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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20강
주님, 옳습니다
말씀/마15:21-31
요절/마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영어에 ‘메가(Mega)’라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메가바이트(Megabyte)’ 또는 ‘메가톤(Megaton)’처럼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앞에 붙는데 이때 ‘메가’는 ‘백만’을 의미합니다. 이 ‘메가’라는 말은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크도다’는 말이 바로 ‘메가스’입니다. 그러므로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은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이런 말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 이처럼 ‘큰 믿음’으로 인정받은 여인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또 가나안 여인의 사건을 통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유대 땅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사람들이지만 두로와 시돈 지역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을 떠나 버림받은 이방인에게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들어가자 누가 나아왔습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어떤 가나안 여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당시 메시아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방인인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단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약속한 ‘바로 그분’, 즉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 처음 오셨는데 그녀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예수님을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까?
그녀에게는 애교 만점의 귀엽고 예쁜 딸아이가 있었습니다. 저도 하늘이가 애교를 부리면 얼마나 예쁜지 힘든 마음이었다가도 금새 다 녹아내립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애지중지하며 예쁜 공주 옷도 사 입히고 방에는 사방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공주 침대도 사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가 흉악한 귀신에 들리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눈이 하얗게 뒤집히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 때부터 여인은 단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그냥 보낸 날이 없었습니다.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자녀를 가진 한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소원은 오직 한 가지, 쟤보다 하루만 더 살고 죽는 것입니다.” 자식보다 더 살겠다고 하는 부모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럼 왜입니까? 엄마가 없으면 그 자녀가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보다도 자식의 삶을 더 생각하는 것, 자식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것,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여인도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혼자서는 이 딸을 정상적인 아이로 고쳐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이 자기 동네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즉시 달려와 체면, 자존심 내려놓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것은 그 가정의 아픔이요 엄마의 한 맺힌 문제였을 것입니다. 보통 이 같은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 사람들은 쉽게 좌절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서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겪는 문제들이 생겨날 때 너무 힘들어 울고 싶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꼬투리가 됩니다. 더욱 간절히 주님을 의지할 수 있고 이것이 축복받는 믿음의 스타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무엇보다 예수님께 나아가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인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 외에는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인을 이 자리에까지 나오게 한 것은 딸을 향한 사랑과 애잔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여인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폭우로 인해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보면서 혼자서는 어쩔 수 없어 소방대원들 붙잡고 ‘나 좀 도와주세요. 내 아이 좀 구해주세요’ 절규하는 엄마의 마음과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도 내가 손 쓸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여인처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울부짖음에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할 때 통화보다는 카톡을 더 많이 합니다. 카톡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아무 반응이 없으면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상대가 내 카톡을 ‘씹었다’, ‘읽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예수님이 여인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도 말을 씹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절 표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래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간청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까지 나섰습니다. 대충 안심시켜서 여인이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고쳐주셨을까요? 아닙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 딸을 고쳐주지 않으신 이유는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자 하셨고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게 사명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범위가 이스라엘 땅에 한정될 뿐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역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 입장에서는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이 땅에 아예 오시질 마시지, 왜 오셔가지고 희망고문하시냐’며 화가 날 법도 합니다. 그래서 여인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런데도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엎드려 절하며 도움을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여인은 딸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딸의 아픔이 엄마의 아픔이요 딸의 절망이 엄마의 절망입니다. 예수님의 거절이 여인의 간절함을 단념시키지 못합니다. 이 엄마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메시아이지만 자신의 고통 또한 해결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항상 즉시 응답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이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잃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영적 소원 없는 양에게 소원주시도록 기도했지만 여전히 소원이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들이 악화됩니다. 오히려 양의 있던 소원마저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더 괴롭습니다. 희망이라는 풍선에서 ‘쉬익 쉬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이때 우리는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이 마치 주님이 ‘No’하시는 sign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No’일 수도 있고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서 기도하다가 상황에 따라 쉽게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감사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주님이 기도에 침묵하시거나 ‘No’하는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더 가까이, 또 더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 또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침묵, 또는 ‘No’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대체 들어주실 것입니까? 말 것입니까?” 이러지 말고 이때 해야 할 바른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기도로 나타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인이 특별히 무슨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여인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를 보면 믿음은 기도로 표현됨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기도를 일으키고 기도는 믿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현실 문제들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문제의 상황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엎드려 절하며 간구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보통 때라면 ‘딸아,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습니다. 더 크게 거절하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어떤 사람이 자기 형편은 몹시 힘든데 늘어지게 자고 있는 개를 보면서 넋두리로 한 말이 있습니다. “개 팔자가 상팔자다.” 그런데 요즘 개들은 ‘상팔자’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에서 강아지를 ‘애완견’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는 내 짝’이라는 의미에서 ‘반려견’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람 누군가를 ‘반려견’ 취급하면 어떨까요? 난리가 날 것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들, 떡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들을, 개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집의 강아지 취급하신 것입니다. 실제 당시 유대인들은 조롱과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시다니요? 이 사실이 인터넷에 알려지면 악플이 십만 개도 넘게 달릴만한 일입니다. 도움을 청하는 여인의 ‘쪽박’에 뭔가를 채워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쪽박을 박살내버리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품상 애타게 간청하는 여인을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렇게 박대하실 분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러실까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인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만한가? 정말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사모하는가? 속마음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존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정열을 부채질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모욕적인 말씀을 하시며 거절하신 것은 여인을 좌절에 빠뜨리고 낙담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가진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주님의 어떤 은혜라도 끝까지 붙들고자하는 믿음을 독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에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대체나 예수님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힘든 말씀이라 할지라도 “Yes, Lord!”했습니다. 딸 문제도 심각한데 멸시까지 받으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개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깊이 인정한 것입니다. 구원사역의 우선순위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녀의 특권을 가졌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자녀라는 특권을 가졌고 이방인들은 강아지처럼 한 발 밀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역사의 순서에 따른 것일 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엄청 훌륭하다거나 잘났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여인이 인간적인 눈으로 유대인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 없는 모습에 구원역사의 우선순위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믿음 없는 저것들이 우선입니까?” 예수님께 반발하거나 상처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구원역사의 우선순위를 인정합니다. 유대인들과의 비교가 아닌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나은 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더 많은 은혜들을 받아 누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어떻게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까?’ 반발하고 하나님께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우리의 실존은 강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개 같은 자신의 존재인식, 즉 주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는 존재, 주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빚진 것이 있어서 우리가 청구만 하면 내놓으실 의무라도 있습니까?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주고자하는 자들에게 주실만한 때에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에 대해 항상 여인처럼 ‘주님, 옳습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결정지은 듯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여인은 개일지라도 주인에게서 받아 누릴 수 있는 부스러기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전 개 같은 존재예요.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세요.”
여러분, 은혜가 무엇일까요? 자격이 안 되어도 주님이 불쌍히 여기사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면전에 대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도 참았습니다. 여인은 주님께 은혜를 받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온전히 다 꺾었습니다. 사람의 자존심은 내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무시하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자존심을 꺾지 못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 문턱에서 되돌아갑니다.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자존심은 백해무익합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창조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여인은 자격이 안 되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고 교만해져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사람만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주님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여인은 자신이 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감히 떡은 구하지 못하고 부스러기를 구했고 그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될 것을, 딸이 고침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안 되는 존재라는 철저한 자기인식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 앞에 은혜의 세계, 축복의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인이 믿고 소원한 대로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집에 가보니 예전의 청순 발랄 모습으로 돌아 온 딸이 엄마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의 믿음은 어떤 점에서 큰 믿음, 메가톤급 믿음으로 인정받았습니까? 먼저, 여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거절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만 붙들었습니다. 세 번의 거절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검증된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절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절대 믿음’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상대 믿음’입니다. 상대 믿음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으면 믿음도 좋아지지만 상황이 나쁘면 믿음도 나빠집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인은 상황을 뛰어넘는 절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볼 때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했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함 받을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또한 오늘 가나안 여인의 사건을 통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민족과 혈통을 뛰어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는 우선순위, 영순위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자녀와 강아지의 순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그 순서를 뛰어넘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결정하는 것은 민족이나 혈통이 아닌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물줄기는 오직 믿음을 통해 유대를 뛰어넘어 이방 세계로 확장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로 가서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장애인들이 나아왔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향기가 그들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을 축복하신 주님의 은혜에 그들 모두가 취한 것입니다. 그들도 여인처럼 도움을 받고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치료해주십니다. 그러자 무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만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돕고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러 오셨지만 이방 세계의 잃어버린 양들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모든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상대 믿음’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절대 믿음’으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비록 주님이 침묵하실지라도, 우리를 강아지로 여길지라도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된 우리의 실존을 깊이 인정하고 다만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 옳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부스러기’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이 인정하시는 ‘큰 믿음, 메가톤급의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