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복희론 - 초록 서정의 숨결, 금빛 애정의 물결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와 둘이서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 최복희, 「꽃시계」 중에서
I.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요, 최복희는 그 경험의 문학적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배려의 자세라는 것을 최복희 수필은 말해준다. 최복희 수필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주제지향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주제의 내면화가 잘 되어 있어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되는 대부분이 자연이고 녹지다. 이런 작가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생태합리성적 인식은 수필가의 사회적 소명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 연결고리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이 존재한다. 마틴 루터킹은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한 바 있다. 최복희 수필의 한 축에는 녹색 존재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이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존재를 껴안으면서 그 포용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솜씨에 있다고 하겠다. 수필은 관조의 문학이다. 필자는 수필의 참신한 맛은 관조와 개성적 묘사에서 우러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여류소설가 펄 벅이 장편소설,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표현했는데, 펼 벅이 보고 만난 사람들이 아마도 최복희 수필가 같은 부류가 아니었을까싶다. 체험의 나열화로 얻는 일상적인 느낌보다는 제재의 의미화를 통한 미적 형상화가 주는 참신함이 더 수필적 감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의 특성도 자조보다는 관조에 초점을 맞출 때 더 문학적 향취를 거둘 수 있다. 최복희 수필은 본 것, 느낀 것만으로 기록되는 단순한 체험의 배열이 아니라 경험을 넘어 본질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문학적 언어의 형상화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결국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관조하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제재의 소성이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자신만의 렌즈로 걸러진 최복희의 주옥같은 수필들은 문학보다 더 깊은 인연과 애정의 물결 아래에서 인간 세계의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어서, 독자의 관심을 충분히 끈다고 하겠다.
필자: 권대근/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I. 1. 자연친화를 통한 녹색정서의 현현
최복희의 수필은 온유한 인성과 자연친화라는 초록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구축되고 있어 우리는 녹색체험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그 과정을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도시를 떠나 전원풍의 시골에서 산새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던 고독과 그 시간을 이겨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수필 「겨울 숲」에서, 그녀는 숲에 있는 하얀 의자에 앉으니, ‘나른한 평화가 나를 포근히 감싼다.’고 적고 있다. 자연이 주는 평화는 그 어떤 연출가도 잡아낼 수 없는, 오직 숲속에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다. 무엇보다도 걷기를 통해 얻은 조용한 공간에서 명상을 즐기는 작가의 일상에서 우리는 수도승 같은 나목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전쟁이라는 역경의 세월을 견뎌내고 지금 누리고 있는 황혼의 풍요가 더없이 소중하고 값지기만 하다는 작가의 수필에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지금은 칠십 고개를 넘어섰지만,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녀에게도 살아가는 목표가 시퍼렇던 시절이 있었다. 황혼의 풍요가 주는 삶에 대한 긍정이 수필에 공감을 더해 준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위안이 긍정에너지를 준다는 측면에서 황혼의 풍요를 누린다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바와 같다. <겨울 숲>은 최복희 수필집의 첫 글답게 다양한 미적 장치를 사용, 울림통을 디자인하여 독자들이 문장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준다. 독자들이 문장에 오래 머물수록 작가의 창작의도는 보다 깊고 진실하게 포착되게 마련이다. 정서를 환기하는 감미로운 문장들이 제공하는 심미적 효과는 신박한 리듬과 조각글 같은 편안함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이런 감각적인 문장의 서술형식을 반복함으로써 문장을 낯설게 만들고, 독자는 그런 작가의 의도를 깨닫는 순간 그만큼 강렬한 감동을 만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공감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글이다.
산 밑에서 올려다본 정상은 아득하기만 했는데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고, 큰 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능선 길 또한 완만해 약골인 내가 걷기에 무리가 없다. 허름한 정자 앞에 이르니 하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등받이엔 “앉아보세요”라고 구호를 외치듯 글씨가 쓰여 있다. 누군가가 베푼 손길에 감사하며 합장하고 앉는다. 내려다보이는 곳은 내가 방금 올라온 계곡이다. 융단처럼 깔린 낙엽에 발을 깊이 묻고 수도승처럼 서 있는 나목의 마른 가지에서 곤줄박이가 건너뛰기를 하며 노닐 뿐, 정적에 휘감긴 자연의 품에 안겨 있으니 나른한 평화가 나를 포근히 감싼다.
조용한 숲에 오면 저절로 명상에 젖는다. 내 나이 어느새 칠십 고개를 넘었다. 굽이굽이 참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짊어진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 총알이 빗발치는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 처지에서도 다친 데 없이 살아서 건강하게 여기까지 왔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알퐁스 도데는 인간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로 고통 받는 존재라고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잿더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그때의 향수보다 역경의 세월을 견뎌내고 지금 누리고 있는 황혼의 풍요가 더없이 소중하고 값지기만 하다.
- 「겨울 숲」
<겨울 숲>은 수필의 맛과 품격을 격조있게 보여준다. 이 수필의 예술성과 주제 또한 상호텍스트성을 통하여 배양되고 있다. 이 수필이 거둔 미덕은 역사적 자아의 인성과 현실만족성을 개성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인용된 글에는 전쟁 후 잿더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가 담겨있다. 알퐁스 도데 어록의 인용이 역경을 이겨낸 자의 행복론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어준다. 문학이 독자의 감동을 목적으로 한다는 본질을 생각할 때 사상의 정서화는 필수적이다. 또 연상에 의한 복잡한 내면의 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인용과 함께 다양한 비유의 구사도 필요할 것이다. 발레리는 문학 속에서, 사상이란 과일 속에 묻혀있는 영양소와 같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엘리어트는 문학은 사상을 장미꽃 향기와 같이 감각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의 내용에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시도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최복희 수필처럼 사상의 정서화, 이념의 감각화, 내용의 형상화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형상적 체험을 통해 문학적 성취를 일구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가 「겨울 숲」이다. 이 작품의 발단은, 온기가 도는 겨울산을 쉬엄쉬엄 오른다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그녀는 아버지가 짊어진 이불보따리 위에 앉아 피난을 떠나던 시절을 기억하며, 저절로 명상에 잠긴다. 소설가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후 예찬 글을 끄집어내면서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일에 몰두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노후의 풍요가 삶의 안정을 보장해 주리라 믿기에 이 수필은 많은 독자의 공감을 받으면서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최복희 수필가가 가진 여러 장점 중에서 가장 빛나는 강점이라면, 곱돌산 정상이란 표지판에 다다랐을 때, 거기서 더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지만 더는 오르지 않기로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욕심을 버리면 행복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실감한다’는 것이다. 집필과정에서 ‘겨울 숲’의 의미를 일관된 심상으로 구상해나간 지점에서 독자들은 이 수필의 높은 예술성을 맛볼 수 있다.
출중한 미모도 아닌 내게 앵커가 될 만한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 10년을 버텨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경력이 약이 되었는지 이제는 자신감도 노하우도 생겼다. 촌티도 점점 벗어지고 표정도 밝아졌다. 까칠했던 늙은 촌닭의 깃에 윤기가 흐르고 퇴색된 붉은 볏엔 홍조가 돈다고 할까. 흙을 비비며 밭을 매고 가축들의 오물을 옷에 묻히고 살던 촌부의 놀라운 변신 아닌가.
지상파방송 앵커는 연예인에 버금가는 외모와 학식과 교양을 겸비해서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관리도 철저하지만 방송하기 전 전문가들이 머리 손질과 화장도 해주고 유명회사의 옷도 협찬 받아 입고 뉴스를 진행한다. 나를 그들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명색이 실버넷뉴스의 앵커인데 촌스러운 내 모습이 친지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나 보다.
- 「촌닭의 변신」
‘까칠했던 늙은 촌닭의 깃에 윤기가 흐르고 퇴색된 붉은 볏엔 홍조가 돈다고 할까.’라고 쓴 대목은 최복희 수필의 미학적 백미다. 이런 형상화는 이 작품의 전편을 관통해나가면서 산뜻한 이미지를 드러낼 것이다. 이는 미감 창출을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수필을 썼다는 의미다. 세련된 표현의 묘미는 그녀의 탄탄한 필력에서 나온다. 위 작품에서 ‘촌닭’은 실버넷뉴스 앵커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생긴 자신감의 표현에서 나온 하나의 상징어다. 자신을 낮추는 미덕은 수필에서 공감을 얻어내는 제1의 전략이 아닌가. 본인은 자신의 변신이 믿기지 않지만, 이 또한 겸손의 다른 표현이다. 최복희는 여성의 현실인식과 정체성 회복을 모색한 작가로서 기존의 구심력에 치중한 여성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 작가로 평가된다. 이 수필은 일상의 변화에 포커스를 두면서 다채로운 연상과 상상의 통로를 통해 미적 사유를 유도한 구성법에다 부분적인 형상화를 곁들여 미감을 실어나르고 있어 감동을 준다. ‘흙을 비비며 밭을 매고 가축물의 오물을 옷에 묻히고 살던 촌부’였다는 고백에는 변신의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한 표현의 묘미가 들어 있다. 지상파방송의 앵커나 실버넷뉴스 동네방송 앵커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그녀의 글에서 겸양의 미덕이 역력하게 묻어난다. “나를 그들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명색이 실버넷뉴스의 앵커인데 촌스러운 내 모습이 친지들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나 보다.”는 표현에 너무도 잘 담아내고 있듯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과 함께 있다. 수필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차가운 진실을 사랑하고 나의 고통을 껴안아, 나를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남게 하는 아름다운 예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많다. 시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정조를 담고 있는 최복희 수필의 시적 표현에 가까운 비유는 그녀가 세계의 자아화 양식이라는 수필의 한계를 표현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겠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농촌을 기피하던 때, 농촌 일에 손방인 나는 낙농인의 아내가 되어 시골로 들어왔으니 숙맥이란 놀림을 받아 마땅했다. 그래도 남편의 배려 속에서 아들딸 낳아 키우며 자연인이 되어 갔다. 그 순수하고 아름답던 40여 년의 세월은 이제 추억 속에 묻히고 나는 상전벽해 된 신도시에 홀로 남았다. 그린벨트로 묶였던 이곳은 개발 바람이 불어와 원주민들은 등 떠밀려 뿔뿔이 헤어졌다. 우리도 건넛마을 아파트로 이전했다가 4년 만에 그 자리로 돌아왔다. 전답으로 질펀하던 땅엔 아파트와 상가, 근린 시설로 메워지고 인구도 수없이 늘어났건만 나는 군중 속의 고독이랄까 절해고도에 버려진 느낌이다. 자식들은 자라서 분가했고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붙어살던 반려자마저 병마로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남들은 새롭게 변화된 겉모양만 보고 축복이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은 설움에 숨이 막힌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귀뚜라미 소리에 한 가닥 삶의 끈을 붙잡고 용기를 내어보리라.
- 「귀뚜라미」
이 수필 「귀뚜라미」에서 작가는 낙농인의 아내가 되어 시골로 돌아와 살았지만, 그린벨트로 묶였던 곳이 개발바람으로 질펀하던 전답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고 인구는 불어난다. 갑작스런 도시화에 작가는 군중 속의 고독을 맛보며 절해고도에 버려진 느낌을 갖는다. 남들은 새롭게 변화된 겉모양에 축복이라고 하지만 작가는 소중한 추억을 잃은 설움에 숨이 막힌다. 이런 숨 막히는 변화를 앞에 두고 수필 한 편을 썼다. 바로 「귀뚜라미」라는 문명비판 수필이다. 세상은 변했지만 작가의 시선은 다시 낙농인의 아내로 돌아간다. 자연인으로 살았던 40여 년의 세월을 상상력으로 건져올리며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서정을 불러온다. 그래서 그녀는 한 마리 귀뚜라미 소리에 한 가닥 삶의 끈을 붙잡고 용기를 내어본다. 문명의 발전에 따른 세태변화를 거부하는 작가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묘사에 힘입어 문명비판이라는 메시지를 ‘귀뚜라미’라는 제재에 잘 담아낸 까닭으로 주제의식의 의미화에 성공하고 있다. ‘막상 공원으로 들어서니 가로등 불빛으로 주위는 대낮같이 밝다. 사방은 마법의 성처럼 우뚝우뚝 솟은 건물마다 불야성을 이루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조각난 회색빛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 있건만 공원에 내려앉은 달빛은 한 줌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가로등 아래 벤치에 도둑고양이처럼 오도카니 앉아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낯설다.’는 표현은 문명비판의 강도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조각난 회색빛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 있건만 공원에 내려앉은 달빛은 한 줌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암시를 통해서 작가는 문학이 지향해 나가야 할 지극히 소중한 바이오필리아를 짙게 깔아나갔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인 시절의 삶이 얼마나 그리웠던 것일까. 투명한 달빛마저도 스며들지 않는 도시의 공간에서 제초기의 굉음을 통해, 험한 세상을 외롭게 살아가던 힘없는 풀벌레들의 대참사를 적발하고 귀뚜라미 소리라는 제재로 주제의식인 문명비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의 풍습, 문화, 문학 속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비방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모양이 비슷한 것을 빙자해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을 때 ‘까마귀 까치 집 빼앗다’ 하고, 정몽주 어머니의 시조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에서도 왕조 찬탈을 노리는 무리를 까마귀에 비유했다. 까마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억울할까. 사람이라면 인권을 모독했다고 아우성을 쳤을 것이다. 한 가닥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까마귀를 효조(孝鳥)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반포(反哺)라고 한다.
‘뉘라서 까마귀를 검다 흉타 하덧던고/ 반포 보은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고, 옛 노래를 불러 까마귀를 위로해 주고 싶다.
- 「까치와 까마귀」
「까치와 까마귀」는 대립항으로 쓴 수필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주고자 하는 이유가 고증을 거친 예화나 삽화를 통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우리는 누구나 겉모습을 보고 쉽게 전모를 판단하는 실수를 범한다. 일종의 중심주의다. 얼굴이 사람의 중심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굴만 보고 인격을 판단하기도 한다. 작가는 우리의 편견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까마귀에 대한 관찰 결과를 내어놓으며, 까마귀에 대한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반대로 폭력적인 참새는 그 반대로 알고 있다. 좋은 소식을 몰고 온다는 길조로 까치를 들고 있다. 작가의 관찰에 따르면, 까마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재수 없는 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몸 전체가 시꺼먼 색으로 되어 있어 우리가 단순히 색깔만 보고 잘못 판단한 듯하다는 것이다. 참새와 까치 그리고 까마귀를 동시에 관찰하면서 그들의 행동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참새나 까치는 아주 얌체짓을 잘하는데, 참새보다 까치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수필의 출발점이 인식에 있고, 인식이란 재해석과 신발견을 의미한다면, 이 수필은 재해석의 가치가 빛난다고 하겠다. 비판정신이 생명인 수필에서 작가는 우리들의 잘못된 상식에 경종을 울리는 바, 관찰의 디테일 그리고 전문가의 지식이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불길한 새로 알고 있는 까마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 잡아주려는 작가의 의지를 높게 살 수밖에 없다. 이는 작가정신의 발로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려는 지식인의 당연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까마귀가 효조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흉조가 아니라 신사적인 새로 승화시킨 작가의 의도를 음미해 보는 것도 이 수필을 읽는 쾌미가 아닐까 싶다. 밤이 되자 오랜만에 산에 다녀온 탓인지 삭신이 나른했다. 어린 것이 감기라도 들지 않았을까 염려되어 전화했더니 잘 놀고 있다고 제 어미가 전한다. 손녀의 음성이 듣고 싶어 바꿔 달라고 했다.
“할머니, 왜 전화했어요?” “응, 네가 산에 다녀와서 아픈 데 없나 걱정이 돼서.” “나 하나도 안 아파요.” “오, 그래! 엄마, 아빠와 잘 지내고 내일 다시 만나자.”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손녀가 울먹이며 “할머니, 보고 싶어요.” 하곤 울음을 터트렸다. 나의 사랑이 어린 손녀 가슴에 전해진 모양이다. 내 가슴도 뭉클하며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봄 숲에서 즐겁게 보낸 게 아이에게 한 줌의 보약이 되었나 보다. 날씨가 더욱더 따뜻해지면 손녀를 그곳에 자주 데리고 가 봄나들이 나온 까투리 가족과 잣나무 숲에서 재롱 떠는 다람쥐도 만나게 해줘야겠다. 불면에 시달리던 나도 그날 밤 단잠을 이루었다.
- 「보약」
불행하게도 인간은 만족감을 오래 누리지 못한다. 편안하다는 느낌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소일거리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다. 작가가 손녀와 같이 산 나들이를 간 연유라면 그런 소일거리에 더하여 귀여운 소녀를 위한 할머니의 사랑이 작동해서일 것이다. 손녀가 걱정이 되어 1차는 안부를 전화로 물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려 전화를 받으니 뜻밖에 손녀가 울먹이며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데서 작가는 가슴에 뜨거운 전율이 차오름을 느끼는데, 작가는 그 원인이 봄 숲에 있다고 단정한다. 이 수필의 쾌미는 제재를 ‘보약’으로 설정한 데 있다. 봄 숲에서 즐겁게 보낸 것을 아이에게 ‘보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산에 자주 데리고 가서 까투리 가족과 다람쥐도 만나게 해주리라는 작가의 손녀사랑은 작가에게도 단잠이라는 보약을 선사한다. 손녀 전화 한 통화의 감동으로 써내려간 「보약」의 발단은 “아침 신문을 펼쳐 든다. ‘봄엔 숲이 보약이다’라는 제목 아래 ‘치유의 숲’이라는 책 소개 글이 눈길을 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마지막 결말부도 ‘보약’이라는 제재가 핵심어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도 숲처럼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나도 보약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로 맺는 결말부는 자아성찰의 문학인 수필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남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이다. 그녀는 여러 글에서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삶을 택하겠다고 토로한 바가 있다. 옆지기를 떠나보낸 작가의 외로움을 그대로 이해한다.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도 그녀에겐 다반사다. 손녀사랑의 내면을 빈틈없이 묘사해내는 그녀의 형상화 능력이 눈부시다. 수필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작가의 개성적 시각으로 발견하는 데 가장 큰 매력이 있다. 여기에는 보편성의 공감대를 이루어주는 서정성이 도사리고 있다. ‘보약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과 깊은 이해의 표시이며 상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관념을 구체화하려는 작가의 문학적 의도가 깔려 있는 네이밍 기법이라고 하겠다.
2. 잊을 수 없는 애정의 물결, 그 촉촉함
최복희는 다 태우지 못한 삶의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정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수필집의 또 다른 한 축은 일상에서 꽃피우는 인연의 소중함과 견고한 인성의 노래로 수놓아져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최복희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웃의 인연과 만남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남편의 부재 때문에 오늘을 사는 그녀는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인생의 양양소」는 남편과의 태국여행에서 남편의 회갑연을 열고 감동의 눈시울을 적시는 순간의 추억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판에 박은 듯한 기행문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여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호텔 정원에는 주로 야자수와 열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로 작은 호수 같은 풀장이 있고, 나뭇가지마다 색색의 꼬마전등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음식은 싱싱한 해물로 그득했다. 식사하기 전, 가이드가 남편을 위한 깜짝 쇼를 벌였다. 우리 일행이 둘러앉은 식탁 위에 케이크 한 개를 올려놓았다. 태국에서는 국왕의 생일날, 누구든 술을 팔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는데 그는 마술사처럼 품속에서 술병을 꺼내 저마다 앞에 놓여있는 물 잔에 술을 따라 주고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신호를 시작으로 정원 한쪽에서 여가수 한 사람이 3인조 밴드의 반주에 맞춰 생일 축가를 부르는 게 아닌가. 엉겁결에 우리도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정원을 가득 메운 다른 일행들도 축하객이 되어 한목소리로 열창했다. 상상도 못 했던 황홀한 회갑연을 맞았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었으랴. 문득 같은 날 생일을 맞은 국왕도 우리만큼 행복했을까. 궁금했다.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미소 지으며 감동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힘든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나.
- 「인생의 영양소」
「인생의 영양소」는 그녀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추억을 동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곡선의 향기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과 같다. 수필 「인생의 영양소」에서 작가는 아름다웠던 추억의 변주곡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힘든 역경 속에서도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왔던 평온했던 자신의 처지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문득 같은 날 생일을 맞은 국왕도 우리만큼 행복했을까. 궁금했다..’라고 고백하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부부간의 사랑과 자신의 삶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다. 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편안하고 행복한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낸다. 「인생의 영양소」는 추억이 물결치는 수필이다. ‘영양소’는 살아가는 데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점에서 메타포로 작용하면서 문학성을 견인해내고 있다.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미소 지으며 감동의 눈시울을 적셨다..’라는 작가의 독백은 해외여행 속에서 맞이한 깜짝 이벤트 속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회갑연을 맞아 기쁨을 감출 수 없는 감동적 순간을 노정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부부가 감격하는 걸까. 낙농인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작가이기에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여행’은 짙은 공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녀는 40여 년의 삶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다. 여행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견뎌온 삶의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여행에서의 겪은 이벤트와 행복한 삶을 연결시켜 정서적으로 풀어낸 것은 최복희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뭘까. 추억이라는 벼랑 끝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살면서 놓쳤던 극적 순간을 불러내어 그녀는 치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흔들림 없이 지켜왔던 자신의 삶을 남편과의 동행을 통해 길어 올리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래서 그녀는 당당하게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여행은 남편 회갑기념으로 다녀온 동남아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02호에 사는 청년은 자동차 부품 수출 사업을 하는 형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형이 사업차 중국을 거쳐서 몽골로 갔다가 코로나19가 번지는 바람에 귀국길이 막혀 사업을 중단한 상태이다. 그는 젊음의 혈기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삶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세입자들의 어려움은 내 삶에도 위축을 준다. 하지만 나도 젊었을 때 가시밭길을 걸어본 경험이 있어 외면하지 못하고 그 청년에게도 형이 귀국해 사업을 시작할 때까지 편리를 봐주겠노라고 했다. 그는 내 말에 안심이 되었나보다. 다음 날, 밝은 표정으로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와 현관 앞에 내려놓곤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며 열심히 살겠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들에게 작은 성의를 보였을 뿐인데 그들은 큰 기쁨을 내게 안겨주었다. -「불씨」 중에서
우리 인간사를 지배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면 사랑과 죽음이 아닌가 한다. 그녀는 이 수필에서 코로나19를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삶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세입자 청년에게 인정을 흩뿌리고 있다. 올곧은 인간 정신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이 이 수필이 지닌 힘이며 가치일 것이다. 나눔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 우리를 든든하게 하고 감동하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현실의 메마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감동의 눈물이라는 환상의 프리즘이며, 눈물의 습기를 통해 인간은 때로 황홀한 기적 같은 것들과 만날 수 있다. 뜨거운 눈물은 슬픔이라는 정서의 결과가 아니라 베풂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수필을 통해서 최복희는 참신한 생활철학을 어떻게 구현하여 제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복희는 독자를 진지한 삶의 현장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눈물은 적절히 절제될 때 아름답지만, 진실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눈물 또한 인생의 아름다움일 수 있다. 우리는 세입자 청년과 작가의 아름다운 만남에서 위기를 어떻게 공동으로 극복하고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찌해야 그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길을 허망하지 않게 되돌려 놓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실직의 아픔을 ‘기다림’이라는 인내로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주인의 ‘편리를 봐주겠다’라는 응수에 그 해답이 놓여있다. 이것 또한 문학의 세상이 가난한 자에게 마련해주어야 하는 커다란 힘이어야 할 것이다. 착한 임대자로서 어려운 시기를 세입자와 함께 헤쳐나가고자 하는 최복희 작가의 배려와 베풂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신도시에서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원주민인 나는 그동안 파란만장한 고역을 겪었기에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안락하게 살던 집과 터전을 버리고 등 떠밀려 떠나는 일도 심신의 고초가 뒤따랐지만, 정든 이곳을 떠나기 싫어 터를 잡아 새집을 짓는 일 또한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혼신을 다해 새집을 지어 놓고 병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 비통함을 잠재우기 힘들었다.
너울가지가 부족한 나는 앉은벼락을 맞은 슬픔을 추슬러 보려고 사람들이 복닥대는 야외운동 교실에도 나가 보고 뒷동산 능선도 타 보았지만 힘에 부치고 마음의 상처는 깊어만 갔다. 생각다 못해 평지나 다름없는 갈매천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갈매천은 우리 부부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곳이다. 이곳에서 젖소를 기르던 남편과 약혼하고 처음으로 신혼 살림집을 보러 오던 날, 하이힐을 신은 나는 그의 등에 업혀 실개천 조붓한 통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두려움과 새로운 꿈에 젖어 있지 않았던가. 추억을 떠올리니 만감이 교차한다. - 「갈매천 청둥오리」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난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그리움의 범벅인 것이다. ‘갈매천’은 부부의 영원한 추억이 담긴 장소다. 신랑의 등에 업혀보는 복을 누려본 것도 갈매천 덕분이었다. 작가는 첫 만남에서 두려움과 새로운 꿈에 젖기도 했다. 혼신을 다해 새 집을 지어놓고 병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의 부재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운동교실에도 가보고 산도 타보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히려 깊어만 갔던 것이다. 산책길에서 자신을 보면 따라오는 청둥오리 떼 덕분에 한때 ‘청둥오리 할머니’로 불리기도 했다는 작가에게 청둥오리는 기쁨의 원천이다. ‘어쩌면 청둥오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반려자가 나의 쓸쓸한 여생의 동반자로 보내준 선물이 아닐까.’라는 멋진 의미부여로 또 한 번 남편의 깊은 사랑을 확인한다. 젖소를 기르던 남편과 약혼을 하고 처음으로 신혼 살림집을 보러 오던 날 갈매천에서의 추억에 만감이 교차하는 건 왜일까. 그 갈매천은 오늘날 최복희를 행복에 겨운 작가로 만든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게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남편의 등에 업혀 조붓한 통나무다리를 건넜던 사연이 아직도 그녀에게는 생생하다. 남편에 대한 기억은 사부곡이 되어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가, 최복희로 하여금 그리움의 정서로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이 수필에서 두드러지는 장점은 수필의 교훈성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노력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주제의 변죽을 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작품에서 명시적인 주제를 포착할 수 없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녀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갈매천 청둥오리의 추억을 문학의 씨앗으로 의미화시킨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어떤 대상이든지 단일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는 열린 태도, 그 대상의 안과 밖, 그리고 이쪽저쪽 측면을 두루 살펴 전체를 이해하려는 구축적 태도는, 우리 수필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다. 우리는 이 수필을 통해서 작가의 한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사람들이 한 번쯤 이 수필을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부부애를 되찾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너울가지가 부족하고 앉은벼락을 맞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녀가 청둥오리와 만나면서 심적 고통을 해소했다고 하니 청둥오리는 남편이 보낸 것이 맞는 것 같다. 동생과 함께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편히 쉬어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슬하의 손위 형제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어느새 내가 집안에서 제일 높은 어른 자리에 있다. 동생은 내게 매일 안부를 묻고 살갑게 친절을 베푼다. 이런 동생이 곁에 있는 것도 내 복이지 싶다. 오늘 자연의 품에서 온갖 시름이 다 가신다. 특별히 잘한 것도 없이 살았는데 신께서는 내게 이토록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곳이 곧 선경이요, 천국이 아닌가. 순간 내 몸이 오색약수터의 바위가 된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한국전쟁이 끝난 잿더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환경 속에서 희망을 안고 공부하여 S 국립대학교에서 수년간 사무직으로 일했다. 도시 아가씨였던 나는 목가적인 시골 정서에 이끌려 낙농인의 아내가 되었고, 40여 년을 자연과 벗하며 살아왔다.
- 「탁영탁족」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감사의 생활이다. 40여 년을 낙농인의 아내로 살아온 자부심에는 자연과 벗하며 살아온 배경이 있다. 여한이 없는 인생여정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수필 「탁영탁족」은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들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으면, 우리 영혼이 가장 낮은 자세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다.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편에 나오는 사자성어, ‘탁영탁족’은 갓끈과 발을 물에 담가 씻는다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에 얽매임 없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맑고 초연하게 살아감을 비유한 말이다. 수필의 제목으로 내세운 것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미학에 힘입은 바고, 또 다른 하나는 크고 작은 바윗돌들은 처음 생성되었을 때는 울퉁불퉁하고 뾰족하게 모가 난 돌이었으나, 억겁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비바람과 흐르는 물에 담금질되어 지금은 하나같이 손으로 빚어놓은 도자기처럼 매끄럽게 된 것에서 느낀 바가 있어서다. 이런 자연의 변화와 순응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나이테를 지닌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그녀는 지혜롭게도 이를 자문하며 수필 속에서 답을 구하고 있다. 그가 앉아 쉬는 동안 나는 공원의 넓은 마당을 지그재그로 활보했다. 내가 건강해야 그를 보살펴주지 않겠는가. 종횡무진 걷다가 잔디밭에 소복이 피어있는 클로버꽃을 발견하곤 쪼그리고 앉아 꽃시계 두 개를 만들어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꽃시계 하나를 그의 손목에 채워주고 또 하나는 그의 손에 쥐여주며 내 손목을 내밀었다. 그도 묵묵히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사랑의 언약을 하듯 내게 꽃시계를 채워주었다.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앉아 은희의 노래 ‘꽃반지 끼고’를 불렀다.
생각난다 그 오솔길/그대와 둘이서 꽃반지 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환자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려고 부른 노래가 목이 메어 2절은 부를 수가 없었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시 걷자며 일으켰다. 그는 결 고운 황톳길을 조심조심 걷고, 나는 검은 돌이 징검다리처럼 듬성듬성 박힌 오솔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 「꽃시계」 꽃시계는 그녀에게 남편과 함께하며 마지막을 보낸 시간의 상징이다. 그녀는 혹독한 인생을 남편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 병을 이겨 보려고 나와 함께 사력을 다해 매일 걷기운동을 하던 곳이다. 오늘은 그와 함께 꽃시계를 차고 공원 벤치에 앉아 노래를 부르던 풍경이 불현듯 떠올라 미소를 머금는다. 아마도 손에 쥐고 있는 클로버꽃이 그때의 추억을 불러일으켰지 싶다.’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복희는 사랑하는 남편을 졸지에 잃은 사람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수필 꽃시계를 통해 노출시키고 있다. 남편의 꽃시계와 은희의 노래 ‘꽃반지 끼고’에 얽힌 추억은 목이 메어 2절은 부를 수 없었다는 대목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시 걷자며 일으켰다.’라는 대목에서 그녀의 남편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있는 이 글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낸 수필이라고 하겠다. ‘클로버 꽃시계는 내 인생에서 그를 만난 행운이요, 행복의 증거물이다. 또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영원한 사랑의 언약으로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늦게나마 세례를 받고 간 그도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며 꽃시계의 추억에 젖어있지 않을까. 나는 내내 가슴이 아프다가도 아름다운 꽃시계의 추억을 떠올리면 반달을 입에 물고 미소 짓는다.’는 대목에서 정서를 압축해서 간접화하는 그녀의 문학적 역량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꽃시계에 중요한 삶의 의미를 주면서 메타포로 작용하게 하는 수법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남편이 떠난 허무를 인식하는 작가에게 역설적이게도 꽃시계는 행운이고 행복의 증거로 작동한다. 마지막 결말부의 이 부분은 그녀가 ‘시종일여’라는 동양적 사생관을 지닌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사랑했던 남편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남편의 맥박과 그 숨결을 점철해 가는 과정이 되고 있는 것은 기록으로 가는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II.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따스한 정이 배어있는 좋은 수필의 완성을 보았다. 최복희가 혼신의 힘으로 그려낸 이런 성격의 수필들은 한국 수필 전체와 맞서 있는 거대한 기념품이다. 그녀는 머리보다 가슴에 와 닿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이 작품 속에는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망이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주는 위안과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끌어올려주는 깊이가 있다. 자신을 비운 자리에 순수를 채우는 일이 그녀에게는 숙명 같은 일이다. 비움의식을 통해 겸허한 자신을 쓰다듬는 자기 성찰의 모습에서 독자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멋지고 감동을 주는 작품집을 엮어내지 않았다면 얼마나 적조했을까.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낙농인의 아내로 살았던 추억에 기뻐하며 자신과의 진실한 대면을 통해 인간적인 향내를 풍기고자 하는 것은 최복희 수필이 지닌 가치 평가에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깊은 지성적 사유와 ‘비움’의 정신 속에 생명의 참된 의미와 인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수필집을 통해 전달받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복희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일상사의 보고에 치중하는 생활서정에만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묘사를 통한 예술성의 추구라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수필의 문학성을 새삼 확인해준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작가는 자신의 수필을 두 부류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자연친화의 녹색서정이 물결치는 밝고 경쾌한 내용들, 남편과의 추억을 회억하며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 글들이다. 이런 자연의 숨결과 사랑의 물결이 그녀만의 독특한 언술기법을 통해 수필은 인간학이라는 등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수필집 『촌닭의 변신』에 나타난 그녀의 수필세계는 최복희라고 하는 한 작가의 정신적 성장사요, 화자의 사상적 변증의 역사라 할 것이다. 수필을 읽는 가장 큰 매력이 작가의 내면 풍경을 보는 것이라면, 화자만큼 자신의 심중에 있는 그림자와 체취를 수필에 투영시킨 작가는 드물지 않을까 여겨진다. 최복희는 ‘비움’으로 채워가는 열린 의식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인본적 태도를 지향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갖고 수필을 씀으로써 자기를 위무하고, 나아가 수필을 통해 인간과 사회 구원하고자 하기에 그녀의 수필은 생명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