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의 감동과 바퀴벌레 김기춘
1994년에 가장 히트한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였다. 미국 역사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와 70년대를 배경으로 아이큐 75 포레스트 검프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극 중에서 검프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 등 역사의 굽이굽이에 모두 등장하면서 케네디, 존슨, 닉슨 등 역대 대통령과 만나기도 한다. 언론과 온라인에서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역시 포레스트 검프처럼 격동의 한국 현대사 굽이굽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른 점도 무척 많다. 포레스트 검프의 아이큐는 75에 불과하다. 기춘이의 아이큐는 포레스트 검프 아이큐의 2배는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더 큰 차이는 아이큐보다도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직성이라 할 것이다.
어느 리뷰에서 “혼란의 시기 속에 ‘순수’와 ‘사랑’을 잃지 않은 한 인간”이라 평한 포레스트 검프의 삶은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지만 기춘이의 흑역사는 나에게 두 가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바퀴벌레와 오뎅.
오뎅 국물과 같은 한국의 엘리트 집단
온갖 환경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3억2천만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지구의 터줏대감 바퀴벌레. 그 어떤 방법으로도 퇴치가 불가능하다는, 마음 고쳐먹고 동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그 바퀴벌레. 오뎅은 한국 엘리트 집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저녁때 장사를 나와 오뎅을 끓이면 새벽에 일 마칠 때까지 통을 비우는 법이 없다. 오뎅이 많이 팔리면 꼬치 더 집어넣고, 국물 졸아들면 물 더 붓고, 싱거우면 간장과 양념 치고, 무 더 썰어넣고, 그렇게 해서 새벽까지 통을 비우지 않고 오뎅을 판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일제시기로, 일제시기에서 해방으로, 군사독재에서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상황변화에도 한국 엘리트 집단의 본류는 단절된 적이 없다.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 한국 엘리트 집단이라는 종을 대표하는 개체가 바로 ‘왕실장’ 기춘이다.
1939년생인 기춘이는 2013년 8월5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을 유행시키며 일흔다섯의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조선왕조 500년을 포함해도 최고령 도승지(조선시대 승정원의 6승지 중 수석 승지로 왕의 비서장 격)가 아닐까 한다. 기춘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역대 최고령 도승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역대 가장 막강한 비서실장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이 있다면 한국에는 격변의 세월을 살아남아 대원군에 오른 오뚝이 기춘이가 있다.
기춘이의 독특한 이력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들의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1958년 서울법대에 입학한 기춘이는 3학년 때인 1960년 말에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기춘이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것은 1963년과 1964년, 그가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가 박정희 일가와 처음 인연을 맺은 때다. 흥미롭게도 5·16장학회 설립에는 박정희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지낸 신직수(1927~2001)가 깊이 관여했다. 대한민국에서 관운이 제일 좋다는 소리를 들은 신직수는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특보 등 자리를 옮길 때마다 기춘이를 데리고 다니며 오늘의 그를 만들어준 후견인이었다.
기춘이는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에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난다. 1971년 6월 신직수가 법무부 장관이 된 직후였으므로, 신직수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이때 신직수 장관과 과장인 기춘이가 주동이 돼 유신헌법에 대한 안을 모두 만들었다.
기춘이는 또 유신헌법에 대해 티브이에 나와 명해설을 하기도 해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 유신헌법 제정 공포 이후 첫 검찰인사(1973년 4월초)에서 기춘이는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승진했다.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
평검사 기춘이는 과장(부장검사)으로 승진했지만, 법무부 장관 신직수는 1973년 말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했다. 이때 신직수는 기춘이를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여 부장의 법률보좌관을 삼았다.
1974년 8월15일, 35살의 새파란 검사 기춘이를 40년 후 최고령 도승지로 만들어준 숙명의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한 재일동포 문세광이 국립극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했고 그 와중에 육영수가 피격 사망한 것이다.
기춘이는 이 사건 수사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춘이는 문세광의 말문을 열도록 하라는 신직수의 지시로 수사팀에 합류했다. 육영수가 실제로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총탄에 희생된 것인지는 지금도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당시 수사당국은 첫째 ‘육영수 여사의 살해범은 문세광’이고, 둘째 ‘그의 배후에는 조총련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박근혜의 입장에서는 문세광을 범인으로 특정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든 기춘이 등 수사진은 바로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고마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현재 박근혜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기춘이에 대한 박근혜의 신뢰와 고마운 마음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세광 사건 수사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한 기춘이는 그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기춘이는 서른다섯살 나이에 중앙정보부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유신체제 유지의 대들보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대공수사국장 시절 기춘이의 대표작이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요 피해자들은 재일동포였고 사건 관련자들은 부산대·서울대·한신대에 유학중이거나 이들과 친하게 지낸 재학생들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75년은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남베트남 정권 붕괴, 장준하 암살 등 참으로 살벌한 때였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교체될 때 기춘이는 계속 대공수사국장으로 있었는데, 신직수는 1979년 1월 청와대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기용되자 기춘이를 데려다가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삼았다. 기춘이는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와 접촉할 기회도 자주 있었을 것이다. 유신시대 최고로 잘나가던 기춘이는 박정희 사후 친정인 검찰로 복귀했다.
삼양라면 공업용 쇠기름 사건도 그의 작품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다. 오뚝이 기춘이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유신 시절 동기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앞서가던 기춘이는 5공 때는 찬밥을 먹었다. 세월이 바뀌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여소야대 상황에서 5공 청산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을 때, 5공 시절 찬밥을 먹은 기춘이는 1988년 12월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무대의 중앙에 복귀했다. 기춘이가 지휘하는 검찰은 1989년 ‘5공 비리’ 수사를 진행하면서 전 안기부장 장세동 등 49명의 5공 인사를 구속했다.
기춘이가 검찰총장으로 있던 시절은 바로 민주화 이후 수구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어 공안정국-보수대연합-범죄와의 전쟁이 이어진 시기였다. 이때 기춘이는 ‘미스터 법질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선봉장’을 자임하면서 좌경용공세력과 폭력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강경발언을 연일 쏟아냈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좌경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머리를 드는 데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기춘이는 검찰총장으로 있을 당시 또하나의 야심작은 검찰이 삼양식품 등이 라면 제조 공정에서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회사 대표 등 여러 명을 기소한 사건이었다. 수년간에 걸친 공방 끝에 그들은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민주화 이후 중앙정보부-안기부는 체제 유지의 전면에서 한발 물러서야 했다.
유서대필 사건은 이 공백상태에서 발생한 위기를 검찰이 온몸을 던져 막은 것이다. 유서대필이란 지금이나 그때나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검찰도 수구세력도 그것을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가야 할 만큼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검찰이 주도한 유서대필 사건은 군과 정보기관이 퇴조한 가운데 검찰이 체제유지의 주력부대임을 과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한동안 ‘검찰공화국’으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기춘이는 선발투수는 아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구원등판하여 노태우 정권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캠프 주변에 몰려 있었다.
기춘이는 원로그룹인 7인회의 일원이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강신욱은 검찰 몫의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캠프의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지냈다.
수사검사였던 기춘이는 박근혜 캠프의 열린검증소위원장, 수사검사였던 윤석만은 박근혜 후보의 외곽조직인 대전희망포럼 공동대표였다. 또 수사검사였던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첫 민정수석이 되었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밀려난 바 있다. 기춘이는 이들 모두의 우두머리다.
‘탁월한 법률가’ 김기춘의 완벽한 탈출
복어를 잘못 먹으면 탈이 난다. 치밀하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기춘이도 복어집에 갔다가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도록 망신한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망신이 아니라 정의가 제대로 섰다면 흉악범죄로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의 수괴였던 것이다. 그 망측한 모의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세상에 까발려졌다.
14대 대통령선거를 이틀 앞둔 1992년 12월16일, 전 법무장관 기춘이는 부산에서 부산시장·검사장·경찰청장·안기부지부장·교육감·기무부대장·상공회의소장 등 기관장을 모아놓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할 것을 모의했는데 이를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아들 정몽준 의원 쪽에서 도청하여 녹음한 테이프를 공개한 것이다.
각 언론이 정몽준 의원 쪽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풀어 상세히 보도하면서 “우리가 남이가” 등 거기서 기춘이가 한 발언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날 기춘이는 “중립내각이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면서도 치밀한 성격과는 달리 막 달렸다.
그 자리에 모인 공직자들은 아직 장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인데 기춘이는 그들에게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모르지”라고 자랑하면서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도 했다.
워낙 자기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하면서 무리수를 많이 두었던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춘이는 “잘못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가야 할 판인데 여당 해야지 그럼 어떡합니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는 노골적인 주문을 하면서 “훗날 보면 보람 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신했다.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속마음이 고향에 가 한잔한 김에 거침없이 나온 것이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지만, 뒤집기의 달인은 따로 있었다. 국정원 직원이 댓글을 달던 현장에서 적발되자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일을 가녀린 여직원을 무지막지한 자들이 감금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뒤집은 신공은 이미 20년 전 초원복집 사건 때도 발휘되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파렴치한 부정선거 모의가 아니라 불법적 반인륜적 도청사건이 된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기춘이는 감옥에 가야 했고 초원복집 사건으로 그는 더이상 공직을 맡을 수 없어야 마땅하다. ‘부정선거 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공식 석상이 아닌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기춘이만 불구속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기춘이는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결국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기춘이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로 끝났다. 법비(法匪)란 말이 있다. 온갖 비적이 들끓던 만주에서 가장 무서운 비적은 법으로 무장한 법비였다. 기춘이야말로 법비 중의 법비였다.
법비 기춘이는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그가 가장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은 2004년 3월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킨 때였다. 당시 기춘이는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의 검사 격이었는데 법사위 여당 간사는 16대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법안에 대해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법사위에서 단기필마로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린 합천 출신의 김용균이었다.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 것이 제명 사유가 된다는 지금이나 유신시대와 비교한다면, 대통령을 실제로 자르려고 했던 2004년의 탄핵은 절차민주주의가 극한으로 만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누려 탄핵안을 가결시키고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러 간 자들은 친일과 유신과 5공과 지역감정의 화신들이었다.
기춘이와 김용균이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는 사진은 온 나라를 뒤흔든 탄핵사태의 본질이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신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기춘이가 어딘가에서 “연산군 밑에는 채홍사들이 들끓고 세종대왕 옆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모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박근혜의 주변에는 누가 모여 있을까. 오죽하면 노무현 시대의 386세대 대신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80을 바라보며 60년대에 공직에 입문한 ‘신 386세대’ 또는 ‘쉰 386세대’라 불리는 흑역사를 자랑하는 올드보이들만 꾸역꾸역 나오고 있을까.
기춘이가 비서실장에 임명된 직후 공식브리핑에서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을 하여 젊은 기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박근혜 취임 1주년을 맞아 청와대 참모들이 자신의 각오나 바라는 마음을 적어 넣은 '롤링 페이퍼에 기춘이는 공직에 임하는 자세를 표하는 뜻으로 '멸사봉공(滅私奉公)' 즉 '사적인 일을 희생해 공적인 일에 봉사한다'란 말을 썼다. 여기 덧붙여 사기(史記)에 출전을 둔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란 문구도 적었다고 한다.
자신의 출세에 필요하면 그것이 독재자이든, 지역분열이든, 조폭이든, 국민을 수장시키는 정권이든, 불의든 가리지 않고 자신을 알아주기만 하면 목숨을 바치겠다는 기춘이는 이미 선비가 아니며 단지 권력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만 꿰하는 더러운 개일 뿐이다.
이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그 충의 근원에는 백성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바다를 지켜내지 않으면 정유재란에서 패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는 생각에 회군을 하라는 왕의 명령까지도 거부하고 전투에 나섰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릇 장수와 신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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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글 : 한겨레 신문의 특집 - 한홍구 교수의 김기춘뎐(傳)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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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Only, 사진및 오디오 제외. 인간이하의 특정인 성씨 생략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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