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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 제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 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말씀전례는 구원이 모든 인류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온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음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당신의 영광을 보리라.”
(이사 66,18)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 13,29)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구원에 있음을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것을 것’인지에 대해 묻는 이 사람은 아마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관심인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적어도 네 가지 면에서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들어가는 ‘문이 좁다’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이는 언뜻 듣기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곧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서 모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더 많은 이가 들어가는 '좁은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 13,29)
이처럼 동서남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들어오는 문이 어찌 '좁은 문'일까요?
정말 당신의 문은 바늘귀처럼 좁은 문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문은 비록 좁지만 하나뿐인 문이 아니라 각자에게 열려있는 수없이 ‘많은 문’인 것입니다.
곧 ‘길이신 당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기에’(요한 13,7)에 '좁은 문'이지만, 동시에 당신께 응답만 하면 누구든지 사방에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들어오는 많은 '좁은 문'일 것입니다.
이는 당신이 바로 '양들이 드나드는 문'(요한 10,8)이시며,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자, 낮추어 어린이가 된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마태 18,3-5)임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 충격은 ‘문이 닫힌다’는 사실입니다.
곧 ‘닫힌 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루카 13,25)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는 좁지만 열려 있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지만, 닫힌 다음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문은 나중에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지금 들어가야 하는 시급성을 다투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재림의 때에 완성되겠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좁은 문'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문을 들어가는 데는 그 어떤 특권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곧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고 하여도 집주인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고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주교님도 신부님도 수도자도 그 누구도 결코 예외가 없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충격적인 사실은 ‘문을 열고 닫는 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집주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루카 13,25),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네 번째 충격적인 사실은 ‘첫째와 꼴찌’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30)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는 꼴찌가 되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첫째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도,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듯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마태 5,6)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좁지만 열려 있는 문>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을 사람이 적은지 주님께 여쭙는데, 주님께서는 많은지 적은지 단순하게 답하지 않으시고 그 문이 좁다고 하시며,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까?
많은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많다 또는 적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구원에 대해 얘기할 때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일부 이단처럼 묵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들먹이며 우리 교회를 믿으면 그 안에 들어갈 거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은 이 구절을 들어 자기 교를 믿어야 이 십사만 사천 명 가운데 들 수 있다고 하였다가, 자기들 신자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을 넘으니 딴소리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이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서 오는 사람들과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신약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오늘 이사야서도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얘기합니다.
이렇든 구원의 문은 모든 종교와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에 열려 있습니다.
우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렇게 얘기하는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이 좁다는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님한테서”라는 시편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거나 지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서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진심으로 또 확고히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역설적으로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자신만만한 사람이고, 구원 교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구원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겸손해야 합니다.
구원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있는 것임을 아는 겸손이고, 그래서 나의 구원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자신하지도 않는 겸손 말입니다.
다음으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구원 무관심일 것입니다.
이것도 구원 교만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밭 갈러 가고 장사하러 간 사람처럼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처럼 오후 다섯 시에라도 주님 포도밭에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늦게 오더라도 구원의 좁은 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임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지 않고 겸손해야지만,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지 문을 닫아걸고 안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니며, 구원의 문은 좁지만 열려있는 문임을 우리고 알고 또 믿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 없이 영광 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개미ㆍ꿀벌의 세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 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 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 개월, 혹은 수 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 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 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좁은 문: “오늘 어떻게 살까?”, 아니 “어떻게 죽을까!”>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줄거리입니다.
매들린은 아주 잘 나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는 법.
매들린은 늘어가는 주름이 걱정입니다.
이때 어릴 적 친구 헬렌이 남자친구 멘빌 박사를 소개하겠다고 옵니다.
멘빌은 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매들린은 헬렌의 남자친구에게 치근댑니다.
멘빌도 매들린이 싫지 않습니다.
헬렌은 매들린이 항상 자기 남자친구를 빼앗았다며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멘빌은 그렇지 않겠다고 해놓고는 매들린과 결혼해버립니다.
헬렌은 상심한 나머지 폭식하여 살이 찌고 정신병원에 갇힐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몇 년이 지난 후 헬렌이 파티를 한다고 매들린과 멘빌을 초대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보려고 갔지만 헬렌은 훨씬 젊어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엔 헬렌이 멘빌을 다시 꼬십니다.
멘빌도 자신을 자기 주름보다 못하게 여기는 매들린이 지겹습니다.
그래서 매들린을 죽이기로 합니다.
계단에서 밀어서 매들린을 떨어뜨린 멘빌은 헬렌에게 전화합니다.
그런데 매들린이 목이 꺾인 채로 멘빌에게 다가옵니다.
멘빌은 기겁합니다.
매들린은 헬렌에게 질 수 없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을 먹은 것입니다.
그 약을 먹으면 몸은 좀 망가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누가 좀 고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겁하고 심지어 심장마비로 죽기까지 합니다.
이때 매들린이 죽은 줄 알고 헬렌이 들어옵니다.
매들린은 자기를 죽이려 했다며 헬렌을 총으로 쏴서 배를 뚫어버립니다.
하지만 헬렌도 죽지 않습니다.
헬렌도 그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죽도록 싸우다가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히 살려면 자기 몸들을 고쳐 줄 의사가 있어야 하는데 멘빌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화해하고 멘빌에게도 영생의 약을 먹도록 권합니다.
멘빌은 괴물이 되어 버린 두 여자를 두고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영생의 약을 버립니다.
그는 죽기를 택한 것입니다.
37년 뒤 멘빌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멘빌은 다시 결혼하여 자녀도 많이 낳고 모험도 즐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뒤에서 두 명의 여인은 비웃습니다.
바로 매들린과 헬렌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으면 뭐 하냐, 살아있는 게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은 슬픕니다.
아무 의미 없는 하루를 또 살기 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십니다.
좁은 문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삶을 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비록 미사에 와서 강론을 듣고 성체를 영하더라도 이 길을 통해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 우리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떻게 살지?”
이것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사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매들린과 헬렌이 영생의 약을 먹고는 매일 아침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멘빌 박사는 다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어차피 죽는 인생,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어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그는 죽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나의 죽음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실제로 혼자서 330척과 대적해 싸웠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머지 11척도 죽자고 덤벼서 결국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의미 있게 죽으려고 하는 삶,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영원히 살게 되면 더 완전한 모습으로 살려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하지만 죽으려 하면 생명 유지를 위해 간직한 아주 작은 것까지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맡김은 하느님의 자녀됨으로 하느님처럼 됨입니다.
우리에겐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우린 지금 살아있습니다.
죽으려 하며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될 것인지, 살려고 하며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예수님은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려는 삶으로 나아가보라고 권하십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도 하루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죽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죽으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과 멸망>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라는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만일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힘쓰는’(노력하는) 사람만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 문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표현만 보고서 ‘들어가기 어려운 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고, 그 생각은 ‘신앙생활은 어렵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좁은 문’이라는 말은 ‘들어가기 어려운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격 심사가 엄격하다는 뜻입니다.
(엄격하다는 말도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대충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으니 하느님 나라의 문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문은 ‘들어가기 쉬운 문’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세속의 눈으로만 보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학력, 나이, 신분 등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어린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몸이 약하거나 병든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니, ‘아주 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못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다.”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는 않아서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은지는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드러날 것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루카 13,25-27)
이 이야기는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선고가 번복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재심의 기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닫힌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뒤늦은 후회’를 나타냅니다.
(주님이 무자비하고 냉정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주님이 앞에 계시는데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는 일은 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미사를 구경만 하고, ‘참례’는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멸망을 선고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는데, 모른다는 말은 관계가 없다, 또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었습니다(루카 12,9).
지금 이 상황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저승에서 애원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루카 16,23-24).
한 번 멸망을 선고받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는 방법을 몰라서 못 들어간 사람들이 아니라, 알면서도 안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의 ‘안’보다 ‘밖’이 더 좋다고 하면서 ‘밖’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입니다.
구원이 확정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서 겸손하게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의 여정 - 은총, 훈육, 좁은문>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돋우세."
흥겹고 아름다운 초대송 후렴으로 하느님께 노래 부르며 하루를 시작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 삶의 지론은 넷입니다.
“1. 기도하라, 2. 공부하라, 3. 일하라, 4. 운동하라”입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요,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문득 예전 21년 전 써놨던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뒷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 2001.4.16
추호도 환경을 탓할 것은 없습니다.
묵묵히 제 삶의 꽃자리에서 하늘의 별처럼 살면됩니다.
제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하나 소중한 성인들입니다.
은수적 삶을 살며 휴식을 갖는 교구 사제가 잠시 수도원에 들려 성전 뒷뜰 잡초를 정리하며 묵묵히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저에게는 매일 운동 중 하나가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은 제 삶이자 기도이자 묵상이자 휴식이자 운동입니다.
정말 유일한 소원은 죽는 그날 까지 강론쓰는 것, 미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걷는 것, 넷입니다.
요즘은 하늘비 얼마 내린지 얼마 안되어 불암산 계곡 흐르는 물이 맑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이렇게 사는 것이 잔잔한 기쁨이요 구원입니다.
“늘 한결같이 깨어 맑게 반짝이며 조용히 속삭이며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영원한 현역으로 최선을 다한 행사였네요! 한결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세요. 사랑하는 형제님!”
몇분에게는 시냇물 사진과 더불어 윗 덕담도 선물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평생, 평범한 일상을 깨어 반짝이며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시냇물 맑게 흐르는 동안 시냇가 산책은 계속될 것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내적 다짐의 글, '무엇이든 적게, 작게'란 글도 생각납니다.
“무엇이든 많이가 아닌
적게, 작게,
적게 말하고,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쓰레기 적게 내고
하느님 안에서
작게 조용히 맑게 살고 싶다
무공해 관상적 삶을 살고 싶다.”
- 2022.8.16.
새벽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궁금해 보냈던 물음에 대한 신혼부부의 답글이 반가웠습니다.
“남편 혁주 잘 있나요?”
“엄청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잘 일하고, 잘 놀아서 몸무게 2kg 늘었어요.”
신혼부부의 행복한 구원의 삶에 마음 흐뭇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찍은 밝게 웃는 사진이 서로 닮았고 꽃처럼 예뻤습니다.
예전 하늘 나라 예화를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갔을 때, 세 가지 사실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1. “내가 여기 와 있네!” 구원의 은총에 놀라고, 2.“어, 저 사람이 여기 왔네!” 예상밖의 사람의 등장에 놀라고, 3. “어, 그 사람이 여기 없네!” 예상했던 분이 보이지 않아 놀란다는 예화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할까요.
어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오늘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이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에 근거한 후렴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게 되리라.”
바로 윗 잔칫상에 자리 잡도록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문, 좁은문, 하늘문'입니다.
우리 삶은 구원의 여정입니다.
언젠가의 결정적 구원의 날을 내다 보며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의 하늘 나라, 꽃자리를 살면 됩니다.
제가 신자분들에게 늘 강조하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결코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내십시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인생 광야, 이렇게 끝까지 살아냈다는 자체로 구원을 받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구원의 여정에 세 삶의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삶은 은총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바로 제1독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구원의 하느님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 하리라.”
이런 하늘 나라 예루살렘을 앞당겨 살 수 있음이 바로 은총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실현된 예언입니다.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 오리라.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이런 구원의 현실을 앞당겨 살면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구원의 꽃자리, 예루살렘 하늘 나라입니다.
돌째, 삶은 훈육입니다.
삶은 훈련이라 해도 좋습니다.
세상에 우리를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상처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한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참으로 희망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시련과 고난을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참아 견디고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을 주님의 훈육으로, 훈련으로 삼는 것이요, 비움과 겸손의 학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다치지 않고 자아초월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를 향한 히브리서 저자의 충고가 너무 고마워 대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들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요.
겨울, 봄, 여름의 고난과 시련을 묵묵히 견뎌냈기에 가을 풍요로운 열매들이듯, 우리의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도,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도, 진선미眞善美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주님 주시는 삶의 훈육을, 훈련을 자발적 능동적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살았을 때 이런 풍요로운 삶의 열매들입니다.
주님 은총이 이미 전제되기에 이런 훈육과 훈련의 삶에 항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훈육과 훈련, 시련과 인내의 과정을 통해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앎의 관계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을 절대 모른다고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불행한 사람들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닫힌 구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이런 주님의 답변이라면 얼마나 절망적이겠는지요!
재차 주님과의 친분을 얘기하며 주님의 선처를 기대하지만 주님은 요지부동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나에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과는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 살아 왔음이 분명합니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다고 내심 확신했는데,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니 얼마나 황당하고 충격적이겠는지요!
새삼 우리 삶을 점검케 하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아는 만큼 보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고백과 더불어 주님을 아는 공부에 늘 힘쓰시기 바랍니다.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일 것이며,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처럼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셋째, 삶은 좁은 문입니다.
생각하면 세상에 태어나기도 좁은 문이지만 우리 삶은 좁은 문의 연속같기도 합니다.
날마다 통과해야 할 좁은 문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 은총에 감사할 때, 일상의 훈육과 훈련에 충실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좁은 문 통과도 수월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저에겐 하루하루 날마다, 오전 1시 전후로 일어나 2-3시간 강론을 쓰는 것이 하루의 좁은문 통과의 시작입니다.
잘쓰든 못쓰든 온힘을 다해 쓰는 좁은 문 통과의 강론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제가 그러할 것입니다.
매일 강론 쓰기 33년이지만, 쓸 때마다 처음 쓰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강론이 그렇듯 삶의 어려움도 그러할 것입니다.
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좁은 문 통과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날로 넓어지는 마음의 내적 문입니다.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이지 주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는 날로 넓어져 가는 마음의 문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과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 마음을 넓혀 주시면, 당신의 계명길을 달려 가리이다.”
(시편 119,32)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
(성규, 머리말 49-50)
좁은 문, 구원 문의 비밀을 알려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얼마나 고무적이며 백절불굴의 힘을 주는지요!
살만한 세상입니다.
연속되는 좁은 문의 현실이지만 주님 은총으로 날로 넓어지는 마음에, 구원의 넓은 문이니 조금도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를 통한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히브12,12-13)
"구원은 오직 주님께 있사오니, 당신의 백성위에 복을 내려 주소서."
(시편 3,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연중 제21주일입니다.
그리고 2022년 8월 21일입니다.
8월 21일은 제게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2019년 8월 21일 오전 11시 30분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뉴욕에 온 지 꼭 3년이 되는 날입니다.
3달만 하기로 했는데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묵상에 강론을 올린 것이 어느덧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견사제연수, 용문청소년수련장, 성소국장, 제주 엠마오 연수를 거쳐서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에 있습니다.
중견사제연수는 사제생활 20년을 하면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교구장님께서 용문청소년 수련장에서 지내라고 하셨을 때는 기뻤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여름 캠프를 다녔던 곳입니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평화로운 날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교구장님은 제게 성소국장으로 교구청에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습니다.
교황님 방한 준비위원으로 일할 수 있어서 보람 있었습니다.
서품식을 준비하면서 새 사제들을 보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제주 엠마오 연수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 같았습니다.
여러 교구에서 온 신부님들을 만났고, 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은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지만 새로운 경험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신앙인은, 사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알리는 것이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사막과 같은 곳이라면 그곳을 오아시스로 만들어서 생명이 자라게 만들어야 합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이라면 화합과 일치로 신명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분노와 원망이 있는 곳이라면 이해와 용서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제게 3가지의 과제를 주었습니다.
첫째는 미주지역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며, 삶을 나누는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의 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야 합니다.
기존의 수입은 구독료, 광고료, 후원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뉴욕으로 온 지난 3년은 어쩌면 긴 시련의 터널과 같았습니다.
팬데믹으로 본당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면서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덕망 있는 사제들에게 글을 부탁드렸습니다.
신부님들은 기꺼이 글을 보내 주었고, 글은 팬데믹 터널을 지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홍보를 통해서 구독자를 늘려야 하는데 홍보자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주가톨릭신문은 팬데믹의 터널을 나오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본당활동이 재개되면서 대림/ 사순특강을 다니면서 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구독자가 늘어 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제들과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길을 찾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다니면서 팬데믹의 터널을 지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영광의 문이 아닙니다.
권력의 문도 아닙니다.
재물의 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하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희생의 문, 사랑의 문, 용서의 문, 겸손의 문입니다.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모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신부님! 이 제품은 콜라젠을 주성분으로 한 건데요.
열심히 드시면 피부에 탄력이 생기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자매님께서 건강보조제를 주시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저 역시 피부 노화를 많이 느끼고 있었기에 열심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었고, 저를 향해 피부가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중에서는 먹거나 얼굴에 바르면 피부에 탄력이 생겨 주름이 없어지고 더욱 젊어 보인다며 콜라젠을 판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콜라젠이라도 먹거나 발라서 얼굴 피부에 탄력을 줄 수는 없다.
콜라젠은 매우 큰 분자라 발라도 피부에 흡수되지 못한다.
먹으면 위와 장을 거치는 동안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온몸으로 운반되므로 얼굴로 고스란히 가지 않는다.”
제가 느낀 피부 탄력은 그냥 느낌뿐이었을까요?
어쩌면 좋아지고 있다는 마음이 실제로 좋아지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짜 양이 명약이 될 수도 있다는 플라세보 효과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당연히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좁은 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하느님 나라는 시련과 유혹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가치 있는 길이기에 어려워도 이 길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에 이르는 이 문은 좁고 또 그 길은 험해서 그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대부분 멸망하지 않을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 말씀은 ‘옳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옳은 길을 통해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크고 넓은 길이라고 불리는 쉽고 안일한 생활이 더 눈에 뜨일 것입니다.
이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선민의 자부심이 있었던 유다인들이었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안락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며,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어렵고 힘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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