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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88
11월23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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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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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MP0B98w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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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만 구원되기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구원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감언이설로 선량한 양들을 현혹시키면서 자신의 배와 호주머니를 가득 채우는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사용하는 성경 해석 방법이 자의적(恣意的) 해석입니다.
오늘 요한 묵시록에는 그들이 ‘이게 웬 떡이냐?’며 애용하는 숫자가 등장하는데, 십사만 사천입니다.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 명! 이들은 곧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예수님과 함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뽑힌 사람들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칩니다. 자신이 그 무리 안에 들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라고! 그 안에 들려면 일인당 큰 거 한 장씩 들고 오라고! 이미 사전 예약된 사람들이 많고, 그리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서두르라고!
참으로 웃기는 짬뽕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이비들은 그렇다 치고, 그런 허황된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웃기는 사람들입니까?
요한 묵시록을 읽다보면 여러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다들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3은 하느님의 영역, 4는 인간세계, 3+4=7, 따라서 7은 완전함,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6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수에서 하나가 빠지니, 불완전함, 나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666이라는 숫자는 나쁜 게 총집합했으니 큰 악을 상징합니다.
12는 유다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좋은 수 입니다. 1,000은 완벽하고 충만한 최고의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144,000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구약의 12지파 x 신약의 12사도 x 1,000 = 144,000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된 새로운 하느님 백성 전체, 순례하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144,000명라는 숫자에만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144,000명에게만 살짝 열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해 활짝 열어놓고 계시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어야겠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사이비 교주들 참으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인간 말종이며 어둠과 사탄의 세력들이 분명합니다. 지들이 대체 뭔데, 예수님께서 활짝 열어놓으신 구원의 문을 여느니 닫느니 하는지, 생각할수록 헛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오늘 루카 복음 사가는 144,000명 안에 가장 먼저 들어갈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들었으면 펄펄 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찢어질 듯이 가난한 사람, 헌금함에 겨우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넣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결국 144,000명 안에 가장 먼저 들어갈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갖은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144,000명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100퍼센트 144,000명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백퍼센트 144,000명 안에 들어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하게도 자신이 144,000명 안에 들 사람들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이비 지도자들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앞에서 폐쇄된 교회가 절대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이든 지금 살아숨쉬고 있는 존재 모두에게 그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는 열린 교회입니다. 타종교인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절대 배제시키지 않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나만 선택되어 인장이 찍혀있고 내가 사랑했고, 한평생 나와 동고동락했던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은 그 영광을 입지 못해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있다면, 내 한 몸 구원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 역시 공동체성을 지녀야 마땅합니다. 나만 구원되기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구원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만 인장을 받을 것이 아니라 죄와 결핍 투성이인 이웃들도 함께 인장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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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이란?>
(anrtkd ehddudtkd)
https://youtu.be/mvtacI0N-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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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풍족한 가운데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생활비를 다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은 봉헌의 참다운 의미와 목적을 알려주려 하시기 위함입니다. 봉헌은 돈을 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과부는 봉헌함으로써 생활이 불편해졌고 부자들은 봉헌을 많이 해도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삶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포기하고 죽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 전에는 과부들을 등쳐먹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그들보다 과부가 더 영성이 높다는 것을 봉헌을 통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다음은 성전 파괴의 예언이 나오는데 결국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전처럼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듯이 봉헌은 풍족한 데서 일부를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합니다. 불편해져야 봉헌입니다.
그렇다면 왜 봉헌을 통해 자신을 죽여가야 할까요? 그 이유는 구원은 분명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고 봉헌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말을 임금의 것으로 내어주었는데 임금을 말 위에 태우고는 고삐를 주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임금은 자기 마음대로 널뛰는 말 위에서 그 말을 조종하지 못하고 떨어지고 맙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믿어봐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신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죽어야 변합니다.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써머스비’(1993)입니다. 남북 전쟁에 나간 ‘잭 써머스비’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 친구와 친척들은 그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포도 농장의 주인이었던 써머스비는 거칠고 잔인한 데다 농사와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말썽만 피우던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에다 농장일까지 맡아 고생하던 아내 로렐은 그 지긋지긋한 남자가 사라져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는 남자 오린 미첨은 써머스비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로렐을 도와주며 써머스비의 죽음이 공식화되면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써머스비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써머스비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니 이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내를 따듯하게 대해줬고 흑인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농장에다 함께 담배 농사를 짓자고 제안합니다. 담배 농사를 지으며 번 돈의 일부를 매년 내고 그 지급한 값이 땅값을 넘어서면 그 땅은 농사를 지은 사람들 소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만큼 큰 혜택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처음엔 써머스비를 무서워하던 아내 로렐도 써머스비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낳습니다.
모든 게 잘 되어갈 무렵 써머스비가 살인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오직 로렐만이 지금의 남편이 써머스비가 아님을 압니다. 사실 이 마을을 찾아온 써머스비는 감옥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던 진짜 써머스비가 죽고 난 후 그 사람이 살던 곳으로 와봤던 것입니다. 지금의 써머스비는 호레이스란 사기꾼입니다. 그러나 로렐과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만약 자신이 써머스비가 아니라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누리는 혜택이 사라지고 맙니다. 계약이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써머스비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그의 목숨을 살리려고 하지만 써머스비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진짜 써머스비라며 사형을 받아들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땅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써머스비는 사형을 당합니다.
끝까지 자신이 아닌 써머스비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이 자신은 끝까지 에사우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가 살면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써머스비가 되려면 호레이스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레이스는 죽습니다. 두 정체성이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 정체성을 흔드는 것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동물들에 고삐를 매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신의 정체성을 죽이려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얻은 정체성이 죽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해 시작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은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봉헌을 하며 이전의 자기가 힘들지 않다면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부는 자신의 주님을 위해 더 많이 비워낸 사람이고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위선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고삐를 주지 않으면서 주인을 섬기겠다고 말하는 짐승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체성을 그리스도로 정하는 것 이전에 자신은 죽었다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던가,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는 고백, 혹은 자신이 죽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도로 “저는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앞에 “저는 죽었습니다”를 덧붙이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죽지 않으며 믿겠다는 말은 고삐를 주지 않으며 자신을 타라는 것과 같은 위선임을 잊지 맙시다. 자기 봉헌은 자신을 죽여 새로운 정체성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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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1-4 :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 그 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 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부자들은 교회에서 선행을 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두워진 눈에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에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지 않았고,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 대신 재물이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궁핍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물을 바친 과부가 나온다. 그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 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행을 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 되지 말자.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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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제사뿐만 아니라 자선의 중심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예배의 핵심 역할을 한 곳이기에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인의 자선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에게 자선은 제사나 기도만큼 중요하고,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오늘 복음은 성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부자와 과부, 풍족함과 궁핍함이 대조됩니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어느 정도의 예물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부는 렙톤 두 닢이라는 얼마 되지 않는 예물을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하느님께 받은 것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예물’이라는 표현은 ‘선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 중에 일부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만 과부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예물로 내놓습니다. 예물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헌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봉헌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나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나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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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은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과부는 자신의 ‘온 마음’을 바친 사람이고,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은” 부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의 일부만’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마르 12,30)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마음’은 보지 않고 “가지고 있는 생활비를 다 넣은 행위”만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 바치려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칭찬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또 생색을 내려고 그렇게 하는 위선자가 칭찬을 받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위선자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그런 위선은 예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위선자들의 행위만 보고서 잘못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동전 두 닢 가운데 한 닢만 바쳤다면?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셨을 것이고, 그 과부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형편에 맞지 않는 헌금이 아니라, 즉 너무 지나치게 많이 바친 헌금이 아니라, 그 자신의 형편에 맞는 범위 안에서 온 마음을 다 바친 헌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 과부의 ‘행위’를 칭찬하신 말씀으로 오해하고, 또 이 말씀을 누구든지 그렇게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오해해서, 이 말씀을 부담스러워 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마음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마음과는 다르게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난한 과부는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만일에 마지못해 했거나 억지로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도 바로 그 ‘기쁜 마음’입니다.)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의 또 다른 예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녁때가 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서 요셉이라는 이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가 내주라고 명령하였다. 요셉은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마태 27,57-60) 당시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 요셉의 행동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의회 의원이었기 때문에(마르 15,43),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을 각오를 하고서, 또 ‘목숨을 걸고서’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무덤만 예수님께 바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스스로 한 일이고, 기쁜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바친 ‘바르나바’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4,34-37) 바르나바가 밭을 팔아서 그 돈을 바쳤다는 말은, 전 재산을 봉헌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는 전 재산을 봉헌한 뒤에 바오로 사도와 함께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바르나바는 부자였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나쁜 예’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의 죄는 “재산의 일부만 바치면서도 전 재산을 바친다고 거짓말을 한 죄”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명예욕도 버리지 못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도 버리지 못하고, 그 두 가지 욕망을 모두 채우려다가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라면, 실제로 재산 전부를 바친다고 해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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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하는 공원 중에 ‘Little Bay Park'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개들을 위한 놀이터입니다. 개들은 놀이터에서 주인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개들의 종류도 많았습니다. 아주 작은 개도 있었고, 아주 큰 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개들은 서로 잘 놀았습니다. 서열을 정하지도 않았고, 잘난 척하지도 않았습니다. 개들은 보면서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신분을 정해서 살았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피부의 색으로, 남과 여로 구분하였습니다. 신념과 이념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신념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어쩌면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직도 여성의 인권이 무시되는 곳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차별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혈연, 지연, 학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능력, 재물, 권력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거기에는 신분에 의한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능력에 의한 차별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지체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이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선포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노예, 여성, 과부, 어린이, 아픈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124위 복자 중에 한분이신 백정이었던 황일광 시몬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초대교회는 백정, 노비, 과부도 형제와 자매로 따듯하게 대했습니다. 엄격한 신분이 있는 사회에서 양반도 상놈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보았으니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교회를 박해했던 것은 하느님 앞에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펴고 주님께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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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봉헌>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봉헌>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가 있는 것
나를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내가 가는 것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손발이 되어
내가 일하는 것
있음과 감과 일함으로
하느님께서 내가 되고
내가 하느님이 되는 것
모두가 해야 하는 봉헌
누구나 할 수 있는 봉헌
아무나 하기는 어려운 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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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과부의 동전 두 닢>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동전 두 닢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은 뭉칫돈은 돈일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과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고 싶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동전 두 닢은 부자들의 뭉칫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믿음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보석보다 찬란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하느님께 바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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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사랑의 나눔>
제가 살던 고향 마을에 열심인 초로의 신자 한 분이 계십니다. 평생을 동정으로 가난하게 사시면서 교회를 일해서 일하신 분입니다.
넓은 본당의 공소를 걸어 다니며 하느님을 전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사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하느님을 전하는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노랫말이 바로 이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본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저희 가족들도 이분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분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제가 수도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두툼한 봉투 하나를 제게 내밀며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써 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본다면 너무 큰 돈이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당신의 회갑을 맞이해서 동생이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준 것인데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참된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고, 나눔을 통해서 체험되는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의 나눔으로 비워진 가슴은 항상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가진 바를 나눌 때 우리의 가슴은 사랑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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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어떤 빈곤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물론 부자들이 넣는 돈과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단순한 금액의 비율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빈곤한 과부가 놓인 현실을 외면해 온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과부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부름받은 모든 이의 어느 지체도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라졌고, 세속적 욕망이 이웃 사랑에 대한 원칙을 넘어서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빈곤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이유는 자신이 얻은 수익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웃의 희생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물론 그 헌금이 성전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제들의 삶을 위하여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원칙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는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약자 보호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유다 사회에 대한 강한 질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늘날 돈과 권력이 갖는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새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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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늘 두 가지 가능성을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거나, 아니면 그분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번째 가능성, 즉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주님만을 믿으려고 하고 또 그렇게 그런 주님만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순위를 매기지 않으십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니까 네 기도의 응답이 일 번이다.”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이 드러나는 응답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어요?”라는 말을 종종 하는 우리입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가혹한 주님이고, 너무나 불공평한 주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만의 생각이고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요한 7,24) 올바로 판단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앞에 말씀드린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믿는 판단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어린 자녀가 날카로운 칼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조르면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내 자녀니까 칼을 줘야지.’라면서 날카로운 부엌 식칼을 손에 쥐여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독이 될 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떠올려 보면 과부라는 신분 자체의 어려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고, 더군다나 자신을 보호할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이 과부는 가난함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예물로 넣습니다.
그에 반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분명히 이 과부보다 많은 돈을 예물로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예물을 봉헌했으니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을 받을 수 있을거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남아도는 것에서 조금 내놓았을 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아도는 것을 조금 내놓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으며, 가난해서 가난한 이를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은총 받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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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비를 받으면서…….]
자동차 정비를 자주 받습니다. 정비만 제 때에 잘 받으면 오래 탈 수 있다는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차에 표시까지 하면서 정비를 받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정비를 잘해서 주행거리가 무려 50만Km나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아무리 못해도 그 절반인 25만Km는 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정비합니다. 며칠 전에도 정비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교체할 곳이 많다고 합니다. 작년에도 정비 비용이 꽤 들었는데, 올해 역시 정비 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정비소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되면 당연히 들어가는 비용입니다.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세요.”
10년 넘게 이 차를 탔으니 고쳐달라는 부분이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저 역시 나이 50이 넘으니 아프다는 곳이 생기더군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노쇠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한숨을 내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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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분은 전체보다 많을 수 없다>
오래전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자구 비교를 하였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면서 현 임지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은 안 하고 전 임지와 견주었습니다. 추수감사미사를 봉헌하면서 본당 규모가 큰 것에 비하면, 감사예물과 곡물이 적게 봉헌되었다고 생각하며 서운해한 적도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시키지 못하고, 믿음을 성장시켜드리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에 매이지 않고 믿음에 마음의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머리로만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빈곤한 과부를 칭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예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풍족한 데서 일부만을 바쳤습니다. 부자가 바친 예물은 가난한 이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은 금액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인생 자체가 담긴 것이라면 가장 많은 돈이 됩니다. 가장 적은 것이라도 보아주시고 그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먼 훗날 잘 되면 크게 돕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정성보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때는, 건축 기금을 모으면서 나름대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아무개는 얼마, 아무개는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며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정성을 보고, 마음을 보아야 하는데 봉헌한 현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도 별수 없이 물질에 휘둘렸습니다. 그 후로 ‘물질의 봉헌 이야기를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봉헌을 아까워서 억지로 한다면, 아무리 많은 액수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는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크면 모두가 주님의 것이요, 감사하게 될 것이니 믿음을 키우는 것에 마음을 두자. 믿음의 성장에…. 그러고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보다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차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양적으로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진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부분은 부분입니다. 전체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모두는 부분보다 큽니다. 먼저 하느님께 바칠 것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가지고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면 어떨지요? 물질뿐 아니라 시간이나 공간, 재능도 말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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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의 뉘우침]
한 성직자가 물건을 훔쳐 나가는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게 “도둑질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깊이 반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물건을 훔쳐 나오면서 발자국을 닦지 않았어요. 바로 가서 닦아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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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부자富者이자 참 자유인自由人>
-사랑과 봉헌, 비움과 가난, 순수와 겸손-
누가 참으로 부요한 자유인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앞서 헌금하는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는 그대로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를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는 참 명료한 오늘 복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거울처럼 우리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참으로 누가 부요한자요 자유로운자인지 묻게 됩니다.
헌금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누구나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는 없는 법이요,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발적으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께 대한 전폭적 사랑과 신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참 보물이신 주님을 모셨을 때 자발적 헌금에 자기 비움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저절로 세상 것들로 부터의 집착에서 이탈의 자유입니다. 하느님 맛을 알아갈수록 저절로 세상 맛, 재물 맛, 돈 맛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참으로 소유욕으로부터 벗어날수록 부요한 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부자요 자유인은 많은 재산을 축적한자가 아니라 필요로하는 것을 최소로 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사람은 늘 갈증의 가난한 자요 불행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모시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했을 것이며 이런 자가 정말 부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소유나 존재냐? 의 갈림길에서 복음의 부자들은 소유를 택했고 가난한 과부는 주님의 존재를 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존재를 삶의 중심에 확고히 모셨던 가난한 과부야 말로 참으로 진정 부자요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깨닫고 보면 가난한 과부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참으로 없어도 자유롭고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이 가려 품위있고 고귀한, 부요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모르고 소유의 노예되어 살아가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만이 참 행복과 참 부요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자기를 비울수록 하느님을 알게 되고 참 나를 알게 되어 참 행복이요 참 부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복음의 가난한 과부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린 자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바로 복음의 가난한 과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바로 이런 가난한 과부가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마음 가난의 겸손이요 순수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하늘 나라는 죽어서가 아닌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부수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적인 하느님 찾는 일, 사랑하는 일에 충실합니다. 이미 현세에 살면서도 궁극의 희망과 미래는 하느님께, 하늘 나라에 둡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그 빛나는 꿈을, 비전을,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가난한 과부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이런 궁극의 하늘 나라에 희망을 둘 때 지상에서 천국을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신비가이자 관상가인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우리의 빛나는 궁극의 미래입니다. 십사만 사천명이 상징하는 바, 가난한 과부처럼 자발적 주님 사랑과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살았던 겸손과 순수의 사람들입니다.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같이 십사만 사천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성사와 계속되는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의 이마 역시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까지 이에 맞같는 삶을 살 때 구원의 표지들도 빛을 발합니다. 참으로 살아 생전 어린양이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깊은 친교의 사랑을 반영하는 하늘 나라의 구원받은 성인들입니다.
이들은 순수는 동정의 순수라기 보다는 하느님만을 사랑한, 갈리지 않은 마음의 순수를 뜻합니다. 결코 세상이나 우상들을 섬기노라 마음이 갈리지 않은 사람들로 거짓을 찾아 볼 수 없는 흠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십사만 사천명의 성인들은 그대로 가난한 과부는 물론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갈림없는 순수와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니 외견상 가난해 보여도 하느님 사랑으로 비움의 인생 여정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비워 순수해지고 겸손해진 사람들이 진정 부자요 자유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가난한 과부처럼 사랑과 봉헌, 가난과 비움, 순수와 겸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또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 이마에 새겨진 예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이자 하늘의 십사만 사천의 성인들과 함께 찬미와 감사의 새노래를 부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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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에 대해 들려줍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 21,3)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습니다. 당시에는 통 속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봉헌의 수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앞서 부자들이 냈던 소리와 그 과부의 소리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봉헌을 크게 치하하십니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그녀는 가진 것이 별로 없이 빈곤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데다, 과부였으니 약자 중의 약자인 셈입니다. 생활비를 주님께 다 드릴 수 있는 건, 그녀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봉헌을 다른 부자들의 그것보다 더 귀하게 보시는 이유는, 예물을 받으시는 주님이 숫자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는 전 재산인 동전 두 닢과 함께, 주님께 자신의 생사를 던진 것입니다. 자기 살림을 주님 손에 오롯이 되돌려 드린 것이지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저도 당신의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저를 당신께 맡겨 드립니다.' 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의 마음이 읽힙니다. 이 온전한 의탁을 보시고 하느님은 가만히 계실 수는 없으시지요. 그분께서 친히 나서실 겁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을 모시고 선 십사만 사천 명의 거룩한 영혼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14,1)
그들은 주님만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오매불망 하느님과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그래서 정결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마음에 다른 우상을 품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묵시 14,3)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는 이들입니다. 찬양이 그들이 일상으로 올려 드리는 목소리이고, 감사와 찬미는 그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묵시 14,4)
그들은 주님만을 따릅니다. 세속의 화려한 명예와 재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곳이 어디이든 주님이 가시는 것이면 어디라도 그분 뒤를 따라 걸어온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묵시 14,5)
그들은 말씀을 품고 진리를 말하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말씀은 그들 입을 맴돌고 적시다가 세상으로 흘러나와 어둠과 더러움, 탐욕과 증오를 정화합니다. 진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듭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잘나고 부유한 권세가들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오늘 복음 속 과부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이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주님과 사이에 지상 삶에서부터 차곡차곡 사연과 추억을 쌓아온 이들일 것이고, 세상 풍파에 휘청이다 쓰러지면서도 세상 힘이 아닌, 그분 가슴에 기대어 신뢰를 쏟아내던 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묵시 14,5)
한갓 피조물인 사람에게 흠이 없을 수 없지만,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의 불로 말끔히 태워 흠 없게 해 주셨습니다. 삶의 파도가 묻힌 때와 오염과 얼룩은 어린양의 피와 뜨거운 사랑의 불로 희어집니다. 온전히 바친 이는 온전히 거룩합니다.
오늘 복음 속 과부에게서 예수님의 온전한 봉헌을 마주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심으로써 가난하게 되셨고, 사형수가 되어 생명마저 아버지께 올려드리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아버지 향한 온전한 의탁과 신뢰가 그 어느 누구의 예물보다 귀한 건 믿음과 사랑으로, 전부를, 온전히 다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육적 영적 자원은 다 다릅니다. 재산이나 지식, 신분과 권력의 정도도 다 다르지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영육의 예물을 외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만, 더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동동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니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수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니까요. 순수한 의탁과 신뢰로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지는 사랑을 그분은 아십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께 한걸음 더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이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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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의 말씀에 여러분을 절여 넣어라!― 성 안토니오
‘성서 주간’을 맞아 하느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세례성사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는 하늘나라 언어인 하느님 말씀을 배워서 말할 수 있어야 하느님 나라 시민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존재 이유는 하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는가? 하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이 언어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하느님 말씀(말, 언어)은: 1) 자신을 표출表出하고
2) 자신을 선물로 증여하며
3) 자신을 상대에게 파견하는 것이다.
♣기쁜 소식>이기에 –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콩당콩당 뛰어야 한다.
*엠마오 두 제자– (루카 24,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느님 말씀에 여러분을 절여 녛으십시오.”(성 예로니모)
뻣뻣한 배추를 소금물에 절여 넣어야 삼투작용으로 물이 빠져나와서 숨이 죽어서 비로소 물을 비워낸 공간에 갖가지 감칠맛나는 양념이 스며들어야 맛깔스런 김치로 새롭게 태어나듯이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절여져서 인간의 기가 빠지고 하느님의 기인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새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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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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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신심 깊은 가난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는 비록 렙톤 두 닢을 예물로 바쳤지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작정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면서도 엘리야에게 바쳤던 사렙다의 과부(1열왕 17,12)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토록, 전부를 예물로 바침은 주님께 대한 전적인 내맡김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는 표현이요,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는 표시였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내놓은 그 값진 두 데나리온과 같을 것입니다.(루카 10,35)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중히 여기고, 무엇을 앞세워야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봉헌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다 쓰고 남은 조각을 ‘나중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치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과부의 딱한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곧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맨 먼저’ 앞세워 바쳤던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그것은 소중하고 귀한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주군이신 분을 만난 까닭이 아닐까요? 바로 그러한 분을 만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고는 못 배겨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그 소중하고 귀한 분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 가는지, 혹은 퇴색되거나 변하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바쳐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가난하면서도 전 재산을 봉헌한 이 “과부”에 대해서,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표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저는 이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통하여, 나의 삶이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앞세우는 삶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진정, 무엇을 바치고 있는지, 혹은 전부를 바치고 있는지를 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봉헌할 수 있을까요? 대체 무엇을 봉헌해야 할까요?
주님!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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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궁핍한 가운데에서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주님!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고
온 시간과 열정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보다 제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왔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먼저 바치기보다 나중에 바쳤습니다.
당신은 저의 전부이오니, 저의 전부를 바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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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루카21,3)
<봉헌의 의미와 자세!>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십니다. 그러다가 어떤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렙톤 두 닢'의 가치는 우리 돈으로 말하자면 10원짜리 동전 두 개에 해당하는, 액수로만 보면 아주 보잘 것 없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동전 두 닢의 가치를 높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동전 두 닢은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었던 전부였고, 그가 가진 전부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과부의 전적인 봉헌을 칭찬하십니다.
오늘 복음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 '봉헌의 의미와 우리의 봉헌의 자세'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나의 마음과 정성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나의 봉헌행위, 곧 '교무금이나 주일헌금'에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헌금의 양보다 봉헌하는 이의 마음을 보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마음과 정성도 어여삐 보십니다. 이는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한 이를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인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봉헌 행위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봅시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 낮은 곳, 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해 있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주변에는 나 보다 더 가난한 이들, 나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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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uOacQktjh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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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4)
진정한 봉헌은
생활의 사랑이다.
하느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생활의 봉헌은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우리의 삶이다.
봉헌은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생활이다.
우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봉헌이다.
우리의
생활안에서
이루어지는
봉헌이다.
우리의
생활안으로
들어오신
주님이시다.
우리의 생활과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삶이다.
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봉헌의 시작이다.
생활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생활과 신앙은
주님을 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주님을
향해야한다.
봉헌의 영성은
생활의 영성이다.
생활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이다.
참된 봉헌은
이와같이
모든 것을
바치는
생활의 봉헌임을
믿는다.
믿음의 힘이
생활의 힘이며
생활의 힘은
봉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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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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