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金龍澤)-젖은 옷은 마르고
하루종일 너를 생각하지 않고도 해가 졌다.
너를 까맣게 잊고도 꽃은 피고
이렇게 날이 저물었구나.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난다.
사람들이 매화꽃 아래를 지나다가
꽃을 올려다본다. 무심한 몸에 핀 흰 꽃.
사람들이 꽃을 두고 먼저 간다.
꽃이 피는데, 하루가 저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
네가 잊혀진다는 게 하도 이상하여,
내 기억 속에 네가 희미해진다는 게 이렇게 신기하여,
노을 아래서 꽃가지를 잡고 놀란다.
꽃을 한번 보고 내 손을 한번 들여다본다.
젖은 옷은 마르고 꽃은 피는데
아무 감동 없이 남이 된 강물을 내려다본다.
수양버들 가지들은 강물의 한 치 위에 머문다.
수양버들 가지들이 강물을 만지지 않고도 푸른 이유를
알았다.
살 떨리는 이별의 순간이
희미하구나, 내가 밉다, 네가 다 빠져나간
내 마른손이 밉다. 무덤덤한 내 손을 들여다보다가
네가 머문 자리를 만져본다.
잔물결도 일지 않는구나, 젖은 옷은 마르고
미련이 없을 때, 꽃은 피고
너를 완전히 잊을 때, 달이 뜬다.
꽃이 무심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사랑은
한낱 죽은 공간, 네 품속을 완전히 벗어날 때 나는 자유다.
네 모습이 흔들림 없이 그대로 보인다.
실은, 얼마나 가난한가, 젖었다가 마른 짚검불처럼 날릴
네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꽃이 때로 너를 본다는 걸 아느냐.
보아라! 나를
너를 까맣게 잊고도 이렇게 하루가 직접적인 현실이 되
었다.
젖은 옷은 마르고, 나는 좋다.
너 섰던 자리에 꼭 살구나무가 아니어도 무슨 상관이냐.
이 의미가, 이 현실이 한밤의 강을 건너온 자의 뒷모습이다.
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 고통의 통과가 자유 위의
무심이다.
젖은 옷은 마르고, 이별이 이리 의미 없이 묵을 줄 몰랐다.
꿈속으로 건너가서 직시한 저 건너
현실, 바로 지금 이 순간 꽃은 피고
젖은 옷은 마른다.
*김용택[金龍澤, 1948. 9. 28.~.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장산리) 출생] 시인은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에 ‘섬진강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평생 자신이 태어난 부근의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부박한 모더니즘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을 삶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직관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하여 김소월, 백석을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인은 순창농고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소설책과 만화책을 즐겨 읽은 것이 정서적으로 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인이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고, 시인의 시집으로는 “섬진강” “꽃산 가는 길” “맑은 날”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래서 당신” “누이야 날이 저문다” “나무” “수양버들”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오래된 마을” “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등이 있으며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등의 동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시인은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위 시는 김용택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시선 360)”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