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말씀의 초대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행위는 주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다윗은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살기보다 자신의 힘을 믿고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고정 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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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언제나처럼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은 주로 유다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여 주셨지만 그분에 대한 편견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 배경을 들어 예수님을 배척할 구실을 찾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불교 선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마조 선사입니다. 도를 터득한 그가 잠시 고향에 들른 일이 있었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 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고향의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고 사람이 달라졌는데도 어린 시절의 꼬마로만 여긴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반은 장난, 반은 감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답니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선의 황금 시대』 중에서) 익숙함은 때로는 너무 쉽게 해석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아주 익숙한 사물이나 사람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욱이 편견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사물의 진실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웃과 따스한 정을 나누고, 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가난한 이들과 친교를 이루고, 외롭게 사는 이들과 대화하는 것은 우리의 평범한 하루하루 생활에서는 소중한 체험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신앙의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바로 구원의 현실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인은 비록 익숙하고 작은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의 구원을 느끼고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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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무시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섭섭함이 배인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무시당했던 체험이 많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했고, 이웃이 그렇게 했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별 뜻 없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된 기억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깎아내립니다. 편견을 갖고 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의 습관일 뿐입니다. 좋은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습관입니다.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기적까지도 오해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허물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허물이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신앙생활이 실망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지내면 쉽게 허물이 보입니다. 뛰어난 사람도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예민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상처 주며 사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사랑하면 가끔은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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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고정 관념’ 탓입니다. 그분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기적의 소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법사나 점쟁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들의 편견’을 놀라워하십니다. 누구나 과거에 ‘매여 살면’ 그렇게 됩니다. 지난 일을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는 삶입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은 퇴보합니다. 자연의 평범한 ‘진리’입니다. 신혼 초에는 남자가 말이 많고, 여자는 듣기만 합니다. 이삼 년이 지나면, 여자가 말이 많고, 남자는 듣는 쪽이 됩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가끔씩 싸우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떠드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은 영영 싹트지 않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을 만났을 것입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행복의 주님을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도입부 삼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비교적 예수님 공생활의 초기인데, 다른 곳에서 사도직을 좀 펼치시다 고향 땅을 찾아가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표정이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더불어 제자들과의 대화 내용이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시는 장면을 좀더 유심히 살핍니다. 먼저 회당의 내외적 분위기를 살피고 모여 있는 사람들 모습도 잘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는 어떤지 보세요.
특별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그저 예수님 모습과 사람들 모습을 대비시켜 가며 보고 있노라면 뭔가 전달되어 올 것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모습도 삐져나오고 자신의 모습도 비춰 나올지 모릅니다.
이런 모든 관상을 할 때 선입견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았으면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 자기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그저 들은 이야기나 읽은 이야기에 의해 해석된 것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눈을 가지고 잘 보기만 하면 분명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얻고 그를 통해 성장이 이뤄질 터이기 때문입니다.
유심히 살피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도가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았을 땐 유심히 살피려고 해도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눈썰미도 점점 날카로워져 세밀한 부분까지 짚게 됩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몽사몽으로 지낸 것 같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너무나 피곤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지경이 되어 있었지요. 왜냐하면 전날 잠을 한 숨도 못 잤거든요. 아마 저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은 제가 잠을 못 잤다는 말에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머리만 닿아도 잠들어 버리는 저의 좋은 습관(?)을 사람들은 너무나도 부러워 하셨지요. 저 역시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아서 계속해서 양의 숫자를 세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잘 자니까요.
그런데 제가 바로 이 모습이 된 것입니다. 잠을 아무리 자려고 해도 오지 않고, 오히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기도도 하다가 밤을 하얗게 새우고 말았지요.
이렇게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은 신경 쓸 어떤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잠들기 직전 어떤 한 사람이 생각났고,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못 잔 것이지요. 솔직히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괜히 화도 나고 그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계속 떠올려지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은 나부터 힘들어지게 만듭니다. 정말로 그렇지요. 누군가가 미워질 때, 내 마음이 정말로 편해질까요?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나의 마음은 완전히 지옥입니다. 저 역시 어떤 한 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잠도 못자고 결국 내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좋은 말씀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일단 부정적인 생각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갑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결국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을 간직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 없는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한 곳에서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또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믿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나 역시 이 세상을 기쁨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운명은 기회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면 되는 것이다.(윌리엄 J. 브라이언)
<한 송이 연꽃처럼>
-양승국신부-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봉헌한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웃어른께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선물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선물을 드릴 때는 아무것이나 드리지 않습니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니 드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의미 있는 것, 가장 흠 없는 것을 골라 드립니다. 선물한다는 것은 그냥 물건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지요. 내 정성을 담아, 내 마음을 담아, 내 영혼을 담아 드리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제게 과분한 정도로 많은 선물들을 주셨는데, 제게 그분께 돌려드는 것이 너무나 보잘 것 없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당신 전체를 주셨는데, 제가 드리는 것은 너무나 부분적인 것이어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담한 호수 수면 위로 탐스런 연꽃들이 몇 송이 활짝 피어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활짝 피어난 꽃봉오리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경탄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어여쁜 연꽃의 자태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수면 밑에 잠겨 있는 연뿌리를 생각합니다. 연뿌리 삶아먹으면 어디에 좋다던데, 저 정도면 시장에 내다팔 수 있을 텐데... 보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서 우리네 삶은 천지차이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말씀이 어떻게나 청산유수인지, 내용은 또 얼마나 알찬지, 그 가르침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지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 끝에 이제 예수님의 삶은 어여쁜 한 송이 연꽃처럼 활짝 만개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는 지혜가 번뜩였습니다. 그의 언변은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 탁월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열어주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에 어떤 사람들은 함께 기뻐해줬습니다. 진심어린 축하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고향 마을 사람들, 활짝 핀 연꽃 같은 현재 예수님의 모습은 보지 않습니다. 양부 요셉을 도와 하루 온종일 묵묵히 일하던 나자렛 청년 예수님만 기억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놀라운 변신에 축하는커녕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었고 속상해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더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핵심 교리, 꽤나 복잡해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취를 발견하는 일, 그분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내 삶의 방향키로 삼는 일,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런 간단한 노력을 통해 우리 모두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셨나요?
-김효준신부-
화들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놀라움은 분노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놀라움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이 불쑥 나타났을 때는 놀라움과 함께 기쁨이 찾아오고, 노모께서 응급실에 계시다는 연락은 놀라움과 함께 슬픔을 가져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보고 놀랍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과 지혜가 누군가에게는 기쁨이요 희망이 되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질투요 분노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비롯된 놀라움은 마른 땅에 싹이 돋게 하는 놀라움이며, 가시밭을 푸른 초원으로 바꾸는 놀라움입니다. 놀라움이 나에게 질투와 분노가 아닌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그 마음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겸손한 지혜를 주소서.
-김찬선신부-
언젠가 공적인 프란치스칸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는데,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마음의 가난이라고 하면서 따라서 프란치스칸, 특히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은 이 마음의 가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가난만 사신 분이 아니고 분명 물질적인 가난도 철저히 사신 분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이런 것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가난을 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맞추어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곤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것도 인정할 텐데 교만하기에 자기를 초월하는 것은 도무지 인정하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그리 천상적인 지혜를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정하려들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이 나왔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뻔한데도 오늘 복음의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인간 예수가 어디서 그 지혜와 능력이 생겼는지 의아해하며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놀라워합니다. 고향 사람들은 놀라운 지혜를 말하는 주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주님은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가까울수록 그러합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희 형제들이 강론하기 제일 싫어하는 대상은 같이 사는 형제들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훤히 알고 있는 형제들 앞에서 영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스스로 찔려서 그러하기도 하지만 형제들도 숫제 모르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는 것보다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이기에 저는 예수님처럼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잘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잘 알수록 교만해지고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모르고 있는 너를 알라는 말씀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모르는지 알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월과 신비를 인정하는 겸손한 지혜를 주님, 주소서.
자기합리화
-전삼용신부-
법률학도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사연구에 몰두하다가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세상의 악한 자들을 넘어서고 이용하여 세상의 선익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나라 홍길동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은 돈들을 다시 부자들로부터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던 영웅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도 결국 욕심 많은 늙은이가 고리대금으로 모은 돈이 머리 좋고 가난한 학도의 학비로 쓰일 수 있다면 인류를 위해서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두 번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한 명의 악인이 사라지는 반면 세상을 위해 일할 또 한 명의 일꾼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자는 사라져줘야 한다는 최종 결론에 이릅니다.
이윽고 청년은 면밀하게 살인 계획을 세우고 늙은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여동생을 죽이고 돈을 손에 넣게 됩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이러한 철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로 ‘나는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했어!’라고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선 계속 ‘살인자! 살인자! ... ’라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기 머리는 합리화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은 자기합리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결국 그는 양심의 소리에 무릎을 꿇고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내용입니다.
이성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정신적 작용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에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이나 묵상을 통해서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하는데 이것도 이성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을 떠난 이성의 작용은 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세상의 이단이나 이단적 신학들이 못 배운 사람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지만 하느님의 빛 안에서가 아닌 자기 나름대로 이성을 사용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 낮에도 촛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 영문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양철학의 시초였던 그리스에서도 이성적 사고만 하였지 빛 안에서 사고하지 않던 당시대를 풍자한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란 위대한 사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도 결국 영혼이 있음을 깨닫고 악법조차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독극물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도 이 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참다운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참다운 세계가 이미 세상에 내려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며 신은 한 분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다신교의 그리스 사상에선 혁신적은 깨달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의 빛 안에서 사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는 분위기에서 결국 신은 유일하게 한 분이 계실 수 있고 그래서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십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저런 지혜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 그러나 그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왜 남의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하는가? ... 그가 마귀 들리거나 미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찾아다닌 일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집과 동네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그 곳에선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쓰되 마음의 빛에 비추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머리로 사고를 하였기에 그들이 가졌던 선입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그들도 믿지 못하는 핑계를 오랫동안 한 동네에서 커오는 것을 보아왔다는 것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애를 배어도 할 말이 있다고 하듯이, 사실 모든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많은 부녀자들을 살해한 사람도 아내가 죽고 나서 여자들이 싫었다는 둥, 종교도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했다는 둥, 많은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나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설득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빈 라덴도 말만 들어보면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택시운전사가 주차장에서 갑자기 앞도 안 보고 출발하여 저와 함께 가던 한 신부님을 거의 칠 뻔 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그 택시를 피하다 넘어졌고 팔꿈치에서 피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택시운전사는 자리에 앉아서 “왜 앞으로 지나가?”라고 도리어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긴 길도 아닌데 앞을 안 본 운전자가 잘못 아닌가요?”라고 단순하게 설명했습니다. 정말 그러다가 사람을 치어도 남 탓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와도 결국 뱀 탓을 하고 아담도 하와 탓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 차원에서일 뿐입니다. 마음은 올바로 판단을 해 주어 그들이 하느님을 두렵도록 죄의식을 느끼도록 해 줍니다.
결코 자기 합리화를 통해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남의 탓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의 진리 안에서 사고하도록 합시다. 절대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양승국신부-
<변신>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 사가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마을을 방문하면서 겪은 일화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예수님의 모습에 고향마을 사람들은 우선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을 거느린 예수님의 모습, 회당에서 가르치는 모습, 병자들을 치유시키고 기적을 행하는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향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 예수님의 금의환향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혹에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고향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하루 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목공소에서 못질과 대패질만 하던 바로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으로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이건 뭔가 속임수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착화된 시각으로 인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메시아를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한 고향마을 사람들의 아둔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이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고향 마을 사람들, 30여년이란 긴 세월을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동고동락했던 내 고향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리라."
그러나 도착과 동시에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철저한 냉대와 거절, 비아냥거림, 불신 등이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계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구원의 주님이신지 알게 하는 혜안을 주시길 빕니다. 누가 우리를 악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사탄의 두목인지를 식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인간적인 눈을 감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괴롭다, 괴롭다" 하며 보낸 지난 세월은 지옥 같은 고통의 세월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뒤에서 지켜주셨던 은총의 세월이었음을 인정케 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루하루 모든 순간들은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흘려보내야할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금 쪽 같이 소중한 구원의 시간임을 알게 하는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가장 가까이 지내기에 늘 티격태격하는 이웃들은 나를 성장케 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감사해야할 존재이자 또 다른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어떤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본당 사목회의에서 글쎄 사목회장님께서 본당신부님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고 해요. 사목회장님은 메모지를 하나 꺼내서 신부님의 열 가지 문제점이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읽었었다고 합니다. 1번으로 뭐 잘못했고, 2번으로 뭐 잘못했다는 식으로 지적했던 것이지요.
사목회의는 찬물을 끼얹은 것같이 아주 냉랭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열 번째까지 다 읽은 뒤, “이렇게 잘못한 것은 빨리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하면서 신부님을 바라보았지요. 그런데 그 열 가지 내용을 다 들으신 신부님께서는 일어서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읽은 그 내용은 틀렸습니다.”
일순간 긴장에 사로잡히게 되었지요. 틀렸다는 말이 뭐에요?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는 것으로 서로 싸우자는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이제 싸움이 시작하겠구나.’하면서 긴장했지요. 하지만 신부님의 다음 말이 모든 긴장을 일시에 풀어버렸습니다.
“저의 문제는 회장님이 기록한 그 열 가지만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아직 저를 잘 모르셔서 그렇지 수백 가지 수천 가지도 더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서 싸움은 끝나버렸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부인하다보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더욱 더 커지면서 싸움이 끝이 없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의 스스로를 인정하는 말로써 부정적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시기, 질투, 미움이 있지요. 개인, 가정, 교회와 사회 등등에 시기와 질투, 미움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불행으로 나아가게 만들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면 나 외에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시지요.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차갑기만 하면, 예수님 행동 하나하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만 볼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히려 고향에 큰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행했던 엄청난 기적들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들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시기, 질투, 미움이라는 쓸데없는 부정적 감정에 내 몸을 맡기는 고향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제1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는 일으킬 수 있으며 예측도 가능하다.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불필요하고 단조로운 삶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게일 쉬)
-정연동신부-
+ 찬미예수님
‘구름 속에 비를 보지 아니하고 구름 위의 태양을 볼 줄 아는’ 신앙인이면 좋겠습니다.
산에 가면, 예쁘고 잘 빠진 나무들에 감탄을 하는 우리들이지만,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 효림 스님의 ‘힘든 세상, 도나 닦지’ 중에서 -
잘 생긴 나무들이 먼저 잘려 나가고, 못 생긴 나무가 숲을 지켜 나간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웃을 향한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빛 안에서 사고하라
-전삼용신부-
법률학도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사연구에 몰두하다가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진정한 위인이란 세상의 악한 자들을 넘어서고 이용하여 세상의 선익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나라 홍길동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은 돈들을 다시 부자들로부터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던 의인이었고 어쩌면 가난한 이들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도 결국 욕심 많은 늙은이가 고리대금으로 모은 돈이 머리 좋고 가난한 학도의 학비로 쓰일 수 있다면 인류를 위해서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두 번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한 명의 악인이 사라지는 반면 세상을 위해 일할 또 한 명의 일꾼이 탄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서는 악인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선을 위해서는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세 번째 결론이 이릅니다.
이윽고 청년은 면밀하게 살인 계획을 세우고 늙은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여동생을 죽이고 돈을 손에 넣게 됩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이러한 철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는 양심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로 ‘나는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했어!’라고 되뇌었지만 마음속에선 계속 ‘살인자! 살인자! ... ’라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양심의 소리에 무릎을 꿇고 자수를 하게 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됩니다.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내용입니다.
이성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정신적 작용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기에 믿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이나 묵상을 통해서 믿음을 더 증가시켜야 하는데 이것도 이성의 작용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을 떠난 이성의 작용은 오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더라도 성령의 빛 안에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결국 공부를 해서 믿음을 잃는 일도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 낮에도 촛불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그 영문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내 눈에는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양철학의 시초였던 그리스에서도 이성적 사고만 하였지 빛 안에서 사고하지 않던 당시대를 풍자한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란 위대한 사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사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도 결국 영혼이 있음을 깨닫고 악법조차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독극물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도 이 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참다운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참다운 세계가 이미 세상에 내려와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며 신은 한 분이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다신교의 그리스 사상에선 혁신적은 깨달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의 빛 안에서 사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는 분위기에서 결국 신은 유일하게 한 분이 계실 수 있고 그래서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훌륭한 설교를 하십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저런 지혜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 그러나 그는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왜 남의 동네에서만 기적을 행하는가? ... 그가 마귀 들리거나 미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찾아다닌 일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어떤 예언자도 자신의 집과 동네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그 곳에선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쓰되 마음의 빛에 비추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적인 머리로 사고를 하였기에 그들이 가졌던 선입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많은 부녀자들을 살해한 사람도 아내가 죽고 나서 여자들이 싫었다는 둥, 종교도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했다는 둥, 많은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빈 라덴도 말만 들어보면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죄를 지을 때, 성당을 안 나오게 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혹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이유 등을 머리로만 정당화시키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봅시다.
기적을 낳는 신뢰의 눈길
- 이은주 수녀-
오늘 말씀은 죽었던 사람을 살린 후 바로 자리를 떠나시는 예수님, 그분의 겸손의 길이 얼마나 치열한 내적 여정을 거치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런 예수님이시지만 당신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군중의 대조적인 모습, 그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중요한 기둥이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간혹 나의 약함과 한계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이 화끈거려 준비한 것을 충분히 말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렉시오 디비나 강의를 부탁받은 곳에 가서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시작기도를 하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바로 나의 “어머니”, 그리고 함께 활동하시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아닌가? 물론 그분들은 나의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어떻게 강의를 풀어나가야 할지 암담해 한참을 서 있다가 웃어버렸다. “이곳에 저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잠시 당황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강의를 시작했지만 입은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격려와 지지로 바라보는 신뢰의 눈길이다. 어머니의 온유한 웃음을 담은 한결같은 표정과 너를 믿는다는 격려의 몸짓은 나를 차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 하나로 세 시간의 강의를 활기차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정연동신부-
+ 찬미예수님
‘구름 속에 비를 보지 아니하고 구름 위의 태양을 볼 줄 아는’ 신앙인이면 좋겠습니다.
산에 가면, 예쁘고 잘 빠진 나무들에 감탄을 하는 우리들이지만,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 효림 스님의 ‘힘든 세상, 도나 닦지’ 중에서 -
잘 생긴 나무들이 먼저 잘려 나가고, 못 생긴 나무가 숲을 지켜 나간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웃을 향한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의사가 한 명 있습니다. 사실 이 친구가 의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 않았거든요. 또한 이 친구가 잘하던 과목은 국어와 영어였기 때문에, 언어 쪽으로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외국어 대학교를 나왔고, 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다녀온 뒤,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의대 공부를…….
저와 다른 친구들은 말렸지요.
“네 나이가 몇 인데 이제야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느냐? 네 실력으로 의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이제는 네가 모셔야지, 언제까지 부모님 도움을 받을 꺼야?”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년 만에 공부를 해서 다시 의대에 들어갔고, 드디어 의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공부를 계속하는 것은 원로한 부모를 힘들게 하는 큰 불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의사가 된 뒤에 보니, 이 친구의 힘든 선택이 오히려 올바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저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의 만류를 듣고는 자신의 꿈을 접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튼 이 친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함부로 접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내가 잘 아는 양, 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함으로 인해 그 사람 미래에 영향을 끼쳐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자기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 가정환경, 가족상황 등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자기들인데, 따라서 이제까지 봐온 예수님의 모습을 정리하여 볼 때 저런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들은 현재의 모습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인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예수님의 특별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곳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기적을 행할 수가 없었지요.
과거의 모습을 가지고 현재를 판단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았으면 합니다. 은혜 받을 사람의 축복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사람의 앞길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하시려는 주님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가 안다고 함부로 판단하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욱 더 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
-이중섭 신부-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성경적 근거는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단어(마르 6,3; 루카 8,19)입니다. 학자들이 그동안 이 구절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일부 개신교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님의 친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성모님의 평생 동정에 대한 의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4세기경부터 등장했습니다. 4세기의 유명한 성경학자 성 예로니모는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들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성모님의 동정성을 옹호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상당히 넓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같은 동족을 뜻하기도 하고 (마태 5,22-24), 이복형제를 뜻하거나(마르 6,17-18), 더 넓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영적인 가족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마르 3,34-35).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교회 공동체에 편지를 쓸 적마다 그들을 ‘형제 여러분’이라 불렀습니다 (로마 1,13; 1코린 1,10 등). 그것은 그들이 친형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믿음 안에서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날로 새로워라 -최연석 목사-
◆“우리와 왕년에 한솥밥을 먹던 친구 아닌가. 맞아, 아무개 집 큰아들이야. 똑똑하네그려. 저 연설하는 것 보게. 이 사람아, 똑똑하면 뭘 해. 우리와 근본이 같은걸.”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 인심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무슨 학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풍토를 보더라도 2천 년 전 주님의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싫은 것 가운데 하나가 새 학기가 되어 가정환경을 조사할 때였다. 부모의 직업을 묻는데, 당시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다. 당시 목수는 ‘노가다’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어떻게 그 어려운 말을 생각했는지 나는 ‘노동’이라고 대답했다. ‘노동’이 ‘노가다’보다 더 그럴듯한 말이라는 영악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내가 영악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풍토에서 직업의 귀천이 심했던 것이다. 우리집에는 아버지, 작은아버지 세 분, 작은 형 등 합해서 목수가 다섯이나 되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이 한마디에 당시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그리고 조금도 그 내용은 변하지 않고 2천 년이나 계속된 왜곡된 가치관이 그대로 담겨 있다.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이 거듭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니코데모도 근심하며 물러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쓰는 이 말을 덧붙인다. “사람은 죽어야 지옥을 안다.” 우리 초등학교 교훈이 ‘날로 새로워라’였다. 나는 그 교훈의 의미를 요즘에야 조금 알아들을 듯하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교훈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눈의 비늘을 떼지 않으면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지금도 목수라고, 전라도나 경상도라고, 상고를 나왔다고, 교양이 없다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
껍데기는 가라
-강영구신부-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6,2-3)
스승 예수님,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껍데기를 보고 누구를 평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학식, 출신가문과 성분, 학벌 따위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그것들은 참나(眞我)가 아니라 헛나(妄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껍데기가 화려한 사람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말을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처럼 별볼일없는 부모 밑에서 별볼일없는 직업을 가지고, 별볼일없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가진 것 없는 랍비의 말은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빈약한 껍데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존재냐 소유냐’ 라는 책을 통해서 사람의 가치는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돈, 권력, 명예, 학식 따위는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나’를 감싸기 시작하면 하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두터운 껍데기는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하늘의 뜻(天命)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소유에 집착하게 되면 하늘을 외면하게 됩니다. 끝내 껍데기에 둘러싸인 헛나(妄我)가 참나(眞我)를 질식시키고 나는 파멸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에게서 하늘의 능력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헛나(妄我)를 벗고 참나(眞我)에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뜻(天命)에 충실하시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셨습니다. 껍데기를 모두 버리고 맨 몸으로 하늘과 대면하시는 당신은 하늘로 충만한 분이되셨습니다. 당신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와 재물 따위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떠돌이 랍비의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예수’의 모습으로 고향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껍데기에 매달리는 나자렛 사람들은 당신을 배척했습니다. 굴러든 복을 발로 차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참나(眞我)에 충실하여 하늘과 대면하게 하소서.(一明)
고향사람들도 예수를 불신하다.
-박상대신부-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히고 난 뒤부터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하셨다.(1,14) 복음선포는 제자들을 부르심과 권위 있는 말씀과 기이한 행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선교무대는 주로 갈릴래아 주변지방들이었고, 활동기간은 약 3년으로 추정되며, 선교효과는 복음의 수용과 믿음보다 불신(不信)과 거부(拒否)가 더 많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고(3,6),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미쳤거나 정신나간 사람으로 여겼으며(3,21.31), 백성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4,12), 그분을 배척하였으며(5,17), 선발된 12제자(3,13-19)들까지도 예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고(4,40),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4,41).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철저하게 곡해되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자라났던 고향을 방문하시지만 거기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으신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3년이라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닐 터인데, 왜 예수님의 열정적인 노력이 모두 공염불(空念佛)이 되고 말았는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문제는 믿음이다. 복음사가의 의도는 복음과 믿음의 불가분의 관계를 피력하려는데 있다. 여기서 믿음은 복음의 주체인 화자(話者)에 대한 청자(聽者)의 모든 인간적인 면을 배제한 후 결정짓는 긍정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런 관계를 오늘 복음이 보여주고 있다.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신 예수께서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을 제기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가 가진 지혜의 정체에 대하여, 그 지혜의 출처에 대하여 묻고, 그들이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직업, 부모, 친척, 인척들에 대하여 논하면서 포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디에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4절)라는 속담으로 대응하셨다. 결과는 단지 몇 명의 병자들만 고쳐주시고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5절) 이유는 그들에게 이상하리만큼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6절)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크고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믿음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기적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과 기적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은 앞서간 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 같은 아주 작은 믿음 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싹튼다고 가르치셨다.(4,31-32) 12년간 하혈병으로 초죽음이 되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나을 것이라는 한 가닥 믿음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실제 치유의 은혜로 응답하셨다.(5,25-34) 또한 병든 딸을 예수께서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에 예수께서는 이미 죽은 그의 딸을 다시 살려 돌려주셨다.(5,22-24.35-43) 이렇게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치유와 기적이 있고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진다. 이는 곧 사랑이신 하느님의 인간 믿음에 대한 응답이다
고향으로 가셨는데(6, 1- 6)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놀랐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 루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선포하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라고 이사야서에 적혀 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놀라지 않았다. 루가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 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치 복음을 읽고 난 후 사람들이 "무슨 강론을 하실 것인가?" 하고 신부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과 같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면서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사 중에는 대부분 조용하고 엄숙하다. 웬만해서는 그런 분위기가 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하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는 것은 사람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으며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자신들도 모르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웅성거렸던 것이다. 왜 그처럼 놀랐을까? 지금까지는 회당장이 어느 성서의 한 부분을 읽고 그 말씀을 설명해 주는 강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성서 말씀을 해석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선언해 버리시니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며 처음 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해설이 아니라 선포된 내용이 오늘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회당장과 하혈하는 부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졌음을 보여 주셨고 회당장이 죽어 가는 어린 딸로, 그리고 하혈하는 부인은 하혈하는 병으로 묶여 있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그들을 해방시켜 내보냈으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써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보게 해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기에 사용한 "놀라다"라는 동사는 예수님의 부모가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던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루가 2, 48)고 했을 때와 같은 동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모들은 어린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무척 근심걱정을 하며 사흘 동안 헤매어 찾고 있다가 어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 학자들과 당당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놀랐던 놀라움과 같은 놀라움이다. 이와 똑같은 놀람이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놀란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변화 즉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서도 이런 놀라움이 일어나야 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회당장이나 하혈하는 여인처럼 가난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세로 복음을 대한다면 누구나 이런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놀라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읽은 복음 말씀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씌어졌고, 내 안에서 이루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이루워져야 할 말씀이다. 즉 묶여 있는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눈먼 나를 보게 해주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해주시고, 무거운 짐으로 억압받고 있는 나를 해방시켜주시고, 하혈하는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죽은 나를 살려주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읽을 때마다 놀래야 한다. 내가 먼저 놀라고 내 주위 사람들도 놀래야 한다. 내가 오늘 복음을 받아들인만큼 내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이루워 질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면서 많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6가지인데 이 중 셋은 긍정적인 것이고 셋은 부정적인 것이다.
첫 번째,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라는 질문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아서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냐? 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 22) 하고 떠든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능력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던진 질문이다. 사람들이 좀 더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우려 들었다면 이런 혼동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하혈하던 부인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경배드렸을 것이다.
두 번째,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지?"라는 질문은 가르침의 출처를 따지는 질문이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지혜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지혜의 출처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지혜를 그리스어로 '소피아'라고 한다. 지혜와 지식은 차원이 다르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어떤 사물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박사라고 한다. 즉 그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해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단순히 지성과 이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들고 지켜보며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10 참조)
지혜는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라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신앙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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