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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에게 스스로 팔린 아합과 이세벨의 충격적 결말
왕상16:31-33,21:8-10,25 왕하9:35-37,10:7-10
성경에는 죽기 직전 눈화장을 한 단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은 그 장면을 이상하게도 굳이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창가에서 한 남자를 내려다 봤습니다. 그리고 몇분 뒤 그녀의 시신은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니 그녀의 충격적 결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평범한 외국 공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엣바알은 시돈의 왕이었습니다(왕상16:31). 시돈은 지중해를 무대로 활발한 무역을 벌이며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린 도시였고 동시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국가 종교로 깊게 뿌리 내린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왕궁의 권력과 신전의 권위가 서로를 떠받치는 구조를 보며 정치권력과 종교가 긴밀하게 결합된 환경에서 성장한 만큼 이세벨은 종교를 개인의 믿음 뿐 아니라 국가통치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야합 왕에게 이 결혼은 해상무역 강국과의 동맹으로 경제와 군사력 두 방면에서 나라에 안정을 가져다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아합은 이 결혼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은 계산했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이 치르게 될 대가는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이세벨이 왕궁에 들어온 뒤 아합은 바알을 섬기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과 제단을 세웠고 이어 아세라 목상까지 만들었습니다(왕상16:31-33). 여기서 이전 세대의 죄와 비교해볼 때 앞서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면서도 그것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과 연결시켰던(왕상12:28-33) 왜곡된 방식이었지만 최소한 여호와 신앙의 겉모양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시대는 한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1. 아합처럼 스스로 팔려 악을 행한 왕이 이전에 없었다
이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알을 국가적으로 섬길 수 있는 신전과 제단을 사마리아 한복판에 세운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중심자체가 통째로 교체되기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이세벨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은 강제로 끌려간 포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제단을 세우고 목상을 만든 왕이었습니다(왕상16:31). 왕상21장 25절은 아합처럼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 이전에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이세벨의 종교적 야심과 아합의 자발적인 동조가 하나로 겹쳐지면서 파멸의 씨앗은 조용히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은 어떻게 한 왕실의 선택을 넘어 나라 전체의 예배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을까요? 이세벨의 진짜 목표는 왕비라는 그 지위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예배자체를 갈아치우는 일이었습니다.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을 만큼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습니다(왕상18:19). 동시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상18장 4,13절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살벌한 숙청 한복판에서 왕궁 청지기 오바댜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왕궁을 떠나지 않은 채 선지자 100명을 두 동굴에 나뉘어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했습니다(왕상18:4).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악한 체제 안에서도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이 광장에서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은 자리에서 생명을 지킴으로 믿음을 증명합니다. 이세벨은 선지자들을 제거하면 하나님의 말씀까지 사라질 것이라 믿었으나 하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 사람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때 등장한 선지자의 이름은 엘리야였습니다.
(1) 하나님은 엘리야를 준비하셨다
엘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바알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시대에 하나님은 이름 자체가 신앙고백인 한 사람을 아합 앞에 세우셨습니다. 수백 명의 거짓 선지자에 맞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던진 첫마디는 사실상 선전포고와 같았습니다. 왕상17장1절에서 그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자신의 말이 있기 전에는 몇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알은 비와 폭풍, 농사의 풍요를 관장한다고 믿던 신이었습니다. 즉 엘리야는 바알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그 영역을 정면으로 겨눈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곧바로 큰 무대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하셨습니다(왕상17장2-7). 나라 전체에 가뭄을 선포한 선지자 자신도 시냇물이 서서히 말라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공개적인 승리보다 먼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왕궁 밖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 그 그릿 시냇물마저 완전히 마르자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왕상17:9). 시돈은 다름 아닌 이세벨의 고향이자 바알 신앙의 본거지였습니다. 엘리야기 그곳에서 만난 과부의 형편은 왕궁보다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통에 조금 남은 밀가루와 병 바닥의 기름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나누어 먹은 뒤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고향 한복판에서 바알은 이 과부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녀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은 신기하게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왕궁의 창고가 아니라 시냇가와 동굴, 그리고 이름없는 과부의 부엌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먼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알의 땅에서 하나님이 한 과부의 집을 살리셨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는 누가 참된 하나님인지 공개적으로 드러날 차례였습니다.
(2)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엘리야가 그 집에서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가뭄은 어느 새 삼년 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말없이는 비나 이슬이 내릴 수 없다는 말이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마침내 아합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 졌는데 그 위기 앞에서 아합이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그는 오바댜를 불러 땅을 나누어 다니며 샘과 풀을 찾게 했습니다(왕상18:5-6). 목적은 말과 노새를 살리고 가뭄으로 가축을 모두 잃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의 고통과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도 그는 회개보다 눈앞의 손실을 막는 일에 더 마음을 쏟았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흔들릴 때 자신의 방향을 돌아보기 보다 당장의 손실을 줄일 방법부터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아합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아합은 그를 보자마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너냐고 다그쳤습니다(왕상18:17). 오랜 가뭄과 기근으로 나라 전체가 고통받았으니, 아합의 눈에는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 엘리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정반대로 답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 아버지 집이며 여호와의 명령을 저버리고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왕상18:18). 나라를 실제로 무너뜨린 것이 누구인지,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정확히 짚어 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던 왕에게 엘리야는 갈멜산으로 온 백성과 바알 선지자들을 모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대결은 누가 진짜 하나님인가를 가리는 자리로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갈멜산으로 백성과 선지자들이 모두 모이자 엘리야는 가장 먼저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18:21) 이 말은 그날 대결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문제는 하나님을 완전히 버렸다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필요할 때는 여호와를 찾고, 풍요가 필요할 때는 바알도 불들려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는 중간지대는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돈과 체면과 성공을 더 높은 기준으로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갈멜산의 질문은 누구를 믿느냐가 아니라 실제 삶의 최종 결정권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느냐를 향한 질문이었습니다. 왕실이 후원한 수백 명의 우상 선지자들 가운데, 실제로 제단 앞에 나선 것은 바알 선지자 450명이었고 그 반대편에는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왕상18:22).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이 기울도록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자기 몸에 칼과 창으로 상처를 내며 격렬하게 매달렸지만 하늘은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그들이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부르짖었으나 아무 소리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었다고 전합니다(왕상18:29). 이 장면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은 불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전에 무너져 있던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때 야곱의 아들 수를 따라 열두 개의 돌을 사용하여(왕상18:30-31) 무너진 제단을 열두 돌로 다시 쌓은 이 장면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원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제단을 다시 쌓은 엘리야는 그 위에 물을 세 번이나 부어 스스로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라고 짧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령을 높여 달라고 구하지 않았고, 백성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외침이 신을 움직이려는 몸부림이었다면, 엘리야의 기도는 이미 살아 계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드린 간구였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무는 물론 돌과 흙까지 태우고, 도랑에 고여 있던 물마저 남김없이 삼켰습니다. 불이 내려오자 백성들은 엎드려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어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자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떠올랐고 곧 수년간 닫혀 있던 하늘에서 큰비가 쏟아졌습니다(왕상18:44-45). 불과 비, 이 두 장면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백성은 무릎을 꿇었고, 아합은 왕궁으로 돌아가 이세벨에게 갈멜산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불이 내려온 사건과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일, 그리고 마침내 큰 비가 내린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습니다(왕상19:1). 그러나 남편의 상세한 이 모든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벨의 마음에는 단 한 방울의 변화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엘리야에게 전했습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당신의 생명을 저 죽은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처럼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섬기는 신들이 자신에게 벌을 내려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2). 이것은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분노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공식적인 서약이었고,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웠습니다. 재판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여왕이 그 권력을 어디에 먼저 사용했는지가 이 한 문장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군대를 보냈다고 기록하지 않고 대신 사자를 보내 엘리야를 협박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세벨이 완고했던 이유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합을 통해 충분히 전해 들었음에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쌓아 올린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이 섬기던 신들의 존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몰라서 완고해지는 경우보다, 알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서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랫동안 쌓아 온 지위와 명분을 하루아침에 내려놓는 일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낙심한 엘리야의 도망
정작 놀라운 반전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이 한마디 위협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도망치기 시작한 것입니다(왕상19:3). 그는 유다 땅 브엘세바까지 내려간 뒤, 자신을 따르던 사환마저 그곳에 남겨 두고 홀로 광야로 더 들어갔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본 사람이 이제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혼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그 마저도 안전지대가 아니었기에 그는 사환을 남겨 둔 채 더 깊은 광야 외딴 곳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듯 걸어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곳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비가 하나 드러납니다. 앞서 이세벨의 살벌한 숙청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던 오바댜와 이번에는 스스로 자리를 떠나 광야로 숨어버린 엘리야가 같은 위협 앞에서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더 훌륭한 믿음을 가졌는지를 가르기 위한 비교가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각자 다른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거나 버텨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오바댜에게는 동굴이 생명을 지키는 피난처였다면,. 엘리야에게는 광야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던 두려움의 자리였습니다. 이 장면은 믿음의 사람을 감정 없는 영웅으로 포장하지 않는 성경의 정직함을 보여 줍니다. 큰 승리를 거둔 직후에도 사람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뒤에는, 그 반작용으로 더 깊은 탈진과 두려움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시간 중요한 일을 치러 낸 사람이 정작 그 일이 끝난 뒤에 무기력해지는 경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수백명 앞에서 홀로 제단을 쌓고 기도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극심한 압박을 견뎌 냈는데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 몸과 마음에 남아 있던 힘도 함께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엘리야는 마침내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았습니다. 로뎀나무는 광야에서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낮은 관목이었지만 뜨거운 햇볕을 완전히 가려 주지는 못하는 나무였습니다. 그 빈약한 그늘 아래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구했습니다. 넉넉하오니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4). 죽음을 구하는 이 기도는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다는 신호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고 묻지도, 갈멜산의 믿음은 어디 갔느냐고 다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천사를 보내 그를 어루만지시며 먼저 잠들게 하셨고 잠에서 깨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왕상19:5-6). 화려한 응답이나 거창한 표적이 아니라 따뜻한 떡 한 조각과 물 한 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방식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길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7). 이 한마디는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한 번의 식사로는 부족했다는 뜻이었고,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다시 채워 주셨습니다. 회복은 언제나 책망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두 번의 식사로 힘을 얻은 엘리야는 밤낮 40일을 걸어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는 호렙까지 나아갔습니다(왕상19:8).
2. 호렙산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은 엘리야
성경에서 40이라는 시간은 종종 특별한 훈련과 준비의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오래전 모세도 40일 동안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엘리야의 40일 역시 단순한 도피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복의 여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놀랍게도 그가 도착한 호렙산은 오래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던 바로 그 산이었습니다. 쉼을 구했던 그 시간은 결코 믿음이 부족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습니다.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을 찾아 들어가 그곳에서 밤을 지냈는데 그 어둡고 좁은 동굴 안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왕상19:9).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엘리야를 추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했던 마음을 말로 꺼내 놓게 하시려는 물음에 가까웠습니다. 며칠 동안 홀로 걷기만 하며 눌러 왔던 감정을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씩 풀어내도록 이끄셨습니다. 급하게 답을 주시기보다, 먼저 물으시는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물음에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쏟아 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다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저버리고 제단을 헐며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고, 이제 자신만 홀로 남았는데 그 목숨마저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10). 나만 홀로 남았다는 이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바댜가 숨겨 둔 선지자 100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극도로 지친 사람에게는 현실보다 외로움이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가장 어두운 쪽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왜곡된 인식조차 즉시 바로 잡지 않으시고 먼저 그 마음의 고백을 다 들으신 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산 위에 나가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이어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지만,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지만,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뒤에는 불이 지나갔지만, 그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왕상19:11-12).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로 자신을 드러내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이번엔 바람과 지진과 불이 모두 지나간 뒤, 아주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는 불로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아무도 보지 않는 동굴 앞에서는 작고 조용한 음성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란한 사건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지치고 낮아진 순간에는, 그 세미한 음성이 더 정확하게 마음에 닿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에 엘리야도 앞서와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 했습니다. 자신은 열심을 다했는데 이스라엘은 언약을 버렸고, 이제 자신만 홀로 남아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13-14).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 말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구체적인 다음 걸음을 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우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을 이을 선지자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15-16). 지쳐서 죽기를 구했던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위로의 말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걸어가야 할 구체적인 길이었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한가지 사실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칠천명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18). 오바댜가 목숨을 걸고 숨긴 백명의 선지자들 뒤에, 엘리야 조차 알지 못했던 더 큰 무리가 있었던 셈입니다. 나만 남았다고 느꼈던 자리에 사실은 훨씬 많은 사람이 함께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힘을 얻은 엘리야가 광야 저편에서 회복되는 동안, 왕궁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3. 나봇의 포도원 사건
평범한 농부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은 마침 아합의 왕궁과 가까이 붙어 있었고 아합은 그것을 채소밭으로 쓰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주거나 값을 쳐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나봇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금하실지언정 조상의 유업을 왕에게 내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왕상21:3). 이 거절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함부로 팔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적 전통이었고, 나봇은 그 전통을 지킨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 대답을 듣고 근심하며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린 채 식사조차 거부했습니다(왕상21:4). 왕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작은 일 하나에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이 상황을 어찌 왕이 되어서 그런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느냐며 남편을 다그친 뒤, 자신이 직접 나섰습니다(왕상21:7). 그녀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왕의 인장을 찍어 이스르엘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높은 자리에 앉힌 뒤, 불량한 자 두 명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 증언하게 하라는 지시였습니다(왕상21:8-10). 장로들은 그 지시를 그대로 따랐고, 나봇은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겉으로는 정식 절차를 갖춘 재판이었지만,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는 살인이었습니다. 신앙의 언어와 법률 제도가 욕심을 감추는 도구로 완벽하게 이용된 것입니다. 더 무거운 사실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훗날 왕하 9장26절은 하나님의 나봇의 피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의 피까지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포도원의 상속권을 완전히 끊기 위해, 나봇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자녀들 까지 함께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합이 포도원을 차지하러 내려가자 하나님은 다시 엘리야를 보내 그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짧고 단호하게 물었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왕상21:19). 이어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아합의 피도 핥을 것이며 이세벨에게는 이스르엘 성 곁에서 개들이 그를 먹을 것이라는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왕상21:23). 놀라운 것은 이 심판의 말을 들은 아합의 반응입니다.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감싸며 금식하고, 베옷을 입은 채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습니다(왕상21:27). 완전한 회개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겸비함조차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아합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 아들의 시대로 미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왕상21:29). 같은 죄, 같은 심판의 말 앞에서 한 사람은 몸을 낮추었고 한 사람은 끝까지 침묵으로 자신을 지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합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들 요람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세벨은 왕의 어머니로서 여전히 왕실의 중심에 있었으나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선포되었던 말씀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4. 이세벨의 최후 충격적인 결말과 아합 자녀들 최후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한 젊은 제자를 군대 장관 예후에게 보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왕하9:1-6).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아합의 집을 심판하여 이세벨에게 죽임당한 하나님의 종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왕하9:7). 예후는 곧바로 병거를 몰아 이스르엘로 향했습니다. 그의 진격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오래전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선포되었던 심판이 마침내 실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예후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망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눈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곱게 단장한 뒤, 창가에 서서 그를 내려다 보았습니다(왕하9:30). 그녀는 예후를 향해 주인을 죽인 시므리여 평안하냐고 조롱했습니다(왕하9:31). 시므리는 전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불과 7일만에 몰락해 스스로 궁에 불을 지르고 죽은 인물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 역시 곧 시므리처럼 짧게 끝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조롱을 던졌지만 예후는 그말에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를 올려다보며 누가 내편이냐고 물었고 두 세명의 내시가 그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예후는 짧게 명령했습니다. 그를 내려던지라는 것이었습니다(왕하9:32-33). 평생 그녀의 명령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그녀를 창밖으로 밀어내니 이세벨은 그대로 떨어졌고 그 피가 벽과 말들에 튀었으며, 예후는 그 위를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예후는 궁에 들어가 음식을 먹고 마신 뒤에야 그녀가 왕의 딸이기 때문에 저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왕하9:34).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려던 명령이었으나 부하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두개골과 두 발과 손바닥뿐이었습니다(왕하9:35). 들개들이 이미 대부분을 뜯어 먹은 뒤였습니다. 부하들이 돌아와 이 소식을 전하자 예후는 오래전 엘리야를 통해 선포되었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으리니 그 시체가 밭의 거름같이 되어 아무도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왕하9:36-37).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한편 아합이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하10:7)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70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아합의 왕자 70명이 자신들을 교육하는 자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상에게 스스로 팔려간 아합은 그 자녀들이 어떤 죽임을 당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참혹한 결말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는 분일까요? 에스겔 18장23절은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돌이켜 살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세벨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은 이유는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같은 심판의 말을 들었던 아합과 이세벨의 마지막 차이를 다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합은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옷을 찢고 잠시라도 자신을 낮추었지만 이세벨은 끝까지 화장을 고치고 조롱을 택했습니다. 신앙의 언어를 욕심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유로 죄에는 결과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늦어 보이는 시간은 하나님이 잊으신 시간이 아니고 우리가 여전히 돌아갈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것은 없는지 오늘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속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말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