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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08회
한편, 순림보(荀林父)는 한궐(韓厥)과 함께 병거를 타고 후영을 나와 패잔병을 이끌고서 산 오른쪽 길을 통해 황하 연안으로 달아났다. 강변에는 晉軍이 버리고 간 병거와 무기들이 즐비하였다. 그때 선곡(先穀)이 뒤를 따라 왔는데, 이마에 화살을 맞아 흐르는 선혈을 전포로 닦아내고 있었다. 순림보가 선곡을 가리키며 말했다.
“싸우자고 주장하던 자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순림보 일행이 황하 어귀에 당도하자, 조괄(趙括)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의 형 조영제(趙嬰齊)가 몰래 배를 준비해 놓았다가, 혼자 먼저 강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우리한테는 알리지도 않았으니, 이게 무슨 도리입니까?”
순림보가 말했다.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데, 그런 걸 논할 여가가 어디 있는가?”
조괄은 분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조괄과 조영제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93회에 보면, 형제의 순서가 동·괄·영이다. 착오가 있다.]
순림보가 말했다.
“아군은 지금 다시 楚軍과 싸울 수는 없다. 목전의 계책으로는 강을 건너가는 것이 가장 급하다!”
순림보는 선곡에게 명하여 하류에 있는 배들을 끌어 모으게 하였다. 하지만 배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모으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를 모으느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강변에는 무수한 인마들이 분분히 몰려들고 있었다. 순림보가 보니, 하군원수 조삭(趙朔)과 부장 난서(欒書)가 초나라 장수 공자 측(側)에게 기습당하여 패하고 패잔병들을 이끌고 당도한 것이었다.
중군에다 하군까지 당도하자, 배는 더욱 부족하게 되었다. 그때 남쪽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났다. 순림보는 승세를 타고 楚軍이 추격해 오는 것인 줄 알고, 북을 울리며 명을 내렸다.
“강을 먼저 건너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
양군은 배를 빼앗으려고 싸움을 벌였다. 먼저 배에 오른 자들로 배가 가득 찼는데, 뒤에 온 자들이 또 계속해서 배에 매달리자 배가 전복되었다. 그렇게 전복된 배들이 30척이 넘었다. 선곡은 배 안에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뱃전에 매달리는 자는 모조리 칼로 그 손을 베어 버려라!”
모든 배들이 선곡의 명에 따라 칼을 휘둘렀다. 잘려진 손가락들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처럼 무수히 배 안에 떨어졌다. 병사들은 그 손가락들을 주워 모두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강변에는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였고, 그 소리는 저 멀리 산골짜기까지 메아리쳤다. 하늘도 어두워지고 땅도 울었으며, 태양도 빛을 잃었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舟翻巨浪連帆倒 큰 물결에 배는 뒤집어지고 돛은 쓰러지는데
人逐洪波帶血流 물결에 휩쓸린 병사들의 피가 강물을 따라 흐르네.
可憐數萬山西卒 가련하도다 서쪽에서 온 수만의 군졸들이
半喪黃河作水囚 황하를 건너다 절반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었구나.
후면에서 일어난 먼지는 순수(荀首)·조동(趙同)·위기(魏錡)·봉백(逢伯)·포계(鮑癸) 등 패장들이 연이어 도망쳐 오면서 일으킨 먼지였다. 순수는 배에 올라 아들 순앵(荀罃)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순수는 병사들을 시켜 강변에서 순앵을 부르게 하였다. 그때 한 병사가 순앵이 楚軍에게 사로잡혔다고 보고하였다. 순수가 말했다.
“아들을 잃고서 내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순수가 강변에 내려 병거를 정비하여 떠나려 하자, 순림보가 제지하며 말했다.
“순앵이 이미 楚軍에게 사로잡혔다면, 가 봐야 무익하오.”
순수가 말했다.
“다른 놈 아들을 사로잡아 내 아들과 교환하려 합니다.”
위기는 평소에 순앵과 친했기 때문에 함께 가겠다고 하였다. 순수는 기뻐하였다. 순수가 순씨 가병들을 소집하자 백여 명이 되었다. 순수는 평소에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군심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강변에 있던 하군 병사들도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미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도, 하군의 순대부가 아들을 구하러 楚軍으로 쳐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모두 강변으로 내려와 사력을 다하여 따르겠다고 자원하였다.
이때의 晉軍의 사기는 처음에 황하를 건너와 하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성하였다. 순수는 晉나라에서 1~2등을 다투는 명궁이었다. 순수는 많은 화살을 가지고 병거를 몰아 楚軍 속으로 돌진했다.
순수는 晉軍이 내버린 병거와 무기들을 거두고 있던 초나라 노장 연윤 양로(襄老)를 만났다. 양로는 뜻밖에 晉軍이 돌진해 오자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순수가 쏜 화살에 뺨을 맞고 병거 위에 쓰러졌다.
楚軍 장수 공자 곡신(穀臣)은 양로가 화살에 맞는 것을 보고 병거를 몰아 구원하러 달려갔다. 위기가 곡신을 가로막고 교전하였다. 순수는 옆에서 달려와 곡신을 향해 화살을 날려 오른쪽 팔을 맞혔다. 곡신이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화살을 뽑는 사이에 위기가 달려들어 곡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양로의 시신이 쓰러져 있는 병거에 같이 태웠다. 순수가 말했다.
“이제 이 두 놈만 있으면 내 아들과 교환할 수 있겠다. 楚軍이 매우 강하니 본대가 오면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순수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급히 다시 황하로 달아났다. 楚軍이 알고 추격하려 했을 때 순수의 군사들은 이미 멀리 가 버린 뒤였다.
한편, 楚軍의 공자 영제(嬰齊)는 晉나라 상군을 공격하러 갔는데, 사회(士會)는 그런 일을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楚軍이 공격해 오자 사회는 이미 진을 벌려 놓고 있다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달아났다. 영제가 오산(敖山) 아래까지 추격해 왔을 때, 홀연 포성이 크게 진동하면서 일군이 나타났다. 앞장선 대장이 병거 위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공삭(鞏朔)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영제는 깜짝 놀랐다. 공삭이 영제를 가로막고 교전하였다. 약 20여 합쯤 싸웠을 때, 공삭은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 사회를 보호하면서 서서히 달아났다. 영제는 晉軍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다시 추격해 갔다. 그때 전면에서 또 포성이 울리면서 한천(韓穿)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편장 채구거(蔡鳩居)가 병거를 몰고 나가 한천을 상대하여 막 교전하려는 순간, 산골짜기 속에서 또 포성이 진동하면서 깃발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상군부장 극극(郤克)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영제는 매복한 晉軍이 많은 것을 보고 계략에 빠질까 두려워 징을 울려 군대를 후퇴시켰다.
[제107회에, 순림보가 우유부단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사회는 극극으로 하여금 상군대부 공삭·한천과 함께 각각 본부병을 거느리고 오산 앞 세 군데에 나누어 매복하게 했었다.]
사회가 장병들을 점검해 보니, 한 명도 잃지 않았다. 사회는 오산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일곱 개의 작은 영채를 세워 마치 북두칠성처럼 서로 연결하였다. 그러자 楚軍은 감히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楚軍이 모두 후퇴한 다음 깃발을 정비하여 귀환하였는데, 그것은 훗날의 얘기이다.
한편, 순수의 병력이 황하 어귀에 당도했을 때, 순림보의 대군은 아직도 황하를 다 건너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황하를 건너 북안에 당도한 조영제가 빈 배를 다시 남쪽으로 보내 접응하게 하였다. 날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楚軍은 필성(邲城)에 당도하였다. 오삼(伍參)이 초장왕(楚莊王)에게 아뢰었다.
“빨리 晉軍을 추격해야 합니다.”
[제106회에서, 손숙오는 후퇴하자고 했지만 오삼은 晉軍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장왕이 말했다.
“우리 초나라가 성복(城濮)에서 패전하여 사직에 치욕을 남겼었는데, 이제 이 일전으로 그 치욕을 씻을 수 있게 되었소. 晉과 楚는 결국 강화해야 할 것이니, 많은 군사를 죽일 필요가 있겠소?”
[제80회에, 楚軍은 성복에서 晉軍에게 대패했었다. 그때 초나라 군주는 초성왕이었고 대장은 성득신이었다. 晉나라 군주는 진문공이었고 대장은 서신이었다.]
장왕은 명을 내려 하채하게 하였다. 그 사이에 晉軍은 밤새도록 황하를 건너가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무사히 강 건너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사관(史官)이 논했다.
“순림보는 적을 헤아릴 지혜도 부족했고, 자기편 장수들을 제어할 능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진격하지도 못하고 후퇴하지도 못해, 패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원의 패권은 모두 초나라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사관이 시를 읊었다.
閫外元戎無地天 도성 밖에서의 원수(元帥)는 천지간에 둘도 없는데
如何裨將敢撓權 어찌 한낱 비장(裨將)이 원수의 권한을 흔들었는가?
舟中掬指真堪痛 배 안에 가득 찬 손가락들은 참으로 애통하구나!
縱渡黃河也靦然 비록 황하를 건너기는 했지만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한편, 정양공(鄭襄公)은 楚軍이 승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필성으로 가서 楚軍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楚王을 형옹(衡雍)의 왕궁으로 모시고 와서 연회를 크게 열어 경하하였다.
[제82회에, 진문공(晉文公)이 천자를 모시고 회맹하기 위해 조쇠의 건의에 따라 형옹 땅의 천토에 왕궁을 건립했었다.]
반당(潘黨)이 晉軍의 시신들을 거두어 楚軍의 무공(武功)을 만세에 알리고자 경관(京觀)을 쌓을 것을 청하자, 장왕이 말했다.
“晉이 죄가 있어서 토벌한 것이 아니라, 과인이 운이 좋아 승전했을 뿐이오. 어찌 무공이라고 칭할 것이 있겠소?”
[‘경관(京觀)’은 무공(武功)이나 전과(戰果)를 과시하기 위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적의 시체를 쌓아 놓고 흙으로 덮은 큰 무덤을 말한다.]
장왕은 군사들에게 명하여 晉軍의 시신들을 모두 매장하게 하고, 하신(河身)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장왕은 개선가를 부르며 영도(郢都)로 돌아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면서 오삼의 계책을 높이 사 그를 대부로 임명하였다. 오삼의 아들이 오거(伍舉)이고, 손자는 오사(伍奢)이다. 오사의 아들이 오상(伍尚)과 오원(伍員)이다.
[오원이 곧 유명한 오자서(伍子胥)인데, 후에 등장한다.]
영윤 손숙오(孫叔敖)는 탄식하며 말했다.
“晉에 승전한 대공(大功)이 한낱 총신(寵臣)에게 돌아가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손숙오는 우울하여 마침내 병이 들었다.
한편, 순림보가 패전하고 돌아오자, 진경공(晉景公)은 순림보를 참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했다.
“순림보는 선대부터의 대신입니다. 비록 패전한 죄가 있기는 하지만, 선곡이 군령을 어겼기 때문에 패전하게 된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선곡을 참형에 처함으로써 훗날을 경계하면 족할 것입니다. 예전에 楚王이 성득신(成得臣)을 죽였을 때 문공(文公)께서 기뻐하셨고, 秦侯가 맹명(孟明)을 살려주었을 때 양공(襄公)께서 두려워하셨습니다. 주군께서는 순림보의 죄를 용서하시어 훗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81회에, 성복에서 晉軍에게 패전한 성득신은 연곡성에게 자결하였다. 제82회에, 성득신의 죽음을 들은 진문공은 비로소 베개를 높이 베고 잘 수 있다고 기뻐하였다. 제90회에, 맹명·서걸술·백을이 효산에서 晉軍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혔다가 돌아왔을 때 진목공(秦穆公)은 맹명에게 다시 병권을 맡겼다. 제92회에, 맹명이 효산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晉나라를 침공했다가 또 패전했는데, 진목공은 또 죄를 묻지 않았다. 맹명은 세 번째 晉軍과 싸워 이기고 효산의 시신들을 거두어 매장하였다.]
경공은 신하들의 말에 따라 선곡을 참형에 처하고, 순림보를 중군원수의 직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육경(六卿)에게 명하여 장병들을 훈련시켜 훗날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다. 그때가 주정왕(周定王) 10년이었다.
주정왕 12년 봄 3월, 초나라 영윤 손숙오는 병이 위독하자, 아들 손안(孫安)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죽거든 이 유표(遺表)를 楚王께 바쳐라. 楚王이 만약 너에게 관작을 내리려 하거든 너는 받지 마라. 너는 재능이 부족하여 정치를 할 만한 인재가 못 되니 벼슬을 바라지 마라. 그리고 만약 너에게 큰 고을을 봉하거든 너는 마땅히 사양해라. 사양해도 안 되거든 침구(寢邱) 땅을 청하도록 해라. 그 땅은 척박하여 아무도 탐내지 않으므로, 너는 후세까지 그 땅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손숙오는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손안은 부친의 유표를 초장왕에게 올렸다.
신은 죄를 짓고 죽은 자의 자식인데 군왕의 은덕을 입어 상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수년 동안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영윤으로서의 중임도 다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군왕의 은덕으로 이렇게 획사유하(獲死牖下)하게 되었으니, 이는 신의 행운입니다. 신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사온데, 불초하여 관직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신의 조카 원빙(薳憑)은 다소 재능이 있어 한 자리를 맡을 만합니다.
晉은 대대로 패자 노릇을 해 왔습니다. 지금 우연히 패전하였지만,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투에 시달려 왔으니, 병사들도 쉬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하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왕께서는 살펴 주십시오.
[손숙오는 위가의 아들 위오인데, 제101회에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위가는 투월초에게 죽음을 당하고 위오는 몽택으로 피신하였다. 제102회에 위오(손숙오)는 초장왕의 부름을 받고 와서 영윤이 되었다. ‘획사유하(獲死牖下)’는 들창 아래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안락한 죽음을 의미한다.]
장왕은 손숙오의 유표를 읽고 나서 탄식하였다.
“손숙오는 죽으면서도 나라를 잊지 않는구나! 과인이 복이 없어 하늘이 나의 훌륭한 신하를 빼앗아 갔도다!”
장왕은 곧 손숙오의 집으로 가서 염하는 것을 보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수행한 신하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음 날, 장왕은 공자 영제를 영윤에 임명하고, 원빙을 잠윤(箴尹)에 임명하였으니 그가 원씨(薳氏)의 시조이다. 그리고 손안을 공정(工正)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손안은 부친의 유명(遺命)을 지켜 굳이 사양하고 교외로 물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장왕이 총애하던 맹주유(孟侏儒)라는 배우(俳優)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우맹(優孟)이라 불렀다. 키는 불과 다섯 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익살을 부려 사람을 잘 웃겼다. 우맹이 하루는 교외에 나갔다가 나뭇짐을 지고 돌아오는 손안을 만났다. 우맹은 손안을 맞이하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어찌 나뭇짐을 지면서 이토록 고생하십니까?”
손안이 말했다.
“부친께서 수년 동안 상국을 지내셨지만, 한 푼도 사사로이 집안에 들여오신 일이 없고, 돌아가신 후에도 남기신 재산이라고는 없었네. 그러니 내가 어찌 나뭇짐을 지지 않을 수 있겠나?”
우맹은 탄식하였다.
“공자께서는 근면하십시오. 왕께서 반드시 공자를 부르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맹은 손숙오가 입던 의관과 칼, 신발 등을 준비하고 아울러 그의 생전의 언동을 연습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우맹은 조금도 틀림없이 손숙오의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어, 마치 손숙오가 재생한 듯하였다.
마침 장왕이 궁중에서 연회를 열어 여러 배우들을 불러 연극을 하게 했다. 우맹은 먼저 한 배우를 楚王으로 분장시켜 손숙오를 사모하는 모습을 연기하도록 한 다음, 자기는 손숙오로 분장하여 등장하였다. 楚王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손숙오는 별 일 없소? 과인이 경을 생각함이 지극하였더니, 과인을 보러 온 것이오?”
우맹이 대답했다.
“신은 진짜 손숙오가 아니라, 우연히 그를 닮았을 뿐입니다.”
“과인이 늘 손숙오를 생각해 왔는데,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니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구려. 경은 사양 말고 상국에 취임하시오.”
“왕께서 신을 중용하시겠다면,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신에게는 늙은 아내가 있는데 세정(世情)에 통달하고 있으니,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한 후에 명을 받들겠습니다.”
우맹은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말했다.
“신이 아내와 의논했더니, 아내가 신에게 취임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오?”
“아내가 이런 촌가(村歌)를 들려주었습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데
청백리(淸白吏)는 해야 할 일 외에는 하지 않네.
탐관오리의 짓이란 더럽고 비열하지만
그로 인해 자손은 튼튼하게 살찐다네.
청백리의 하는 일은 고결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자손은 홑옷을 입고 밥을 굶는다네.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초나라 영윤 손숙오를
생전에 한 오라기도 사사로이 모으지 않아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니 집안은 몰락하고
자손은 걸식하며 쑥대밭에 살고 있다네.
그대에게 권하노니 손숙오를 본받지 마시라.
군왕은 지난 공로는 생각지 않으시네.
장왕은 우맹의 연극을 보면서 그의 모습이 손숙오와 너무 닮아 슬픈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우맹이 노래하는 것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손숙오의 공로를 과인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장왕은 즉시 우맹에게 손안을 불러오라 명하였다.
손안은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와서 장왕을 알현하였다. 장왕이 말했다.
“그대의 곤궁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우맹이 옆에서 대답했다.
“그의 곤궁함을 보면, 전 영윤의 어짊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왕이 말했다.
“손안은 벼슬을 원하지 않으니, 만가(萬家)의 고을을 봉하겠노라.”
손안이 굳이 사양하자, 장왕이 말했다.
“과인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경은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손안이 아뢰었다.
“군왕께서 선친의 작은 공로를 생각하시어 신에게 의식(衣食)을 하사하시겠다면, 침구 땅을 봉하여 주십시오. 신의 소망은 그로써 족합니다.”
“침구는 척박한 땅이라, 경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소?”
“선친의 유명이니, 다른 땅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장왕은 손안에게 침구 땅을 주었다. 침구 땅은 토질이 척박하여 아무도 빼앗으려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손씨는 대대로 그 땅을 지켜나갈 수 있었으니, 이는 손숙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다.
사관(史官)이 시를 지어 우맹의 일을 읊었다.
清官遑計子孫貧 청백리는 자손의 빈곤까지 신경 쓸 틈이 없으니
身死褒崇賴主君 그가 죽으면 자손은 주군의 은덕에 의지할 수 있을 뿐이네.
不是侏儒能諷諫 맹주유가 풍자하여 간하지 않았더라면
莊王安肯念先臣 장왕이 옛 신하의 자손들까지 챙길 수 있었겠는가?
한편, 순림보는 손숙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楚軍은 당장 출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림보는 진경공(晉景公)에게 청하여 정나라를 정벌할 군대를 일으켰다. 정나라 교외를 크게 약탈하고 무위를 떨친 다음 회군하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정나라 도성을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순림보가 말했다.
“정나라 도성을 포위하여 공격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소. 만일 초나라 구원병이 오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적을 불러들이는 격이오. 우리가 잠시 물러나서, 정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오.”
晉軍이 물러가자, 정양공(鄭襄公)은 과연 크게 두려워하여 사신을 초나라로 보내 晉軍의 침략을 알렸다. 그리고 아우 공자 장(張)을 인질로 대신 보내고 공자 거질(去疾)을 정나라로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다.
[제106회에, 정양공은 초장왕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의 아우인 공자 거질을 인질로 보냈다.]
장왕이 말했다.
“정나라는 참으로 신의가 있으니, 어찌 인질이 필요하겠는가?”
장왕은 거질과 장을 모두 돌려보내고, 신하들을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첫댓글 앞으로의 晉과 楚의 패권 싸움은 어떻게
진행될 걸가?
진문공의 시대가 지나고 초장왕이 제3패군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