망을 접음일까, 부흥의 샅바를 바투 잡는 다짐일까?
열네 살에 집에 돌아온 수운은 다시 공부에 몰두하는데 입신출세를 위한 육법전서 기출문제 풀이가 아니라 널리 세상을 건질 본격적인 공부였다. 열여섯에 늙으신 아버지가 돌아가고 이어서 집에 불이 나 귀중한 유품과 그 나마의 재산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에 세상만사에 의욕을 잃은 수운은 가족을 울산의 처가에 맡기고는 다시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이 일 저 일을 해 보았으나 도무지 손에 잡히는 일도 되는 일도 없었다.
당시의 조선은 깊게 골병이 들고 있었다. 순조 이후 심화된 세도정치는 더욱더 삼정의 문란을 가져왔고 국가의 재정은 메말라 갔다. 과도한 세금, 부당하고 어지러운 행정과 만연한 억압과 부패에 민중의 불만은 쌓이고 쌓여 임계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터지는 자연발생적인 민란으로 조선 전체가 마치 가마솥의 팥죽이 끓듯 했으나 병든 양반 사회는 이에 불감증인 듯 도리어 날마다 탐학을 더해 갈 뿐이었다.
게다가 서양 사람들은 이제 심심하면 조선에 출몰하여 해안을 측량하거나 대놓고 통상을 요구했다. 하늘같이 믿고 기대던 청나라가 아편전쟁(1840~1842)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애로우호 사건(1856)으로 서양 오랑캐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알고 있던 조선의 지배층은 이러한 통상요구와 함께 중국에서 묻어 들어온 천주교를 극도로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민중들의 동요도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요즘 같은 밝은 세상에서도 이른바 미ㆍ일이라는 우방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까닭 없이 전전긍긍하는 일부 국민들을 보자면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의 불안과 동요가 어땠을지 짐작이 간
다. 전에 없던 천재지변과 괴질의 유행은 거기에 구색을 갖춘 양념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을 둘러본 수운은 어떻게 해야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이 나라를 살려낼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였다. 그리고 심사숙고와 명상수련 끝에 이러한 모든 불안과 곤경의 원인은 사람들이 하늘의 도리[天理]에 따르지 않고 하늘의 명령[天命]을 돌아보지 않으며 자기만의 이기심에 차서 눈앞의 생존과 경쟁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진정한 천리와 천명이 무엇인지 알아보리라. 그는 헤맴을 마치고 울산 처가에 머물던 처자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느 날 홀로 앉아 있는데 눈앞에 문득 어느 스님이 나타나 책 한 권을 건네주면서 자기들은 읽어 봐도 도저히 뜻을 알 수 없어 선생께 드린다며 홀연 사라졌다. 눈앞의 책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책속의 글은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수운은 이를 사흘 동안 되뇌어 뜻을 알아내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수운은 1856년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어가 49일을 작정하고 정성을 드리던 중 47일째 되던 날에 문득 숙부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이 들어 정성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 장례에 참여하는데 이 일로 수운의 예지력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수운은 이제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기도를 마치고는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다. 그는 구미산 아래에 있는 용담정에 ‘산에서 나가지 않는다[不出山外]’ ‘도의 기운이 오래 머물러 삿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며 세상 사람들과는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入不同歸]’라는 글귀를 써 붙여 놓고 세상의 뭇생명을 널리 구할[廣濟蒼生] 큰 도를 얻기 전에는 결코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때 이름도 본명인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꾼다.
그러던 1860년 4월 5일, 조카 맹륜의 생일잔치가 있어 마차를 보내와 마지못해 참석하였으나 몸이 이상해 일찍 자리를 떠 돌아왔는데 그날 오전 11시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떨리며[心寒身戰] 한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엄청난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한울님의 첫 마디가 ‘두려워 말라. 사람들이 나를 한울님이라 일컫거늘 너는 한울님을 알지 못하느냐?’였다.
이것이 동학의 시작이다.
여러 종교에 있어서의 신비체험, 그 중에서도 무함마드(Muhammad 570 دّمحُم CE ~ 632 CE)가 히라산 동굴에서 알라의 음성을 들은 사건이 연상된다.
그 목소리로 이르심의 핵심은 한울님을 모시라는 것[侍天主],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것[人乃天], 영험스런 부적[靈符]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라는 것, 이것은 서학[天主敎]이 아니라 유불선이 하나 됨[儒佛仙 合一]이라는 것, 그리고 이로써 갈고 닦아 부지런히 실천하여 이 세상을 빈부귀천(貧富貴賤)이 없는 지상천국으로 만들라는 것[後天開闢]이었다.
이러한 신비 체험은 그 해 9월 20일까지 이어졌고 수운은 이로써 그지없고 커다란 진리의 길[無極大道]을 확고히 체득한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숙고한 결과 확신을 갖고서 21자 주문[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을 짓고 그 이듬해인 1861년에 포덕(布德)을 시작한다. 주문이란 본래 꼭 해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풀자면 이런 뜻이다. ‘한울님의 그지없는 기운이 지금 이곳에 이르나니 바라옵건대 저에게 크게 내려 주옵소서. 한울님을 모시오니 조화가 자리 잡을진저, 한평생 잊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헤아리오리다.’
불교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포교(布敎)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선교(宣敎)라고 하지만 동학에서는 포덕(布德)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길동무를 불교에서는 도반(道伴)이라고 하며 개신교에서는 성도(聖徒), 천주교에서는 자매나 형제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동학에서는 동덕(同德)이라고 한다. 지금은 관계가 끊어졌지만 이로써 서울의 동덕여자대학교의 연원이 동학, 곧 천도교에 닿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홍익대학교도 본래는 대종교와 관련이 있었다. 이렇듯이 민족종교의 원대한 뜻으로 시작된 숱한 사학들이 얼마 안 가 다른 재단에 인수되거나 합병되어 성격이 바뀌고 그 뿌리가 잊히거나 영영 사라진 것은 해방공간 이후 국학 및 민족예술, 민족종교 내지 민족주의 진영의 힘이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 외래문명을 맞닥뜨려 정치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급격히 위축되었음을 보여주는 불행의 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지 4년 만인 1864년 마침내 관가에 잡혀가 대구 감영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는데 그 한 해 전인 1863년에 역시 경주 출신인 일자무식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넘겨주었다. 이게 결국 동학을 살린 간발의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쟁쟁한 여러 후보자들도 있었을 터에 왜 하필 최시형이었나?
수운보다 세 살이 적은 해월은 1827년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며 본래 이름은 경상(慶翔)이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수운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일곱 살 때부터는 종이 만드는 공장[製紙所]에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거기서 몸일만 한 게 아니라 종이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영업사원 노릇을 했기에 특히 경상도 북부지방에 발이 넓어 훗날 포덕과 도피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해월은 열아홉 살에 흥해에 사는 밀양 손씨(密陽孫氏)에 장가를 들었지만 여전히 가난하여 화전을 일구거나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남들이 ‘머슴놈 머슴놈’ 하면서 천대하는 것이 가슴에 멍이 들 정도로 괴로웠다고 하였다. 스물아홉에 경주 승광면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여섯 해 동안 충실히 맡은바를 해내다가 서른세 살 때에 검곡(劍谷)으로 이사 가서야 생애 처음으로 제 땅에 제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해월은 1861년(철종 12년)에 흰 종이 세 묶음을 들고 경주 용담에 있던 수운을 찾아가 동학에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경주 일대의 유생들 사이에 동학을 배척하는 여론이 끓어 올라 수운이 한 때 관헌에 체포된 적이 있는데 각지의 도인들이 경주로 몰려와 관에 항의한 결과 닷새 만에 석방이 되었다.
이에 수운은 뒷일을 생각하여 열여섯 명의 접주를 임명하였지만 수운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로써 그의 교단내 위치가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설이 있지만 진상은 알기 어렵다.
이러한 불우하고도 불안한 삶 속에서도 해월은 동학의 인간평등과 상호부조의 경제이념에 크게 공감하여 달마다 서너 차례 용담을 찾거나 검곡의 집에서 끊임없이 수련하였다.
그렇다. 종교는 이론보다 수련이고 수행인 것이다. 그러다 1861년 겨울에는 밤마다 연못의 얼음을 깨고 찬물에 목욕하면서 수련하였는데 어느 순간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차가운 물에 급히 들어가는 것은 몸에 해롭다.’ 이 일을 수운에게 알렸고 수운은 이때부터 해월의 포덕을 허락하였다.
동학에서는 얼마간 수련이 끝나고 교조의 허락이 있어야 포덕을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해월은 숨어 다니는 수운을 종종 영감으로 찾아가는 등 신비체험을 하였다.
1863년, 동학을 널리 펴라는 수운의 명을 받은 해월은 영덕 • 영해 등 경상도 곳곳을 돌며 많은 신도를 얻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도통을 물려받았다. 이를 보면 수운은 사람의 출신이나 학식이 아니라 신앙심과 능력을 보아 인재를 골랐으며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즈음에 학식이 풍부하고 능력있는 여러 제자들이 몽땅 잡혀가 순교해 버린 사실도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긴 하지만.
이 해 12월 9일 아침, 해월이 수운을 찾아와 금년은 특별히 선생을 모시고 세상에 나서고자 한다고 아뢰니 수운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 특별히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이 시간부터 내 문전에 들어서지 말고 어서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대로 전할지니 다 천명으로 알고 조금도 어기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 경졸 오륙십 명이 용담정을 둘러싸고 선전관 정운구가 어명을 전하자 수운은 곧 행장을 갖추고 순순히 이들을 따라 집을 떠났다.
체포된 수운은 서울을 향해 압송되었으나 마침 철종이 붕어하여 과천에서 발길을 돌려 대구영으로 내려와 옥에 가두어졌다. 수운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만약 서울로 곧장 압송되었으면 그나마 완고한 유림 세력들의 기세가 더 등등한 영남이 아니라서 혹시 사형은 면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교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한 해월은 대구의 옥중에 변장 잠입하여 옥바라지를 하며 3월 3일에는 수운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뵈옵고 그에게서 마지막 가르침과 당부를 들어 받든다. 그리고 일주일 후, 수운은 ‘삿된 도로 올바름을 어지럽혔다[左道亂正]’는 죄목으로 망나니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사흘 후, 제자 김경필, 김경숙, 정용서, 곽덕원 등이 은밀히 수운의 주검을 거두어 구미산 아래 용담전록에 장사지냈다.
한편 해월은 체포의 손길이 자신에게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숨어 살면서 자신의 처자와 수운의 유족을 보살폈다. 수운에게는 남겨진 아내와 세정, 세청 두 아들에다 수운이 일찍이 자신의 노비에서 해방 시켜 짝을 지어 준 며느리가 있었는데 제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 스승의 권속까지 우선적으로 챙겼음은 강철같은 의리말고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수운의 아내 박씨나 두 아들 모두 관의 핍박에 시달리며 맞아죽는 등 결국 불행하고도 신산한 일생을 차례로 짧게 마쳤으며 한 아들을 통하여 난 외손의 핏줄을 남긴 것으로 안다.
해월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옮아갔다. 거기에서 한 해에 네 번씩 정기적인 49일 기도를 하고 수운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만들어 신도들을 결집시켰으니 어느 종교나 조직이든 한국인이 모인 곳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계가 늘 큰 역할을 함은 변함이 없다. 더러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이러한 계모임야말로 한국 종교와 문화의 실질적인 마중물이요 씨돈이 생기는 돈주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해월은 체포의 위기와 긴장 속에서도 틈틈이 경전을 다시 베껴 쓰고 짜맞추어 신도들에게 읽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두 손은 끊임없이 일을 하였다. 새끼나 노끈을 꼬고 짚신을 삼으며 입으로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일거리가 떨어지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었다. 좀 쉬어가며 하시라면 한울님은 놀고 먹는 게으름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답변하였다.
아무튼 이처럼 교세의 재건이 이루어지는가 하는데 어느 집단에서나 으례 그렇듯이 때 이른 과격파가 일을 망치고 싹을 문지른다. 1871년(고종 8)에 터졌던 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李弼濟)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해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운의 제삿날인 3월 10일에 일을 저지른다.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준비 허술하고 뒷감당 대책이 없는 민란(이필재의 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희생만 내고 자신도 잡혀 죽으니 이로 인해 동학은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해월은 관헌의 추격을 피해 소백산으로 피신하면서 영월 • 인제 • 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마련하였다. 1878년에는 개접제(開接制), 1884년 육임제(六任制)를 도입하여 신도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동학이 신도를 포섭하며 확장돼 나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접(接)이 생겨났다. 접의 책임자인 접주는 보통 오륙십 명의 교도를 맡았다. 접이란 본래 글 가르치는 학교 조직을 일컫는 말로서 선생을 뜻하는 접장이란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다 신도가 크게 늘어나자 여러 접을 관장하는 포(包)를 만들어 대접주가 책임을 맡았다. 해월은 탄압에 적응하는 조직의 유연성을 위해 어느 접에나 임기응변으로 들 수 있게 하는 개접제를 실시하였다가 동학의 조직이 방대해질 조짐을 보이자 각 포 안에 여섯 방면의 소임자를 두는 육임제를 두는 마련을때에 맞게 미리 한 것이다.
이리하여 교세가 갑자기 커지자 1885년 본거지를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옮겼다. 아울러 관헌의 탄압도 심해졌는데, 힘이 커진 동학은 이에 맞서 1892년부터는 교조의 원한을 푸는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합법적 투쟁을 펼쳐 나갔다. 1892년 전주 삼례역(參禮驛)에서의 첫 번째 신원운동, 1893년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두 번째 신원운동이 그것이다.
정부 측의 회유로 일단 흩어졌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세 번째 신원운동을 벌여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가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보면 최근의 촛불 시위 등 한국 사람들의 평화적이고 조직적인 시위가 한두 해에 그저 된 것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가히 세계적인 시위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 탐관오리를 파면하는 모양새를 보이자 시위대는 다시 스스로 흩어졌다. 당시에 많은 신도들은 혁신을 위하여 총칼을 잡고 일어설 것을 청하였으나 해월은 아직은 때가 아님을 말하며 신도들을 달래고 추슬러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 ~ 1911)의 학정에 폭발한 민중에 떠밀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죄로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에 나서자 해월은 일단 이와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며 동학의 진로를 고민하였다. 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을 엄금하도록 시달했다.
아무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꼬이려고 그랬는지 고부 농민군의 봉기를 무마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李容泰 1854 ~ 1922)가 도리어 사람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는 등 화약더미에 불을 붙이자 곧바로 첫 번째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났다. 전봉준은 이 기회에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 • 손화중(孫和中) • 차치구(車致九 1851 ~ 1894)를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초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동학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정비한 진용이었다. 고부의 백산(白山) 산허리를 하얗게 덮은 흰옷 입고 죽창을 든 농민 대군,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란 말이 이때 나왔다. 이들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왜양(倭洋)을 쫓아내 없애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하지만 해월은 녹두장군의 봉기를 아직도 탐탁지 않게 여기고 관망하며 비폭력의 종교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이리하여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과 해월이 이끄는 북접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얼마간 천금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 잃어버린 시간이 우리 역사를 바꾸는 큰 방향타였다는 의론도 있다. 해월은 전봉준이 대원군과 밀통하는 것을 못 미더워했으며 폭력적인 봉기가 아니라 종교적인 수행과 교조의 신원, 포덕의 자유 확보 및 동학의 저변 공고와 확대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믿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전봉준 • 김개남(金開南 1853 ~ 1894) •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의 스승으로 스님 출신이자 남접의 거두인 서장옥(徐璋玉 ? - 1900)이 해월의 지도력을 벗어나 강경한 독자노선을 고집함으로써 교단에 금이 간 일도 있었다.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아무튼 백산에 모인 동학 농민군은 관군을 격파하여 1894년 음력 3월 전주성을 점령하였고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정부와 약속[전주확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리고 호남 일대 53개 군현 모두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이는 1980년의 광주 민중 항쟁에 한참 앞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밑바닥 민중이 주체가 되는 강력한 통치기구가 근대 민주자치행정을 원활히 작동한 사건이었다. 각 집강소는 확약에 따라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들 관리들의 시정을 감시하고 상의하였다.
의금부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가운데 상투틀고 있는 인물)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각 집강소를 관할하는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전라우도를 호령하였다. 호남뿐만 아니었다.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의 집강소들을 호령하던 혁명아 김개남은 스물네 살의 열혈 청년 김인배(金仁培)에게 영호대접주라는 직함을 주어 순천지역으로 내려 보냈다. 김인배는 섬진강을 건너 하동, 진주를 석권했다. 결국 부산에서 파견된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하동 • 여수 • 광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침내 광양에서 잡혀 머리가 잘려 죽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청년은 동행한 처남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장부가 나서 죽을 자리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지들과 최후를 같이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누가 조선 사람은 젊으나 늙으나 모조리 나약한 버러지들뿐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러한 사태 진전과 확산에 당황한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응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제멋대로 조선에 상륙시켰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으나 한 번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나 이제나 외세란 본래 불러들이기는 쉬워도 물리치기란 무지 어려운 법이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하고 청이 거절하자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킨다. 조선은 이미 뻔히 눈 뜨고 외세에 휘둘리는 반식민지로 떨어져 있었다. 이 친일 내각은 일본의 입김 아래 허울 좋은 개혁을 단행하였으니 그게 바로 빛 좋은 개살구 갑오경장이다. 도대체 그 개혁의 근본적인 의도가 무엇이었던가? 결국 누구 좋자고, 무슨 도둑질에 편하도록 사다리를 걸치는 개혁들인가? 그 주인을 위함인가 아니면 도적을 위함인가? 그런데 이 개살구는 지금도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반일민족론이니 뭐니 하는 자가당착의 반역적인 억지 논리에 갖다 쓰여 쓰라리고도 신맛을 더하며 일부 아둔한 대중과 식자들의 입맛을 농락하고 있다.
일본은 이처럼 반역자들을 조종하여 조선의 내정을 휘어 잡자 곧바로 청나라 군사를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싸우려면 자기들 땅에서나 싸울 것이지 이런 안하무인 일본을 이제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을 조선 정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은 다시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였으니 두 번째 동학 농민전쟁이다.
이제 해월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전봉준과 손병희(孫秉熙 1861 ~ 1922) 등 제자들의 간곡한 호소와 설득에다 그 밑의 따르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들불처럼 번지자 드디어 해월은 마음을 확고히 정하여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하였으며 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였다.
김개남
봉기한 동학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 아래 공주성으로 다가들었고 제2대는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 병영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시월 중순 십만의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에서 마지막 총공격을 하였으나 하루 종일 주검에 주검을 쌓는 일방적인 살육의 벌판만 남기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해월은 논산에서 남접군과 합세하여 공주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참패하고 전북 장수에서도 참패하자 몸을 숨겼다. 김개남은 12월 1일 태인에서 친구 임명찬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상금에 눈이 먼 옛 동지 김경천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만다.
김개남은 왕조의 통치를 인정한 전봉준과는 달리 왕조를 뒤엎으려는 혁명가였다. 그가 점령한 고을의 양반 통치자들은 가차 없이 목이 달아났다. 훗날 그가 관군에 잡히자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 1848 ~ 1909)는 구름같이 모여들며 호송 수레를 둘러싸는 백성들이 두려워 공소장도 없이 그를 즉결처분하여 머리만 서울로 보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다투어 배알을 잘라 씹었고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선비 황현(黃玹 1855 ~ 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써 놓았다. 서울에 압송되어 조선 관헌에게서 일본군에 넘겨져 다리가 부러져 담가에 실려 가는 조리돌림으로 취조 당하며 어쨌든 기록이 남겨진 전봉준에 비하여 그에 못지않은 무게감과 함께 대비되는 행적을 남긴 한국의 체 게바라 김개남의 기억이 우리에게 희미해진 것은 이런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의암 손병희
이상이 동학농민전쟁의 대략적인 전개이거니와 해월의 심사숙고와 지체가 얼마나 이 절체절명의 싸움판에서 결정적인 패착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나마 훗날을 기약하는 씨베개가 되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후자에 더 무게를 둘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인식, 그의 가르침, 그의 해석은 날이 갈수록 무게와 빛을 더한다. 수운 대신사(水雲 大神師)의 뒤를 이은 2대 교주로서 해월 신사(海月 神師)가 그 온갖 신고의 틈바구니에서 설파한 깨침의 대목들을 살펴보자.
해월은 대신사의 시천주 사상을 확대 해석하여 범신론적인 범천론(梵天論)을 이끌어낸다. 모든 천지만물이 유일한 지기(至氣, 天)로부터 나온 것이니 시천주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품고 있다. 누구든 사람이라면 그를 공경하라[敬人].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事人如天].
인간의 노동행위는 한울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하는 거룩한 몸짓이다.
부지런히 쉬지 말고 일하라. 게으른 자는 한울님이 싫어하신다.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도 한울님의 지기를 받아 품고 있는 것이니 한울처럼 대하라[敬物].
사람이 밥을 먹는 것도 생명의 근원인 한울을 먹는 것이다[以天食天].
땅을 소중히 하기를 어머님의 살갗을 대하듯 하라. 한울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만물을 공경하라[三敬思想] 사람은 한울님을 품고 있지만 도덕적인 마음과 행위로 이 씨앗을 부지런히 키워 나가야 한다[養天主].
그리고 그 다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설해진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선포다. 1897년 정월 창도기념식에서 행한 설파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벽을 향하여, 벽앞에 제단을 모시고 타자인 조상이나 신을 향해 무엇을 빌거나 기리는 기도요 제사의 역사였다[향벽설위].
벽 저쪽에, 내 시선 저 너머에, 다른 차원에, 내일에, 미래에 신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약속의 땅, 행복의 낙원이 있다고 했다. 그를 위해 참고 견디고 희생하여 왔다. 아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중심으로 잃어버렸던 오늘을 회복해야 한다. 내 안에 한울이 계시니 내가 한울이다.
향아설위, 나를 향해 제단을 차려라. 지금 여기에, 내 안에 행복도 미래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요 후천개벽이다.
수운 대신사에서 비롯한 이러한 해월 신사의 가르침에 그대는 납득이 가는가? 한국의 기독교 측에서는 일찍이 수운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른 국면에서 다르게 행한 위대한 하느님의 사도라는 평가와 함께 고려의 가치가 없이 옆길로 빠진 미신이요 샤마니즘에서 변형된 절충주의, 편의주의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넘쳐난다. 아니 무관심과 무시가 대세라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어떠한가?
모든 번뇌의 적을 무찌른 살적(殺賊), 누구에게나 숭앙받고 대접받을 만한 이[應供],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오른 이[無學], 곧 아라한(Arahant)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 한 단계 아래, 욕망의 세계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불환(不還), 곧 아나함(Anagami)의 경지인가? 그도 아니면 어쩌다 한 번쯤은 욕망의 세계로 빠꾸할 수도 있는 일래(一來), 곧 사다함(Sakadagamin)일까 깨달음의 흐름에는 들어선 예류(豫流), 곧 수다원(Sotapanna)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번쇄한 교학이 그를 무어라 규정하거나 얼버무리든 홈리스보다 남루한 최보따리 노인은 지극히 걱정스러우면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 각자의 가슴 앞에 오늘도 나 자신이 나 자신을 향한 제단을 차리라고 이르고 있다.
한편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했던 많은 지도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1898년, 해월은 한 때 믿었던 송경인(宋敬仁)의 밀고로 원주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모진 고문 끝에 6월 2일 일흔둘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맙소사! 하늘은 언제나 이런 영웅과 짝지어 잊지도 않고 반드시 배신자, 밀고자를 내시느뇨?
이때 해월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판사가 고부 봉기를 유발한 조병갑이라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요 웃지 못할 아이러니다. 해월이 죽은 사흘 뒤, 이종훈 등이 광희문 밖에 가매장된 주검을 거두어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자락에 이 위대하며 불쌍한 넋을 장례 지냈다. 해월은 부인의 사망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세 번 결혼하여 3남1녀를 낳았으며 요절과 시련은 있었지만 어쨌든 후손은 이어졌다.
그가 예수의 나툼인지 베드로인지, 부처의 화신인지 또다른 달마인지는 모른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마무리 지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운데 그것은 출중한 후계자의 기름과 굳힘이다. 해월은 최후를 맞기 한 해 전, 훗날 기미 독립선언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 ~ 1922)를 3대 교주로 삼아 도통을 넘겨주었다. 대신사, 신사에 이어 나중에 성사(聖師)로 불린 풍운아요, 젊은 시절 끈끈히 어울렸던 불량배들과 단칼에 의절하고 대의를 각성하여 스스로 혹독한 수련에 목숨 걸고 임해 오는 의암을 해월은 먼저 시험하였다. 가섭암에 도피하던 해월은 의암에게 무리의 끼니를 끓일 무거운 가마솥을 한데에 걸게 하였다. 찬물로 진흙을 이겨 힘들여 부뚜막을 만들고 가마솥을 걸었으나 해월은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잘못 걸었다며 다시 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쳐 일곱 번을 연거푸 솥을 걸게 하고 그때마다 묵묵히 고쳐 걸은 후에야 해월은 이제 되었다며 의암의 사람됨을 인정하고 후계자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그 후 예상 밖으로 세찬 역사의 소용돌이를 힘겹게 헤쳐나오면서 형 만한 아우가 없다고, 그렇지만 잿더미에서도 불씨가 핀다고, 분열과 화해, 둔감과 각성, 아둔과 지혜가 갈바드는 수많은 인사들의 행적은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가 아니라 차라리 우리 자신을 말함이지만 남북한에서 공히 억울하게 희생당한 결과 이제는 소수종교로 떨어진 채로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장엄하고도 처절한 천도교의 이야기는 또 하나의 대하 드라마를 이루기에 여기서는 이만 글을 접는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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