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청풍료는 지금 성보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뒷 뜰에는 내가 꿈에도 그리던 선산 강락사지 삼층석탑이 옮겨져 와 있다. 이 탑은 원래 선산읍 원동 강창(江倉)마을의 강락사(江洛寺)터라고 전하던 곳에 있던 것인데 1968년에 선산군청으로 옮겼다가 1980년에 다시 직지사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강락사터는 그 곳 강창마을 강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창은 선산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7km떨어진 곳에 있으며 감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 낙산에서 동남 쪽으로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전) 강락사지라고 하는 것은 그 곳이 딱히 강락사라고 하는 기록 등 물증이 없어서이지만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강락사라는 절이 틀림없는 것 같다. 강락사터의 동쪽 강 건너편으로는 가야시대부터 수백 년간 그 지역의 중심지였던 낙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고분군과 의구총, 여지니 나루터, 낙산리 삼층석탑이 있고 냉산(태조산)과 도리사가 건너다 보인다. 또 서쪽 뒤로는 그 대단한 선산의 죽장리 오층석탑이 있다.
따라서 강락사는 당시 이 지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고 교통의 요지였던 곳에 있었던 셈인데 강창이라는 창고가 있는 곳에 위치했으니 낙동강과 감천을 이용한 수운과 그 곳을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 비교적 풍요로운 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천(甘川)에 생필품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배시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런데 배시내는 한자로 梨川으로 적고 있어서 강을 건너는 배와는 상관없이 먹는 '배'가 나오고 있다. 배가 드나들어서 배시내라는 이름이 생겼고 그것을 한자로 적다 보니 梨川으로 적은 것인지 원래는 '밝'계열의 어원을 가진 언어가 시내와 결합하여 배시내가 되었는데 그 연유를 배가 드나들었다고 후대에 붙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감천은 김천에서 선산을 거쳐 동쪽으로 내려와 낙동강에 합류하는데 그 뿌리 중 한 줄기는 바람도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추풍령에 닿아 있고 다른 한 줄기는 무주 구천동으로 유명한 덕유산 줄기 민주지산에 닿아 있다.

이 감천을 중심으로 하여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일리천(一利川)전투가 있었다.
때는 고려 태조 왕건 19년(서기 936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아들에게 쫓겨 왕건에게 몸을 맡긴 상태였고 그의 아들 신검과 고려의 왕건이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일리천은 일선(지금의 선산)을 관통하여 흐르는 낙동강 지류라고 되어 있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현재의 배시내(이천, 감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 흐르는 강이 따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태조산성, 칠창을 비롯한 이 지역의 많은 지명과 유적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선(선산)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선궁. 해평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훤술이 그 때 활약하여 중시조가 된 것은 전에 올린 적이 있다.
이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왕건과 신검은 진을 쳤는데 아마 신검은 고아와 구미 쪽에 진을 치고 왕건은 일리천 북쪽인 선산과, 냉산의 산성을 등뒤로 하고 낙동강 동쪽인 낙산 쪽에 진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고아 들판을 사이에 두고 낙동강 건너와 일리천 건너에서 협공을 한 모양이다. 즉 왕건으로서는 신라와 가까운 이 곳에서 신라 북부내륙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해 쉽게 낙동강 이쪽의 신라병력과 물자를 이동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이 전투가 당대 최대의 전투였다는 것은 군사의 수에서 알 수 있는데 후삼국시대의 전투가 대체로 평균 2,000~4,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던데 비해 이 전투에서의 고려군의 수가 8만7천5백명이었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국운을 건 엄청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후백제의 병력규모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려군이 후백제 병력 중 3200명을 사로잡고 57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으니 후백제의 병력은 최소가 8900명이며 나머지 패잔병이 황산,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적어도 1만명 이상, 곡창지대인 전라, 경상도를 배후로 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면 많게는 고려군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두 나라의 군사는 10만명을 훨씬 넘어 15만 명에 육박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일리천 전투는 후삼국시대를 마감하는, 두 나라가 국운을 건 최대의 전투였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리천 전투로 하여 다시 한반도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루었고 역사적으로는 고대에서 중세로 이전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1917년 모습> <현재의 모습>
이 탑은 1917년에 일본인에 의해서 현지조사가 있었고 그 때 사진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괴되어 넘어진 이후, 선산군청으로, 직지사로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탑의 바로 밑으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니 강락사는 강변 바로 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이 탑도 9미터에 이르는 규모나 양식면에 있어서 문경 도천사의 탑들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두 번이나 옮겼으므로 원래의 바닥돌은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받침돌은 몇 매의 돌을 계단식 괴임형으로 각형 2단을 만들어 짜맞추고 그 위에 탑신을 올리도록 하였다.
기단은 몇 매의 널돌을 세워 짜맞추었는데 모서리기둥을 새기고 가운데 기둥을 하나 새겼다. 면석 중 일부는 나중에 보수, 교체된 것이다.

갑석은 네 매의 널돌을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아래면에는 각형의 부연을 두었고 윗면은 평평하게 하였으며 위에는 호각형 2단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부연과 갑석처마의 두께는 같이 하였다. 갑석 중 한 부분도 후에 교체되었다고 한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몸돌에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다. 몸돌의 비례는 대략 4:1.1:1 정도여서 1층 몸돌이 다소 높게 조성되었다. 1층 몸돌이 이렇게 고준한 것도 도천사의 탑들과 마찬가지로 단층 기단과 더불어 이 시기 경북 내륙 지역의 한 특색인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에 각각 5단의 받침을 두었다. 밑면 받침은 질서정연한 직선미가 엄격하다. 처마는 얇은 편이며 하단은 수평을 이루었고 상단은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만 살짝 날카롭게 들렸다. 낙수면은 중앙을 파낸 내곡형인데 그렇게 깊지 않아서 물매는 완만하다.
지붕돌 위에는 다시 각형 2단의 괴임을 새겨 올렸는데 층급받침처럼 질서가 정연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현 위치에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9세기경의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의 양식을 하고 있는데 단층기단과 탑신부의 구성형식은 9세기 후반 신라석탑의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많은 부분 통일 신라기의 양식을 이어받고 있으며 여전히 질서가 엄정하게 살아 있어서 꼿꼿한 기상을 잃지 않은 수작이라 할 것이다.

현재 이 석탑의 전체높이는 9m이며, 3층 옥개석까지의 높이는 5.1m이다.
보물 제1186호이다.
소재지 ; 경북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 (운수리) 직지사
2011. 9. 28.
머루눈
첫댓글 봄이 되었응깨..이제 또 역사공부 시작혀야지...자꾸 올리봐...ㅎ
답사하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은다리...은처리하고 탑돌이 함 다녀 볼텨?? ㅎㅎ....
드뎌 모습을 들어낸건가.. 앞으로 볼꺼리 많아지겄네.... 빵가빵가(교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