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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방글라데시의 방대한 가수
필자 이원우
한국소설가협회이사 ‧ 국제PEN한국본부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문인복지위원 -한국가톨릭 문인회 이사/ 저서 소설집 <거기 나그네 방황 끝나는 곳><내 죽음 우리 유택> 등 4권 ‧ 수필집 <밀려나는 새벽><아직도 목에 메는 문 안에서의 작별> 등 15권 ‧ 기타 4권/ 수상 <문예시대> 문학대상 ‧ 경기PEN문학대상‧ 화쟁포럼 문화상 ‧ KNN문화대상 ‧ <한국수필> 청향문학상 ‧ 부산수필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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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참 좋은 세상이다! 이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글쎄다, 여기엔 의문 부호를 붙일 수밖에 없다. 노(老) 가수 팽가창(彭歌唱)이 근래에 입버릇처럼 토해 내는, 나름대로의 견해 혹은 정의(定義)다.
“‘세상’과 ‘나라’는 이래서 다르다는 말이야.”
그가 오늘 ‘세상’과 ‘나라’라는 두 단어를 비교하는 혼잣말을 내던진 데는 다 근거가 있다. 고국인 방글라데시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코로나에 그만 발이 묶인 가수 방대한에게서 전화가 온 게 단초다. 신호음이 울리고 번호가 뜨는데, 국제 전화란다. 내게 국제 전화? 그는 혹시 보이스 피싱 같은 그런 데에 낚이는가 싶어, 겁이 났지만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할아버지, 저 방대한입니다. 전화 주셨는데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방글라데시에 와 있습니다.”
“그랬었나. 고마우이.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네. 아무리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자네가 사는 충북 음성군에 한 번 가봤으면 싶었다네. 자네는 외국인 출신 가수이자, 음성군 홍보대사 아닌가?”
“저도 할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문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세.”
문자 메시지 난에 찍힌 전화번호를 보니 006-880-1883-13694*다. 이윽고 방대한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싣는다. 왜냐면 그는 한국의 보통 사람보다 더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나은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지금 방글라데시에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국제 편 비행기가 4월 24일까지 모두 취소됐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제 메일 주소는 khan242*@hanmail.net입니다. 방대한 올림
팽가창은 다시 방대한에게 메시지와 카카오톡을 동시에 보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민요 한두 곡 악보를 좀 보내 줬으면 좋겠다고. 나아가 그걸 부르며 즐기는, 예컨대 춤을 추는 장면 등을 직접 찍은 사진도 행여나 있을 땐 덧붙여 달라고 한 거다. 우리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아리랑’이나 ‘도라지’ 등이다. 방대한도 그것들을 너무나 잘 부른다. 팽가창은 방대한에게 양국 간 교류(交流)의 값어치를, 민요를 통해 높이 사자고 은연 중 권유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팽가창은 봉천동이나 인사동 케이블 방송가에서는 이름이 난 가수 중 하나다. 한데 세상은 요지경이다. 가수가 출연료를 받는 게 아니라 한 곡에 얼마씩 자기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르는 거다. 적잖은 자칭 타칭 가수들이 자기 호주머니를 이렇게 비우는 게 현주소 혹은 풍속도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그 흔한 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창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명(藝名)이 팽가창이다. 그가 오늘 그 바닥에서 인기를 누리기까지 숱한 일들을 겪었다.
그 중 하나. 대여섯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팽가창은 인사동 어느 업소-간단한 주 류나 식사를 내는-에 좀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들어서려 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안 되겠다. 남루하다? 그래 그게 알맞은 표현이겠다.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던 사나이가 입구에서 시비조로 제지를 한다.
“어찌 왔습니까? 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노래나 한 곡 부르려 하네만….”
“가수 아니면 그건 불가합니다. 구청에서 단속도 나오거든요.”
“난 대한 가수협회 회원이야. 여기 회원증을 보시오.”
그러면서 팽가창은 지갑에서 대한가수협회 914호 회원증을 내밀었다. 사나이는 조금 놀라운 표정을 지었으나, 여전히 마뜩찮다는 시선을 팽가창에게서 거두지 않았다. 육개장 한 그릇 먹으러 찾는 손님 수준에도 못 미치는 노숙인? 그 정도로 치부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작은 업소지만, 가수는 물론 그 세계를 아는 손님(팬)들마저 적어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어야 한다. 그게 마치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는 거다.
물론 팽가창도 그 정도의 낌새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두서너 번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정통인 대한가수협회와 곁가지인 **가수협회 회원들이 그런 수모의 현장을 목격하고, 달려 나와 구해(?) 주기도 했었다. 한데 그날따라 그런 우군(友軍)이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팽가창은 마침내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 평가하지 말게. 내가 여태껏 열일곱 번이나 개인 콘서트를 연 사람이야. 당신 쟈리니 알아? 남백송은?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방일수 원로 코미디언이 사회를 봤어. 그들이 우정 출연한 경력을 들먹여도 이럴 참이오? 문 전 시장은 팝송 가수이기도 해.”
그러면서 그는 스마트폰으로, 그 현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사나이는 표정이 바뀌더니, 팽가창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거였다. 지금에야 밝히지만 그날 팽가창은 줄도 안 선 면바지에, 점퍼를 걸쳐 있었다. 인터넷 신문 기자이기도 한 그가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에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을 취재하고 오던 참이었다. 그러니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수모(受侮)? 뭐, 그걸 겪은 셈이고말고.
물론 그 3분 남짓한 시간에, 기자증을 내 보일 수도 있지만 별무소용이었으리라. 그런 건 오히려 상대방을 하여금 거부감을 더 갖게 부채질할 따름이니까.
어쨌든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그날따라 중앙 객석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나, 대기석에서 환담을 나누며 출연을 기다리는 가수들의 분장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눈치를 살필 수밖에, 아니나 다르랴 그의 귓전을 울리는 소리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폭트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이야. 폭스트로트의 준말! 트로트가 거기서 출발했지.”\
“오늘 성황을 이루어야 할 텐데….”
아하 그랬었구나, 팽가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접수대로 가서 만 원짜리 석 장을 내밀었다.
“어렵게 들어왔어. 여기는 처음인데, 노래 두 곡을 부르고 싶네.”
접수대의 아가씨가 연민이 실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대답한다.
“할아버지, 가수협회 회원이시네요.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정식 가수라 옵서버로 출연하실 자격은 있지만, 복장이 안 되겠는데요. 무대 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팽가창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어지간히 고집 센 그는 굴하지 않았다. 봉투에 든 돈을 접수 노트 밑에다 억지로 밀어 넣었다. 겉에다 ‘목포의 눈물’과 ‘연락선은 떠난다’ 등 두 곡을 휘갈겨 쓴 거다.
몇 번이나 거절하는 시늉을 보이던 아가씨도 못 이긴 척 침묵을 지켰다. 될 대로 되라. 이런 심정이었겠지. 주위에 서거나 앉은 여럿도 힐끗힐끗 팽가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이 기상천외의 노(老) 가수를 그들은 애써 백안시하지는 않았다.
무대 위에 올라가고도 남았을 차례인데, 팽가창은 자꾸만 뒤로 밀렸다. 그래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다린다. 미동도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는지 모른다. 어금니를 깨물고 그는 허밍으로 열심히 두 곡을 연습했다.
그때였다. 누가 팽가창의 어깨를 가볍게 치는 게 아닌가. 팽가창이 놀라서 돌아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였다. 한데 노신사는 근사한 무대 복을 차려 있고 미소를 보내고 있다.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팽가창 가수님, 옷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음다음 차례입니다. 노래 부르고 나서 제 무대 복을 빌려 드릴 테니, 안심하고 올라가 열창을 하십시오.”
“한데 선생님, 저보다 한참 연장(年長)이신 것 같습니다. 제게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웃에 남백송 원로 가수가 주관하는 이런 업소가 있잖습니까? 거기 팽 가수님이 출연하여 많은 이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의정부 근처 주내 삼거리 근처에 효원 정사(精舍)의 산승(山僧) 법구입니다. 법 법(法). 언덕 구(丘). 처자(妻子)도 있습니다. 워낙 노래를 좋아해 가끔 이런 데에 나오지요. 중절모를 쓰면 제 신분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합니다. 머리도 완전히 밀지는 않았지요. 저를 한갓 땡추로 여겨 주십시오.”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스님 인상도 너무 좋으신데요. 좌우지간 말씀입니다. 초면인데 제가 이런 부끄러운 일을 해도 되겠습니까?”
“팽 가수님, 오히려 제가 어쭙잖은 걸 갖고 생색을 내서 민망합니다. 제 청을 팽 가수님이 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전 잠시 탑골공원에 사람을 만나러 갔다 오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팽가창이 마침내 무대에 서게 된 거다. 그제야 악단의 색소포니스트며 트럼페터(마지막 몇 마디만 연주한다.), 사회자, 회장 등도 찡그렸던 인상을 폈다. 근데 무대 복이 기가 막히도록 팽가창의 몸에 맞는 게 아닌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신청했던 두 곡에다 특유의 제스처를 곁들여 다중(多衆) 앞에 선보였다.
‘연락선은 떠난다’를 먼저 목청에 실었고, ‘목포의 눈물’로 마무리를 짓는데….마지막 무렵에 그는 현란한 막춤까지 선보이며 흥을 돋우었다. 일제 강점기 수탈(收奪)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의 슬픔을 노래한 두 곡이지만, 막상 무대에선 그런 게 염두에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그는 애면글면 열창에만 신경을 썼다.
‘연락선은 떠난다’ 끝자락에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훔치고, 그걸 다시 비틀어 짜는 시늉을 보였다. 객석에서 터지는 박수 소리!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서 답례했다. 그리고 ‘연락선은 떠난다’ 후주(後奏)와 ‘목포의 눈물’ 전주(前奏) 때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포의 눈물’은 그가 이 사회에 던지는 특별한 메시지를 담은 매체다, 만고불변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하는. 그는 부르짖었다.
“지역감정을 타파하자는 백 번의 사자후(獅子吼)보다 ‘목포의 눈물’ 몇 마디가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고선 ‘목포의 눈물’을 장내에 쏟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 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그 순간이었다. 옷을 잘 차려입어서인지, 품위가 돋보이는 초로의 여인들이 대여섯 일어섰다. 그들은 마치 초등학생들 같은 표정을 짓고 앞서서니 뒤서거니 하며, 팽가창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마치 거짓말 같은 풍경을 그들이 연출하였으니, 각기 5만 원 짜리 한 장씩을 손에 쥐는 게 아닌가! 그들은 그걸 죄다 팽가창의 손에 건네주는가 하면 무대복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가 생전 종로 인사동에서 받아보는, 말하자면 팁이었다. 거절할 틈도 없었다. 그들을 대표해서 누가 말하는 것이었다.
“종로에 사는 호남 향우회 회원입니다. 오늘 특히 부산과 목포의 노래를 같이 불러 주셔서 무척 뜻이 깊었습니다.”
팽가창은 어인이 벙벙했다. 물론 자기 자신도 그런 의도-지역감정 타파-를 갖고 있었지만, 그걸 알아 주는 종로 구민이 있었다니 싶어서였다.
팁만 해도 그랬다. 그런 파격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하던 거였다. 인사동 골목에서 두어 몇 달을 보내면서 겪었던 체험담을 털어 놓자. 여자 가수에게 꾀죄죄하고 헙수룩한 옷차림을 한 할아버지들이 한둘 나온다. 그러곤 만 원 지폐 한 장을 가수의 가슴팍에 쑤셔 넣는 정도야 흔한 일이다. 남자 가수에겐 그런 일은 언감생심이다.
팽가창의 팁 받는 모습을 본 객석 회원들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앙코르가 터지고 해서, 팽가창은 덕분에 노래 두 곡을 더 부를 수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며 그는 혼잣말을 했다. 과연 이 무대 복이 좋긴 하구나.
그런데 경악(?)할 일이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지금도 그게 사실로 믿기지 않는 거다. 무대 복을 벗어 왼팔에 조심스럽게 걸치곤 법구 스님을 찾는데, 접수대 아가씨가 쪽지 하나를 건네주며 하는 뜻밖의 말이다. 법구 스님은 바쁘다며 좀 전에 나갔다는 거다. 팽가창은 급히 쪽지를 폈다. 적힌 그대로를 여기 옮겨보자.
팽가창 가수님
남백송 선배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란 걸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분과 가수 님이 이웃집 업소에서 나란히 서서 그분의 히트곡 ‘방앗간 처녀’를 열창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수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요. 오늘도 너무나 잘 부르셨습니다. 한데 무대 복만 걸치시면 금상첨화일 텐데, 오늘도 그대로이셔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산승(山僧)은 그 무대 복을 열두어 벌 갖고 있습니다. 제가 세속에서는 형님이라 오늘 그 무대 복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부디 거절치 말고 기념으로 걸치시기 바라며 이만 총총. 法丘 합장
그건 충격이었다. 어지간한 무대 복이라면 아무리 싸게 사도 10만원 자기앞수표 석 장은 있어야 한다는데, 그걸 쾌척하는 법구 스님. 팽가창은 차라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을밖에. 전후사정을 안 접수대 아가씨며 몇몇 가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긍정의 표정이었다고 하자. 한 달 쯤 뒤에 팽가창은 짬을 내어 효원정사를 찾았다. 그러곤 팁으로 받은 25만원 중 그동안 쓰고 남은 10만원을 불전에 놓고, 녹차 한 잔을 대접받은 뒤 귀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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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이 지난 8월 27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목동 방송회관에서 대한가수협회 회장 선거가 있었다. 김흥국과 인순이가 경합을 벌였는데, 김흥국이 이겼다. 생각보다는 표차가 많았다. 팽가창도 당연히 투표에 참가할 수밖에. 회비를 내는 중앙회원(정회원)이니까.
그날 협회 이사도 따로 뽑았는데, 출마자들의 프로필을 보고 회원들이 더러 수군덕거렸다. 아니 실소를 감추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이 어느 어느 단체의 홍보 대사 경력을 다투어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자되는 공식 하나. 가수 협회 임원이 되려는 자들이여, 하다못해 소규모 병원 홍보대사 자리 하나는 꿰차라!
한 달 보름 뒤에 드디어 취임식이 열렸다, 여의도 63빌딩 컨벤션 센터 그랜드볼룸에서였다. 김흥국이 불자(佛子)라서, 비구와 비구니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얼추 5백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외국인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서 눈에 뜨였다.
물론 팽가창도 법구 가수(효원정사 주지)와 나란히 입장해, 헤드테이블 가까이에 앉았다. 그날따라 당당히 날이 선 바지와 무대 복으로 한껏 멋을 내었다. 게다가 기자증까지 패용하고 보니, 팽가창은 자신이 봐도 외관으로는 꿀릴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밖에. 법구스님이 넌지시 일렀다.
“야, 오늘 잘하면 팽 가수 아니 팽 기자님이 스타가 되겠는데요. 내가 시중을 들 테니 사고(?) 한 번 내 보세요, 허허. 동영상은 제가 촬영할게요.”
“제가 스님 심부름을 해야 할 텐데….어쨌든 스님이 그래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취임식은 간단히 끝났다. 이어서 무대 위에서는 어느 코미디언의 사회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가수들의 노래가 중심이었고. 어느 유명한 가수가 MR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반주 없이 ‘친구여’를 목청에 실었는데, 그만 첫 음을 잘못 잡아 낭패를 보기도 했다. 최고음에서 그만 돼지 멱따는 소릴 내 질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두들 즐거워했다. 박수도 아낌없이 보내 주었고말고. 생각보다 스님들 중에서 괴짜(?)가 많았다. 무대에서 절창을 뽐내기도 했으니까. 이런 장면일수록 고스란히 묘사해야 한다 싶어 부지런히 수첩을 메모로 메워 나갔음은 물론이다.
팽가창은 조금 전 법구스님이 하던 말을 생각해 내었다. 사고를 한 번 치라는….워낙 큰 행사라 긴장이 될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아침에 복용했던 우황청심원 덕분인지 마음이 안정이 되었던 거다. 그는 일어나 뚜벅뚜벅 헤드 테이블로 다가갔다.
신임 김흥국 회장과 직전 태진아 회장 사이에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그 둘과는 이미 아는 사이라 눈인사만 하고 얼른 거기 앉았다. 한데 김흥국 바로 옆의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되살리려는데, 그가 먼저 일어서더니 명함을 내민다.
“이봉규입니다. 김흥국과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지요.”
“아, 저명하신 이봉규 앵커님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친구의 취임식에 즈음하여 한마디 축하해 주셔야지요. 이래봬도 저 가수입니다. 그리고 기자이기도 하지요.”
이래서 한참 동안 넷이서 환담을 나누는데, 송대관이 오더니 합석했다. 남진을 제외한 역대 가수협회 회장이 다 모인 셈이다.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 전 현 국회의원이 네 명 보이지 않는가? 정갑윤 부회장과 박민식, 조해진, 이우현 등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대 야당 의원은 아무도 없다. 정갑윤 부의장을 제외하곤 다 전(前) 의원이다.
참고로 덧붙이자. 정갑윤 부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팽가창이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다. 먼저 박민식. 팽가창이 용인 시민이 되기 전 부산 북구에 살았으니, 더 이상 뭘 무슨 설명을 하랴. 조해진은 팽가창이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서 궂은일을 할 때, 가끔 거기 들르던 의원이었다. 이우현, 그가 재선을 하는 동안 팽가창은 그 선거구에 살았지 않은가!
거기서도 넷에게 소감을 부탁하여 몇 마디씩 스마트폰에 옮겼다. 물론 정치 이야기는 신문사 방침에 의거 실을 수 없기 때문에 기사화하지는 못했지만….그저 참고로 들은 셈이다.
법구 스님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갑자기 세속의 연장자라는 느낌이 들어 그만 다시 부르짖고 말았다. 형님, 감사합니다.
법구 스님은 그런 데에 괘념할 소인이 아니었다. 손사래를 치더니, 정색을 하고 하는 말
“곡차 한 잔 후면, 우리 서로 그냥 편하게 형님 아우로 부르자고 하지. 전에도 약속한 바 있었지 않소?”
점심은 뷔페 식이이었다. 나이프를 들던 팽가창은 건너편에서 어느 누구와 마주앉은 남진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팽가창은 법구 스님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형님, 저기 초대 회장 남진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사진 좀 부탁합니다.”
그래서 둘은 곧장 남진의 테이블로 갔다. 상대방(마주앉은)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 그냥 목례만 했다. 남진이야 구면(舊面)이니, 서로 알은체를 했고.
“회장님 감개가 무량하시지요? 오늘 5대 회장 취임식을 갖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요. 59년에 사단법인으로 인가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제가 다시 출범한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일한 것이 06년이었습니다. 올해가 15년이니 9년이 흘렀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면모를 일신했으면 합니다. 기자님들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당연하지요. 면모 일신이라….참 멋지신 말씀이군요. 기대하겠습니다. 한데, 가요가 국민 정서 함양에 끼치는 역할이 지대(至大)하지 않습니까?”
남진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요면 가요지 뭐 그게 국민정서 함양에 지대한 역할? 그런 남진에게 팽가창은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였다. 지난번 어느 업소에서 일제 강점기의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연락선은 떠난다’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일화를 들먹이면서 말이다. 남진은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팽가창은 이왕지사 두 노래는 지역감정을 타파하는 매체도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영역(英譯)하여 세계에 알렸으면 한다고도 부연했고. 이어 팽가창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가 싶더니 어느 누구가 말릴 새도 없이 ‘연락선은 떠난다’를 쏟아내는 게 아닌가. 파도는 출렁 출렁 연락선은 떠난다/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마침내 일어서기까지 한 팽가창을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뉘라서 말릴 것인가? 더구나 천하의 남진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말이다. 끝나자 오히려 박수 소리는 더 커졌다.
팽가창은 남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나서 네 의원(議員) 테이블로 다가갔다. 남진에게 강조하던 그 내용을, 장관설(長廣舌)은 생략하고 요약해서 설명했다.
“오늘 여기에 영남 출신 세 분과 경기 출신 의원 한 분만 오셨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신임회장의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군요. 이 자리에서 여러 함의가 있는 ‘목포의 눈물’을 불러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바야흐로 왁자지껄 야단이 났다. 가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일반 시민이라도 ‘목포의 눈물’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건 지휘자가 없어도 이루는 혼연일체의 제창이었다.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서 법구 스님이 팽가창의 어깨를 감싸더니, 하는 말이다.
“팽가창 가수 아니 아우님, 오늘 드디어 사고를 쳤소이다.”
십 분쯤 지났을까? 얼른 보아도 한국 사람이 아닌 젊은이가 팽가창을 찾아온 것이다. 허리를 굽히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음성군 홍보대사’란 직함 뒤에 ‘가수 방대한’이라 소개해 두었다.
“가수님, 가수님 노래엔 한이 서려 있습니다. 가창력도 대단하시군요. 오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맙소. 자넨 외국인인가?”
“예, 예 방글라데시 출신인데, 지금은 귀화했습니다. 명함에 적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우리나라 말도 유창하게 하네그려. 앞으로 좋은 가끔 연락이나 하고 지내세.”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방대한이라는 방글라네시 출신 귀화 대형 가수와의 선연(善緣)이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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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은 참 매력이 넘치는 대한가수협회 정회원인 가수다. 팽가창은 스스로 방대한 가까이 못 간다고 자평한다. 방대한의 노래엔 그만큼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방대한의 노래에 기교가 넘친다는 말 한 마디로 그걸 대변할 수는 없다. 2억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보이지 않는 방글라데시의 저력? 아서라, 그런 두루뭉술한 표현도 알맞지 않다.
좌우지간 가수이자 기자인 팽가창과, 외국 출신으로서 군(郡) 홍보대사와 가수를 겸업하는 방대한의 어울림은 숙명이다. 그 뒤로 둘은 서로 자주 연락하고 가끔은 만났으니, 두터운 신임과 애정을 나누고 있을 수밖에. 몇 가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일화로 둘의 교유(交遊)를 소개해 나간다.
언젠가 수원 팔달구 중앙 시장에서 공연이 있었다. 주최 측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팽가창은 거길 찾을밖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방대한이 우리나라 가요 몇 곡을 선보였다. 팽가창은 기자 신분으로 편집국장과 함께 거기 가서 그를 취재했다. 많은 가수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방대한이 단연 돋보였다. 틈을 봐서 그를 만나서 다방-시장 통이어서 어김없이 ‘다방’이 있었다.-대담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말이 가장 잊히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참 좋습니다. 물론 제 조국은 방글라데시입니다만….저는 GDP 1,700 달러인 빈국(貧國)에서 와서 음성군 홍보대사도 되었습니다. 제가 양국의 우의 증진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저는 방송국 배려로 어느 누구 못지않게 무대에 자주 오릅니다.”
그는 이런 깜짝 놀랄 말도 했다. 아버지는 방글라데시에서 은행원으로 정년퇴임했고, 당신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대학까지 졸업을 시켰다고. 자신은 방글라데시에서 법학을 전공했다고도 첨언했다. 하여튼 그 공연은 방대한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그가 집중 조명을 받았다.
몇 달이 지나서 팽가창에게 방대한이 전화를 해왔다.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는데, 응원을 좀 부탁한다는 거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몇 팀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시청자들의 투표로 최우수상을 뽑는다는 거였다. 팽가창은 당연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그 개요를 미리 파악하고 카카오톡으로 여럿에게 성원을 부탁한다는 문자를 날렸다. 그는 당일 기대 이상의 다수 표 획득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다시 두어 해가 흘렀다. 팽가창이 그를 극적으로 만난 건 작년 573돌 한글날 경축식장에서였다. 광화문 광장으로 여느 해처럼 취재를 나갔는데 말이다. 세상에, 애국가 선창(先唱) 팀에 방대한이 섞여 있지 않은가! 수첩에 부지런히 메모를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여 들어 봤다. 그리고 놀랐다. 다른 출연자들보다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고 발성 또한 정확했으니…. 팽가창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었다. 그의 입에서 이어 터져 나온 신음소리 같은 명확한 진단이다,
“아 가장 잘부른다, 방대한이! 외국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저렇게 잘 소화시키다니, 그가 애국자이고말고. 시종일관 바이브레이션(떨림) 별로 없이 부르지 않는가 말이다.”
그날 이후 어찌된 셈인지 대여섯 달 연락이 끊겼다. 통화를 몇 번 시도하다가, 그가 그동안 자기 조국 방글라데시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방글라데시 민요 악보도 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귀국 중에 있는 모양이다. 일정 기간 격리 수용 과정을 거쳐야 하니, 아직 해후의 날이 언제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보고 싶지만 참는 도리밖에 더 있겠는가? 앞으로는 법구 스님과 셋이서 만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그렇게 방대한을 그리워 하다가 마침내 팽가창이 무릎을 치며 하는 말이다.
“꿩 대신 닭이라 했다. 오늘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민요 ‘또응구또트와네’나 익히자.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와 있으니 두어 시간이면 가능할 게다! 방글라데시 민요는 방대한에게 직접 배우면 될 테고…”
I-gqi-ra-len-dlela(이 그띠 라 렌들레라/ 벌레야 벌레야) Ngu-qo-ngqo-thwa-ne(응구 또 응구 또 트와네/ 너는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