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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환목사, 하우스보이에서 세계침례교연맹 회장까지 강사로 초청해 8월12일(금)부터 14일까지 교회설립 35주년 기념 전도부흥회를 개최한다. 전도부흥회는 김장환목사뿐 아니라 김 목사의 가족이 총 출동된다. 부인 트루디(Trudy Kim)사모가 여성도들을 위한 집회(토요일 오전10시, 주일 오후2시)를 가지며, 둘째아들 김요한목사(대전 함께하는 교회 담임)도 강사로 참여해 청소년집회를 따로 갖는다.
큰 아들 요셉 목사는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교목이며 수원 원천침례교회를 1,0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이번 뉴욕에 오는 둘째 아들 요한 목사는 대전의 ‘함께하는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딸 애설씨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교포 자녀와 결혼했다. 인구 90만인 수원에서 1만5천 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또한 김 목사는 한국교계에도 큰 의미가 있는 동양인 첫 세계침례교연맹 총회장으로 6년동안 활동하다 지난 7월 임기를 마쳤다. 김장환목사의 가족은 빌리그래함목사와 관련이 깊다. 김 목사는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빌리그래함 목사의 서울 전도집회 통역을 함으로써 유명 인사가 되며, 빌리그래함목사를 반대하던 모교 밥 존스신학교에서 제명된다. 부인인 트루디 김여사는 중학생 시절 빌리그래함목사의 집회에 참석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전쟁 중인 16세 때 미군의 하우스보이 일을 하게 된다. 소년 김장환은 미군의 주선으로 1951년 17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떠난다. 김장환목사는 미국에 유학와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2년만에 전 미국웅변대회 최고상인 아이젠하워상을 수상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그가 밥 존스 중 고등학교와 밥 존스 대학교 신학과와 밥 존스신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그후 미국 트리니티대학과 사우스 웨스트침례대학과 켐벨대학과 인터내셔널대학에서도 공부한다.
20세 트루디 (한국명 김추리)와 1956년 결혼한다.
1959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59년 목사와 신학박사가 되고 부인 트루디를 데리고 한국을 떠난지 8년 만에 수원으로 돌아온다. 그는 수원 사람으로 수원을 고집하여 수원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수원 중앙 침례교회는 1959년 말 교인 12명이 모이는 기존 교회를 맡아, 인구 90만인 수원에서 1만5천 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트루디 김((한국명 김추리)여사는 중앙기독초등학교 내에 있는 Trudy's Pie Shop에서 직접 빵을 만들어 팔아 장애 아동들을 돕고 있다. 김 목사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와 신분이 두터웠다. 전두환대통령이 백담사에 있을 때에는 제일 먼저 찾아 갔으며,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이 수감시에 똑같이 13회나 면회를 갔다.
노태우대통령의 딸 소영이가 SK 집안에 며느리가 된 것도 소영과 SK회장 식구들이 서로 김장환목사 댁을 방문하다가 이루어졌다.
김영삼대통령과는 같은 신앙인으로써 관계가 좋았으며, 현철이 수감 시는 12회나 면회를 갔었다. 침례교 세계연맹총회장이 될 때 쿠바에서 카스트로를 만나 스페인어 성경책을 주며 그를 전도했고,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는 절친한 사이이다.
김 목사는 “그간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총 속에 목회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 같다”며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그는 후임 목회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당분간 교회를 떠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후임 고 목사에게 “목사는 신학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골방’에서 만들어진다”며 “교인들과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목회자가 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내가 부족한 부분을 젊은 목사가 대신 감당해주니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7월 27일 영국 버밍엄 인터내셔널컨벤션센터(이하·ICC)에서 성대하게 개막됐다. 예배는 김장환 목사의 기념대회 개회사 선포로 시작됐다. 김장환 목사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BWA 총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는 2000년 1월 동양인으로는 처음 BWA 총재에 선출된 후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전 세계 1억5000만명의 침례교인을 이끌어 왔다. 이번에 BWA 총재에서도 물러나 대외적으로 남은 직함은 극동방송 사장이 전부다. 이제는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남아있는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인맥을 쌓아온 여러 나라 대학 총장들을 만나 후배들이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할 것”이라며 “일반대학이든 신학대학이든 상관 없이 후배들이 공부할 수 있고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