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지리산 산행
체력 부족과 미흡한 계획 수립으로 당초 2박3일로 계획된 지리산 종주는 이미 물건너 간 상황이었다. 바래봉과 정령치를 거쳐 성삼재까지 간 뒤 노고단까지 가는 코스를 하루만에 완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다행히도 해가 어둑해지는 상황에서 남원 주민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고, 남원시내에서 푹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뱀사골 계곡
다행히 첫째 날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단풍 산행은 계곡에서 즐기는 것이 제 맛이라는 것이다.오대산의 아름다웠던 단풍을 본 것도 월정사계곡이었고, 국립공원의 단풍 사진 또한 유명한 사찰을 품은 계곡을 따라 찍은 것들이 많았다. 가을 단풍 산행은 역시 계곡을 따라 걷는 것이 답이었다. 드넓은 지리산 국립공원의 지도를 보니 선택할 수 있는 계곡이 많았는데, 남원에서 가장 가까운 계곡은 뱀사골계곡이었다. 우선 뱀사골계곡으로 오른 뒤 노고단 대피소에서 하루를 묵고 구례의 피아골 계곡으로 내려가는 일정으로 지리산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국립공원 이야기 9 - 지리산 반달가슴곰
반달가슴곰은 호랑이처럼 옛날부터 한반도에 서식했던 동물이다. 20세기 한국의 근대화와 맞물려 호랑이처럼 한반도에서 멸종되나 싶었던 반달가슴곰은 1983년 설악산에서 밀렵꾼의 총에 맞은 채로 발견된 뒤 흔적을 감추었다. 다만 지리산에서는 1990년대까지 반달가슴곰을 봤다는 증언과 그 흔적이 있어 반달가슴곰이 한반도에서 자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 지리산에 설치된 무인카메라에서 반달가슴곰이 발견되자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주도 아래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토종 반달가슴곰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된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복원사업이 시작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복원사업이 시작될 당시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개체수는 5마리 정도였고 그대로 둘 경우 멸종될 위험이 있어 북한과 러시아에서 같은 아종의 반달가슴곰을 도입하여 방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달가슴곰 복원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방사된 34마리의 반달가슴곰 중 13마리가 폐사, 1마리가 실종, 4마리는 부적응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다. 방사한 반달가슴곰의 절반 이하만이 자연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데 성공했다. 복원사업이 실패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었지만, 2009년 이후 최초 방사된 곰들이 성장하여 새끼 10여마리를 낳는 등 복원 사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0마리 중 한 마리는 지리산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토종 반달가슴곰의 새끼로 판명되어 토종 반달가슴곰의 생존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사업 초기 목표로 삼았던 건 2020년까지 50마리를 생존케 하는 것이었지만, 2018년에 확인된 개체수가 56마리가 되어 목표를 조기달성하였다.
2020년 지리산에 서식하는 반달가슴곰은 69마리로 확인되어 뛰어난 번식력을 보여주었다. 지리산의 적정 개체수가 78마리 정도로 생각되므로 곧 포화될 가능성이 얼마남지 않은 것이다. 반달가슴곰 개체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리산 북쪽의 덕유산과 거창군의 삼봉산에서도 반달가슴곰이 발견되는 등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한 상황이다.
지리산 3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히는 피아골 계곡 산행
지리산의 피아골계곡은 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한 계곡으로, 칠선계곡・피아골계곡과 함께 지리산 3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힌다. 뱀사골계곡은 옥색의 맑은 물을 담고있는 병소・병풍소・제승대・간장소 등 아기자기한 전설이 얽혀있는 소(沼)와 담(潭)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봄에는 계곡변 수달래와 가을철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달궁계곡을 따라 나 있는 861번 국도에 위치한 반선마을은 첩첩산중에 있음에도 뱀사골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해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전주에서 출발하는 시외버스도 있으나 남원에서 뱀사골로 향하는 직행버스가 하루 6편으로 더 많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남원을 출발지로 선택하는 것이 좋다. 전날 남원에서 묵었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나 또한 남원에서 뱀사골로 향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뱀사골 탐방로는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있다. 뱀사골계곡을 따라 능선 위의 화개재까지 오르는 탐방로는 거리는 9.2km이며 4시간 20분이 걸린다. 반선마을에서 요룡대까지 가는 길은 2km이며 콘크리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 걷기 편하나 등산의 맛은 덜하다.
뱀사골 계곡의 하이라이트는 요룡대에서 간장소까지 걷는 길이다. 뱀사골계곡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옥색의 소와 담을 보며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때마침 물든 단풍은 계곡을 더욱 더 아름답게 빛내준다. 단풍이 절정에 들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리산의 계곡은 10월 하순에 물들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등산을 했음에도 가끔씩 보이는 새빨간 단풍은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탁용소・뱀소・병풍소・제승대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아름다운 풍경은 단풍이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간장소의 장엄한 풍경을 끝으로 완만한 등산로는 끝이 나고 화개재까지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화개재까지 오르니 첩첩산중이라는 표현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산국인 지리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개재는 지리산의 주능선임에도 왼쪽의 삼도봉이나 오른쪽의 토끼봉으로 가는 길이 가팔라 등산이 편해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목표인 노고단까지 가기 위해서 왼쪽의 삼도봉 (1,499m)로 향했다. 삼도봉까지 오른 뒤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노루목을 통해 곧장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고,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 (1,732m)까지 들렀다 가는 선택도 있었다. 새벽 일찍 등산을 시작해서 그런지 삼도봉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로 아주 여유로웠다. 노고단대피소에 일찍 도착해도 특별히 할 건 없을 것 같았으므로 주저없이 반야봉까지 오르기로 했다.
삼도봉에서 반야봉까지 거리는 1km로 짧지만 고도차이는 200m인 가파른 오르막길로 30분에서 40분 정도가 걸린다.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아름답기로 유명해 반야낙조는 지리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의 높은 봉우리들이 주능선에 위치한 것과 달리 반야봉은 주릉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올라갔던 길 그대로 내려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힘을 들여 반야봉에 오르면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날이 흐린데다 아직 시간이 일러 반야봉에서 일몰을 보려는 생각은 일치감치 접었지만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지리산 풍경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반야봉에서 피아골삼거리를 거쳐 노고단까지 가는 길은 5.9km로 넉넉잡아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길이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가 되는 능선을 따라 걸으니 지리산을 따라 자리잡은 수많은 마을이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지리산이 제공해주는 풍족한 터전에서 옛부터 살아왔을 것이다. 그뿐인가. 반달가슴곰을 비롯해 지리산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물들은 지리산이 대한민국 제일 가는 국립공원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덧 다섯 시가 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날씨는 흐려 일몰을 볼 가능성은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대피소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비록 소박하지만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위에서 저녁 식사를 먹으니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불편할 지 모르지만 대피소에서 묵는 하룻밤은 도시의 고급 호텔에서 묵는 것만큼 귀중한 경험이 된다. 다음 날 일정은 피아골삼거리까지 가서 피아골계곡을 따라 하산한 뒤 연곡사터를 둘러보는 것이다. 피아골계곡의 단풍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유홍준 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등장한 연곡사의 문화유산은 어떤 모습일까. 둘째 날 일정보다 훨씬 짧고 내리막길인 코스인데다 볼 거리도 많아 기대되는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