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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학교 장년교과 보충교재(예언의 신 인용구들/Ellen G. White Notes)
(1) 이 자료는 대총회 안교부가 매기마다 안교 장년교과와 함께 매일의 공부 내용과 연결하여 새로운 통찰력과 신선한 관점을 얻도록 돕기 위해 출판하는 보충교재 [Ellen G. White Notes for the Sabbath School Lessons]-예언의 신 인용구들을 한글판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는 예언의 신 인용구는 게시자가 번역함)
(2) [활용방법] 매일의 교과를 공부한 후, 그날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결하여 묵상하면 큰 유익이 됩니다.
<2024년 3기 – 마가복음>
제3과 논쟁
(Controversies)
<7월 13일/안, 서론>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지체장애인[중풍병]의 치료가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는 마치 하늘이 열려 더욱 좋은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 것과 같았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이 발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짐을 마치 새의 깃털인 양 가볍게 지고서 군중을 뚫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물러서서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 사람을 응시하며, 저희끼리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눅 5:26)라고 가만히 속삭였다.
불과 얼마 전에 가족들 앞에서 천천히 운반되어 갔던 그 사람이 침상을 가뿐히 들고 돌아오자 고침을 받은 지체장애인[중풍병]의 집에는 큰 기쁨이 넘쳤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위에 모였으나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 그 집에서는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고 고통받는 자에게 힘을 주신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생애를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되었다. 어떤 의심도 그들의 믿음을 흐리게 하지 않았고, 어떤 불신도 어두웠던 그들의 가정에 빛을 비추어 주신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깨뜨리지 못하였다.(치료, 78~79)
◎ 만약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만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다. 그분은 그분의 새 교훈의 술을 담을 새 병들을 택하셨고, 어부들과 배움이 없는 신자들을 세상에 그분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로 삼으셨다. 아직 그분의 교훈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것 같았지만 실상은 태초부터 가르쳐 오신 것에 대한 깊은 뜻을 계시한 것이었다. 그분의 계획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삶의 길잡이로서 분명하고 순전한 진리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더하지 말아야 하고, 강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도 말아야 하였다. 성경의 분명한 교훈에 신비적 해석을 가하지도 말아야 하며, 어떤 인간이 만든 이론을 세우기 위하여 신학적 지식을 끌어오지도 말아야 하였다.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 성스럽고 중대한 진리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반면에 인간의 이론들만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된다.(화잇주석, 마 9:17)
◎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사이에 아주 변덕스럽고 겉치레의 겸손이 많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를 정복하려고 단단히 결심하고 자신들을 가능한 한 낮은 위치에 둔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자력으로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그다음에 밀려오는 칭찬이나 아첨의 파도가 그들을 휩쓸어 버린다. 그들은 즐겨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분은 그들을 통하여 일하실 수 없다.(마음 품성 개성 1권, 39)
<7월 14일/일, 중풍병자를 고치심>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가난과 질고 가운데 있던 지체장애인[중풍병]이 구주께 들려 왔을 때, 처지는 너무나 위급하여 한순간의 지체도 허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미 신체에는 와해작용이 진행 중이었다. 그를 데려온 이들이 직접 그리스도 앞에 나갈 수 없음을 보았을 때, 그들은 즉시로 지붕을 뜯고 그 환자가 눕혀진 병상을 아래로 달아 내렸다. 우리 구주께서는 보시고 그의 형편을 완벽하게 이해하셨다. 그분은 또한 이 가련한 사람에게는 신체적 고통 이상으로 더 고통스러운 영혼의 질병이 있음을 아셨다. 그분은 그가 여러 달째 짊어져야만 했던 최대의 부담은 죄악들이었음을 아셨다. 백성의 무리는 그리스도께서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보기 위하여 거의 숨을 죽이고 기다렸으며, 그분의 입술에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놀랐다.
이것은 병으로 고생하는 그 사람이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짐이 그를 얼마나 무겁게 짓눌렀는지 거의 편안함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마음은 평강과 행복이 회복되고, 고통 중에 있는 신체도 이제 치유될 수 있다. (3증언, 168~169)
◎ 랍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보기 위해 궁금히 여기면서 기다렸다. 그들은 이 사람이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한 사실과 그들이 그에게 소망과 동정을 거절한 사실을 회상하였다. 그들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들 앞에 있는 이 환자를 보았을 때 이런 일들이 새롭게 그들의 마음에 떠 올랐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이 광경을 관심 있게 주목하고 있음을 느끼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공포를 느꼈다. …
그분의 시선이 그들에게 고정되자 그들은 그 시선 아래서 움츠려 물러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그 환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다. …
바리새인들은 놀라움으로 말문이 막혔고 패배감에 짓눌렸다. 그들은 이곳에서는 그들의 질투심이 군중을 선동할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 버렸던 그 사람에게 나타난 놀라운 이적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감명을 주었으므로 잠시 랍비들은 잊혀졌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렸던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은근한 위엄의 태도는 그들의 오만한 태도와는 뚜렷이 대조되었다. 그들은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더 우월한 존재의 임재를 깨닫기는 하였으나 고백은 하지 않았다. …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침묵시키기 위한 새로운 술책을 꾸며내기 위하여 … 베드로의 집에서 떠나갔다.(소망, 268~271)
<7월 15일/월, 레위를 부르심과 금식 문제> 예언의 신 보충자료
◎ 마태는 겸손하게 그에게 주신 영예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자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구주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 친구들은 사업 친구, 재미를 보러 다닐 때의 친구, 죄를 지을 때의 친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처럼 죄가 많고 가치 없는 그를 부르셨다면 그분은 자기보다도 휠씬 더 나은 친구들을 틀림없이 받으실 것이라고 마태는 생각하였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나누어 갖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마태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멸시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축복의 구주시라는 것을 알려주기를 원하였다. …
예수님은 그런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한 번도 거절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의 앞에 항상 있는 목적은 마음을 그분에게로 이끄는 대화를 통해서 듣는 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분의 모든 행동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목적을 갖고 계셨으며 이런 때에 그분은 때에 알맞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행동 양식으로 그분이 선포하신 것은 세리와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면전에서 내치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함께 대화를 나누심으로 그들을 존귀케 하셨다는 간증을 할 수 있었다. (화잇주석, 눅 5:29)
◎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관원들에게서 그분의 새 포도주를 담을 병들을 찾지 못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로부터 돌아서셔서 겸손한 이들에게로 가셨는데 이들의 마음속에는 질투도 탐심도 자신의 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이키기를 거부했으나 비천한 어부들은 거룩하신 교사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관계를 맺었을 때 그들의 품성은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이 아직 알지 못했던 위대하신 교사에게서 가르침 받기를 원하였다. 제자들은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그분의 왕국의 새 포도주를 부을 수 있는 새 병들이 되었다. (높임, 259)
◎ 랍비들은 하나님께 범죄 한 자들이 멸망될 때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멸망시키는 일이 하나님께는 “기이”(사 28:21)한 일이라고 가르치셨다. …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모든 사람은 그분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 일을 등한히 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도 이 일을 등한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
그대가 장래성도 없고 매력도 없어 보이는 자들에게서 돌아설 때, 그리스도께서 찾고 계시는 영혼을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가? 그대가 그들에게서 돌아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들에게 그대의 동정과 도움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예배 시간마다 거기에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갈망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비록 부주의한 생활을 하는 것같이 보일지 모르나 저희는 성령의 감화에 무감각하지 않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수 있다. (실물, 190~191)
<7월 16일/화, 안식일의 주인>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탄은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힘썼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탄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날의 준수는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하였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소망, 283-284)
◎ 유대 교사들은 그들의 성경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구주의 답변 속에는 그들이 성경에 무지하다는 은근한 책망이 들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 먹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 … (눅 6:3~4; 막 2:27~28).
만일 다윗이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떡덩이를 먹어서 자기의 허기를 채운 것이 정당하다면 제자들이 거룩한 안식일 시간에 곡식 이삭을 잘라 그들의 필요를 채운 것도 정당하였다. …
이 세상에서 하나님 사업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으므로 이 사업을 성취하기 위해 안식일에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안식일의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 … 이라고 선언하심으로 그분의 논증을 끝내셨다. (소망, 285)
◎ 내가 우리 모든 교인과 모든 참된 선교인과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는 모든 사람과 안식일에서 그들의 발길을 돌이킨 모든 사람에게 이사야 58장의 기별을 생각하라고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이 장에서 명령한 자선사업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이 시대에 행하기를 바라시는 사업이다. 그것은 그분께서 직접 명하신 사업이다. … “너는 역대에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표가 되고 기념일이 되는 제칠일 안식일은 죄악의 사람에 의하여 바뀌어졌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 중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특별한 사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끝이 가까워질수록 이 사업은 더욱 긴급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구호, 33-34)
<7월 17일/수, 샌드위치 구조 이야기(1)>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모여들었다. 그분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여, 그들 중에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청중들은 홀린 듯이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화나게 했다. 저들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교사의 말씀을 너무나 열중해서 들었기 때문에 시기심으로 가득 찼다. 저들은 군중을 붙잡는 그분의 위력을 깨트리기로 결심했다. 저들은 그분께서 죄 가운데서 났으니,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느니 하면서 그분의 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요 15:25; 시 69:4 참조)라고 한 말씀이 성취되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만인 가운데 가장 위대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을 비방하고 핍박했다. (하늘을 향하여, 325)
◎ 자비의 초청을 무시하고 은혜의 성령을 멸시한 자들만큼 마음이 강퍅한 자는 없다. 성령님께 대항하는 가장 보편적인 죄의 표시는 회개하라는 하늘의 초청을 완강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매 발걸음은 구원을 거절하고 성령을 거스르는 죄의 길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유대 백성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였다. 우리도 자비의 초청을 거절함으로 그와 똑같은 죄를 범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는 사탄의 대리자들 말을 들을 때, 생명의 임금을 조롱하고 사탄의 회와 하늘 우주 앞에서 그분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같이 행하는 한 그 사람에게는 소망도 용서도 없으며, 마침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려는 모든 갈망조차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소망, 324-325)
◎ 무엇이 성령님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가? 그것은 고의적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사탄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하나님 성령의 특별한 역사를 증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그 일이 성경과 일치된다는 것과 성령께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그의 마음에 증거해 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 그는 그가 이전에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정했던 것이 사탄의 능력이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령님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성령님을 거역하고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통로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즐겨 그들에게 주신 증거를 부인함으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비치고 있던 빛을 꺼 버린다. 그 결과로 그들은 어둠에 묻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말씀, 곧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3)라고 하신 말씀이 입증된다. 이 죄를 범해 온 사람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품성을 나타낼 환경을 만나서 그들이 어떤 형태의 정신에 속한 사람인지를 보이게 될 때, 그들이 원수의 땅에 있다는 것 … 이 발견될 것이다. (5증언, 634)
<7월 18일/목, 샌드위치 구조 이야기(2)> 예언의 신 보충자료
◎ 요셉의 아들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사업에 대하여 거의 공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분의 생애와 활동에 관하여 그들이 들은 소식은 그들을 놀람과 경악으로 가득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온밤을 기도로 새우시며, 종일토록 큰 군중에 둘러싸여 잡수실 만한 시간도 얻지 못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의 친구들은 그분께서 끊임없는 활동으로 자신을 지치게 만들고 계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설명할 수 없었으며 그분의 이성이 안정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의 형제들은 이 소식을 들었으며 그분께서 사탄의 능력을 빌려 사귀를 내쫓는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도 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임한 비난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과 이적이 어떤 소동을 일으켰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대담한 말씀에 놀랐을 뿐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들은 이런 모양의 활동을 중지하라고 설득하든지 강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머니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이용하면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그분을 설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들과 협력하도록 마리아를 부추겼다.(소망, 321)
◎ 예수께서 여전히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은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한다는 기별을 전했다. 그분께서는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셨으므로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은 다 인간적인 혈육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로 그분과 연합하였다. 그들은 그분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자로서 육친 관계에 의한 것 이상으로 더 가깝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분의 형제들은 그분과 맺어진 관계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할 것이었다.(소망, 325)
◎ 여기저기서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양심의 신념에 충실하고 홀로 서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경계선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한편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고 다른 편은 전통이나 사람들의 말 위에 선다. …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셨고 우리가 기도하는 평안은 진리에서 난 평안이요, 분열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 평안이다. 겉으로는 전쟁, 싸움, 질투, 시기, 적의 그리고 쟁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세상이 주거나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다. (높은 부르심, 328)
<7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언의 신 보충자료
◎ “그리스도께서 통제하심” (1기별, 83~84)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으나 가버나움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였으며 그분은 그들 가운데서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위대하신 의원으로서 우리가 육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질병에 걸렸을 때 찾아뵐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바람과 파도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하고 계신 사실을 증거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시다. 그분께서 굴욕을 당하고 계신 때에도 모든 정사와 권세들이 그분께 복종하였다. …
왜 우리는 신령하신 의원에 대하여 더 큰 믿음을 행사하지 않는가? 주님께서 지체장애인[중풍병]을 깨끗이 낫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그분께 나오는 자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행사하실 것이다. 우리는 더욱 큰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백성들 사이에 믿음이 결핍된 것을 볼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똑바로 찾아가 우리의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을 그분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다. 아, 나는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려고 했던가! 저들은 믿음을 행사하기 위하여 극도의 흥분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저들이 해야 할 일이란 사람들 상호 간의 말을 믿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꼭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분의 허락을 잠잠히 의뢰하라. 주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내게 말씀하셨으니 주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지 말라. 확고히 신뢰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시다. 그대들의 하늘 아버지께서 미쁘신 분인 것처럼 믿음으로 행동하라. …
사람들은 새로운 개척지에서 진리를 선포하도록 임명을 받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저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금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저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저희 사업을 통해서 만나는 불쌍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자금이 있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저들의 자선적 행위는 진리를 선포하는 저희 노력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불쌍한 자들을 자진해서 도우려는 저들의 태도는 도움을 받는 자들에게 고마운 뜻을 품게 하고 천국의 인정을 얻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실한 교역자들은 반드시 교회의 깊은 동정을 받아야만 한다. 주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저들의 사업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자는 없다. 하나님의 사업에서 각자는 해야 할 직분을 맡았다. 모든 사람의 연합은 각자의 사업을 힘 있게 해줄 것이다. 믿음과 사랑과 교회의 연합 정신이 점점 강화될수록 저들의 영향력은 확대될 것이며 언제나 저들은 이 영향권의 가장 먼 한계에 이르기까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계속 십자가의 승리를 확장시켜야 한다.
◎ “안식일” (소망, 281~289)
안식일은 창조시에 거룩히 구별되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기원은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욥 38:7)던 때이다. 평화가 세상을 조용히 덮었으니 이는 땅이 하늘과 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완성된 사업을 보고 기뻐하심으로 안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쉬셨기 때문에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 즉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구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날을 아담에게 휴식의 날로 주셨다. 안식일은 창조 사업의 기념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표징이었다. 성경은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다”라고 말한다. “만드신 것”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선언하였다(창 2:3; 시 111:4; 롬 1:20).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그리고 안식일은 창조 사업의 기념물이므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표징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생각을 천연계로 이끌고 우리가 창조주와 교제하도록 한다. 새의 노랫소리와 산들거리는 나무와 바다의 음악 소리에서 아직도 우리는 날이 서늘할 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담소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연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때 위안을 받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 곧 사람에게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다음의 노래를 읊게 한 것은 바로 이 사상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시 92:4~5).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않으시며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것이 천연계 가운데 쓰여진 기별이며 안식일은 이것들을 기억하도록 지정되었다. 주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안식일을 성별하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면서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40:18~29, 41:10, 45:22; 겔 20:20).
안식일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구현되어 있지만 이때 처음으로 안식의 날로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시내산에 오기 전에 이미 안식일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어떤 사람들이 안식일을 더럽혔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견책하시면서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출 16:28)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에덴에 살았던 아담에게 알려졌으며 십계명의 다른 명령과 같이 폐할 수 없는 의무에 속한다. 넷째 계명이 그 일부를 이루는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이 존속하는 한 안식일은 창조주의 능력의 표징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덴이 다시 지상에 회복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의 날은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해 존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매 안식일에” 영화롭게 된 새 땅의 주민들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마 5:18; 사 66:23).
유대인들에게 위탁된 제도 중에 안식일만큼 그들과 주변국들을 철저하게 구별시킨 제도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준수로 그들이 그분의 경배자로 일컬어지도록 계획하셨다. 안식일은 우상숭배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참하나님과 연결된 표징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이 거룩하게 되어야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였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명령이 이스라엘에게 내려졌을 때 여호와께서는 또한 그들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8, 22:31). 이렇게 되어야만 안식일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경배자로 구별(區別)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사탄은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힘썼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였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탄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날의 준수는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하였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랍비들이 무자비한 적개심을 품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예수께서는 결코 그들의 규례에 순응하는 것처럼 행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면서 바른 모본을 보이셨다.
어느 안식일,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이 예배 장소에서 돌아오면서 익어가는 곡식밭을 통과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일을 늦은 시간까지 계속하셨다. 밭 사이를 지날 때 제자들은 밀 이삭을 모아서 손으로 비빈 후에 낟알을 먹기 시작하였다. 다른 날이었다면 이런 행위는 아무런 비평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까닭은 곡식밭이나 과원이나 포도원 사이를 지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따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신 23:24~25 참조). 그러나 안식일에 이렇게 행하는 것은 신성 모독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곡식을 따 모으는 것은 일종의 추수일 뿐 아니라 손으로 그것을 비비는 것은 일종의 타작이었다. 그러므로 랍비의 의견대로라면 그것은 이중의 범죄였다.
정탐꾼들은 즉시 예수님께 불평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베데스다에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아들 됨을 강조하시고 또한 그분이 하늘 아버지와 일치되게 일한다고 선언하심으로 자신을 변호하셨다. 이제 제자들이 공격을 받자 예수께서는 그분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이 안식일에 행한 행위의 실례를 구약에서 찾아 상기시키셨다.
유대 교사들은 그들의 성경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구주의 답변 속에는 그들이 성경에 무지하다는 은근한 책망이 들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 먹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눅 6:3~4; 막 2:27~28; 마 12:5~6).
만일 다윗이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떡덩이를 먹어서 자기의 허기를 채운 것이 정당하다면 제자들이 거룩한 안식일 시간에 곡식 이삭을 잘라 그들의 필요를 채운 것도 정당하였다. 더욱이 성전 안의 제사장들은 다른 날보다도 안식일에 더 많은 일을 행하였다. 세속적인 사업에 그런 노동을 하면 그것은 죄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의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사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능력을 가리키는 의식을 집전하였으며 그들의 노동은 안식일의 목적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셨다. 그리스도의 사업을 하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안식일에 이 사업의 성취에 필요한 일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과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으뜸가는 일임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으므로 이 사업을 성취시키기 위해 안식일에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안식일의 율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 곧 모든 문제와 모든 율법 위에 계신 분이라고 선언하심으로 그분의 논증을 끝마치셨다. 이 무한하신 심판관께서 제자들이 범하였다는 바로 그 율법에 호소하심으로 그들에게 무죄를 언도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원수들을 꾸짖는 일로 이 문제를 종결짓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눈이 멀어서 안식일의 목적을 오해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무정한 의식들은 하나님의 참된 경배자들의 특징이 될 참된 고결함과 온유한 사랑의 결핍을 보충해 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다시 반복하셨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제사의 목적은 사람들을 구주께 이끌어서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사랑의 봉사이다. 이것이 결여된 채 행하는 의식의 단순한 반복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 안식일 역시 그러하다. 안식일은 사람들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제정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피곤한 의식에 골몰하여 있을 때 안식일의 목적은 훼손되었다. 안식일을 단지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은 헛수고였다.
또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손이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지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구주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범죄자로 여김을 받을 것을 잘 아셨으나 주저 없이 안식일을 가로막은 유전적 요구의 벽을 무너뜨리셨다. 예수께서는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신 후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며 생명을 구출하기를 등한히 하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 한 격언이었다. 이같이 예수께서는 랍비들이 견지한 입장에 서서 대항하셨다.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4~5).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0~12)라고 대답하셨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난처한 처지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 두려워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그리스도께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유전을 범하기보다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었다. 한편 짐승은 구출해 주었는데 이는 버려둔다면 소유주가 손실을 당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더 큰 배려를 하였다. 이것은 모든 거짓 종교가 하는 일을 설명하여 준다. 이런 종교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을 야수보다 못한 존재로 타락시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종교마다 창조 시에 그분의 소유였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람에게 회복될 영광을 사람에게서 속여 빼앗는다. 거짓 종교마다 그 신봉자들에게 인간의 필요와 고통과 권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도록 가르친다. 복음은 인류를 그리스도의 피로 산 존재로 높이 평가하며, 사람의 필요와 고통에 자애로운 관심을 보이라고 가르친다. 주께서는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 13:12)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그들에게 드러내셨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구하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시는 반면에 그들은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그분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는 것보다 그들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나은 일인가? 하나님의 성일에 모든 사람에게 인자한 행실로 표현되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보다 마음에 살의를 품는 것이 더 의로운 것인가?
예수께서는 손이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유대인의 관습을 정죄하셨고 넷째 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연의 모습대로 살리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무의미한 제한들을 쓸어버리심으로 안식일을 존귀하게 하신 반면에 예수님께 대해 불평의 말을 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성일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정당화하셨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들은 실상 트집 잡던 유대인들이 하던 것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로써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노라”(요 15:10)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증언을 부정한다. 구주나 그분의 제자들 중 누구도 안식일의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산 표본이셨다. 그분의 생애 가운데서 율법의 거룩한 명령을 범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분을 정죄하려는 기회를 찾던 증인들을 바라보면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구주께서는 부조들과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폐지하려고 오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이 대리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의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 그러나 이 무한히 귀중한 보석이 제 위치에 놓이지 않았다. 그 귀중한 빛은 오류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 왔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오류의 상황에서 벗어나 진리의 틀 속에 놓이기를 원하셨다. 오직 거룩하신 손만이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오류와 관련됨으로 진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의 사업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 진리를 둠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후 4:15; 고전 3:22~23).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그 일부를 이루는 십계명의 율법을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으로 주셨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신 6:24)니라. 그리고 시편 기자를 통하여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2~4)라는 기별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사 56:6~7)라고 선언하셨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교훈과 안위로 차 있다.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안식일은 주의 날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께 속한다. 이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요 1:3)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안식일도 그가 지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안식일은 창조 사업의 기념물로 구별되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창조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가리킨다. 안식일은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붙드시는 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분께서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었다”(겔 20:12)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능력의 표징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성결하게 하시는 능력의 표징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 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13~14)라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그리스도의 창조와 구속의 능력의 표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날은 즐거운 날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봄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구속하기에 능하신 그리스도 권세의 증거로서 창조 사업을 가리킨다. 안식일은 사람의 마음에 잃어버린 에덴의 평화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구주로 말미암아 회복된 평화에 대하여 말해준다. 그리고 천연계의 모든 사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그분의 초청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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