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된 양광(楊廣)
604년에는 수국(隨國)의 황실에 패륜적(悖倫的)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아들인 양광에 의해 살해되고 폐태자(廢太子) 양용 역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문제에게는 다섯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번째 아들은 방릉왕(房陵王) 양용(楊勇), 두번째 아들은 진왕(晉王) 양광(楊廣), 세번째 아들은 진왕(秦王) 양준(楊俊), 네번째 아들은 촉왕(蜀王) 양수(楊秀), 다섯번째 아들은 한왕(漢王) 양량(楊諒)이었고 그 외에 네 명의 딸이 더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귀족들로부터 선망과 지지를 얻고 있었던 인물은 바로 양광이었다. 양광은 진국(陳國) 정벌전(征伐戰)을 총지휘했고, 북방 돌궐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매번 큰 공을 세우면서 많은 인재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맏형 양용이 차지한 태자의 자리를 엿보았다. 양용이 여색을 밝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아 점차 문제의 환심을 잃게 되자 양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해 힘을 과시했다.
문제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양광은 거짓수작을 꾸며대면서 문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문제가 진왕부로 올 때마다 그는 호화롭게 몸단장한 애첩을 숨겨놓고 무명옷을 입은 늙은 여인들만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일부러 비파(琵琶) 줄을 끊어놓은 다음 비파에 묻은 먼지도 털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곤 했다. 문제는 그런 광경을 보고 양광이 여색을 즐기지 않으며 청렴한 성품을 지녔다고 칭찬하고는 흡족해했다.
황태자 양용은 어머니인 문헌황후(文獻皇后) 독고씨(獨孤氏)가 짝지어 준 태자비(太子妃) 원씨(元氏)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것도 꺼리고 단 한마디도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운소훈(韻蘇薰)이라는 기녀(妓女)를 사랑하여 밤마다 그녀를 자신의 침소로 불러 애정행각을 벌였으며 태자비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태자비는 궁궐에 들어온 지 두 달만에 병사(病死)했는데 문헌황후는 양용이 태자비를 독살한 것이라고 여기며 태자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양광은 어머니가 맏형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문헌황후에게 더욱 곰살궂게 굴었다. 황제나 황후가 보내오는 사람이면 그 직위가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연회를 베풀고 처와 같이 동석하곤 했다. 그는 또 권세가 있는 대신들에게도 선심 베풀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신들과 황실의 사람들은 저마다 진왕이야말로 인의 도덕이 있다고들 말했다. 이에 문헌황후는 양광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한번은 양광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문헌황후와 작별할 때 그는 능청스럽게도 이별하기 아쉬운 듯 눈물을 흘리면서 태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제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이에 황후는 몹시 격분했다.
“내가 살아 있는데도 그런 수작을 하니 내가 죽은 다음에는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문헌황후는 양광에게 자기의 부름 없이는 함부로 장안으로 올라오지 말고 동궁으로 아예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양광은 문헌황후의 마음을 알고 은근히 기뻐했다.
양광이 양주로 돌아오자 우문술(宇文述)이 그에게 한가지 계책을 말했다.
“태자를 폐하는 것은 아주 큰일이니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지금 임금님과 대신들이 모두 다 양소(楊素)를 몹시 신임하고 있으므로 양소의 지지를 받는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소는 그의 아우인 양약(楊若)을 더없이 사랑하므로 저와 양약은 잘 알고 있는 사이니 제가 장안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양광은 몹시 기뻐하며 우문술에게 금은보화를 주고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우문술은 장안에 당도하자마자 양약을 초청해 주연을 베풀었다. 양약이 골동품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미리 여러 가지 보물들을 객실에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양약은 골동품들에 호기심이 끌려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술상을 물린 뒤 우문술은 보물을 걸고 바둑을 두며 일부러 몇 번 져주었다. 보물을 절반 이상 따게 된 양약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때 우문술이 입을 열었다.
“이 진주보물은 진왕께서 양공(楊公)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양약은 의아하게 여기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요?”
우문술은 웃으며 말했다.
“이만한 선물이 뭘 그리 대단하다고 그럽니까? 진왕께서는 양공과 월국공(越國公:楊素)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게 할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 말에 양약은 더욱 놀라며 물었다.
“내가 지금 부귀영화를 누린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형 양소는 부러울 게 없이 잘 살고 있소. 그런데 진왕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단 말이오?”
우문술이 대답했다.
“두 분 형제가 지금은 비록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다 하지만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월국공은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어 숱한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태자께서 하는 일을 늘 반대하셨으니 태자께서는 월국공을 좋아하지 않지요. 만약 지금의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신 다음에 태자께서 즉위하면 월국공을 그대로 보고 있겠습니까?”
우문술의 말을 듣고 양약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슨 좋은 수가 없겠소?”
우문술이 양약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지금 황제 페하 내외께서는 태자를 폐하고 진왕을 신태자(新太子)로 세우려 하시지만 고경(高熲)과 하약필(賀若弼)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계십니다. 양공이 적절한 때에 거들어주시면 큰 공을 세우는 겁니다. 진왕께서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계신다니까요.”
양약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양약은 양소를 만나 우문술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이해득실을 따져주었다. 양소도 쉽게 동의했다.
며칠이 지난 뒤 양소가 문헌황후에게 아뢰었다.
“진왕께서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합니다. 평소에 검박하게 지내는 모습도 폐하를 우러러 뵙는 듯합니다.”
황후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옳은 말이지. 진왕은 효성이 지극하나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가슴이 아프다네.”
양소는 붙은 불에 부채질 하듯 태자를 헐뜯었다. 황후는 양소의 말이 자신의 마음과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면서 태자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태자로 세우도록 조정의 신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일을 당부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용은 몹시 두려움을 느꼈다. 이때 문제가 양소를 태자궁에 보내 치국(治國)에 대해 강의하게 했다. 양소는 태자의 마음을 건드리고자 동궁에 이른 뒤에 일부러 지체하면서 궁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양소가 들어오지 않자 양용은 노발대발했다.
양소는 돌아가 문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자께서는 폐하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당도하자마자 화를 냈는데 아무래도 뜻밖의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여러모로 방비를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양소의 말을 곧이듣고 사람을 풀어 양용을 감시하도록 했다.
양광은 태자의 측근인 희위(希慰)를 매수했다. 희위는 태자를 고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태자께서는 늘 점쟁이들을 찾아 점을 치곤 하는데, 점괘에 나오기를 개황(開皇) 18년에 황제께서 눈을 감게 되니 때가 오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자 문제(文帝)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양용이 이렇게도 지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문제는 드디어 양용을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리고 나서 양소에게 책임지고 심문하게 했다.
600년에 문제는 양용을 폐위시켜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난 다음 양광을 태자로 책봉했다.
양광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지 4년이 지나 문제가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때가 돌아왔다고 생각한 양광은 문제가 죽은 후에 뒷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내용의 친필편지를 양소에게 보냈다. 그런데 양소의 회답편지가 그만 문제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문제는 편지를 본 다음 크게 노하여 양광을 불러 문책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의 애첩인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황한 기색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면서 문제의 침소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태자 양광이 자기를 성추행했다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침상을 탕탕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짐승 같은 녀석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 중책을 떠맡는다는 말이냐? 아, 황후가 대사를 그르쳤구나!”
문제는 곁에 서 있는 유술(劉述)과 원암(元巖)에게 폐태자 양용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양광과 양소는 급히 가짜 조서(詔書)를 작성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인수궁(仁秀宮)을 포위했다. 황제의 명을 받고 떠나려던 유술과 원암은 밧줄에 꽁꽁 묶여 감금되었다. 인수궁을 지키던 황제의 근위병들은 무장해제되고 동궁의 보위병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참 뒤 문제의 침소에서 나온 사람은 양광의 측근인 장형(藏炯)이었다. 그는 한 곳에 몰려 꿈쩍거리지도 못하는 환관들에게 소리쳤다.
“폐하께서 운명하신 지 오래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때까지 품신(稟申)하지 않았느냐?”
궁전 안팎 사람들은 아연실색했지만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제는 이렇게 둘째 아들인 양광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이어 양광은 자결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담긴 칙서(勅書)를 꾸며 양용에게 보냈다. 양용이 대답하기도 전에 칙서를 가지고 간 우문지급(宇文智及)이 양용을 끌어내려 교살(絞殺)하였다.
그 해 7월에 양광이 드디어 수국(隨國)의 두번째 황제로 등극하였으니 그가 ‘제2의 시황제(始皇帝)’로 일컬어지는 양제(煬帝)였다.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형마저 서슴없이 죽인 양제였으니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잔혹했던지는 말하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계속}
첫댓글 고맙습니다...^^
세월만 가면 화제자리에 오를텐데 왜 양광은 애비를 살해하였을끼??
양만춘 장군님의 화살이 단죄를 했지요...
소설풍의 역사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대단한한양제구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