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벧후1:5-11)
2024.8.2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강한 사람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화가 날 때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은 그 절제를 반복하면서 지속하는 사람이다. 살을 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내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성공한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인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품(=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힘써할 덕목들을 열거하면서, 인내를 강조했다(벧후1:5-7).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강조한 것들은 동시(同時)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건물을 한 층을 지으면, 그 위에 2층, 3층을 순서적으로 올리는 것처럼 믿음 위에 덕을 완벽하게 이루면,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순차적으로 더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같은 것들을 동시에 추구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이것들 중에 오늘 이 시간에 나누고 기도하려고 하는 것은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절제하는 강한 사람을 넘어, 더 강한 인내의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강조하는 인내란 무엇일까? 성도들이 더욱 힘써야할 인내는 일반적인 인내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인내(휘포모네)”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알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쓰인 인내(휘포모네)는 단순히 용을 쓰면서 견디는 해병대식의 깡다구가 아니고, “말씀에 대한 소망 때문에 견뎌내는 신앙의 힘”을 뜻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내의 개념이며, 일반적인 인내와의 차이점이다.
그러면 왜 사도 베드로는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죽어가는 성도들에게(또한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이처럼 지속적인 인내를 강조할까?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인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벧후1:10-11).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계속해서 인내해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믿음을) 실족지 않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13절 말씀에 보면, 사도 베드로 보다 훨씬 더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한 마디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주님의 이 한 마디에서 거친 세상 속에서 ‘내가 왜 모든 것에 대해 인내해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눈이 밝아지고, 박하사탕을 한 입 가득 깨물었을 때 그 화~한 맛이 온 입안에 가득 퍼지는 것 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에 퍼지기를 바란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라. 주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꾼들에게는 고난이나 갈등이나 이단의 미혹 같은 어려움들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온갖 박해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But)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들은 로마황제의 박해 때보다 더 교묘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최소한 남한 땅에서) 로마제국 시대는 주로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박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핍박과 영적싸움이 더 많다는 것이다(두 주인, 맘모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동성애와 극단적인 이단들의 창궐 등). 그래서 로마제국시대는 순교가 요구되었지만, 지금 시대는 순교보다 순교자적인 삶이 더 요구된다. 언뜻 보면 순교가 더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은 순교자적인 삶이 더 어렵다. 왜냐하면 순교는 한 순간이지만, 순교자적인 삶은 매순간 그리고 평생 동안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고난이 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왜 나에게?”(Why me)", “왜 나에게만(Why only me)?"라고 말하면서 괴로워한다. "왜 너에게?(Why to you?)"라는 말에는 더 힘들어 한다. 최대호 시인의 글 중에 자신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나는 왜 나를 응원하는 큰 소리에는 힘을 내지 못했으면서, 나를 비난하는 작은 소리에는 주저앉고 아파했을까”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려움이 있지만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움은 누구에게 올 수 있다. 누구에게 올 수 있는 고난이 단지 ”나에게“도 온 것일 뿐이다. 그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때문에 어려움들이 나에게 왔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진짜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끊임없이 마귀 사탄은 우리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주저앉게 만들려고 갖은 간계를 부린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고, 성령님이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우리를 응원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부모, 형제자매들, 성도들, 목회자 등)이 나를 응원하고, 나를 사랑하고 아끼며,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다. 모두가 다 내 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쓰레기 같은 말들이나 상황에 집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고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오히려 마귀 사탄을 향해서(심지어 자신을 향해서) 담대하게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So what)"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래도 나는 십자가의 길을 간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해야 한다. 때로 포기하고 싶은 욕구까지도 절제하면서,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고, 계속해서 사명감당하고, 계속해서 찬송해야 한다. 계속해서 예배하고, 계속해서 묵상하고, 계속해서 충성하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던 대로 해야 한다. 이것이 절제에 인내를 더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에 파리 올림픽에서 비록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의 기쁨을 준 선수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 신유빈, 전지희, 이은혜 선수로 구성된 여자탁구팀이 있다. 이들이 여자단체전 동메달을 따냈다. 삐약이 신유빈과 전지희, 이은혜 선수의 경기 모습이나 일거수일투족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이들 중에 전지희 선수와 이은혜 선수는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들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 이은혜 선수는 중국 내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양영자 선교사(서울올림픽 탁구여자복식 금메달리스트, 전 국가대표팀 감독)가 2011년에 한국으로 귀화시켰다. 이은혜 선수는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영자 선교사에 의하면, 이은혜 선수가 한국에 와서 처음 7년 동안 공황장애를 앓는 등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면서 말씀으로 양육했고, 본인도 뼈를 깎는 훈련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면, 양영자 선교사가 이은혜 선수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처럼 헌신적인 사랑과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이은혜 선수는 양영자 선교사에 대해 “제겐 엄마 같은 분”이며,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큰 힘이 되어 주셨는데, 메달로 보답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한 마디가 우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렇게 행복한 날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 이은혜 선수의 인터뷰와 양영자 선교사의 간증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LyoPilCP3o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성경에서의 인내는 단순한 깡다구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소망 때문에 견뎌내는 신앙의 힘을 말한다. 이은혜 선수와 양영자 선교사가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그리고 그 위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모든 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견뎌내고 인내하자.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마땅한 모습이다. 모든 것을 이기신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