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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고백록”을 보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맹수를 피해 도망치다가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맹수는 계속해서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벼랑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하지만, 벼랑에서 자라고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극적이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직도 맹수가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절벽 아래에서는 커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자기가 걸터앉은 나뭇가지 주변에서 맛있는 과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 과일을 먹으며, 잠시나마 달콤한 맛을 음미했습니다. 바로 그때, 나무 아래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습니다. 쳐다보니 흰 쥐와 까만 쥐가 쉬지 않고 교대하며 나무뿌리를 갉았습니다. 쥐들이 갉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무뿌리는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나무는 머지않아 뽑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흰 쥐는 낮이며, 까만 쥐는 밤입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보여주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맹수와 뱀은 인생에게 닥쳐오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절벽 위의 맹수와 아래의 뱀은, 인생의 절망입니다. 나무에 걸터앉아 맛있는 과일을 먹으며 잠시나마 달콤함을 음미하는 것은, 인생에서 맛보는 즐거움과 쾌락입니다. 흰 쥐와 까만 쥐는, 밤낮으로 인간의 생명을 갉아 먹음으로 머지않아,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신을 한다면, 그 사람을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은 사랑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상대하며 사랑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라서 가능할까요? 사람이 아니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 아니기에 가능하다면,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표현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 가운데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제사하며 우상 앞에 분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이끌고 먹이고 치료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다시 돌아오게 해서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집에 머물게 하실 계획이라고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말만 들어도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며, 그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매어 우리를 이끄십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이스라엘을 앞에서 이끄셨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끎에 있어서,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신 곳에 이르게 하기 위해, 줄을 매어 앞에서 이끄셨습니다. 이때 사용하는 줄이 “사람의 줄”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의 줄”을 가리켜, “사랑의 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시킨 이스라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줄로 매어놓음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너무 먼 길로 가지 않게 하고 또, 하나님에게서 떨어질지라도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매어놓은 줄은, 때에 따라 징계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징계는 이스라엘이 볼 때는 자기들이 억압당하고 자유를 빼앗기는 고통의 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줄은 사실, 그들이 무사히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랑의 줄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줄은, 때에 따라 우리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를 고통스럽게도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둔 엄마가 자녀의 발과 자신의 발을 줄로 연결시켜서, 어린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엄마가 그 줄을 당기면, 어린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끌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줄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마침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어 놓으셨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랑의 줄을 당김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기 다루듯 안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하여, 이방을 의지하며, 이방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줄인 사람의 줄로 이스라엘을 매어서 이끄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만남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견인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 준비하신 곳으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 힘든 사람, 정말 2번 보기도 싫은 사람, 실망시킨 사람들도 많았고, 그러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가시에 박힌 것처럼, 또,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픔도 많이 겪었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곳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사 43: 1을 보시면,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셨습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듯,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선택하여 지명하셨다는 겁니다.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지명되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우리가 비 기독교인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로서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지명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계획,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곳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이토록 사람의 줄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강팍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계속적인 사람의 줄로 이끄셨으나, 이스라엘이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행한 것은, 그들의 강팍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해 순종할 줄을 몰랐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 거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현상에만 몰두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를 의지하며, 앗수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섬겼던 바알을 숭배한 겁니다. 이것은, 이제껏 자신들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대신 인본주의적 계책을 통해, 나라의 안녕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강팍한 행위이며, 완악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계속적으로 “돌아오라”며 선지자들을 보내어 부르셨습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이 행한 행위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다시 읽어보시면,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끝끝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기로 고집하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내 외면했고, 하나님께서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리 가는 강팍한 태도를 고집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성”이며, 그것의 결과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롬 1: 20을 보시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도, 마음을 강팍하게 하며 완고하게 행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행위이며, 멸망의 자리에 던져질 행위입니다. 온 몸에 기름을 뿌리고, 화기근처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해야 합니다. 시 81: 11 - 12을 보시면,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라고 하며, 히 3: 7 - 8을 보시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는 것은, “순종”과 “완고”입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이며,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과 내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고지식하게 고집하는 것은 “완고”입니다. 이는,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이 “완고”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계속 말씀하셨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고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팍해서도 안 됩니다. 고지식하게 굴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 - 11절을 보시면,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완고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이방으로 끌려간 이스라엘이 본국으로 귀국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섬기고 의지했던 애굽과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함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포로의 자리에서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는, 세계 각 국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선택하여 지명하신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켜, “사자처럼 소리를 내신다”라고 합니다. 계 1: 15을 보시면,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라고 합니다. “사자의 소리”나 “많은 물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위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엄있는 큰 소리로, 그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위엄있는 소리는 우리에게 공포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애정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자의 부르짖음은 크고 명확하여 하나님이 택한 백성 중 그것을 듣지 못하는 자가 없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 새와 비둘기에 비유되는 것은, 이는 돌아오되 그들이 신속히 돌아온다는 겁니다. 특히, 새 중에 비둘기가 언급된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돌아옴이, 마치 비둘기의 귀소 본능과 같이 본능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쉬며 누릴 수 있는 안식의 공간을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집”은, 사람들이 머무는 처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안식”도 상징합니다. 집은 하루 종일 밖에서 수고하던 사람이 돌아와 안식하는 곳이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던 나그네가 돌아와 안식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요 14: 2 - 3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그들을 향한 불붙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안식할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게하고,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것과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원하십니까? 그것은, 욕심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그 사랑보다,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토록 버리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