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역사 자료 (영주시사 편찬위원회 제출자료)
1. 고창오씨의 유래 高敞吳氏(고창오씨)의 由來(유래)와 矜持(긍지) 高麗는 建國初부터 官員이나 土豪들을 包容하는政策으로 本貫制를 施行, 모든官員에게 土地를 分割해주고, 土豪들에게 領地를 認定해주고, 本貫과 姓氏를 내려주는 土姓分定政策을 써서. 民心을 收拾 統一을 이루웠다. 우리高敞吳氏도 이 政策에 의하여 始祖 吳學麟公께서 高敞을 食邑으로 下賜받은 당시 이미 高敞이 本貫으로 定해진것이다. 그런데 그땅이 高麗國 當時 사람이 살기좋기로 전국에서도 最高의 땅이였으니 始祖님의 地位가 자랑 스럽지아니한가? ☉近世에와서 穀倉이된 全羅道 萬頃벌,黃海道 延白벌,載寧벌 등을 치나, 當時에는 이모두가 雜草만 우거진 진퍼리땅 이였다. 高敞은 산좋고 물좋고 肥沃하며 따뜻하고 景致도 좋으면서 海産物까지 豊盛한 땅이었다. 그 當時에는 이보다 더좋은곳은 없었을것이다. 當時 양반(識者)이 살 수 있는 땅으로는 京畿, 忠淸, 全北, 慶北, 黃海道 平山까지이고 그 북쪽은 蠻地 정도 여겼으며, 그중에도 高敞을 비롯한 安東 尙州 全州 등을쳤으나, 高敞과 같이 條件이 골고루 가추어진 곳은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高麗國 第一의 살기좋은 땅을 下賜 받기까지는 우리先祖께서 그때 사람들이 가장 羨望하던 最高의 淸要職인 翰林學士를 靖宗1年(1035)부터 오래동안 하셨고. 거기에 더해 文宗11年(1057)에는 統一 高麗의 北方境界인 鴨綠江 一帶에 아직 거란족의 侵擄(침로)가 잦아 나라가 소란스러울때, 그地方을 平定할 行政官으로 拔擢되어 가셔서 그의 侵入을 완전히 封鎖하고 그 地域民의 生業과 民心을 安定시키는 큰 功을 새우시니 當時의 地名 牟陽縣을 高敞(높을고, 시원할창)으로 그 地名까지 바꾸어서 本貫으로 指定, 下賜(하사)한것이다. <*고려때에는武官은 文官(행정관)에 예속해있어서 文官이 그를 指揮했다. *淸要職 : 高麗때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다르게, 淸要職을 가장 羨望했는데(깨끗한고위직)즉,역사를편찬하는사관,각종 外交文書(외교문서) 나 國王의 敎書와 文章을 作成하는 文翰官(문한관), 王에게 諫 (간)하거나 관이들의 비행을 담당하는 言官(언관)등을 이르는데, 그중에서 最高로 羨望하는 淸要職은 당연 翰林이였다. *本貫制: 新羅는 三國領土는 統合했으나 民族統一을 이루지못해서 地方에데한 지배력을 잃어, 各處에 土豪들이 雄據하여 國力이 점점衰退하고있었다. 이때 에 일어난 것이 그土豪의 하나이던 甄萱(견훤)의 侯百濟였고, 弓裔(궁예)의 侯高句麗(후고구려)였다. 王建도 역시 그러한 土豪로 弓裔의 밑에서 活躍하던 將軍으로 民心이 그에게로 모여져서 高麗를 建國하고는 각처의 土豪들에게 本貫制를 실시하여 그勢가 크면 큰데로 작으면작은데로 그들의 領地를 認定해주고 賜姓 (사성)도하여 民心을 收拾, 包容함으로서 民族統一을 이루웠다. 이政策을 土姓分定 政策(토성분정정책)이라고 한다. 그 좋은 例가 安東權氏의 賜姓으로 安東의 金幸(김행)이王建에게 반항없이 協助한 功으로 安東땅을 領地로해주고 ,權氏를 賜姓해주어 金氏가 權氏로 바뀌었다 *國立中央博物館에 있는 仁正公(世文,世才公의父親) 誌石에도 高敞人 仁正으로 뚜렷이 새겨진 것을 보아도 始祖公때에 本貫이 定해진 것이 確實하다.> 지금도 高敞群誌 人物欄에 제 1장에는 翰林公과 孫子 三分이 실려있으며, 高敞에는 翰林塚(한림총)(오래된묘)을 비롯하여 吳몽룡골 吳亭子터 吳書堂골 땅위에 우리先祖의 자취가 널려있다. 近者에는 高敞文人詩公園을 造成, 그上座에 우리 三世 玄靜先祖의 詩碑를 그 地方 文人들이 自然石에 새겨 세우기도했다. 우리 先祖 二代가 내리 그 名譽로운 翰林學士셨고, 三世東閣學士世文先生게서는 王世子에게 王道를가르치는 修學 擔當이셨으며, 六世인 季孺先祖께서는 많은 功이 있어 牟陽君 (高敞으로 바꾼후에도 牟陽도 함께쓴듯)에 封하여져 君臨했으니 高敞은 완전 우리 땅이 었다. 이와같이 高麗의 最高의 땅을 下賜받으며 代代로 하신 行蹟으로 보아 얼마나 우리가 훌융한 貴族 家門이였는가를 알 수 있다 始祖께서는 老後 官에서 물러나시어 高敞에 내려가셔서는 學堂을 짓고 人材를 養成하셨고, 亭子도 짓고 風流도 즐기시며 三代까지 여기서 사셨고 “世”字 三兄弟도 高敞에서 誕生하시고 交友하신 記錄이있다 後日 後學들이 우리先祖들의 德을 追慕하여 鄕賢祠를세우고 ,春秋로 祭享을 받들었다. 그러나 代代로 官에 重用되어 京(송도)에 가시게 되니 高敞에는 뿌리를 내리지못였고, 또한 七世 六和公(禮儀判書), 八世淹公(肅川 都護府使)대에는 이미 李氏朝鮮이 되니 高敞에의 군임도 끝이났고
高敞에있던 鄕賢祠도 王朝가 바뀌고 또 우리 吳氏도 없게 되니 오랜 歲 月 돌보는 이가 없어 自然히 毁撤되었고 그뒤를 이은 것이 黃海道 平山의 竹林祠이며, 祖 國分斷으로 竹林祠의 祭享을 올리지못하게 됨을 悚懼하게 여겨서 또다시 세운 것이 高陽市 碧蹄의 先祖壇이다. 우리는 이렇게 훌융한 祖上의 後裔라는 矜持와 또한 高敞吳氏가 어떻게 해서 되었다라는 사실을 確實히 認識함으로서 커다란 自負心을 갖을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우리民族 대부분의 始祖님들이 모두 武功에 의해 始祖가 되었으나 우리始祖와같이 學者로서 始祖가 된 이는 손꼽을 정도로 貴하여서 古今의 學者들이 우리 家門을 대단히 貴히여기고 있으며 高麗時代에는우리 高敞吳氏가 最高의貴族家門이었다는것도 알아야한다.
<辛丑譜 主幹 吳東樹 씀>
2. 고창오씨의 역대인물 가.高麗時代人物 1)오학린(吳學麟): 文宗朝 翰林學士 高敞吳氏 始祖 2)오 질(吳 質): 高麗 顯宗朝 登第官 直翰林 3)오인정(吳仁正): 元興鎭 判官 翼陽附錄事 4)오세공(吳世功): 學者 文臣 1177年 慶尙道 按察使 5)오세문(吳世文): 學者 文臣 1152年 陞補詩 壯元及第, 秘書丞, 郎中, 翰林學士歷任 著述歷代歌, 群蟲詩, 潮水論,三百韻詩, 等 不傳 6)오세재(吳世才): 字, 德全 謚號 玄靜 竹林七賢의 座首, 1183年 大科 及第 有遺集 7)오 위(吳 威): 朝散大夫 殿中內給事 8)오영로(吳永老): 衛尉寺 承同正 衛尉京 正順大夫 9)오 균(吳 均): 朝奉大夫 都梁署令 10)오계유(吳季孺): 忠肅王朝 輸忠保節佐理安社功臣.三重大匡 都僉議 贊成事. 封爵 牟陽君 11)오육화(吳六和): 恭愍王朝 上將軍 京城修復一等功臣敍勳 奉翊大夫 禮儀判書
나. 朝鮮時代人物 1)오 엄(吳 淹): 1442年 通訓大夫 肅川都護府使 京畿水使 忠淸兵使 2)오 천(吳 泉): 號.淸溪 建功將軍行司正 贈工曹參議 始居忠北玉泉(司正公派祖) 3)오 형(吳 滎): 字. 智甫 通訓大夫, 羅州判官, 成宗朝 原從功臣, 僉知忠州府使 4)오원찬(吳源纘): 號.寒溪 昭威將軍副司直 三轉爲上將軍贈兵曹判書 5)오 서(吳 湑); 贈司憲府執義(執義公派) 6)오 징(吳 澄): 字. 明俊 號 昌景堂 전력부위승(展力副衛陞)嘉善大夫 副護軍 (展力公派祖) 7)오종성(吳從聖): 武科宣傳官 副護軍, 仁祖朝 振武原從功臣 8)오석복(吳碩福): 1455年 --1533年 字.慶善 號 竹齋또는 三友臺 1477年에 擧進仕 稷山 全義 宜寧縣監 歷任 贈職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 中宗朝 原從功臣.李退溪周愼齋先生 從遊世人曰月成三人, 南溪書院 世德祠 祭享.(宜寧公派祖) *三友臺寫眞 別添參考> 주소지:경북 영주시 휴천3동 1108번지
9)오성신(吳誠愼): 字, 成潤 通訓大夫 全義 縣監(全義公派祖) 10)오계종(吳繼宗): 號,逸齋 成均館生員 進仕 典農署判官(逸齋公派祖) 11)오언의(吳彦毅): 1494年--1566年 字,仁遠 號 竹塢 1531年에 進仕 全義縣監 贈職 通政大夫 左承旨兼 經筵參贊官 榮州南溪書院에 祭享 12)오수영(吳守盈): 1521年-1606年 朝鮮中期의 學者, 字 謙中, 號 春塘 桃巖 退溪 門人. 1555年 成均館 進仕, 宣城 三筆 1605年 陞職 龍驤衛副護軍. 榮州 南溪書院에祭享 遺稿 춘당문집 四冊 二卷(春塘公派祖)
*13)오 운(吳 澐): 1540年--1617年 字.大源, 號,竹牖. 白巖栗溪, 1566年 文科 及第 成均館 學諭, 學錄,學正,直講. 忠州牧使, 成均館司成 等 歷任. 壬辰丁酉倭亂 義兵將으로 活躍. 1608年 慶州府尹, 1616年 工曹參議. 義兵辭職 . 遺物과 遺稿 東史簒要, 竹牖 全書 등 六種 122점의 國家指定 文化財 所藏. 宜寧 忠翊司 大邱 壬亂護國 嶺南 忠義壇. *榮州 山川書院 祭享(竹牖公 派祖)
14) 오여은(吳汝檼): 1561年--1633年 字, 隆甫. 號,洛厓.碧溪. 1613年文科及第 三司檢閱 典翰春秋館編修官 世子 侍講院輔德 壬亂 義兵功臣
15)오 열(吳 悅): 1567年-- ? 號. 松齋. 任亂倡義將 文川會盟. 鷗江會盟. 奉正大夫 軍資監正 蔚山忠義祠 大邱嶺南忠義壇 配享 (監正公派祖) *16)오여벌(吳汝橃): 1579--1635 朝鮮中期學者, 文臣. 字, 景虛. 號 敬菴,南岳.1603年 文科及第 吏曹左郎.修撰,敎理를거처 蔚山判官, 永川郡守.大邱都護府使.昌原府使.등을歷任 地方住民善政致賀去思碑堅立.遺稿 敬菴集 官武原從公臣一等, 扈聖原從功臣 *경암 오여벌의 묘 소재지: 경북영주시 휴천 3동 17)오 수(吳 壽): 號 厚庵. 壬亂倡義將 先鋒將.訓練院判官 宣武原從 一等功臣 18)오선기(吳善基): 1630--1703年 字, 慶夫 號,寒溪 朝鮮後氣學者. 梅林書院, 南溪祠 祭享. 遺稿 小學釋義 寒溪文集 19)오명희(吳命羲): 1682--1765年 字,요경(堯卿). 號,玄巖 1687年 文科及第. 兵曹左郎通禮院 通禮. 松禾.端川郡守. 陞職 嘉善大夫 禮曹參判 遺稿, 玄巖集
20)오석일(吳錫一): 1835-1888年 字,聖咸. 號,聯山 儒學者.高等敎育機關 眉陽齋創始.人才養成 21)오상열(吳尙悅): 1849-1918年字, 敬仕. 戶曹參判 判任官 義禁府都事.贈職 嘉善大夫.
다.近代人物
1)오석준(吳錫俊): 1863-1915年 字.夏三 桃坪山 乙未義擧 義兵軍糧都監 日軍과 交戰 中 戰死.建國勳章 愛國章 2)오화영(吳華英): 1890-1959年 一名 夏英. 號,菊史.己未獨立宣言 33人中一人, 日政時 秘密結社興業俱樂部結成,新幹會總務. 解放後建國準備委員會委員,朝鮮民族黨黨首. 韓,中協會會長.過渡政府立法委員 朝鮮政治大(現建國大學校) 設立及學長. 第2代國會議員.獨立有功者. 建國勳章 愛國章敍勳 3)오하근(吳夏根):1897-1963年字,仲初.號,聾故.1919년(己未年) 3.1獨立運動, 抗日鬪士. 獨立有功者. 1990年 建國勳章 愛族章 敍勳 每年 3월1일 抗日鬪士 聾故 吳夏根公 追慕行事(記念碑前) <聾故儒契會主管> 2.壬亂 忠義士 가. 오 진(吳 溍) : 朝奉大夫 濟用監 副正 나. 오 운(吳 澐) :與金鶴峰 郭忘憂堂 討賊遺勳 通情大夫 다. 오여은(吳汝檼) :火旺山 戰鬪有功 壬亂倡義錄勳 라. 오여벌(吳汝橃) :宣武.호성원종(扈聖原從)功臣 一等 마. 오 열(吳 悅) :壬亂倡義 奉山會盟 奉正大夫 軍資監正 바. 오경우(吳敬友) :宣武 原從功臣二等級 軍器寺直長 사. 오 수(吳 壽) :宣武原從一等功臣.嘉善大夫. 訓練院判官 아. 오 신(吳 信) :宣武原從三等功臣 折衝將軍行龍驤衛副 자. 오 변(吳 忭) :忠順衛 工曹參議護軍 차. 오웅걸(吳雄傑) :宣武原從三等功臣 軍資監判官主簿 카. 오웅동(吳雄仝) :宣武原從三等功臣 訓練院判官 타. 오탁이(吳卓伊) :宣武原從三等功臣 禮賓寺主簿
3.桃坪山 乙未義擧 황해도(黃海道)平山의 吳門中 선비들은 1907년 日帝의 軍隊 解散에 對抗하여 倡義 義兵 活動을 展開하여 救國의 先鋒將이 되었다. 오석영(吳錫英): 1879--1947年.字, 德培 號, 耕山 덕무(德務: 資金管理責任者) 로 平山 白川 .延安. 等地에서 救國抗日戰을 展開 戰鬪만도 19회에달함 오석준(吳錫俊): 1863-1915年 향궤관(餉饋官: 義兵軍糧都監) 日軍과 交戰中 戰死 建國勳章 愛國章 受賞 오응명(吳膺明): 1880-1943年 字.赫哉 斥候活動과 奇襲活動의 先鋒將 受刑 7年 오필형(吳弼衡): 字. 元常 素有慷慨之心 丁未以召募,被殺於平山廣岩里 오석순(吳錫淳): 居龍山 被執死 오목영(吳穆泳): 儒林 人士 蔡洪斗 邊玄錫등과 乙未義兵 論議 救國抗日戰 展開
4.旌閭(정려) 가.오시량(吳始樑): 吳璉父子 孝子旌閭 나.오상옥(吳相玉): 菊圃公 旌孝之閭 다.吳孝子 弼烈 褒賞 表門記 孝子旌閭 라.通政 吳秉堯(오병요)之妣 .淑人 淸州 韓氏 孝子碑閭 3. 영주지역에 관련된 역사적인 인물 가. 조선시대 인물 1) 竹牖 吳 澐 에대한 小考 <경상대학교 한문학과교수 허권수> 1.서론. 조선중기에 영남에서는 거유(巨儒)인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이 나왔다. 두사람은 독자적인 학풍으로 제자들을 교육하여, 그문하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남영의 제자가운데에는 임진 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사람이 많았다. 남영의 제자로서 의병 활동을 한 사람가운데 죽유 오운(竹牖 吳澐)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양문에 모두출입하여 두선생의 영향을 많이받았고, 두문하의 제자들과 폭넓은 교유(交遊)를 가질수 있었다. 오운은 증조때부터 함안에 세거해 오면서 혼인을 통하여 경상도 일원의 강력한 재지사족들과 유대를 맺었다. 이는 뒷날 곽재우가 의병활동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인물인 吳澐에 데해서. 그의가계, 재지사족과의 관계, 행적, 학문과 시문등을 고찰해 보고 나아가 임진왜란때 그의 활약상을 밣혀 보고자한다. 지금까지의 임란에 관계된 인물의 연구가 너무 한사람 중심인물에 편중되어 왔던 것을 지양하여, 임란관계 연구의 시야를 넓이는데 이러한 연구가 도움이되 었으면한다.
2. 생애 가.가계 죽유 오운은 자는 대원, 호는 죽유. 죽계. 백암노인 ,本貫은 高敞이다. 시조는 고려때 한림학사를 지낸 학린이고 고려 중기에 동각학사를 지낸 복양 오세문은 그의 10대조가된다. 강좌칠현의 한사람인 오세재의 형이 오세공의 아우인데, 삼형제 모두 문장의 대가로서 당시의 이름을 날렸다. 집안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삼아왔다. 조선조에 들어와 6대조 오육화가 예의 판서를 지내면서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살았다. 증조 석복이 의령현감을 지내고서 고령인 관계로 인근 고을인 함안의 모곡촌에 정착하게되었다. 함안은 부인 김씨의 외항이었기 때문이고, 아들 오언의는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 현감을 지냈는데 퇴계의 숙부인 송제 이우의 사위로 함안지방의 비중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부친 오수정은 일찍부터 병이있어 벼슬에 진출하거나 학문을 하지는 못하고 조행(操行)에 힘쓰며 가정에서 지냈다. 모친은 취우정 안관의 따님인데, 안관은 고려말기의 근제 안축의 후손으로 막서울에서 낙향하여,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넓혀가고 있던 시기였다. 안관은 또 오운의 처숙부 허윤엽과 동서관계였다.
나. 행적 오 운은 1540년 함안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6세때 조부에게서 처음으로 수학 하였는데 문재가 탁월하였다. 18세때 생원 허사염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허사염은 의령에 세거하던 사족으로서 많은 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그는 퇴계의 맏처남으로서 퇴계를 따라 배웠고,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허사염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오운은 그맏사위로서 많은 전장을 과 짐을 상속받았다. 이때부터 의령현 가례에도 집이 있게 되었는데, 그의 일호인 백암은 처가가있는 가례 마을에서 연유한 것이다. 퇴계의 처남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퇴계의 처질서가 된다. 19세때 김해 산해정으로 남명 조식을 찾아 뵙 고서 제자가 되었다. 남명은 이때 삼가 토동에 주용정.계복당을 짓고서 강학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 젊은 시절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 에도 가끔 왕래하고 있었다. 오운은 이 이후로 김해나 삼가로 남명을 찾아가 수학을 하였다. 22세때 생원에 합격하였고, 25세때 는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27세때 별시문과 병과 제 7인으로 합격하여, 권지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서애 류성룡. 개암 김우굉등 당시의 명현들과 동방 급제하였다. 31세때 까지 벼슬하여 학록까지 승진했다가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해 있는 동안에 퇴계 남명의 상(喪)을 차례로 만났고, 이어 조모 이씨 상(喪)과 부친상(喪)을 만나 37세때 까지 상중에 있었다. 복을 마치자 조정의 부름에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옮겼다. 겨울에는 명천현감으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봄에 체직되어 돌아와 의령에 우거하였다. 의령은 처 향이자 퇴계의 처 향으로 퇴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고, 산수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그는 백암대를 쌓고서 참된 신수의 정취를 얻어 즐겼다. 41(1580)세때 다시 성균관 전적으로 나아가 정선군수를 거쳐 충주목사겸 춘추편수관 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는 팔봉서원을 세워 음애 이우. 관수 이연경을 향사하였다. 지방장관으로 나가서 서원을 세워 성현을 향사하고 후진을 교육하는 운동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 퇴계였는데, 오 운도 그 스승 퇴계의 영향을 받아 서원 창설운동을 적극 적으로 이어 받았던 것이었다. 45세 되던 해에 외증조부인 송제 이우의 시집인 송제시집을 간행하였다. 송제의 시 원고를 퇴계가 편집하여 친필로 정사(淨寫)하여 두었는데, 오 운이 이때 봉록을 출연하여 간행하였다. 이해 겨울에 파면되어 의령으로 돌아왔다. 이때 충주목에는 감사일가와 관련된 송사가 있었는데 여러 전임목사들이 판결하지 못한 것이 였다. 오운이 이일을 원칙되로 처리하다가 감사의 뜻을 거슬리어 파면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함안 의령 두곳을 오가면서 함안 군수로부터 부임한 한강 정구와 함께 함주지를 편찬하였는데, 이책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지방지이다. 49세 되던 해에 성균관사성에 제수되었다가 그이듬해 공주목사로 나갔다. 2년 만에 파면되어 돌아왔는데, 그가 이처럼 파면을 당한 것은 정의를 지켜 시속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은 남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고 볼수 있겠다. 1592년 의령 집에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고을원들은 모두 도망 가버려, 왜적들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처 들어 왔다. 이에 망우당 곽제우와 함께 창의하여 낙동강이나 남강을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무찔렀다. 이 때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온 김성일 중도에 서 영접하자, 김성일은 오운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으도록 했다. 이때 오운은 개인적으로는 , 증조부 이래로 살아오던 집은 전란으로 패허가되었고 집안에 전래해 오던 문적은 한자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조상의 산소도 왜적의 손에 도굴이 되었다. 다행이 숙부 오수영이 예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얼마간의 문적이 남아 있게되었다. 그다음해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병으로 사퇴하고서 경북영주 초곡으로 돌아왔다. 영주초곡은 본래 허사염의 부친인 진사 허찬의 처가인 허사성 문경공이 살던 곳이었다. 문경공은 많은 전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으므로 맏사위인 허 찬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거기서 살게 되어, 의령과 영주 두곳에 집이 있게 되었다. 오운의 장인 허사염은 허찬의 맏아들로서 의령과 영주에 있는 집과 田場을 물려받았다. 허사염도 아들이 없었으므로 맏사위인 오운이 많은 재산을 물려 받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지방은 전화에 휩 사이게 되었으므로 , 오운의 가족들은 비교적 안전한 영주에서 살았다. 이때 영주에 살면서 임진 계사년에 있었던전쟁 상황을 정리하여 용사 난이 록을 저술하였다. 56세(1595)되던 해에 협천 군수로 부임하였다. 전란으로 잔폐해진 고을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완전한 고을로 만들었다. 이해 4월에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그는 사재를 인정받았으므로 외직에 있으면서도 늘 사관을 겸임하였다. 60세(1599)되던 때 장예원 판결사로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소를 올리고 함안으로 돌아와 선영을 개수하였다. 그의 증조 이하 3대의 산소가 함안에 있었는데 ,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발총을 해버렸다. 오운은 당시 나라일이 급하므로 대충 수습하였다가 이때 완전히 개수하였다. 61세 되던 해에는 토계문집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연보를 교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문집고성제에도 참여하여 여러 동문들과 함께 강론하였다. 69세 때 정주부윤으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72세 때는 주자문록을 완성하였다. 주자의 다른 문체의 글들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운은 주자의 글 가운데서 봉사.소차.잡저. 서기 등의 문체가운데서, 후학들에게 절실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글들을 절선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67세때 편찬하였던 동사찬요를 75세때 개찬하여 완성하였다. 이는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우리 나라의 歷代史 였다. 77세 되던 해에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앞서 여러 차례 제수된 관직에 부임하지 않아 임금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워 부임했는데, 광해 조에 들어와 처음으로 부임한 관직이었다. 대북파가 정권을 오로지 하던 광해 조에는 그는 영주에서 은거하면서 주로 저술과 유림의 일로 여생을 보냈다. 다음해 2월에 병을 얻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3월에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의 예관을 보내어 부의를 내리고 치제하였다. 오 운은 2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적에 50여 년 동안 올라 있었지만 최종의 직위인 부사는 44세 때 제수 된 목사보다 더 낮았다. 이렇게 환로가 순탄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사환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점과 그의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은 점 때문이었다.
3.재지 사족과의 관계 앞에서 밣 였듯이 ,그의 증조부 오석복이 의령현감에서 물러나 함안에 정착하면서 경상우도의 사족이 되었고, 또 그의 조부 오언의가 퇴계의 숙부인 송제 이우의 사위가 됨에 따라, 경상좌도 지방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갖는 가문이 되었다. 그의 부친 오수정은 함안의 사족 안관의 사위가 되었고 오운자신은 의령의 사족인 허사염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맏아들 오여은은 주세봉의 아들인 주박의 사위가 되었고 , 둘쩨 아들 오여벌은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사위가 되었고, 셋째 아들 오여영은 점필제 김종직의 현손인 김성율의 사위이다. 그의 사위는 생육신 조여의 5대손인 군수 조형도이다. 그도 화왕산성의 곽제우의 휘하에서 싸웠다. 그의 손자 익환은 사인 문홍달의 사위이고, 익황은 대사연 권태일의 사위이고, 손녀는 그의 가까운 처족인 허종무의 부인이다. 그의 매부는 고려 말부터 함안에 세거하던 재령 이씨집안의 판결사 이대형 으로서, 임란초 김해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이처럼 오운의 가문은 경상도 지역의 함안. 의령. 칠원. 고령. 협천. 안동.예안등과 혼인을 통한 유대관계는 임진왜란때 그가 창의하는데 크게 원동력 이 되었다. 임진 왜란 때의 홍의장군 곽재우를 위시하여, 그 휘하에서 활약하던 17 의병장 가운데 수병장 오운,전군향 허언심.치병기, 강연용등이 오운의 처가와 인척 관계를 맺고 있고, 화왕산성 전투에서 활약하던 허도라는 사람도 오운의 처족이자 그의 손서이다. 이런 관계에서 볼 때 , 오운이 곽 제우를 도와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 할 수 있게 한데는 , 오운자신의 가문과 처가를 통한 재지사족과의 강력한 유대가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수있다.
4.사우관계 오운은 19세때 남명을, 24세 때 퇴계를 찾아 뵙고서 제자가 되었다. 본디 퇴계는 할머니의 사촌동생이자 처 고모부 였으므로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퇴계의 영향을 먼저 받았다고 할수 있겠다. 그는 퇴계를 존모하여, 그도덕과 문장은 태산북두와 같고 이 세상에 모범이 된다, 주자 이후로 “제 일인자다” 라고 하였다. 특히 퇴계에 대해서는 제자이기 이전에 친척으로서 인간적인 관계가 더 두터웠다. 그래서 퇴계 사후, 퇴계의 초취부인의 묘갈명인 퇴계선생 배 정경부인 허씨 묘갈명과 진성이씨 족보서를 퇴계의 손자 동암 이영도의 부탁을 들어 지었다. 퇴계, 남명 양문을 출입한 제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간적 차이를 두고 양문에 동시에 출입하여, 두선생이 타계할 때 까지 계속 출입하였으므로 두 선생의 훈도를 가장 많이 받은 샘이다. 그래서 광해군의 사제문에서 이른바, 도학은 퇴계를 존모하고 학문은 남명을 종주로 삼았다. 「도모퇴도 학숭산해(道慕退陶,學崇山海)」라는말에서 그의 학문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사위이자 제자인 조형도는,“남명의 마루에 오르고 퇴계의 방에 들어갔다.(승상해당,입퇴계실)”라고 하여 그의 학문 수준이 퇴계.남명에 가까이 접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양문을 출입하여 퇴계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과거로 진출하여 벼슬에 나갔으면서도 물러나기를 좋아하였고, 저술을 좋아하였다는 점이다. 남명에게 받은 영향으로는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아 , 자주 파직을 당했고, 사환에서 현달하지 못했다는 점과. 왜적의 침입에 분연히 창의 하였다는 점이다. 양문을 출입하는 동안 문하의 많은 인사들과 가까이 사귀었는데, 대표적인 벗과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문하의 동문우인데, 김성일이초유사로서 임명되어 왔을때 그의 막하에서 소모관으로서 그를 도왔다. 1593년 4월 김성일의 진주에서 병몰하자. 조종도,와 노박성 등과 염습을 하고서 지리산에 가매장 하는 등 의리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 아들 오여벌은 김성일의 아들 김집의 사위이다. 오운은 임란직후인 1600년에「서김학봉용사사적후(書金鶴峯龍蛇事蹟後)」 라는 글을 지어 송암 이노가 지은 용사일기에 실린 학봉관계 기사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한강 정구는 양문을 같이 출입한 친구인데 , 오운이 고향에서 살 때 정구가 함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때 그는 산관으로서 향교의 재독관으로 있으면서학문을 장려하였고. 함께 사직단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함께 함 주지를 엮었다. 서애 유성룡은 퇴계 문하의 동문이면서도 동방 급제하였다. 그리고「퇴계문집」을 편찬하는 일에 함께 종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사 3수를 지어 그의 국가를 위한 큰 충절과 정주의 도통을 이은 학문을 칭송하였다. 또 류성룡은 김성일의 행적을 전할 문자를 지을 것을 요청한 오운 의 편지에 , “자기는 바야흐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김성일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 라고 완곡히 거절하는 답을 보낸 적이 있었다. 류성룡이 오운의 동사찬요를 얻어 보고서 선조에게 추천하자, 선조는 이 책을 ,유림에 표준이 되는 책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초야에 물러나 있던 류성룡이 사찬 사서를 자진해서 임금에게 올린이유는 , 당시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가 점점 세력을 형성하고 퇴계 계열의 인사들이 배척 당하던 시기였으므로 , 퇴계학파의 학문적 우수성을 선조에게 인식 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볼수있겠다. 소고 박승인은 퇴계 문하의 동문이면서 손아래 동서인 박 혼의 아버지이다. 같이 영주에 살면서 절친했다. 박승임이 죽은뒤 오운은 그의 문집인 숙호집을 교정했다. 망우당 곽제우는 남명 문하의 후배인데, 임란 때 같이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또 인척 관계로는 곽제우는 오운의 처종고종이 된다. 이밖에도 창석 이준 , 우복 정경세.동악 이안눌 등은 후배이면서도 절친하게 지냈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 처럼, 그는 당시 조정에서나 영남에서 영향력이 큰 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5. 학문과 시문 그는 토계,남명 양문을 출입하였지만, 학문적 으로는 토계의 영향을 더많이 받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급은 죽유전집에서, “주용정에서 출발하여 암소현에서 졸업 하였다” 라고 그의 학문역정을 요약하였다. 학문의 시작은 남명에게서 비롯 됏지만 최종적으로는 퇴계에게서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이다. 두선생의 영향을 받은 바탕위에서 그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적 성추를 얻었다. 그 결과 그는 주로 사학.주자학,문학에 관심이 많아 각분야의 저서를 남겼다. 사학 분야에 있어서는 , 우리나라 역사서인 「동사찬요」를 저술하였다.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고려사.동국여지승람등을 참고하여 ,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까지 1449년에 걸친 기전체사서를 저술하였다. 동사찬요를 저술하게된 동기는 다음 네가지로 요약될수있겠다. 첫째 우리나라사람들은 대개 우리나라역사에 관심이 없고 또 잘모르기 때문에 이런 풍토를 시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둘째 옛사실을 밣혀 현재의 일을 해석하는데 거울을 삼으려는 것이다. 셋째 각각의 인물들을 명신관 반아(叛兒)으로 선악에 기준하여 구분하고 권선징악 하려는 데있다. 넷째 당시 까지 나와 있던 여러 사서의 병통을 시정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 사관은 공자의 춘추나 주자의 강목등의 유가사서에 바탕을 두었다. 다만 그가 참고한 서적이 주로 동인측의 자료에 국한되어 있다는 결점이 없지않다. 당시 우리나라 주변정세는 임진왜란을 겪은지 얼마안된 시점에서 명나라가 기울고 신흥 청나라가 발흥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적 자주심을 길러주고, 오랑케인 왜나 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필요에서, 오운은 이책을 저술하게 된것이다. 이책 가운데서 유일한 지(志)인지리지는 고대 인문지리서로서 가치가 크다.삼국사기 지리지가 신라위주로 편찬된 것을 탈피하여, 삼국을 각각 독립적으로 지리지를 편찬하여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군현명의 표제로 내세우고, 경덕왕때 고친지명에 대해서는 주(注)로 처리하였다. 이는 고구려때의 광대한 요동을 우리영토로 보는 민족적인 시각이라고 할수있겠다. 그리고 삼국사기.지리지 에 실리지 않은 지명에 대해서는 고려사 지리지를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오운은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게 할수 있는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하여 광해군에게 주자대전의 진강을 건의하는 상소를 하기도 했고, 자신은 주자학에 경도되어 깊이 연구하였고, 늙어서도 개을리 하지 않았다. 주자의 글은 후세의 학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였고, 그가운데 소차에는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경론이 더욱 많이 들어있다고 오운은 생각하였다. 주자의 서간은 퇴계가 절선한 주자서절요가 있어 학자들이 쉽게 얻어 보고 주자학의 정수에 접근 할수 있지만, 나머지 봉사,진차.잡저.서.기등의글은 워낙 방대하여 학자들이 쉽게 접근 할수도 없을 뿐아니라, 주자대전을 쉽게 구해 볼수 없었으므로, 서간을 제외한 주자문장의 선집을 만들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런사업은 그가 후세을 보급하는 한방법이 었던 것이다. 오운은 이렇게 주자학에 심취하고 주자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그 보급에 힘썼지마는, 당시 학계를 풍미하던, 성리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임진왜란을 직접 겪으면서 성리학이 국가 민족의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인식했던것이다. 그 대신 주자학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를 바로 하는 현실 문제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운의 문집인 죽유집은 그의 후손사중이 영주,예안 등지에서 널리 수집하여 그의 수고율계난고와 합쳐 문집을 만들고, 연보와 부록을 붙여 3책으로 1885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청신. 준영(준영:우수하다,맛이좋다)하고 온온.심원하여 소식과 황정견에 대적할만 했다. 문장은 간결, 고아하여 한유, 류종원에 가까웠다.
6.임진왜란때의 활약상 오운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당시에는 산관으로 있었는데. 이 이전에 정3품직인 광주목사를 역임한 전직관료였다. 그리고 경상도일원의 재지사족들과의 혼인을 통한 강력한 유대를 맺고있었다. 임란 발발 이후 최초로 창의했던 곽제우가 감사김수와 병사 조대곤에게 토적으로 몰려,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곽제우도 어떻게 할수 없어 한때 모든 일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으려고 하였다. 이 때 곽제우는 오운이 살고 있는 가례마을을 지나다가 오운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오운은 곽제우가 창의한 일을 칭찬하면서 같이 일할 것을 약속했다. 자기의 전마와 날쌘 노비 7.8명을 내주었다. 또 인근마을의 사우들에게 권유하여 장정들을 내게하여 곽제우를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자신은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곽제우가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까지만 해도 곽제우는 양촌의 일개 서생에 불과했지만 ,오운은 이미 3품 관을 지냈고, 나이도 12살 위이며 처가로 쳐서 곽제우에게 매형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곽재우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 자신은 그 휘하의 수병장 으로서 곽재우를 도왔다. 여기에서 그가 국가대사를 위한 겸허한 자세를 볼수있다. 학봉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로 부임해 왔을때, 그는 이지역의 사족들과 유대를 갖고 있지 못했고, 또 이지역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다. 퇴계. 남명 양문에 다 출입한 오운은 김성일과 이지역의 지리와 제반 사정을 안내해 주어 초유사의 임무를 잘 수행할수 있도록 활약했다. 1594년 군공으로 협천군수에 임명되어서는 군사를 규합하여 많은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웠다. 도원수 권률이 그의 공을 임금에게 장계(狀啓)하여 가자(加資) 되였다. 그리고 고을원으로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을을 잘 복구하였다. 1958년 명나라 수군감독 진린의 접반사가되어 호남 해안 지방에서 활약하면서 대명외교에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오운이 임진왜란때 많은 공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가 지은 임란관계 기록인 「용사란이록」등의 문헌이 일실되어 그의 활약상은 별로 밝혀지지 않아 주목받지 못했다.
7. 결 론 죽유 오운은 함안에 세거하면서 혼인을 통하여 강력한 재지사족들과 유대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 관계는 뒷날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의병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운이 이러한 사족 들과의 유대관계를 활용하여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유사 김성일을 도와 이 지역 사족들과 연계를 시켜주고, 이지역의 지리적 상황을 안내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특히 낙동강 남을 통해서 침입하는 왜적이 북상하거나 서진하지 못하도록 하여 왜적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오운은 어릴 시절부터 퇴계.남명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두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퇴계에게서는 학문하는 자세와 저술하는 방법을 배웠다. 문과출신이 지만 ,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늘 초야에 물러나 학문을 즐기며 저술에 힘쓴 것은 퇴계의 영향이라고 할수있겠다.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고 시세에 영합하지 않은 점이나, 임란때 국가민족을 위해서 창의한 일 등은 남명의 영향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는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사학.문학 방면에 관심이 있었는데, 특히 주자학에 경도 되었다. 그는 정치를 올바르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길을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임금에게 주자대전의 진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또 주자학에의 접근을 쉽게 하기위하여 주자의 문장을 절선하여 주자문록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자의 성리설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는데, 이는 그가 성리학이 국가민족의 현실문제 해결에 도움이되지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기전체사서인 동사찬요를 지어 당시까지 나와 있던 여러사시의 잘못된 제례를 바로잡고, 우리나라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지리지에서 고구려 강역에 대한 관심은, 민족적 자존심의 발로라고 볼수있다. 오운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오랫동안 사적에 있었지만 중앙의 현요직에는 있지 못했으므로 관찬사서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없고, 집안에 전해 오던 자료도 가화(家禍)를 겪는 바람에 많이 없어졌다. 이런 관계로 그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이면서도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었다. 앞으로 그의 시문(詩文)이나 저서인 주자문록, 동사찬요등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가 요망된다. <모양실록 502페이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許捲洙 논문에서 옮김> ◆죽 유 선생의 저술 죽유선생은 죽유전서를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용사난리록」 「동사찬요: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우리나라역사서17권.기전체형식에따라역사 서술」등이 대표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현금에 정구복(전북대 교수)한영우(서울대교수)박인호(금호공대교수)석학들이 조선후기사학사 연구에서 「오운의 동사찬요를 주제로하여 연구책자가 발표되기도 하였으며,고령군청과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가 주최하여 죽유 오 운의삶과 학문세계」주제로 유교문화 학술회의가 개최되기도 했다.또한 김순희「오운의 <동사찬요>의 서지학적연구」『서지학연구』박장승「계림부(경주부)간행<동사찬요>에 데하여」『경주문화』. 허권수「죽유 오운에대한 소고」등 이 연구발표되어 학계에 널리알려져 연구하고 있으니 이또한 문중을 빛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죽유오운에 대한 소고.허권수 경상대학교교수. 죽유 오운-각좌와 강우 문화의 융합자 허권수 경상대학교>>
2) 敬菴 吳汝橃의 生涯 1. 行蹟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고창 자는 경허 호는 경암 남악. 아버지는 부윤 澐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로 생원 士廉의 딸이다. 큰 아버지 晋에게 入養되었다. 鄭逑의 門下에서 수업하여 문학이 성취되었다. 1601년 (선조34년) 생원 進士試에 합격하고, 1603년 문과에 급제,종부사직장 승문원 정자를 비롯하여 정언, 좌랑을 거쳐 수찬 교리 에 이르렀고 외직으로는 울산판관 영천군수 대구 도호부사 ,청송부사, 창원부사. 연일 군수 등을 역임 하였다. 그는 울산 창원 등지의 지방관으로 있을때 선정을 배풀어 고을 백성으로부터 거사비가 세워지기도했다. 그는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易掛圖 천지만물도 음양오행도를 저술하였고, 특히 역사에 조예가깊어서 중국역대총론과 동국역대기사를 남겼다. 저서로는 경암집 6권 3책이있다. <출전:한국인물사전 정신문화원 참고문집 인조실록 경암집> 1635(인조13년) 7월 14일 창원 임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다. 임진왜란에는 부친(죽유공 휘운)을 도와 애적을 물리친 공이였으며 , 선무원종공신일등. 호서원종공신일등에 녹권되었으며, 창의록에등제되어있고, 행적은 영주지인물에 기록되어있다. 사림의로 영주 남계사에서 제향하고 있다. 저서는 시고문집인 경암집이있다. 정한강(鄭寒岡 諱 鄭述).류서애(柳西厓 諱 柳成龍) 두선생께 학문을 배웠다. 묘소는 경북영주시 휴천동에 있으며 합봉이다. 배위는 숙인 의성김씨(金氏 文忠公 金學峰 諱 成一 孫女)이다 <출전: 고창오씨 세보> 2. 遺 槁 □ 오경허 여벌이 구성으로 돌아감을 전별함 <別 吳景虛 汝橃 還龜城 二首> <天山 萬樹裏 多謝此來尋> 첩첩산중 수림속에 찾아주어 감사하오 <瑚海 三年別 風燈一夜心> 호해이별 삼년의회포 풍등의하룻밤 심정일세 <黃金 多結契 白雪少知音> 황금같이 귿은정분 맺음이 많았지만 백발되어 서로만나 아는사람 적었구나 <明日 相分결 何時更對襟> 내일 서로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손가.
<今朝歸去 松蹄露> 오늘아침 돌아가는 솔뿌리 오솔길이 <綠水千廻 山萬椆> 푸른물 천구비요 산봉우리 만첩이라 <明月不隨 人共山> 밝은달은 사람따라 해어지지 아니하고 <一天分照 兩鄕愁> 한하늘 높이떠서 둘의 마음 비쳐주리 □오경허가 왕명으로 체포되었다는말을듣고 <聞 吳景虛 就 拏命> <禍福相飛伏> 화와 복은 서로가 나타나고 없어지며 <憂榮互往來> 근심과 영화는 서로가 가고 오는 것 <魚鴻雖混網> 어 홍이 비록 섞어서 걸렸으나 <玉石豈俱災> 옥석을 그 어찌 함께 대울 손가 <有若昭天日> 저 하늘에 맑은 해 비쳐있구나 <何難霑雨雷> 점 우(소낙비)처럼 시원스레 풀어 주리라 <行還竹嶺路> 갔던 날 죽령 길일세 <相對把深杯> 서로 만나 술잔 권하리라 <출전: 東溪文集 동계 : 괴산군수 조형도>
3.통훈대부 행홍문관 교리 諱 汝橃(휘 여벌) 묘갈명 오씨 가 高敞을 관향으로 삼은 지 오래되었으나, 한림학사 오학린에 이르러 비로서 크게 드러났는데, 이때부터 대대로 저명한 사람이 나왔다. 공의 고조 오석복은 의령현감 증좌통례이고 증조 오언의는 전의 현감 증 좌승지이고 할아버지 오수정은 증 이조참판 이고 아버지 오운은 통정대부 경주부윤이고 어머니 정부인 김해 허씨는 생원 허사렴(許士廉) 딸이다. 공이 만역 기묘년에 의령 가례리에서 태어났는데 , 휘는 여벌이고 자는 경허 , 스스로 부른 호는 남악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6세에 독서 할 줄을 알았고 9세에 백부 제용감 부정 오진의 양자로 나갔는데 어머니 숙인 상주 주씨는 제원찰방 주세란의 딸이다. 임진년에 공이 남쪽으로 피난 가 영천에서 살았다. 영천은 본래 문학의 선비가 많았는데 공이 실로 그중에 으뜸갔었다. 신축 년에 생원,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계묘년에 문과중 잡과에 합격하여 관례에 따라 종부시 직장에 임명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기었다. 그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존호를 올리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청한 영상 윤승훈의 의논이 그르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교체되자, 그 의논이 중지되었는데 , 홍문관에서 처음에는 정계한 것을 배척하였다가 결국에 가서는 윤승훈을 출사하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공이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이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공이 좌석에 써 있는 공명정직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 그대들은 이것도 부끄럽지 않는가? 」 라고 하니 , 동료들이 얼굴이 붉어졌다. 공이 인피(引避) 하면서 홍문관의 잘못을 배척하자, 선조 대왕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대사간 박이장이 「공이 은밀히 윤승훈의 입장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자, 선조대왕이 하달한 비답에 「오 여벌은 새로 진출한 시골 사람으로 혼자 우뚝 서서 과감히 말하였으니 , 이는 정말로 근일에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를 배격하였으니, 너무나도 옳지 않았다.」 고 하였다. 박이장이 교체되자 공이 불안하여 재차 인피하고 이어 휴가를 얻어 행리로 돌아왔다. 이에 공의 올곧은 소문이 안팎에 퍼지자 사람들의 시기가 더욱 심해져 공을 수성으로 추천하였으나, 선조대왕이 공에게 노친이 있는지 물어보고 낙점하지 않고 전서(典書) 겸사관(兼史官)에 임명하였다. 병오 년에 병조 좌랑에 임명되어 지제교를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다른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모두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무신년에 울산판관(賑恤從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술년에 임기가 차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신해 년에 호남관찰사 의 막 좌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자 다시 영천군수로 임명하였다. 을미년에 허위로 고발한 역모의 옥사가 일어나 공도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풀려났다. 병진 년에 진휼종사관으로 본도를 순회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가 일이 끝나자 조정으로 들어가 지강원 문학,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교리로 승진되었다. 정사 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기미년에 상복을 벗자 문학이 되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대구를 요청하여 부임하였다가 청송으로 전직되었다. 경신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임술 년에 상복을 벗었다. 계해년 이후로 연달아 수성, 연일 좌동례 , 창원부사 에 임명되었다가 을해년에 병이나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 이해 10월에 경북 영주시 휴천3동 조암리에 묻혀있다. 아! 공이 어버이를 섬길때 효성을 다하였다. 나이 겨우15세에 양부모의 상복을 성인처럼 입었는가하면 큰 난리를 만나 유리하는 속에서도 친히 신주를 모시고 다니면서 통곡하였다. 일직이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영종에게 음악을 가르쳤는데 ,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다시는 그 음악을 듣지 않았다. 큰 형님과 먼 변방에 떨어져 있는 것을 한스러워하여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었고 궁핍한 아우 하나를 가련하게 여겨 있는 대로 털어서 도와주었다. 임금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국상이 났 을때 졸곡이전에는 어육을 먹지 낳았다. 광해군 때 두문불출하고 지조를 지키자 그 당시 무리들이 시기하여 끝내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직을 하락하지 낳았는데. 인조 반정 이후로 공론이 신장되어 이 따라 그 관직에 임명되니, 사람들이 그의 명철ㅇ에 탄복하였다 특히 백성을 다스리는 데 뛰어나 울산 , 연일 , 창원에 모두 공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젔다, 공과 같은 재덕으로 장정을 출발하여 명철한 임금의 인정을 받았으나 소인배들의 비위를 거슬린 바람에 결국 그들의 비난을 받아 궁하게 끝나고 말았으니. 매우 애석하다. 공이 일찍이 류 서애선생을 찾아 뵈었을 때 류 서애선생이 예로대우하고 이별에 임해 고인이 매화에 대해 을픈 시중에 「매화야 눈하고 싸우지 말고 깨끗한 그 자태 명월 속에 간직하라」라는 구절을 말해주었는데, 이는 공의 깨끗한 지조가 세상과 어울리기 어려운 점을 염려한 것이었다. 아! 결국 류서애 선생의 말씀이 들어 맛고 말았으니, 이는 천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판서 동명 김세렴이 공에게 제전을 드린 제문에 「도덕이 훌융하고 언론이 정대하다.」 고 하였으니, 사류들에게 이처럼 존중을 받았다. 공의 부인 숙부인 의성 김씨는 김학봉 선생의 손녀이자 세마 김 집의 딸이다. 정숙한 자품으로 법도가 있는 가문에 태어나 婦德이 순수하고 행실이 갖추어졌는가하면 첩들을 은정으로 대하고 안방의 법도가 매우 올발랐다, 공보다 15년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공의 큰 형님 들째 아들 오덕기는 3남 1녀를 낳아 딸은 사인 김수창에게 시집가고 아들은 아직 어리다. 둘째아들 생원 오경기는 재주와 학문이 있어 조만간에 승진될 것인데 , 그가 낳은 2남 2녀는 아직 어리다, 공이 소실에게서 1남1녀를 낳았다. 아들은 오익문 이고 딸은 정익주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자녀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현명한 임금을 만나니 그 정직은 넉넉히 간신들의 뼈속을 시리게 하였고 혼탁한 시대에 주선하니 그 침묵은 넉넉히 매서운 지조를 보전했도다. 결국에 깨끗한 조정을 만났으나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재주를 써 보지도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조물주에게 물어 볼길 없도다.』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겸,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풍산김응조는 쓴다> <출전: 墓碣銘> <출전 :牟陽實錄에서 옮김>
나. 近代史의 人物 1.主要 經歷 가)본관: 고 창(高敞) 나)성명: 오 하 근( 吳 夏 根: 號는 聾故) 다)출생지: 경상북도 영주 이산면 조암리 1108 라)출생년월일 : 1897년 10월 15일생 마)경력 : 기미년 3.1독립운동. 경성(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복역 사)서훈 1) 3.1독립운동 국가유공자 2) 대통령표창 3) 건국훈장 애족장 아) 항일투사 농고오하근공의 기념비제막:1979년 12월 17일 자) 농고 오하근공의 묘와 배, 양위. 墓 :국립묘지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이장: 2007년9월1일
2. 功績內容 가)고종황제인산에 참가 후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참가 (1919년3월1일):고종황제승하시) 나)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 다)고향인 경북영주지역에 귀향하여 동년3월 20일 영주우시장에서 지역주민을 동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시위타가 왜병에게 체포됨. 라)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1년 6개월 온갖 고문과 고초를 겪으며 영어(囹圄)의 생활. 마) 출옥 후 귀향하여 출옥 동지와 울산 대구 지역에서 독립운동활약. 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계몽과 한학으로 후학을 양성타가 1963년 5월25일 숙환으로 별세
3) 記念碑文 紹介
愛國志士 聾故 吳夏根公 記念碑文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옷깃을 여미자 우리고을 千年幽宅에 잠드신 吳夏根公은 日制의 사나운 채찍아래 온 겨례가 설움 받았던 시절 己未年 獨立萬歲의 우렁찬喊聲이 온나라에 퍼지자 어려서부터 瑞香門前에 태어나 가슴가득 끌허 오르는 血槽를 억누를 길 없어 榮州의 愛國靑年은 물론 奉花의 朴仁緖 同志와 擧事를 內約하면서 榮州 장날을 擇하여 太極旗를 높이 휘두르며 獨立萬歲를 외쳐 많은 시민의 호응속 山川도 함께 울려 흔들렸으니....... 이는 民族魂의 부르 지즘이오 民族正氣의 扶植이였다. 그때의 公의 나이 스물 셋 그 젊음과 그義氣 실로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公의 擧事로 말미암아 우리고을의 빛이 될 뿐 아니라, 祖國光復의 大義를 드높임에 있어서 民族의 자랑인 것이다. 公은 1897년 10월 15일 慶北榮州伊山槽岩里에서 태어나셨으며 萬歲事件으로 日警에 被逮되어 1년 6개월의 獄苦를 치루셨고 1963년 5월 25일 生涯를 마치셨다. 婦人은 安東權氏이며 3男 2女를 두어 家門이 繁盛함은 公의 陰德이 根源깊고 흐름긴 것을 미루어 알만하다. 이제 六甲을 맞이한 그遺族이 地方人士들의 協贊을 얻어 精誠과 힘을 모아 여기 碑碣을 세워 公의 氣節을 길이 後世에 傳하여 崇仰토록한다.
西紀 1979年 己未 六十週
韓國文化藝術振興院長 宋 志 英 記
[출처] 고창오씨와 영주시의 역사 편찬자료 제공|작성자 형팔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