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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Ⅳ. 문화관광부의 행정상의 문제점.
1.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 근거와 검토
문화관광부가 공문서와 도로 표지판에 한자를 병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아래의 글은 한 일간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추려 실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글자도 보태거나 빼지 않았다.
① 먼저 우리말 뜻의 혼란문제다. 예컨대, 한글로만 ‘이이는 성품이 온건하다’라고 쓰면, 이 글에서 ‘이이’가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인지 이 사람을 뜻하는 대명사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또 도로표지판의 영동도 한자를 쓰면 강원도 영동(嶺東)과 충북 영동(永東)이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연구단체쪽은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글이란 낱말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문맥 안에서 그 구분은 명확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이이’는 그 앞 문장을 살펴보면 학자 이이를 뜻하는지, 이 사람을 뜻하는지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또 표지판의 경우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면서 나오는 ‘영동’이라는 지명을 충청도 영동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② 다음은 한자문화권과 교류 및 관광증대이다. 문화관광부는 또 이번 조처 추진이유의 하나로 “한자권 관광객들의 편의”를 꼽고 있다. 문화부는 “지난해 우리 나라에 입국한 관광객 425만 명 중 한자문화권이 주축이 된 동남아권 국민들이 전체의 71.3%에 이른다”며 “따라서 이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도로표지판 한자 병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관광수입 증대를 나라 전체의 문자정책보다 우선시하는 문화부의 정책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또 문화부가 강조하는 한자문화권'은 허구라고 말한다. 한자의 종주국격인 중국이 몇십 년 동안 한자를 간편하게 만든 간자체를 사용하고 있어, 우리가 아는 정자체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원광호 한국바른말연구원장은 결국 한자를 씀으로써 의미가 통하는 주된 대상은 일본인 정도일 뿐이라며 한글사용 단체들은 일본이 일본 저작물의 한국 유통 등을 위해 국한문 혼용정책을 은밀히 지지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③ 전통계승의 문제다. 문화부는한글전용은 국민의 한자능력 저하를 초래했으며, 이 때문에 전통이 단절되고 한자세대와 한글세대 간 의사전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글학회 등은문화부의 논리대로라면 칠천만 겨레 모두 한문 유산과 만나야 한다는 논리라며 한문으로 된 고전은 전문 한학자를 길러 쉬운 배달말로 번역하고, 보통 사람들은 이것으로 공부하는 게 전통 유산을 더 잘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예컨대 <동문선>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을 한글로 번역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다.
④ 한문교육 강화의 문제다. 문화부는 한자 병기’와 함께 교육용 한자를 2천자로 현재보다 200자 가량 늘릴 계획이다. 문화부는 국어연구원이 지난 2년간 고전 등에 나타난 한자의 빈도'를 연구한 결과, 약 2천자를 익히면 우리 고전의 95%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들 중 현재 교육용 한자 1800자에는 없는 것들이 많아 교육용 한자 늘리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글단체들도 중․고등학교에서의 한문교육 강화 필요성은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이 논리가 초등학교 한자교육론 등으로 확산될 폐단이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⑤ 정보화 추진 문제다. 문화부는 한자병기가 정보화 추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태도다. 한자가 정보화에 문제가 된다는 것은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 때 이야기이며, 현재는 각종 컴퓨터 워드프로세서가 1만 자 이상의 한자를 지원해 한자를 문서화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단체들은 컴퓨터로 한글을 한자로 바꾸려면 한자 한자 여러 단계의 조작을 거쳐야 한다며 이는 앞으로도 문서의 빠른 처리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문화관광부의 주장과 그 반박 내용에 덧붙여 특별히 더 적고 싶은 것은 없다. 위의 글에서 문화관광부를 반박하는 내용들이 나의 주장과 다르지 않거니와, 나는 이미 앞에서 문화관광부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었기 때문이다.
2. 문화관광부의 졸속 행정.
(1)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에 대한 여론조사.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방침이 발표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문화관광부의 기대와 달리 여론은 반대하는 사람이 찬성하는 사람보다 2 배 정도 많았다.
PC통신 하이텔이 2월 10일부터 2월 11일 오전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68.3%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총응답자 4백20 명 중 2백87명. 한자 병용에 “찬성한다”는 사람은 67명으로 16.0%. 그밖에 “충분한 의견 수렴을 한 뒤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14.5%,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견은 1.2%였다.
SBS의 저녁 <8시 뉴스>와 KBS <길종섭의 쟁점 토론>에서도 생방송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반대 여론이 65-70%, 찬성여론이 30-35% 정도였다. 한겨레신문의 여론조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 신문 기사 정리
우선 신문기사 가운데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도 일간 신문들에 기사로 나온 내용을 골라 실은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글자도 보태거나 빼지 않았다.
1) <한자병용 결정은 ‘전격 작전’>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 결정은 사전 예고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자병용 방침이 결정된 9일 국무회의 참석전 대부분 국무위원들조차 이 같은 논의가 있을 줄 몰랐다는 후문이다. 문화관광부는 국무회의 전날인 8일 오후 `한자병용' 방안을 보고하겠다며 국무회의 의사일정에 이를 넣어 달라고 총리실에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이날은 문화부장관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가 논란 끝에 `한자병용'에 관한 결론을 내지 못한 날이었다. 문화부는 총리실 통보 이후 한자병용 방침을 `보고자료'로 작성해 다음날 국무회의 석상에서 신낙균 장관이 공문서 한자병용 계획을 전격적으로 보고했다. 이 같은 문화부의 `전격작전' 때문인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김기재 행자부장관과 최재욱 환경부장관만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을 뿐 다른 국무위원들은 토론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전격작전'은 사전에 한자병용 방침이 알려질 경우 반대여론이 빗발쳐 시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도 “방침이 새어나갈 경우 정책결정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따라서 당연히 부처간 협의도 없었다는 후문이다. 문화부의 발표 이후 행자부가 공문서의 한자병용에 난색을 표명한 것도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사전에 청와대와 총리실 등에는 병용방침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한자병용 방침이 청와대 등과 사전에 조율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문화부가 느닷없이 한자병용 방침을 발표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는 고전과 전통을 이해하는 데 최소한의 한자이해가 필요하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과 김종필 총리가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문화부에 한자병용 검토지시를 내린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문화부는 `한자병용' 방안을 내부적으로 결정해 놓고 이를 발표할 시점을 엿보다 전격적으로 이를 공식화한 것이다.
2) <일선 교육현장 혼란>
신낙균(申樂均) 문화관광부장관이 9일 국무회의에서 ‘한자병용 방침’을 전격 보고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는 왜 충분한 논의 없이 전격 발표했느냐는 절차상의 문제다. 신 장관은 지난 주말 실무자들에게 ‘내주 초 국무회의 상정’ 을 준비토록 지시했고 일요일인 7일 실무자 전원이 출근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8일 국어정책심의위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석득 연세대명예교수는 정부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고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안은 8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에 보고됐고 정부안으로 발표됐다. 이같이 전격 처리된 배경에 대해 문화부 관계자는 “새 정부출범이후 김 대통령이 여러 차례 한자 습득의 필요성을 강조해 그 동안 실무작업을 벌여 왔다”며 당초 이 달 말 경 국무회의에 보고할 계획이었으나 다소 앞당긴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의 심중이 곧바로 정책으로 연결되는 권위주의적인 정책 결정과정의 전형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문화부 산하의 국어정책심의위원회의 논의라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두 번째는 이번의 정부 방침이 한글전용 원칙과는 무관한 조치라고 하나 이 같은 정부방침이 가져올 교육현장과 어문정책의 혼란 및 파장에 대해 신중히 그리고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문제다. ‘한글전용이냐 한글병용이냐 한글혼용이냐’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있어 왔고 어떤 측면에서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제정 이후 그 동안의 정부방침은 한글전용쪽으로 시행돼 왔던 것이 분명하다. 한글 한자 사용문제를 놓고 숱한 논란이 있었고 한자교육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한글을 전용한다는 원칙 하에서 정부정책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한자병용 방침에 대해 학계에서 거센 논란이 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선교육현장에서 한자교육정책이 또다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고 일부 행정 부서에서도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번 조치가 졸속행정임을 증명한다. 한자병용 계획을 발표한 다음 신 장관은 실무자들에게 “미래를 내다보고 한 일이니 당분간 힘들겠지만 크게 염려하지 말라”며 격려했다. 그러나 관련학자들이나 관계부처 실무자들은 “미래를 내다봐야 할 문제를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해서 될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3월중 시행이라는 당초 방침을 유보하고 교육정책에 미칠 영향, 행정의 혼란, 한자병용의 한계 등에 대한 폭넓은 여론수렴의 기회를 가진 뒤 신중히 처리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3) <부처간 협의, 학계와 조율 등 미진… '깜짝쇼' 우려>
우리 나라에는 국어문자정책 발표만 있었지 실천이 없었다. 정부는 48년 광복이후 한글 전용한자 혼용(단독표기)한글 전용한자 병기(괄호 안 표기) 순으로 네 차례 국어문자정책을 바꿨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떤 정책을 시행하든 정부의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어학계를 중심으로 「고독한」 운동이 펼쳐지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형국이었다. 공문서 한자 병기 추진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만만치 않은 것도 이런 「경험」때문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글정책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의 준비 부족은 우려를 자아낸다. 9일 문화부의 방침 발표 이전 부처간 사전 협의나 한글정책 수립기구와의 사전조율, 실질적 연구 모두 미진했다. 발표 하루 전인 8일 열린 국어심의회에서는 한자 병용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문화부장관의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는 사실상 국어정책을 결정해 온 기구. 8일 국어심의회에 참석했던 한 학자는 『정식회의도 아니었고, 의견이 엇갈려 한자 병용 문제는 차후 논의하기로 했다』며 문화부의 성급한 발표를 비판했다. 국립국어연구원 관계자는 『한글 전용이든 한자 병기든 장단점이 있다』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교육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한자 병용을 실시하려면 교육적 효과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고, 이를 토대로 한 여론수렴, 여론에 바탕을 둔 사회적 합의와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학자인 이종덕(李種德․46․서울과학고 국어교사)씨는 『우리가 쓰는 한자는 간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 관광객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며 『차라리 일본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에는 일어병기, 중국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에는 간자체 병기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김기식(金起式)정책실장은 『한자 병용은 장점도 있지만 정보화 시대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병기대상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6년 국어교과서에 한자를 혼용했던 65~69년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국어사전을 찾기 전에 자전을 찾아야 했다. 과거의 사례를 볼 때 국어학계의 소모적인 논쟁도 문제다. 비생산적인 대립과 갈등보다는 서로의 주장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와 주의주장에 대한 과학적이고 실체적 연구에 바탕을 둔 논쟁이 필요하다.
4) <행자부, 부처협의․전문가의견 수렴 없는 졸속정책 비판 >
정부문서를 총괄하고 있는 행정자치부는 공문서의 한자 병용 방안에 비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반대이유는 크게 세 가지. 공문서 한글전용이 30년 가까이 시행되면서 이미 정착단계에 들어섰다는 점, 한자병기는 전자결제 등 행정정보화 추세에 역행한다는 점, 한자 병용 등 새로운 문자정책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백년대계임에도 불구, 문광부가 여론수렴이나 전문가의견은 물론 정부문서의 주무부처(행자부)와도 한마디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수립됐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한 당국자는 『70년 1월1일부터 국무총리 훈령에 따라 30년간 공문서를 한글로만 작성, 이미 한글전용이 정착된 상황에서 갑자기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할 경우 정부의 신뢰성과 일관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 당국자는 『81년부터 정부방침에 따라 행정부처는 물론 법원도 「행정용어 순화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정보화 시대를 맞아 행정업무가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 한자병용을 할 경우 행정능률화와 정보화에 역행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행자부는 『현재로선 공문서 한자병용을 위한 사무관리규정 개정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5) <한자병기 "도로표지판 교체, 1조 이상 예산 필요">
- 도시미관, 운전자 시선도 방해
건설교통부는 『도로표지판의 크기를 키워 한자를 병기하려면 1조원이상이 필요해 예산이 낭비될 뿐 아니라 실효성도 의문시된다』며 한마디로 난색을 표명했다. 아울러 『관광지처럼 특수한 경우 한자 등을 병기할 수 있게 하는「도로표지규칙」이 있는데도 굳이 모든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려는 문화관광부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건교부는 우선 획이 많은 한자를 병기하려면 표지판을 키워야 하고 이 경우 전국 10만 234 개의 표지판을 교체해야 한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여기에 표지판을 지탱하는 지주 등의 교체비용까지 포함하면 총 1조원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추산이다. 또 각 시도에서 이미 4,8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97~2001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표지판 교체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걸림돌이다. 이와 함께 한자를 병기해도 발음이 국가마다 다른 점도 문제다. 예를 들어 大田을 중국인은 따이엔, 일본인은 다이텐, 한국인은 대전으로 발음한다. 서울과 같은 순수 우리말은 한자표기가 안되고 일본은 약자, 중국은 간자를 쓰기 때문에 여러 개의 한자를 병기해야 할 경우도 있다. 도시미관을 해치고 운전자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문제도 반대이유로 꼽힌다.
6) <[독자의 소리] 도로표지판 한자병기 의견수렴 왜 안 거치나>
우리는 참으로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전국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일들이 대통령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고 있다. 신정 연휴만 해도 그렇다. 연휴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 말 한 마디에 시행의 준비나 조사도 없이 보름 여만에 처리하는 아부근성이 문제이다. 12월 중순에 처리를 지시한 대통령이나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언반구 없이 처리하는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제작된 달력은 오류로 시작되었고 달력에 맞추어 계획을 세운 국민은 어이없어 했다. 그런데 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공문서와 도로표지 등에 한자를 병기한다는 것이다. 그 장단점은 잘 모르겠으나 한 사람의 생각이 여과 없이 시행되는 것은 진짜 큰 문제이다. 이제 각급 학교에서도 한문을 가르칠 것이다. 입시제도도 바뀔 것이다. 제발 이제는 토의하고 조사하고 그리고 시행했으면 한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착한, 너무나 착한 백성이다. 국민연금으로 바가지를 씌워도, 경수로 건설비용을 전기료에 부과해도 한숨만 쉬고 만다.
7) <한글․한자 병용 찬반 논란 확산>
정부의 한자 (漢字) 병용 추진방안이 발표되자 그 동안 한글전용을 주창해 온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또 문화관광부의 결정이 졸속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화부가 국어연구원과 사전 작업을 하고서도 자문기구인 국어심의회의 한글분과위 회의를 간담회 형식으로 치른 것이 계산된 요식행위라는 것이다. 부처간 협의를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국무회의에 올린 것도 졸속이라는 비판을 사고 있지만 사전에 청와대와 교감을 거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낳고 있다.
◇ 한자병용 추진과정 = 문화관광부는 국무회의 상정을 앞두고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부는 새 정부 들어 한자병용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국립국어연구원 등 소속기관을 통해 추진 가능성을 검토해 왔다. 이에 따라 국어연구원은 한자가 국어생활과 교육에 미치는 영향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국어정책과가 이를 바탕으로 지난 2일 자체 방안을 마련했다. 국어정책과는 8일 장관 자문기관인 한글분과위원회 (위원장 김석득) 와 한자분과위원회 (위원장 김학주) 의 의견을 수렴해 국무회의 보고서를 마련했다.
◇ 국어심의회 회의록 = 한글분과위와 한자분과위는 동일안건을 놓고 합동회의가 아니라 같은 시간대에 독자적으로 회의를 연 것으로 회의록에는 기록돼 있다. 위원 10명중 9명이 참석한 한글분과위는 연장자인 김석득 연세대 명예교수를 위원장으로 선출한 뒤 회의에 들어갔으나 애초부터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간담회 성격을 띤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한자병용 추진방안에 대해 국어심의회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문화부가 졸속으로 정책추진을 발표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회의록에는 또 안병희 서울대 명예교수가 "동일안건인데 왜 합동분과위를 열지 않느냐" 고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간 한자분과위는 '당연히' 한자병용을 찬성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 확대되는 논란 = 한글학회(회장 허웅)를 비롯, 전국한글전용실천추진위원회.한국바른말연구원 (원장 원광호).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 (회장 문제안) 의 4 개 단체 회원 40여 명은 10일 오전 서울 정부 세종로청사와 문화관광부, 한글학회 건물 앞에서 집회를 갖고 정부의 한자병용 방침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한자를 병용하게 되면 우리 글과 말이 죽게 될 것" 이라며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한자병용 방안은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지 않은 날치기 정책으로 즉각 철회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한글학회 유은상 사무국장은 "정보화시대에 사회 곳곳에서 한글전용 정책이 정착되고 있는 시기에 외국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자병용을 시행한다는 정부의 방침은 시대착오적" 이라며 "철회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강력한 반대투쟁을 벌여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한문 혼용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 정기호) 측은 "한자교육을 강화하자는 등의 특별한 조치는 아닌 것 같다" 고 해석하면서도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 한자를 필요로 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은 느낌" 이라는 입장이다. 정 회장은 "한자는 예로부터 우리말을 표기하는 문자인데 마치 영어나 일본어 같은 외국어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대 국문학과 이병근 교수는 "대다수 교수들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한글전용과는 별개 문제" 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공문서의 한자병용 방안에 대해 "한글전용이 효과적인지 한자병용이 효과적인지는 국어연구원 같은 곳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검증한 다음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너무 졸속으로 처리한 감이 든다" 고 비판했다.
8) <[한자병용 시행되면…] 문화부 '기본 틀 변화 없다'>
9일 정부가 '한자병기'를 결정하자 한글학회 등 한글 관련 연구기관들이 일제히 반발, 또다시 어문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관광부의 한자병기 방안은 앞서 국무회의에서도 찬반양론이 맞섰으나 문화관광의 진흥이라는 국정 목표를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부는 문화관광 육성을 위해 제안한 한자병기안이 예상외로 큰 논란을 빚자 "이번 조치는 한글 전용의 원칙 아래 필요할 때만 한자를 병용하자는 것으로 현행 문자 정책의 기본 틀을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며 진화에 애쓰고 있다.
◇ 국무회의 =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신낙균 (申樂均)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글․한자의 병용방안을 안건으로 전격 제안하자 회의 분위기가 금새 달아올랐다. 최재욱 (崔在旭) 환경부장관이 바로 "한자 병용방안은 큰 진전" 이라고 평가했다. 崔장관은 "정부 보고서에서 이미 한자 혼용 (混用) 이 이뤄지는 이상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어 "한자교육을 전혀 실시하지 않는 것은 문제" 라며 "입시에 한자문제를 하나라도 넣어야 한다" 고 한술 더 떴다. 그러자 정부 공문서를 총괄하는 김기재 (金杞載) 행자부 장관이 "당장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하기보다 이를 2단계로 미뤘으면 좋겠다"며 반론을 폈다. 金장관은 "기본원칙에는 찬성하나 그간 한자표현을 우리말로 풀어쓰려는 노력이 진전을 보여 왔고 한자교육에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 고 지적했다. 이런 논쟁에 김대중 대통령이 가세했다. 金대통령은 "중국에선 정자체(正字體)가 너무 복잡해 간자체(簡字體)를 쓰고 있으나 젊은이들이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없게 돼 지금은 후회한다"며 한자 병용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단계적 실천론을 중재안으로 제시했다. 金대통령은 "한자를 갑자기 혼용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어 시간을 두고 전문가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야 한다"며 신중한 자세를 주문했다.
◇ 관련단체 = 그 동안 한글전용 운동을 추진해 온 한글학회 (이사장 허웅) 는 이번 조치에 대해 "일반 대중들 사이에 한글이 한자에 비해 우세한데도 새삼 한자 병용을 추진하는 것은 시대를 거스르는 처사" 라고 비판했다. 반면 한자 혼용과 초등학생들의 한자 교육을 주장해 온 한국어문회 (이사장 이응백) 는 "한자는 조어력․함축성․축약성이 뛰어난 표의 (表意) 문자이므로 한글과 한자의 조화는 이상적인 문자 운용" 이라며 찬성했다.
◇ 일선 교육현장 = 수색초등학교 전한준 (全漢俊.60) 교장은 "전통문화의 올바른 이해 차원에서 정부의 조치에 대환영" 이라고 말했다. 행정자치부는 한자를 병용할 경우 한글전용을 전제로 진행중인 문서정보화 프로그램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으며 건설교통부는 한자를 병기할 경우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반면 현실적인 효과는 검증되지 않은 상태라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교육부는 이번에 발표된 정부 방침이 현재의 어문교육 수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오락가락한 어문교육방향이 다시 한번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한편 문화관광부 박문석(朴文錫)문화정책국장은 이미 대통령 지시가 내려진 만큼 논란이 있어도 한자병용 방침은 당초 계획대로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부는 설 연휴가 끝난 다음 이르면 내주 말에 공문서는 한글만 쓰도록 한 사무관리규정(대통령령)에 필요한 경우 한자를 병기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붙이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대통령령 개정에 관한 의견을 행정자치부에 보낼 방침이다.
9) <[사설] 불쑥 내놓은 한자병용안>
문화관광부가 9일 발표한 한자병용 (竝用) 방안을 놓고 벌써부터 논전 (論戰) 이 뜨겁다. 한자병용이 바로 국한혼용 (混用) 이 아닌데도 마치 정해진 코스인 양 한글전용 대 (對) 국한혼용의 해묵은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사전에 문화관광부가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국무회의에서 불쑥 내놓아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정책결정 과정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문화관광부장관의 자문기관으로 어문정책을 결정해 온 국어심의회조차 사전에 어떤 결론을 내린 바 없다고 하니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이번 발표는 이미 정착단계에 온 한글전용 원칙을 크게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48년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 은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쓰되 필요할 경우 한자를 병용하도록 규정했다가 70년 단서조항을 삭제했다. 또 지난 91년 만들어진 '사무관리규정' 은 모든 공문서를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 맞춤법에 따라 가로로 쓰도록 정했다. 따라서 한글전용은 우리 언어생활의 기본원칙이다.
물론 이 같은 기본원칙이 실생활에서 철저히 지켜지진 않았다. 과거에 비해 크게 줄긴 했지만 상당수의 신문․잡지․단행본 등은 아직도 최소한의 한자를 혼용 또는 병용하고 있다. 우리도 이번 발표에 포함된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도로표지판․간판 등에 한자를 병용하는 문제에 대해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지난해 우리 나라를 찾은 관광객 4백50만 명 가운데는 70%가 일본․대만․중국 등 아시아인들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는 불만 가운데 하나가 호텔 문만 나서면 까막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서방국가 관광객들을 위해 영어를 병기 (倂記) 하듯 아시아 관광객들을 위해 한자를 병기해 편의를 도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또한 고전․역사․사회과학 등 학문연구에서 한자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다. 컴퓨터 사용이 일상화된 정보화사회에서도 한자의 중요성은 줄지 않고 있다.
최근 중국․일본 등 이웃 한자문화권 국가들과의 정치․경제․문화교류가 확대되면서 한자의 중요성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한글전용과는 별개로 한자교육의 강화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한자병용을 공문서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주무장관인 행정자치부 장관의 말대로 그 동안 공문서의 우리말 풀어쓰기가 상당한 진전이 있었고, 공문서의 한자병용은 자연스럽게 '다른 영역'에까지 확대됨으로써 언어생활에 큰 혼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동안 정착돼 온 한글전용 원칙을 근본적으로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정부의 조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 방식상 무리, 준비 소홀 등으로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킨 면이 없지 않다. 폭넓은 의견수렴을 생략한 채 국민 앞에 불쑥 내미는 형식의 정책발표는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기도 어렵다.
10) <한자병용 부처마다 입장 달라 조정 필요>
9일 문화관광부의 전격적인 한자 병용 방침은 관련 정부부처간에도 입장이 달라 혼선을 빚고 있다. 어문정책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는 한자 병용에 관한 행정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고, 공문서 관리를 총괄하는 행정자치부는 공문서의 한자 병용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또 건설교통부는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포함시키는 방안에 대해 문화관광부 등과 협의에 나섰다. 반면 교육부는 당장 한문교육체계나 교과서 양식의 기본 틀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문화관광부 = 10일 박문석 문화정책국장은 "한자 병용의 필요성은 대다수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 이라며 "이미 지난 50년간 찬반 양론과 중도론 등 가능한 모든 여론이 수렴된 상태이므로 남은 것은 정책적 결정 뿐" 이라고 말했다. 朴국장은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 정신에 따라 "필요시 한자를 병용하겠다는 것이지 한자의 무리한 사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달라" 고 말했다.
◇ 행정자치부 = 행정자치부 한 당국자는 "지난 70년 공문서를 한글로만 작성토록 한 국무총리 훈령이 30년 가까이 시행돼 온 상황에서 갑자기 공문서에 한자를 병용하는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사안" 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공문서 한자 병용을 위해서는 현행 사무관리규정을 개정해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규정개정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정보화 시대를 맞아 행정업무가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한자 병용의 경우 행정능률화에도 역행할 우려가 있다" 고 보고 있다. 행자부는 특히 지난 81년 이후 정부방침에 따라 행정부처는 물론 법원도 공문서에 표기되는 어려운 한자 용어들을 보다 쉬운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벌여 온 점에 비춰 한자병행 방안은 이에 역행한다는 입장이다.
◇ 건설교통부 =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하는 문제에 대해 교통안전공단과 건설기술연구원 등 전문기관의 의견을 수렴중이다. 정임천 건교부 수송정책실장은 "차량의 고속화․도로의 다차선화 등 교통환경이 복잡해짐에 따라 표지판에 자국어 등 3개 국어를 표기한 나라는 세계에 한 곳도 없다" 면서 "다만 한글로 표기해 혼란이 빚어지는 장소나 관광지 등에 대해서는 한자 병기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고 말했다. 건교부는 지난 97년 도로표지규칙을 개정하면서 아시아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일부 관광지에 대해 표지판 밑에 보조표지판을 설치, 한자를 병기할 수 있도록 규정해 두고 있다.
◇ 교육부 = 중고교에서 한문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데다 각종 정부문서에서도 한문을 쓸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려 있어 당장 한문교육체제․교과서․공문서 양식의 기본 틀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고교 국어․국사․사회과목 등의 교과서에서는 이미 국한문을 병용하고 있으며 7차 교육과정 (중 2001년, 고 2002년)에서도 한문이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도입돼 학생들은 기초과정인 '한문' 과 심화과정인 '한문고전' 을 선택해 배울 수 있게 돼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다만 지난 72년 제정된 교육용 한자 1천8백자의 일부가 현실 생활과 차이가 있다는 문화관광부의 지적에 따라 문화관광부 국어연구소의 보고서 검토와 실태조사를 거쳐 조정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문화관광부가 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 관광객의 증대로 관광지 도로표지 등에 한자표기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밝힌 데 대해 전문가들은 `억지논리'라고 반박하고 있다. 10일 교통문제연구시민모임 김수협 사무총장은 교통표지판의 생명은 `판독성'이라며한자는 아무리 크게 써도 인식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더구나 한국, 중국, 일본 등 각국의 한자표기법과 발음이 모두 달라 외국인들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운전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교통표지판에 쓰이고 있는 영어 알파벳은 한글의 60% 크기인데 한자의 경우 획수가 많아 한글의 1.5배 크기 이상으로 써야 판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자를 병용할 경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교통표지판이 된다는 것이다. 예산낭비도 우려하고 있다. 건설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 97년 `도로교통표지판 5개년 정비계획'을 마련해 48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며 한자병행표기가 결정되면 이 사업의 전면 재검토와 함께 엄청난 추가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교통전문가는 현재의 표지판 규격도 거리 미관을 해치고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한다고 지적 받고 있다며 표지판을 더 크게 만들 경우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교통부 도로관리과 박영목(52) 계장은 동남아시아 등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를 비롯해 세계 각국이 자기 나라의 공식언어 중심으로 교통표지판을 만드는데, 유독 우리 나라만 이에 역행하고 있는 점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11) <[취재파일] 문화부의 비문화적 강변>
공문서와 길 표지판에 한자를 병용하겠다고 불쑥 발표한 뒤 거세게 일어난 비판 여론에 문화관광부 정책당국자가 보인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다. `불쑥'한 것도, 한글전용 원칙을 `수정'한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문화부는 `불쑥'이 아니라는 근거로 문화정책국 국어정책과에서 내부토론과 여론수렴을 거쳤다고 주장했다. 다만 공개적이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원칙 수정이 아니란 근거로 내민 논리는 더욱 놀랍다. 지난 48년 10월에 제정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얼마동안'이 한글전용으로 가기 위한 한시적 과도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그 뒤 반세기를 넘어선 오늘, 법개정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강변이다. 총리훈령으로 이미 70년 1월부터 한글만을 사용하기로 한 사실에는 편리하게 눈감고 있다. 모든 정책에는 그 입안의 주체가 있다. 문화부는 누가 처음에 정책수정을 거론했느냐는 물음에도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당국자는 정책이 발표된 모양새나 정책이 수정된 `속도'를 보면 누가 그 주체인가를 `감'으로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수수께끼식 답변으로 `엄청난 윗선'임을 시사했다. 어문정책의 큰 틀을 흔드는 내용을 발표해 놓고도 정책 전환이 아니라 우기고, 최초 발의자조차 얼버무리는 문화부가 정책전환의 철학과 당위를 설득력 있게 내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여론수렴의 과정조차 생략할 만큼 무모할 수 있었다. 참으로 충격이랄 만큼 무책임하고 비문화적이다.
12) <한-일 외무장관, 한자 회담 열었다?>
지난 2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과 고무라 마사히코 일본 외상의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글-한자 병용’ 문제가 화제에 올랐었다. 오전에 공식 회담을 마친 두 장관은 한남동 외무장관 공관에서 1시간 여 동안 점심을 함께 하며 못 다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고무라 외상은 "현재 한국에서 한자 사용이 화제가 되고 있다면서요"라고 화제를 꺼냈고, 홍 장관은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면서 "현재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한자 병용 방침이) 수용될 것"이 라고 말했다는 것. 이에 대해 일본측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사용하는 글자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면서 "공식 약자를 정할 거면 일본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농담을 건네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얘기가 진행되면서 진지한 '한-일 한자회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지난 94년 김영삼 전대통령과 호소카와 전총리가 한-중-일 3국 한자 통일을 위한 협의회 개최에 합의했던 일을 되새기며, 3국간 회의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됐다는 것. 홍 장관은 취임후 외교부 문서에 한자를 사용하도록 지시해 왔다.
(3) 정리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부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런 것 같다. 지금 한자병용방침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며칠만 지나면 또 잠잠해 질 테니 계속 밀어붙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 연휴만 지나면 아무 저항 없이 한자병용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 문화관광부의 한자병기방침 발표는 우선 절차상으로 명백히 잘못됐다. 문화관광부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또는 문화관광부장관의 개인적 취향에 의해 이와 같이 후세에 길이 남을 중요한 언어정책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문화관광부가 이처럼 상식 이하의 졸속행정을 전격작전처럼 추진한 배경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한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께서는 평소에도 개인적으로 한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해 왔다. 들리는 얘기로 이미 지난해에 김 대통령과 김 총리는 문화관광부에 한자 병용 방안을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를 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가 나서니 문화관광부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절차나 형식은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절차와 법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요 법치국가인 우리 나라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날치기 졸속행정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번 문화관광부의 깜짝쇼는 공청회와 여론 수렴 및 관계 전문가와의 협의 등 모든 면에서 상식 이하의 날치기 졸속 행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관광부는 절차상에 큰 문제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국민들의 불같은 저항이 있자 문화관광부는 그 정도의 반대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대통령께서 재가를 하셨으니 이젠 밀어붙이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국민적 저항이 있다 하더라도 마구 밀어붙이면 된단 말인가. 국민의 정부가 기본적으로 이런 과거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단 말인가.
대통령이나 총리 또는 장관도 한 인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도 분명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어문 정책 같이 중대한 일(이 일은 문화정책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말 중대한 문제이다. 국민투표에 부의 해야 할 정도의 문제라는 주장까지 있지 않은가)을 제대로 절차도 밟지 않고 이렇게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 절차야 어찌되었든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으니 무조건 추진한다는 생각도 문제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공정한 절차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그 이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번 한자병용방침은 철회됨이 마땅하다. 민주주의는 그 누구든 예외를 두지 말고 법과 절차가 지켜져야만 올바르게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절차를 무시하고 법을 무시한다면 누가 법을 지킬 것인가. 다시 한번 정부는 반성하고 이번 부당한 한자병용 조치를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정한 문화란 우리 미래의 우리 후손에게 어떠한 말의 문화를 넘겨 줄 것이냐에 맞춰져야 한다. 지금 한자에 중독돼 있어 왜 한자가 문제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자를 왜 멍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원래 아무 것도 모르는 것보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더 위험하다. 누구나 모든 면에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라의 어문정책 같이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취향에 의해 좌지우지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한글만 쓰기나 한자 나란히 쓰기나 다 나름대로 타당한 구석이 있는 주장이니 그 가운데 아무 것이든 제 입맛에 맛는 것을 하나 골라 밀어붙이면 된다는 독단에 빠져선 안 된다. 도대체 우리말과 한자에 대해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맘대로 독단에 빠져 절차까지 무시하며 밀어붙이는 것인가. 이번 한자병용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각부 장관들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의 소신 없는 태도에 실망했다. 김기재 행정자치부 장관 말고는 소신껏 자기의 얘기를 하지 못했다 한다. 이처럼 우리 정부가 잘못된 일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게 된 데는 우리의 책임도 크다. 우리는 왜 한글만 써야 하는가를 기성세대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다. 한자에 중독돼 그 달콤함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그 굴레를 벗어나길 기대한 것이 잘못이다. 한자의 유혹은 이와 같이 달콤한 것이다. 다시 한번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Ⅴ. 지금 우리가 할 일
1.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을 만들자
오늘날 우리말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두가 우리말 교육이 옛날 글자를 익히는 데 모든 정열을 쏟았던 서당 교육 식의 주입식 교육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말 교육은 실용성에 그 촛점이 맞춰 져야 한다. 말하기, 듣기, 쓰기(글짓기) 같은 교육을 많이 해서 좀더 다양한 어휘를, 좀더 다양한 발음으로, 좀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국민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우리말 교육은 한글 전용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한자를 가르치느라고 다시 글자 교육의 덫에 걸려서는 우리는 다시 주저앉고 말 것이다. 한자는 늘 실용적 우리말 교육의 발목을 잡아 왔다.
그리고 한자말은 입말과 글말을 분리시켜, 언제든지 청각성 상실의 멍에를 씌우려 도사리고 있다. 그 나라의 말이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청각성의 확보는 말의 기본이다. 우리말의 청각성을 온전히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한글전용을 반드시 계속 해야 한다. 한글만 쓰게 되면 청각성을 상실한 말들은 자연히 정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갈이를 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자말들이 쫓겨날 수밖에 없다. 이 때 우리는 쫓겨난 한자말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한자말을 갈음할 수 있는 갈음말[대체어]를 찾아내고 다듬어서, 온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널리 퍼뜨려야 한다. 모든 우리말 전문가들은 올바른 우리말의 세계로 국민들을 이끄는 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우리말의 올바른 길을 열어 보이고, 그 새 길을 아름답게 다듬고, 국민들을 그 길로 이끌어서,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에 모든 국민들이 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를 세우는 일, 이것이 우리말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아름다운 우리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는 한자어를 갈음할 갈음말을 만들어 낼 전문가 모임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갈음말을 연구하고 만들어 낼 모임의 이름을 여기서는 우선 부르기 좋게 ‘갈음말 모임’이라 하기로 한다. 갈음말 모임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 국립 국어연구원 같은 기관이 이 갈음말 모임의 구실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현재 국어연구원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진 못한다. 그래서 과연 국어연구원이 갈음말 모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쨌든 갈음말을 만들고 보급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음말 모임에 한 데 모여야 한다. 한글학회 같은 곳은 당연히 갈음말 모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학자, 인류학자, 컴퓨터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한자를 알아야 한자말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한자 실력을 갖춘 전문가도 필요하다. 한자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할 일은 이것이다. 한자를 가르치려 하지 말고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되도록 한자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우리말 전문가들의 역량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 지원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하지 않는다면 민간에서 자율적으로라도 이런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갈음말 모임과 같은 취지로 이미 설립된 모임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어느 한 모임이라도 이미 내가 생각하는 갈음말 모임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곳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자격이 있는 모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모임을 지원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갈음말 모임은 갈음말을 제시하고 보급하는데 모든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김 정섭 님이 쓰신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이 한자를 갈음할 갈음말책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 같다. 내가 이런 분야에 전문가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더 좋은 책이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우리가 갈음말 모임의 구실을 하는 모임도 아직 없고, 또 앞으로 그런 모임을 만들 힘도 없다면 그때는 갈음말을 이미 제시한 책 가운데 가장 좋은 책을 선정해 보급하는 일에라도 나서야 한다. 그러나 책의 보급으로 그쳐서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갈음말 모임이 해야 할 일을 한번 적어 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글을 세계 문자로서 손색이 없는 글자로 다듬어 가는 일도 중요하다. 한글과 관련해서 우리는 한글의 완전한 표음문자성을 유지해 나가는 데 늘 초점을 맞추고 있어야 한다. 이미 한글은 적지 않은 부분에서 표음성에 손상을 입고 있다.
우선 우리말 속에서 살펴보자. 소유격 조사 ‘의’는 ‘의’로도 발음하고 ‘에’로도 발음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다. 또 오늘날 된소리가 발달하면서 한글 표기는 된소리가 아닌데 실제 발음은 된소리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장단음의 표기도 한글이 제대로 구별해 표기하지 못한다(앞으로 한글이 장단음을 계속 표기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말에서 장단음의 구별은 사실상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장단음을 구별해 표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고, 장단음이 오히려 발음상의 혼란과 청각성의 혼란만 일으키므로 사라지는 것이 낫다면 그대로 두면 된다. 나로서는 어느 것이 옳을 지 알 수 없다.). ‘ㅐ’와 ‘ㅔ’, ‘ㅖ’와 ‘ㅔ’, ‘ㅢ’와 ‘ㅣ’, ‘저’와 ‘져’, ‘희’와 ‘히’ 같이 엄연히 발음이 다른 것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현상이 많아졌다. 표준 발음법에서 예외를 너무 많이 허용함으로써 한글의 표음문자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요컨대,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소릿값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표기 따로 소리 따로 나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한글이 완전한 표음문자의 기능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한글과 우리말 발음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 발음 교육이 너무 편의성에 치우쳐 예외를 많이 두고 있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가야 한다는 말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많아지고 거친 말이 많아져서 우리말이 거칠어진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한글이 소리글자로서 살아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소리글자는 소리를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 생명이다. 한글이 생명을 잃어 소리 따로 글자 따로가 되면 우리 말글살이도 입말과 글말이 둘로 분리되고 만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말글살이는 원칙적으로 쉬워야 하지만 마냥 쉽기만 하면 좋은 게 아니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쉬운 글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지켜 가야 하는 것이다. 글자가 말을 표기하기 위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말 또한 글자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받아야 한다. 말은 변하기 쉽다. 그러나 글자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변해야 한다.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말이 변해야 한다. 당장 발음에 조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본래 한글이 가지고 있는 소릿값을 그대로 발음하도록 발음 교육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글자의 소릿값대로 발음하는 것이 다소 어렵더라도 될 수 있으면 정확한 발음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도 한음 한음을 정확하게 내며 부르는 사람이, 음을 우리 뭉실하게 부르는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게 된다고 한다. 말소리도 풀어진 자세로 편한 대로 한다고 좋은 게 아니고, 정확하게 하나 하나의 소릿값을 신경 써 가며 말하는 것이 두뇌 계발에도 뛰어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바깥말[외국어]의 한글 표기도 문제다. 우리 나라에는 없는 발음이 바깥말에는 있기 때문이다. 한글의 표음문자성을 좀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선 한글의 개량이 필요하다. 바깥말을 들온말[외래어]로서(들온말은 우리말의 자격이 있는 우리말의 하나) 표기할 때에도 한글을 개량해 가며 표기할 필요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별개다. 그러나, 각종 전문 분야(예컨대, 불교 경전 번역에서 만뜨라나 다라니)에서처럼 정확한 한글 옮김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그리고 앞으로 한글을 세계의 다른 민족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도 한글의 개량은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한글이 우리말, 더 나아가 바깥말의 소리까지 두루 적어 낼 수 있게 하려면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일을 위해 ‘누리한글 모임’ (모임의 이름이야 달라도 상관없다)같은 모임도 필요하다.
아래에서는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간단히 적어 보기로 한다.
2. 갈음말 모임과 누리한글 모임의 할 일
(1) 갈음말․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한 기초 연구
갈음말을 만들기 위해선 우리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말의 뿌리, 역사, 형성 과정, 구성 원리, 소리와 뜻의 상관관계, 각 소리마다의 대표 이미지, 소리 사이의 어울림, 맞춤법, 발음법 등 우리말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한글은 소리글만이 아니고 뜻글자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다. ‘ㅁ’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어떤 뜻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ㅅ’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또 어떤 뜻을 공통적으로 가진다는 식이다. 그리고 우리말의 소리 하나 하나가 서로 결합하는 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고도 한다. 소리간에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 하는 관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갈음말은 우리말을 제대로 알 때에만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갈음말이 구체적으로 이미 있던 토박이말이 될지, 아니면 여러 말을 조합한 말이 될지, 아니면 아예 처음 만들어지는 말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형태가 되건 우리말에 대한 깊은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토박이말의 연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토박이말의 구성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갈음말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나는 소리간의 어울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말은 본질적으로 소리다. 따라서 갈음말은 소리 자체가 아름답고, 또 서로 어울려야 한다. 음성학에 대한 연구 등을 통해 갈음말은 소리의 우수성이 특히 뛰어났으면 한다. 그리고 소리들은 기본적으로 가짓수가 많을수록 좋다. 나는 우리말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발음을 가진 말이 되길 바라고 있다. 소리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의 정서를 풍부하게 만들고, 마침내 다양한 문화를 꽃필 수 있게 만드는 토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실제로 다양한 소리로 말을 하면 두뇌의 발달에 아주 좋다. 나는 우리 선조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말소리를 물려주신 것이 참으로 고맙다.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 다양한 소리를 가진 아름답고 다양한 말을 만들고 가꿔서 뒷사람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지금 현재 한글로는 11,172 자를 적을 수 있다. 이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사용 빈도수와 대표 이미지를 조사하고, 대표 이미지가 없는 글자는 대표 이미지를 부여하는 작업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리고 소리가 겹치는 것을 빼면 3,024 개의 소리가 되는 데, 이에 대한 사용 빈도수와 청각적 이미지 조사도 아울러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11,172 자 또는 3,024 개의 소리 사이의 어울리는 규칙을 연구해 그것들을 밑감으로 해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야 한다.
각 소리나 글자마다 대표 이미지를 가지도록 하고 그것을 참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어떤 글자나 말소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이미지에 열려 있어야 말로서의 유연성이 생겨 많은 어휘를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떤 글자나 소리가 대표 이미지에 너무 묶이는 것은 곤란하다. 대표 이미지는 그 글자나 소리가 홀로 하나로만 쓰일 때, 또는 독립된 대표 이미지의 말 둘 정도가 같은 비중으로 대등하게 결합할 때 큰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은 음절과 함축된 의미를 가져야 하는 이른바 전문용어를 만들 때 유용한 방법이다. 그런데 여러 소리가 어울릴 때는 대표 이미지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감을 중시하고 풍부한 느낌을 전달할 필요가 있는 일상용어는 대표 이미지가 가지는 경직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말이란 자율적으로 흘러가면서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우리 나라처럼 이제 새로운 우리말 문화를 열어 나가야 할 처지에선 이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말은 본질적으로 가꿔 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어나 외국 발음도 연구를 하여 그 특징을 알아내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그 또한 연구해야 한다. 오늘날 영어가 우리말에 외래어로 들어오게 되면서 우리말의 발음도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영어의 [f] [v] 같은 발음을 외래어를 쓸 때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첫 소리로 ‘ㄹ’이 오는 말도 많아져서 ‘ㄹ’이 첫소리로 오는 것을 그렇게 꺼리지 않는 말이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두음법칙이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내 생각에 ‘ㄹ’이 첫소리로 오는 것은 서양말에서는 일반적인 것이며 ‘ㄹ’은 외국어에서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소리다. 우리말도 차차 다양한 발음을 자유자재로 쓰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볼 때, 영어와 같은 외국어의 발음에 자극을 받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영어 발음을 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말소리의 새로운 가능성에 많이 눈을 뜨고 있다.
다음으로 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해서도 역시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한글의 창제 원리, 구성 및 결합원리, 역사, 각 자모의 사용 빈도수, 각 자모와 의미의 연관성, 외국 문자와의 비교, 한글 로마자 표기 문제 등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특히 한글의 취약점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긴소리(장모음) 표기 문제, 시각성이 떨어지는 문제, 외국발음 가운데 표기하지 못하는 발음의 표기 문제(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산스크리트어 등),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 문제, ‘아이’ ‘에이’ 같은 이중모음을 한 글자로 쓰는 문제, 여러 음절인 말의 축약 표기 문제, 번다한 획수(특히 ‘ㅎ’, ‘ㄹ’)를 줄여야 하는지 하는 문제,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병용 문제, 필기체 등 자체의 개발 문제, 닿소리와 홀소리의 이름(‘기역 니은’)을 바꿀 것인지 문제(북한은 이미 바꿨다), 자판의 배열 문제, 컴퓨터 코드의 표준화 문제, 한글 문서인식 소프트웨어(OCR)개발 문제 등 앞으로 한글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글 자체에 대한 전문가들의 연구가 꼭 뒷받침되어야 한다. 영문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글자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글자의 새로운 가능성에도 점차 눈을 뜨고 있다. 우리말의 띄어쓰기도 영어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 한다. 한글 풀어쓰기도 영문자에서 시사 받은 점이 많이 있다. 글자의 시각성이라는 면에서도 영문자는 우리를 눈뜨게 했다. 또 영어에서는 기본 알파벳 이외에도 많은 부호(&, $, @, ₩ 따위)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고 있다. 특히 말이나 단어를 줄여 쓰는 방법이 발달되어 있다. 우리말에도 특히 많이 반복되는 부분(예컨대, ‘-ㅂ니다, -한다, -다, -ㄹ 수 있다, 그리고, 그러나, 또는, 앞의 책’ 같은 말)은 한 글자나 한 부호로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우리말은 높임말이 발달돼 있어 말의 음절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글자로 표기할 때는 짧게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높임말이 글을 쓰는 데는 매우 불편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높임말로 쓰면 맘대로 자기의 주장을 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높임말도 예삿말도 아닌 중성의 문장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즉, 표기는 중성으로 하고, 그 글을 읽을 때는 형편에 때라 예삿말로도 높임말로도 쓰일 수 있는 글을 말한다. 영어나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높임말과 예삿말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말하거나 글쓸 때 편리한 면이 분명히 있다. 우리도 말을 중성으로 할 수는 없겠지만 글로 쓰는 문체는 중성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불편한 곳에서 발명을 시작된다. 우리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고 늘어져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 글을 쓸 때에도 무엇이든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것을 잡고 늘어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우리말과 우리 글을 돌아보지 않았다. 관심만큼 우리말도 우리 글도 자랄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 글에 늘 마음을 두자.
이와 같이 갈음말과 누리한글을 만들기 위한 기초 연구를 위해서 모임 안에 각 과제마다 전문 분과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상설 기구가 되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기구가 있어서 거기서 전문가들이 말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갈음말 모임이 계속 기능을 해 가야 한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2) 갈음말과 누리한글 만들기 기본 원칙 제정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기초 연구가 끝나면 이를 바탕으로 실제 갈음말과 누리한글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먼저 기본 원칙을 세워야 한다. 관계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내가 무어라 할 것은 없지만 한두 가지만 적어 본다.
갈음말이 갖춰야 할 요건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소리도 좋고, 뜻도 좋고, 음절수도 좋아야 하겠다. 토박이말 최우선 원칙도 몰론 필요하다. 많은 원칙이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우리말은 아름답고 다양하게 가꿔 가되 청각성을 잃지 않는 말들이어야 한다는 것에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누리한글도 한글의 완벽한 표음문자성의 유지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제정
실제로 갈음말을 만들어 책, CD 등에 담아 집대성하는 것이다. 누리한글도 마찬가지다.
누리한글이 제정과 관련해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외국어의 발음을 죄다 적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음이나 모음을 만들어 내는 방법과 기존의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거나 변형시키는 방법, 옛날에 쓰다가 지금은 없어진 글자(ᅀ 같은 것)를 활용하는 방법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컴퓨터의 한글자판(두벌식의 경우)에는 많은 부분이 빈자리로 남아 있어 앞으로 큰 문제가 없다. 예를 들면 ‘˚’ 같은 부호를 한글의 각 자음이나 모음과 결합시키면(,처럼;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모양의 글자는 아니다. 컴퓨터로 내가 생각하는 모양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렇게 한 것뿐이다. 나는 ‘˚’과 ‘ㄱ’이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모양을 생각하고 있다.)
얼마든지(5배까지도) 자음 수와 모음 수를 늘릴 수 있다. 이 때 ‘˚’는 한글 두벌식 자판의 경우 <Shift+ㅁ>에는 왼쪽 위에 위치한‘˚’를 <Shift+ㄴ>에는 오른쪽 위에 위치한 ‘˚’를 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Shift+ㅁ>을 하고 곧이어<ㄱ>자판을 누르면 ‘’이 찍히고, <Shift+ㄴ>을 하고 곧이어 <ㄱ>자판을 누르면 ‘’모양의 자음이 찍히는 것으로 할 수 있다. ‘˚’의 위치를 위아래 왼쪽오른쪽으로 각각 조정해 배열해 보면 모든 한글 자음과 모든 한글 모음의 수는 4배 이상의 숫자로 늘릴 수 있으면서도 컴퓨터자판상 무리 없이 수용이 가능하다. 물론 컴퓨터가 아니라 실제 손으로 글을 쓴다면 더욱 간단히 이것을 실현할 수 있다(그리고 컴퓨터자판은 모아쓰기의 원칙상 어떤 것은 초성에 붙고 어떤 것은 종성[받침]에 붙는 등 일정한 원칙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컴퓨터 자판에서는 ‘ᄔ’은 글자의 초성에는 올 수 있으나 종성(받침)에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또 앞글의 종성과 뒷 글의 초성 사이에 혼란이 올 수 있다. 하지만 손으로 쓸 경우는 그런 제약이 없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글자의 개발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의 예이다. 이외에도 얼마든지 한글은 변형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용이하다.(‘오우’ ‘아이’ ‘에이’ ‘어우’ ‘아오’ 같은 것도 하나의 모음으로 수용할 수 있다.) 한글 개량을 시도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담은 책들도 이미 나와 있기도 하다. 이런 여러 전문가의 지혜를 모아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음과 모음을 결합시켜서 1만 자가 넘는 글자를 만들어 내는 한글의 과학성은 그 개량에서도 기하급수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하나의 개념이 새롭게 생기면 한자 한자 새로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한자와는 다르다. 한글은 전혀 새로운(창제 당시에 예상하지 못했던) 발음이 생겨도 자음이나 모음의 숫자를 한 두 가지만 개량시키거나 추가시키면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발음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한글에는 기본적인 음들이 기호화 돼 있기 때문에(ㄱ ㄲ ㅋ, ㄴ ㄷ ㄸ ㅌ, ㄹ, ㅁ, ㅂ ㅃ ㅍ, ㅅ ㅆ, ㅈ ㅉ ㅊ, ㅇ, ㅎ 처럼) 전혀 다른 소리가 생겨도 그와 가장 가까운 자모를 찾아내, 이것을 조금 변형시켜 표기할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이란 것이다. 그리고 한글은 단 한 번도 이런 발전의 기회를 제대로 가져 보질 못한 채 미개척의 글자로만 남아 있다. 오히려 창제 당시보다 글자의 자모수가 줄어들어 퇴보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한글을 세계화시키는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중국어의 경우도 한글을 쓰면 한어병음보다 훨씬 좋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아쓰기를 하는 우리 한글이 풀어쓰는 로마자보다 중국 한자의 특성에 맞는 것이다. 다만 우리 한글을 어느 정도 변형시켜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특히 혀말림소리(권설음 ; zh, ch, sh, r)를 표기하는 것과 이중모음을 한 모음으로 표기하는 것, 성조를 표기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이 문제는 크게 어렵지 않은 것인데 한국과 중국이 연구를 하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중국이 한글을 쓴다면 그것은 중화주의에 대한 크나큰 손상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은 세계 글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4) 갈음말과 누리한글의 보급
말이란 사회 각 분야에서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모든 분야에 걸쳐 갈음말이 쓰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갈음말을 보급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나는 갈음말 함께 쓰기(또는 ‘갈음말 나란히 쓰기’)를 제시하고 싶다. 한자병용이 아니라 갈음말 병용이랄까.
예컨대 교육 분야에서 모든 교과서의 외래어와 한자어에는 갈음말을 함께 쓰는 것이다. 한문, 영어, 컴퓨터, 과학, 음악, 미술 모든 교과서의 전문용어에 갈음말을 나란히 써넣는 것이다.
만약 갈음말 모임이 국가 기관이 아니라서 이런 정책을 뒷받침해 줄 수 없을 때는, 민간 차원에서 하나의 모범적인 교과서를 출판할 수도 있다. 이렇게 갈음말을 병기한 교과서를 내 놓으면 이것을 교과서로 채택하는 학교도 생길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갈음말이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밖의 법학, 불교, 기독교, 미술, 음악, 정치학, 경제학, 영문학, 일문학, 중문학, 철학, 의학, 컴퓨터 등 모든 전문 분야의 책에도 갈음말을 병기한 교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또한 국어사전, 전문용어 사전에도 갈음말을 병기하도록 만든다. 갈음말을 자동으로 검색하여 병기하거나 갈음해 주는 소프트웨어도 개발하여 보급한다.
이러한 갈음말 함께 쓰기는 국가기관에서 앞장서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민간단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각종 교과서와 전문 서적에 갈음말을 함께 쓰도록 모범 교과서나 모범 교재를 만들어 출판해야 한다.
Ⅵ. 사대주의와 민족주의
문화관광국에서 한자병용방침을 발표하자 홍콩, 일본 등 다른 한자 사용국에서 일제히 환영을 표하고 나섰다. 홍콩의 한 신문은 한글로는 담아 낼 수 없는 유교적인 동양문화가 있다며 우리 나라의 한자병용 방침을 환영한다 했다. 우리 나라 외무장관과 일본 외무장관의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한다. 거기서 양측은 지난 94년 김 영삼 전대통령과 호소카와 전총리가 한중일 3 국 한자 통일을 위한 협의회 개최에 합의했던 일을 되새기며, 3국간 회의를 조속히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일본측은 “공식 약자를 정할 거면 일본식으로 만들어 달라”는 농담도 건넸다 한다. 한자병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중일의 이러한 미묘한 기류 속에 우리는 서로의 문화적 우월감과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대해선 밑도 끝도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은 거의 우리 나라가 한자를 쓰지 않는 한글만 쓰는 나라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실제 한국에 와 보니 간판이고 도로 표지판이고 한자를 없고 한글만 있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에 종속된 나라임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을 그들이, 실제 한국에 와 보니 그들의 자존심인 한자를 쓰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문화적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서슴없이 한국에서 한자를 쓰지 않는 점에 불평을 터트렸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분명히 우리보다 한 수 아래일 텐데 말이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미국에 가서도 미국이 한자를 안 쓴다고 불평을 했겠는가. 우리를 얕잡아 보려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의식은 그들에겐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우월감도 아닌, 막연한 우월감이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은 무조건 동양에 관한 한 1등이어야 한다. 중국은 우선 제쳐놓아야 한다.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은 당연히 1등인 것 같이. 우리는 잘 해야 2등이다. 그리고 중국에 이어 2등이면 족하다. 앞으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우리는 한자를 잘 배워 놓았다가 때가 되면 남들보다 빨리 그 밑에 들어가 2등 자리를 꿰차야 한다. 한자를 안 배우면 중국에 이어 2등 하기가 어렵다. 뭐 이런 생각이다. 일본에 대해서도 패배 의식이 강하긴 마찬가지다. 일본이 한자를 쓰는 나라이니 우리도 써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일본이 하는 일은 다 옳다. 일본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식이다. 특히 기성세대 가운데 이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나의 생각이 전혀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 사람 치고 사대주의에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한자를 병용하자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중국 문화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중국 역사나 중국 고사를 인용하길 좋아한다. 이에 비해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라는 말만 들어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한자 히스테리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자병용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중화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그런 것이 많기 때문에 어찌 보면 둘 다 중화주의의 피해자이다. 중화주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푹 빠져서 그것이 편하다고 하는 쪽이나 그것을 지나치게 의식해 어떻게든지 벗어나려는 것이나 다 사실은 뿌리가 하나인 것이다. 어떤 뿌리인가. 그것이 바로 중국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이다. 한자병용론자들이나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 중국문화․중화주의에 대한 열등감에서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의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 본질은 같다. 사대주의가 우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제 이러한 열등감은 미국 같은 서양 선진국에 대해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신 사대주의라는 것도 이러한 문화 열등감에 뿌리박고 있다. 열등감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그런데 사실 열등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세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커다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그 결과 큰 인물이 되었다. 열등감이 없이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다고 한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민족적 열등감은 바로 민족적 우월감으로 표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다. 한글 자체가 우리 겨레의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물임을 잊어선 안 된다. 겨레의 글자생활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한이 뭉쳐서 한글이라는 보물이 나온 것이다. 세종대왕을 비롯한 한글학자들은 이러한 민족의 한을 한글이라는 훌륭한 창작물로 승화시켰다. 이 정신을 배워야 한다. 사대주의 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당당해져야 한다. 중국 하면 일단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 중국이 초일류 강국이 되면 그 밑에 들어가 안주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선 문화를 중국에 전파하여 중국을 일깨우는 겨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독교, 불교 모두 이젠 우리가 중국에게 가르쳐 줄 때이다. 옛날에는 우리가 중국에게 배웠지만 이젠 우리가 가르칠 때다.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라. 주인 의식을 가지라. 한자를 배우려 하지 말고 한글을 가르치려 하라. 중국 문화가 화려했다고는 하나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 이념에 중국 사상이 얼마나 기여했다고 생각하는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중국이 문화가 우수해서 동양 세계를 주름잡아 왔다고 단정하진 말자. 내 생각에 중국이 인류 문화에 기여할 만한 문화는 우리보다 나을 게 없다.
한자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돌아 보라. 말로만 나는 중화사대주의자가 절대 아니다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가 얼마나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을 해 왔는지 돌아 보라. 우리 토박이말은 얼마나 되는지, 우리 토박이말을 새로운 용어로 만들어 활용해 본 적은 있는지.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 <겨레말 갈래 큰사전>, <국어용례사전>, <한겨레 말모이> 같은 사전은 가지고 있는지. 그런 사전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지.
강 희안, 공 병우, 권 재일, 김 경석, 김 계곤, 김 두루한, 김 민환, 김 불꾼, 김 석득, 김 성배, 김 슬옹, 김 승곤, 김 정섭, 김 정수 김 종택, 김 차균, 남 기심, 류 제한, 류 중달, 리 의도, 문 제안, 문 효근, 박 병순, 박 종국, 박 지홍, 박 팽년, 밝 한샘, 배 우리, 백 용덕, 서 재극, 서 정수, 성 경린, 성 삼문, 손 보기, 송 현, 숨결새벌, 신 명균, 신 숙주, 신 태민, 안 송산, 여 영택, 오 동춘, 원 광호, 윤 물맑, 이 강로, 이 개, 이 규방, 이 대로, 이 돈주, 이 봉원, 이 선로, 이 승규, 이 현복, 임 경재, 임 종철, 정 동환, 정 인지, 정 재도, 조 재수, 주 시경, 최 기호, 최 두선, 최 항, 최 현배, 허 웅 같은 <예순 다섯 분의 한글 문화 인물>은 물론이고, 박 용수, 남 영신, 장 승욱, 이 오덕, 김 정섭 같은 분들의 이름은 얼마나 들어봤는지. 북한에서 토박이말을 살려 만든 말들에는 관심이 없고 북한이 한자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데만 관심을 가지진 않았는지.
한자 실력엔 자신이 있는데 정작 우리말 실력(말하기․듣기․글쓰기, 맞춤법, 토박이말 실력)은 형편없는 게 아닌지. 민족문화의 계승을 주장하고 유교 이념의 전승에는 앞장서면서 우리 소리(국악), 우리 역사(우리 겨레의 기원이나, 고조선 같은 고대사), 우리 민속 같은 것엔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우리 소리 한 대목 할 줄 아는 것이나 있는지. 나는 한자병용론자들이 우리말을 말하고 우리 전통을 얘기하고 할 자격조차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우리말이 한자말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마치 한자를 알면 우리말을 다 알고 잘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말 실력도 좋고, 우리 문화의 계승에도 적극적이다. 한자 실력도 물론 뒤질 게 없다. 우리말이 오늘날 좋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이분들의 몫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말을 발전시키고 가꿔 온 사람들은 이분들이다. 그들의 노력은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겨레는 뛰어난 겨레다. 그러나 중국 영향 때문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일본 사람들이 그리고 서양사람들이 우리의 독자적인 문화를 인정하는 데 그토록 인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에서조차 이미 과거의 유산이 돼 버린 유교적 사상이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국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중국에서조차 버림받은 한자(번체자)가 우리 나라에선 한 획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고 추앙 받고 있다(한자는 중국의 간체자가 보여 주듯이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 글자다. 간체자를 보라. 이것저것 뚝뚝 떼어 내도 훌륭히 제구실하는 글자가 되질 않는가). 우리 겨레는 바탕이 뛰어난 민족이었기에 이만큼 버텨 온 것이다. 과거에 중국 문화의 절대적 영향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적 불행이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중화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레 짐작으로 안 된다고 하며 출발점에서부터 우리를 주저앉히려 한다. 한글만 쓰기를 해선 우리말을 꾸려 갈 수가 없다고 단정짓고 있다.
한글이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려고만 한다. 어째서 안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또 노력을 기울여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냥 그럴 것 같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중국 문화를 벗어난다고?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안 될 일이라고 고개를 젓는다. 이모저모 따져 보고 그런 결론에 이른 게 아니다. 중화주의, 한자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의식일 뿐이다. 중국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한자를 버리고는 우리는 말글살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그 생각에 갇혀 다른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결론이 정당하다는 이유만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한자의 허울과 한자의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라. 말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유연성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표음문자를 쓰는 미국 사람이 한자를 모른다고 문화를 꽃피우지 못하는가? 지금 그 누가 한자를 모른다고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낀단 말인가. 한자를 모르는 우리 초등학생 조카도 언어생활에 아무 불편이 없다. 그 아이가 뭘 몰라서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하지 말라. 말이란 그런 것이다. 말이란 그렇게 신비한 것이다.
지난 50년간 우리 나라에 펼쳐진 언어생활, 글자생활의 변화는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 역사상 90% 이상의 저서가 이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 그 중심에 한글전용 정책이 있는 것이다. 한글혼용론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과연 ‘어린이’ ‘도우미’ 같은 말이나 ‘서울’같은 땅이름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아니 한글 자체가 태어날 수조차 있었겠는가. 서울을 그 전처럼 경성이라고 하고 京城이라고 적으며 서울대학교를 경성제국대학교라고 불러야 전통을 계승하고 문화를 지켜 가는 것인가. 서울이라는 우리 토박이말을 되살려 이 시대에 우리 문화로 가꿔 가는 것이 진정한 전통의 승계요 문화를 지켜 가는 길이 아닌가. 경성이란 말을 고집하고 그 경성(京城)이 경성(硬性)과 뜻이 헷갈리므로 한자를 병용하자거나 혼용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서울이란 말을 우리 나라 수도의 이름으로 정하고 국민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데 엄청난 세월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가. 일단 서울이란 말로 수도의 이름을 해야겠다는 방향만 제대로 정하고 나면 그 시행과 정착은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서울로 하겠다고 결정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금 누가 서울이라고 지명을 고쳤다고 경성이라는 옛 이름과 혼란을 일으킨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서울의 역사성이 훼손되어 전통 단절이 일어난다고 하겠는가. 최근에도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꿨다(초등학교도 한자말이니 잘된 이름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예를 드는 것이다. 한자중독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무슨 혼란이 그리 심한가. 벌써 초등학교는 자연스러운 말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란 바로 이러한 무한한 유연성이 있는 것이다. 왜 말의 이런 가능성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무시하는가. 세상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 이치다. 변하지 않으려 해도 변할 수밖에 없다. 말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래야 말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지녀 갈 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은 너무도 다른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면 말도 달라지고 그 말을 담는 그릇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글은 우리가 한글보다 더 좋은 글자를 발명해 내지 않는 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글자는 하나가 원칙이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하나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만 가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두 개 이상 가지는 것은 그 나라의 언어나 인종 등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한글과 한자 두 가지를 가지는 것은 이상적인 것 아니라 이상한 일일뿐이다. 한자의 장점만 보고 그 장점만 쏙 빼다가 우리 글로 만들 수 있다는 엉뚱한 환상에 빠지지 말라. 한자는 장점만 따로 빼올 수가 없고 한자가 가는 데는 한자의 단점도 반드시 따라온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그리고 북한도 한글전용이 실패임을 자인하고 한자를 우리 나라 초등학교 4학년에 해당하는 시기부터 교육시키고 있다고 얘길 한다.
그러면서 마치 북한에서는 국어 교과서가 국한문 혼용으로 돼 있다는 식으로 북한의 한문 교과서를 국어 교과서인 양 제시하곤 한다. 북한에서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남한이 계속 한자를 사용하므로 통일을 대비해 배우는 것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일 뿐 아니라, 사실상 외교적으로 중국 이외의 국가와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중국의 눈치를 안 살필 수 없었던 외교적인 고육지책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이 전통의 계승이나 일상 언어생활에서 한문을 알지 않고는 불편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 한자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숨기고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속이려 한다. 그러나 국민들을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말라. 한자만 가지고 특권층이나 향유하며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부려 왔던 한자 시대가 아니다. 우리 국민은 이제 한글의 혜택을 입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는 국민이 이미 아닌 것이다. 한자 교육을 계속 시켜 왔다면 지금과 같은 국민 수준이 되었겠는가. 나 또한 평범한 시민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생각이 없다.
우리말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참다운 우리말을 가꿔 나가는데 밤을 새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갈 생각은 안하고 중국 사람들이 할 일까지 나서서 하려 하고 있다. 우리말 토박이말을 살려내는 데는 관심도 없으면서 한자에는 죽자 사자 매달리고 있다. 써 놓은 글들을 보라. 한자는 어디서 유래됐고 한자의 구성 원리는 어떻고 .... 그러고도 오히려 중국 사람보다 뛰어난 일을 한 것처럼 자랑을 한다. 한자 중독도 이 정도면 아마 중국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러고도 한자 중독자가 아니라고? 정신차려야 한다. 참다운 한자 실력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 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한자성어를 들먹여야 직성이 풀리고 한글로 써도 될 것을 굳이 한자로 써야 지식인이라고 느껴지는가. 허울을 벗어라. 어설픈 한자 실력을 가지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글을 한시니 열반송이니 오도문이니 내놓지 말라.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이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중국어를 전공하는 중어중문과 교수들도 국가시험을 출제할 때 자기가 직접 중국어 문장을 작문하질 못한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중국인이 써 놓은 문장을 베껴다가 놓고 그것을 해석하게 한다. 중국어 작문도 중국인이 써 놓은 문장을 자기가 먼저 해석한 다음 그 해석문을 문제로 내, 거꾸로 다시 중국어로 작문케 하는 것이다. 그만큼 남의 나라 말은 제대로 알기 어렵고, 틀리지 않고 써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자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의 특권 의식과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명한 세상을 원하는가. 열린 세상을 원하는가.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원하는가. 그러면 한자를 버려라. 한자를 교육만 일찍 시키고 교육만 열심히 시키면 누구든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글이라고 제발 우기지 말자. 국민의 95 % 이상 깨우칠 수 없는 글자라고 생각하면 미련을 버려라. 세상이 바뀌었다. 오늘날은 우리 고유의 토박이말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고, 그런 글을 쓸 줄 알아야 지식인이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까. 거의 없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우리 토박이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조차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됐을까. 그것은 우리의 우리말 교육이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글짓기를 중심으로 많은 토박이말들을 이용해 말글살이를 하도록 가르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법 교육이나 입시 위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교육만을 계속해 온 때문이다. 그리고 한자를 쓰던 과거에는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 데 정력을 쏟다 보니 실제로 말하고 글쓰는 교육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자로 쓰여진 글이란 것들이 현실의 입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으니 우리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익힌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한자를 하나도 모르는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말을 더 술술 잘한다. SBS<좋은 세상 만들기>를 보라.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도저히 우리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말들을 아무 막힘 없이 술술 하신다. 오히려 한자께나 배웠다는 노인들이 억지로 문자 좀 쓰려 떠듬대는 바람에 보는 이까지 불편하게 하곤 한다. 이젠 우리말을 제대로 듣고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우리말 교육의 정열을 모아야 할 때이다. 한자 같은 글자를 익히는 데 정열을 쏟고 있을 때가 아니다. 글자를 익히는 것은 한글 하나로 간단히 끝내고 이제는 한글을 이용해 어떻게 우리말을 제대로 부려쓸 것인지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자 한 글자를 배울 시간에 우리 토박이말 하나를 배우는 것이 진정한 우리말 교육이 아니겠는가.
한글은 앞으로 우리 겨레의 말글살이를 이끌어 가기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연모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말글 정책은 한글만 쓰기로 단단히 굳히고 이 점에 대해선 다신 거론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한글만 쓰기를 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그때그때 우리의 역량을 모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쫓겨나는 한자어의 공백을 재빨리 메우기 위해 우리 토박이말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말들을 캐내고 다듬고 가꿔 나가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한글 자체의 개선과 발전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한글 자체의 발전 문제만 해도 할 일이 많다. 한가하게 한자병용 논란을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통일을 대비해서도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분명한 사실은 한겨레가 세계 문화에 기여하고 세계 문화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면 한글은 그 맨 앞자리에 자리할 것이란 점이다.
Ⅶ. 맺음말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책 당국은 한자병용 방침이 지금 국민의 반대에 부딪쳐 있지만, 요 시기만 넘기면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국민들은 늘 그때만 떠들썩하지 일단 그 시간만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존재니까 하면서 말이다. 한자병용에 대한 반발도 배타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문화관광부는 문화 독단에 빠져 있다. 문화 독단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근거가 궁색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굳이 그럴듯한 근거를 찾는다면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께서 좋아하시는 일이라는 점일 것이다. 놀라운 근거다. 참 현실적인 근거다. 아직도 위만 보고 일을 하는 모양이다. 국민은 여전히 눈에 보이질 않는다.
한글만 쓰기는 결코 우매한 사람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말을 가장 사랑하고, 우리말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한글만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만큼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들은 내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말을 좀더 풍성하고, 좀더 아름답게 가꿔 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의 노력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선 안 된다. 우리 겨레가 새털 같은 한글 날개를 달고 21세기를 향해 날아오르려 하는데 자꾸 바지 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말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 말라.
한자병용 방침을 마땅히 철회해야 한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고 공휴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자병용에 대한 반발을 얼버무리는 도구로 한글날을 이용하지 말라. 속보이는 일 아닌가. 국민을 더 이상 무시하면 국민의 힘이 어떤 것인지 곧 보게 될 것이다.
이제 21세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한글로 새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 역사는 도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글로 열어 가는 우리말의 역사는 우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누리마로’란 말을 아는가.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21세기 우리 한겨레가 한글을 온 누리에 퍼뜨려 우뚝한 누리마로가 돼야 하지 않은가. 꿈꾸는 이여, 한글의 날개를 펴라. 누리마로의 힘찬 날개를.
마지막으로 김 정섭 님이 쓰신 <아름다운 우리말 찾아 쓰기 사전>의 머리말로 이 글의 맺음을 갈음하고자 한다.
「사람다운 삶과 겨레다운 삶, 그리고 주인 되는 삶을 누리면서 앞선 나라 사람들과 어깨를 겯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그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려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겨레 얼이요 겨레 줏대요 겨레 문화다.
겨레 얼을 살지게 하는 기틀은 겨레 문화고 겨레 문화가 자라는 텃밭은 겨레말이다. 일찍이 먼저깬이[선각자]들이 ‘한글만 쓰기’와 ‘쉬운 말 쓰기’를 펼쳐 온 까닭이 여기에 있고, 이제 다시 ‘우리말 쓰기’를 내세운 것도 이런 뜻에서다.
어떤 이는 겨레말을 쓰고 싶어도 없어서 못 쓰고, 한문자와 한자말을 버리면 말글살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겨레말은 어렵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오천 년을 한결같이 겨레말로 살아온 우리다. 겨레말이 없을 턱도 없고,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다면 어려울 까닭도 없다. 오랫동안 한자말에 억눌리고 일본말에 짓밟히고 서양말에 밀려 우리 말살이에서 멀어진 옰이다.
그 옛날 겨레말 한 가지로 옹근 삶을 누리던 모둠살이에 중국글자가 들어오면서 우리 겨레는 문자를 쓰는 양반과 겨레말을 쓰는 상놈으로 위아랫물지고 겨레 얼이 흐려져서 겨레 삶은 중국 문화 종살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뒤 왜놈들과 손잡은 든사람들[지식층]이 일본말글을 앞세워 힘과 돈을 독차지하니 마침내 줏대마저 꺾이게 되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한자말과 일본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롭게 몰아친 서양 바람에 휘둘리어 오늘날 나날말[생활 용어]은 겨레말 얼굴에 한자말 몸뚱이, 일본말 팔다리, 그리고 서양말 옷을 입은 몰골로 바뀌기에 이르렀다. 중국닮기, 일본본받기, 서양흉내내기에 매달려 온 옰이다.
나라말은 나라 앞날을 여는 연모요, 겨레 삶을 가꾸는 바탕이다. 따라서, 나라말 자리에서 쫓겨난 겨레말을 찾고 갈고 닦아서 제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 나라말 텃밭을 차지하고 있는 남의 말을 솎아 내어 겨레말이 자라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남북한 말글살이가 달라졌다고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고 말다듬기에 나서야 하고 그 열쇠는 겨레말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세종 큰임금께서 한글을 펴신 오백쉰한 돌을 맞이하여 말글살이 속에 켜켜이 스며 있는 종살이 얼룩을 씻어 내고, 나날살이[일상 생활]에서 흔히 잘못 쓰는 말글을 바로잡아 겨레 얼을 맑히고 잃어버린 우리말을 되찾아 겨레 줏대를 세워서 겨레 문화를 꽃피우는 일에 작은 디딤돌을 놓는 마음으로 이 사전을 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