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 3,7-14; 마르 1,40-45
+ 찬미 예수님
오늘 1독서에서 히브리서는 시편 95장의 말씀을 인용하는데요, 원문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인용한 후 그것이 오늘날 어떠한 의미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의 성경 주석 방법 중 하나인 ‘미드라쉬’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시편 9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음이 완고해져 하느님을 시험하고 하느님께 반항하던 일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일이 오늘날 반복될 수 있다고 말하며 특히 “오늘”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가 특히 경계하라고 한 것은 ‘마음이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완고해지다’(스클레리네테)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여섯 번(사도 19,9; 로마 9,18; 히브 3,8.13.15; 4,7) 나오는데요, 그중 히브리서에 네 번 나옵니다. 이것은 파라오가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감히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시험했을까요? 마음이 완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복음을 말씀하셔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동료’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메타코이’를 번역한 말인데요, 역시 신약성경에 여섯 차례 나오는데, 히브리서에 다섯 번(히브 1,9; 3,1.14; 6,4; 12,8) 나옵니다. 나머지 한번은 루카 복음(5,7)인데요, 베드로와 함께 물고기를 잡던 동료들을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함께 나누는 이’(200주년 신약성경) 또는 ‘상속자’(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동반자’ 또는 ‘동료’로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이 많이 와닿습니다. 피정이나 강론 때 묵상 주제로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내가 사랑하는 분’, ‘나의 모든 것’, ‘나의 형제’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나에게 한없이 퍼주셔야만 하는 분이고, 나는 예수님께 아무것도 해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식이 부모에게 무한한 사랑을 요구하면서, 정작 부모가 ‘너에게 난 뭐니?’라고 물었을 때, ‘그냥 나에게 사랑을 주기만 해야 하는 존재’라고 대답한다면 무척 서운하겠지요.
어쩌면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빚쟁이처럼 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수님이 들어주셔야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당신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나를 낫게 하실 의무가 있으시다거나, 내가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 “내가 원하는 대로 반드시 해 주셔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고 정작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복음의 나병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완고함이라는 병일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히브리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동료라면, 예수님의 시선이 가 계신 곳에 나의 시선도 향하고, 예수님께서 관심 있어 하시는 것을 나도 관심 있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것, 하느님의 의로움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시선이 향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예수님과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알렉상드르 비다, 나병환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 1813-1895
출처: Jesus cleansing a leper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