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 열고닫기 荼蓼齋도요재 검색 Tonton Macoute:아이티의 공포정치 doldom|2015.05.30 17:46 -작게+크게
철모를 쓰고 있는 정규군과 군모를 착용한 통통마쿠트 단원의 모습. 좌측의 행상인 여성의 공포에 젖은 눈이 통통마쿠트의 악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는 1959년 아이티의 종신독재자였던 프랑수아 파파독 뒤발리에Fran?ois Papa Doc Duvalier가 만든 준군사조직 단체이다. 1970년에 이 준군사조직은 공식적으로 Milice de Volontaires de la S?curit? Nationale-Militia of National Security Volunteers- MVSN으로 개칭되었다. 이 무장단체를 아이티 사람들은 Tonton Macoutes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와 유사한 아이티의 신화에서 버릇없는 아이들을 잡아가서 응징하는 삼베자루 아저씨Tonton Macoute-Uncle Gunnysack-와 유사한 발음에서 통통 마쿠트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포의 단체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이태가 채 못 되어 만들어졌다. 1958년 그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군대와 모든 사법단체를 해체시키고 고위급 장성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그리고 새로 만든 무장단체는 밀짚모자에 푸른 셔츠에 선글라스를 쓰고 마체테Machete와 권총으로 무장하였다. 뒤발리에는 본격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통통 마쿠트를 체제 속으로 편입시켜 그의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뒤발리에의 진보적 사회제도를 목적으로 하는 통치는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밤새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종종 대낮에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에 테러를 당하곤 하였다. 통통 마쿠트는 종종 살아있는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거나 돌로 타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살해된 시체들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전시되거나 나무에 걸어 놓았다. 가족들이 이들 살해된 사람들의 시신을 옮기려 하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모두 통통 마쿠트로 불리는 MVSN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아이티 사람들은 믿었다. 몇몇 용기있는 사람들은 MVSN의 처사에 용기있게 암살의 위험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만 했다. 통통 마쿠트의 거리낌 없는 테러행위는 당연히 부정부패를 수반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공공연하게 시민들을 갈취하고 위협하고 테러를 가하였다. 특히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통통 마쿠트를 지휘했던 루크너 카브롱Luckner Cambronne은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잔인함으로 캐리비안의 흡혈귀Vampire of the Caribbean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그가 이런 별명을 얻은 이유는 미국의 병원과 대학에 혈액과 시신을 정기적으로 공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급하는 혈액과 시신은 아이티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것이었음은 자명하다. 종신독재자인 파파독이 사망한 뒤에 카브롱은 파파 독의 미망인인 시몬과 아들에 의해 추방되었다. 카브롱은 1971년 아이티를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 망명하여 아무런 법적제재法的制裁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가 2006년 77살로 사망하였다. 통통 마쿠트의 중요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부두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래서 통통 마쿠트 속에는 부두교의 흔적이 스며있다. 이 부두교적 요소는 토착종교에 심취해 있던 대중들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 주었다. 그들이 대중을 향해 사용한 공포의 대부분은 부두교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이 독재자의 사설기관은 파파 독의 아들인 일명 베이비 독으로 불리는 장 클로드 뒤발리에Jean-Claude Duvalier시절에도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 기구는 1986년 베이비 독이 축출될 때 해체되었지만 아이티 인들에게는 1990년대까지 공포로 남아있었다. 아이티의 종신독재자였던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07년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에서 태어났다. 1934년 아이티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발리에는 지방에서 의료봉사에 종사하였다. 그는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공공의료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뒤발리에는 1940년부터 50년까지 아이티의 보건부장관과 노동부장관을 역임하였다. 특히 보건부장관으로 재직하던 1943년 뒤발리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열대성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빈곤층에 발진티푸스와 딸기종yaws,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예방하는데 진력盡力하였다. 그의 이런 헌신적인 활동으로 사람들로부터 파파 독Papa Doc이란 별명을 얻었다. Papa Doc은 Daddy Doctor-아버지 의사선생님-이란 뜻이다. 이렇게 대중들에게 헌신적이었던 인물이 어떻게 독재자로 돌변하였을까. 뒤발리에는 1915년 미국의 아이티 침공에서 무력과 권력의 영향력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미국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을 구실로 해병대를 파견하여 점령하였다. 채무불이행은 구실에 불과했고, 실은 미국의 뒷마당인 카리브 해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이티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이 결과 수십 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도미니카로 망명하였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을 강요하였다. 이결과 세계 최초로 성립한 흑인 국가인 아이티는 군부의 입김이 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미국의 점령 이후 아이티는 흑인이 아니라 소수인 혼혈 물라토가 집권하면서 다수 흑인과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흑인인 듀마르세 에스티메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다수 흑인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펼쳤지만 소수 물라토와 흑인 지식층의 저항을 받았다. 에스티메그가 50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하려하자 물라토와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티메그를 축출하였다. 그리고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는 폴 마그로워의 군부정권이 탄생한다. 이 정권도 마그로워의 권력욕심으로 인헤 1956년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가 실시되어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다수의 흑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포풀리즘이 강한 뒤발리에는 아이티의 모순과 분열을 해결시켜 줄 대통령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그가 이듬해인 1958년 독재자로 돌아서면서 군대를 무력화시키고 경찰을 자신의 개인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키면서 국가 재정을 자신의 개인 금고로 변모시켰다. 뒤발리에의 이런 변화는 되풀이되는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과 가진 소수와 못 가진 다수와의 대립으로 인해 군부보다 더 강한 힘을 소유하는 권력자가 되어야만 아이티를 이런 악순환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아집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다니던 1938년부터 부두교에 심취하여 아프리카 문명을 찬양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한 다수 흑인층이 가지고 있던 소수의 혼혈 지배층인 물라토mulatto와 소수 흑인 지식층에 대한 분노를 이해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은 뒤발리에가 아이티에서 장 프랭스-마르Jean Price-Mars가 이끈 네그리튜드N?gritude 운동에 참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뒤발리에의 이런 문화적 활동은 후일 그에게 아주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된다. 하지만 1939년 물라토의 사생아인 시몬 오비드Simone Ovide와 결혼하여 마리 드니스Marie Denise, 니콜Nicole, 시몽Simone 그리고 장-클로드Jean-Claude를 낳았는데 이 결합이 그에게 가져다준 사회적 이익은 없었다. 네그리투드N?gritude는 1930년대 프랑스의 정치인들과 작가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의 흑인 지식층들이 주도한 문화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후일 세네갈의 대통령이 되는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L?opold S?dar Senghor가 있다. 기니아의 레옹 다마스L?on Damas, 마르티니크의 아메 세사르Aim? C?saire 등이 서구문화-식민지문화-에 대항하여 흑인의 정체성을 찾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네그리투드 운동을 통해 진정한 아프리카의 흑인문학이 태어났으며 식민지 정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게 되었다. 왜 뒤발리에는 대중적이며 인지도 있는 자신의 전력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종신 독재자의 길로 빠져든 것일까. 그는 어쩌면 사악한 힘보다 더 강한 힘으로 그것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악함을 누르는 더 강한 힘은 더 거대한 사악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결과 뒤발리에 체제는 공권력이 사라지고 뒤발리에 개인에게 의존하는 개인 권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뒤발리에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서 모든 것을 보고 지시하고 치유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그가 사용한 수술도구는 통통 마쿠트라는 자신이 만든 수단이었던 것이다. 의사인 자신의 처방을 불신하는 환자는 통통 마쿠트라는 메스에 의해 가차 없이 제거되었다. 자신의 처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뒤발리에도 간과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통통 마쿠트라는 자신의 수단이 치유하는 메스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변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통통 마쿠트는 뒤발리에라는 의사의 흰 가운 아래서 모든 악행을 마음껏 자행하는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아이티는 가장 폐쇄적이고 무법적인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뒤를 이어 통치하면서 통통 마쿠트에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적법성이 결여된 지도자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폭력에의 의존을 베이비 독은 반복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1986년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될 때 통통 마쿠트는 국가 안의 국가에 버금가는 범죄조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무소불위의 통통 마쿠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하면 1986년 베이비 독 뒤발리에를 축출한 군부도 이들 세력을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무자비함의 흔적은 지금도 아이티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상상 속에 존재하던 폭력을 현실에서 맛 본 자들은 결코 그 경험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http://m.egloos.zum.com/dohyosae/v/4173663 대부분 단원들은 심판 받았겠죠?
첫댓글 나쁜 아이 잡아가는 삼베자루 아저씨라면 한국의 망태할아버지?
아이티.. 예전에 대지진때문에 대통령궁도 수리못하고 방치했다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