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부 시대의 전통 파괴
1909년 10월26일, 이토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권총 세 발을 맞고 사망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려고 했다.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에 부임한 그 는 헌병 경찰제를 강화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이완용을 앞세워 8월22일 한일합방조약 을 체결했다.
1910년 8월29일, 이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합병 당했다. 이날 경복궁 근정전에는 일장기가 게양되었다. 순종 황제가 퇴위 당한 직후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일월도(日月圖) 대신 봉황도(鳳凰圖)가 내걸렸다. 그해 10월에 공포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해 한성부(漢城府)는 경기도 소속의 경성부(京城府)로 격하되었다. 1914년에는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상징하던 원구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는 조선 호텔이 신축되었다. 일제는 합병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의 총본산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남산의 통감부 건물이 한동안 그대로 사용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는 남대문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도로를 개수한 데 이어 1911년에 황금정(黃金町, 지금의 을지로, 1912년에는 태평로(太平通, 지금의 태평로)를 확장했다. 황금정은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南村)의 주 도로가 되었으며, 총독부에서 서울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남북축 도로와 함께 경성(京城) 도로망의 기본골격이 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한강 인도교가 준공되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방식은 기본적으로 무단 통치였다. 강점 초기 일제는 헌병을 경찰로 둔갑시켜 1919년까지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지금의 중구 필동 1가 남산골 한옥촌 마을에 있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1919년 3·1 운동을 진압한 주역이었다.
■ 삼성 제일병원은 일본군 홍등가
당시 일본은 공창(公娼) 제도를 인정하는 나라로서 군인들을 위한 性的(성적) 하수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의 동국대 후문에서 삼성제일병원에 이르는 곳에 「신마치(新町)」라고 부르는 홍등가가 들어섰다. 지금 청와대 자리로 옮기기 전의 조선총독 관저는 남산 중턱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시정개발연구원(전 남산안기부 청사) 자리다. 이곳에 오르면 종묘와 창덕궁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인다.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는 지금의 중앙대학병원과 이웃한 중구 필동 2가 80의 20번지 한국의 집 자리에 있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충무로, 명동에 이르는 지역이 완전한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했다. 황금정(지금의 을지로)도 본정통(지금의 충무로)과 함께 일본인 거주지의 중심가로 성장한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지속되면서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제력이 1920년대에 이르러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일제당국의 재정지출이 일본인 거류지에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일제 때 남산 기슭은 일본인 거주지였다.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곳은 남대문로에서 동쪽으로 들어간 진고개(泥峴)에서 필동에 이르는 일대였다. 진고개는 원래 좁은 진흙탕 길이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도로가 확장되고 상가가 번성했다 . 남대문로에서 들어가는 진고개 입구에 일본 영사관이 있었고, 배후의 남산 중턱에는 일본공사관이 있었다. 1906년 2월1일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국통감부가 설치되자 공사관이 폐지되어 통감 관저로 되었다. 현재의 명동(일제시 대에는 明治町) 일대는 경성부(京城府) 청사, 조선은행,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경성 지점을 비롯한 각종 기관들이 집중되어 있어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은 한국은행이 조선은행, 신세계 백화점이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 제일 은행 제일지점이 조선저축은행 본점, 미도파 백화점이 조지아(丁子屋) 백화점의 건물을 각각 차지하고 있다.
日帝는 조선왕조가 개국 초에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작위를 부여한 남산을 그들의 국교인 신토(神道)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1925년, 이들은 조선왕조 시절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던 국사당(國師堂)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했다. 조선신궁을 그들이 국조(國祖)로 받드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메이지(明治)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일제의 최대급 관폐신사(官幣神社)였다. 남대문의 동쪽 끝에서부터 조선신궁에 이르는 참배로의 조 성에는 남대문-남산 꼭대기 구간의 성벽을 부수어 건재(建材))로 사용했다.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남산식물원이 들어 서있고 그 아래쪽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10월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다 새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근정전은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무를 보던 조선 왕조의 심장부였다. 근정전을 가로막아 버린 지상 4층의 이 화강암 총독부 건물은 일본을 상징하도록 日자형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 패망 후 美군정청,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었는데, 1995년 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철거되었다. 1926년 11월에는 지금 서울시청 건물로 쓰이고 있는 경성부(京城府) 청사도 완공되었다. 합병 당시 경성부 청사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과 제일은행 제일지점 자리에 있던 통 감부 시절의 이사청(理事廳, 일본영사관)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직원수와 업무량이 늘어나자 넓은 청사가 필요하게 되어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신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남북축을 조선총독부-경성부청-서울역-용산으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치했다. 경복궁이 위치한 북악에서 남산의 국사당으로 이어지던 상징축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도록 탈바꿈시켰다.
■ 신라호텔 자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명복 빌던 곳
1932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남산 기슭에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박문사의 산문(山門)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례문(興禮門)을 뜯어 옮긴 것이었다. 현재 신라호텔이 들어선 박문사에서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영령을 모시는 장충단(?忠壇)을 굽어볼 수 있었다. 1926년 이전 경성의 모습이 총독부 권력의 주도로 형성된 것이라면, 이후의 경성의 모습은 식민지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나카이 상점, 히라다상점, 미쓰코시 백화점 등 진고개 일대에 자리 잡은 일본인 상점들이 「불야성을 이룬 별천지」로 비쳐 아직 근대 시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들의 전통적 상가 종로를 압도했다.
그러나 종로도 변하기 시작했다. 1928년 무렵에는 동아부인상회나 유창상회 등 신축 상점이 잇따라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0년대 종로 상권의 중심이었던 화신백화점은 박흥식이 종로 네거리에 있던 신태화의 화신상회를 1931년에 인수하여 1937년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신축한 것이다. 화신 백화점은 시설면에서 당시로는 첨단을 걸어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다. 화신 백화점은 1990년대에 헐리고 지금은 초현대적인 종로타워(국세청 청사)가 들어서 있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조선은 전시 체제로 들어갔다. 경성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전후의 시기였다. 변화의 중심은 군수산업 공장지대인 영등포와 물류의 중심인 용산이었다.
1930년 이후 용산의 철도부지 50만 평 위에는 철도국, 철도병원, 철도국 관사, 철도공장 등이 잇따라 들어섰고, 1940년대에는 주둔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병영화했다. 일찍이 시흥군의 군청 소재지였던 영등포는 일제 강점 이후 방적공장, 기계공장, 장유공장, 맥주공장 등 근대적 공장이 집중되었다.
1944년 11월 미군기의 동경 폭격의 충격으로 조선총독부는 소개(疏開) 정책을 시행했다. 소개지구 가운데 종로-필동 사이(폭 50m, 길이 1200m)와 경운동-남산 사이에 이르는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 조성 사업이 1945년 6월 말에 완료되 었다. 이 공터에 광복 직후의 행정 공백기 때 판잣집이 들어차는 바람에 두고두고 서울의 골칫거리가 된다. 8·15 광복을 꼭 3주 앞둔 1945년 7월24일, 부민관(府民館, 중구 태평로 1가 61번지 코리아나호텔 옆)에서 개최된 친일강연회 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박춘금 등 친일파가 일제의 「대동아전쟁」 수행에 조선인의 협력을 촉 구하는 연설을 하던 연단을 향해 조문기·유만수·강윤국 등 3인의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일제 때 종합공연장이었던 부민관은 광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쓰 이다가 이제는 서울시의회 청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