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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제1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2,1-19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 사함의 권과 기적의 힘이 하나라고?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치신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병과 죄의 용서를 동시에 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라고 하며, 예수님만이 아닌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인간이 죄를 사해줄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악한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병이 낫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옴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의 힘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인정하면서 죄의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기적의 힘을 주시는 분은 죄의 용서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진다고 믿나요? 그러면 다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겸손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죄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곧 기적입니다.
신문 배달, 부두 하역, 탄피 수집, 고물상 등으로 시작해 지금은 커다란 부를 이룬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일궈내는 분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어야 첨벙대면서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조차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게으른 이에겐 가난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부지런한 이에겐 돈이 밀물처럼 밀려온다는 말을 나는 믿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용서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분은 한 해에 60여 명을 서울대에 보내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2010년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하여 우리나라 예술계에 커다란 이바지를 하고 있습니다. 한 신문 배달부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서울예고는 1987년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막내아들이 학폭으로 목숨을 잃은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인수할 때 가족의 많은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뉴욕 출장 중인데 비서가 전화했어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막내 대웅이가 선배들한테 맞다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 갔다고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지요. 그런데 이미 냉동실에 들어간 뒤였어요.”
그는 “가해자 학생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셨다고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학교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했지요. 회사 직원들이 학교로 몰려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장 선생님이 도망갈 정도였죠. 그런데 막상 영안실에 평안하게 누워 있는 아이를 보니 눈물만 났어요. 내 죄와 업보가 많아 이렇게 된 건가 싶고. 복수를 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난동을 피우면 아버지가 저러니 아들이 벌을 받았다 할 거고요.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아들을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겁니다.”
담당 검사는 “검사 생활을 18년 넘게 했지만, 자식을 때려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부모는 없었다며 절대 안 된다”라고 했지만, 이대봉 회장은 직접 구명운동을 해서 가해자가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대에 들어가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회장은 이어 아들 이름을 딴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하여, 35년 동안 3만여 명의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지금은 사비를 털어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하여 한국의 예술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용서의 힘이 복수의 힘을 앞섭니다.”
이대봉 회장은 용서를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힘은 음식을 먹어야 생기고 운동을 해야 강해집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의 힘도 용서의 힘도 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분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기적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으므로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는 이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성당 신부로 있으면 내가 원하는 사목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재정을 많이 할애하게 됩니다. 저는 이번에 첫영성체와 견진 아이들에게 많은 돈을 쓰고 소공동체를 위해서도 많은 재정을 할애하였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의 힘은 하느님 뜻에 더 순종하려고 하는 이에게 더 주어집니다. 이대봉 회장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께서 기적의 힘을 주시는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은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나라에서 무기를 나누어준다면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 줍니다. 다른 용도로 쓰려는 사람에게는 줄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필요하면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무기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준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무엇인들 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죄의 용서의 은혜를 저버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생 때 심부름을 많이 했었습니다. 막내인 저만 초등학생이고, 형과 누나들은 중학생 이상이라 학교 끝나고 늘 밤늦게 집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거의 모든 심부름을 독차지했습니다. 귀찮고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보상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 이렇게 먹을 것으로 보상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보상이 있어도 하기 싫은 심부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를 사 오는 일이었습니다. 20리터짜리 들통에 석유를 받아오는 것인데, 어린 제게 20리터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여기에 석유 가게까지의 거리도 상당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서 하기 싫은 심부름이었지만, 이 역시 제가 했습니다. 착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보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장에서 닭 다리, 닭 날개만 따로 튀겨서 팔았는데, 이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석유를 받은 다음, 시장에 들러 닭 다리 한 마리를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석유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기쁨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또 힘이 세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글쎄 석유 들통에 구멍이 나서 계속 석유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생각에 석유가 새는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인해서 영적인 마음은 빠져나가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평화로운 마음이 빠져나갑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위로와 기쁨을 얻었는데, 어느 순간 함께 있음이 불편하다면 이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병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모든 병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벌을 받는 중이었기에 치료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시 시대의 상황을 보셨기에, 겉으로 보이는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힘차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의 반대쪽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이를 하느님 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만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영적인 마음이 빠져나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서로가 따뜻한 관계로 만날 수 있다면 사는 일이 그다지 고단하지 않을 것이다(박재훈).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