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 화포가 상갑판을 목표로 삼는 이유
2. 판옥선과 유럽 군함이 대결하면?
3. 보충
4. 결론(생략)
1.
사관은 논한다.
16세기 초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전 세계 바다를 주름잡은 유럽 범선과 화포의 위력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버릴 때가 왔다.
당시 유럽 해전에서 상대 함선에 포격을 가하는 목적은 배 자체의 격침이 아니라 인명손실과 적선의 기동력 약화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레판토해전이나 16세기 후반 여러 해전에서 함재화포는 전투 초기 몇 차례 사격으로 끝났다. 포격전에 이어 머스킷 사격전, 그리고 투창을 던지거나 권총 사격을 하다가 적선에 넘어가 창칼로 백병전을 벌인다. 당시 화포로는 적선 격침은 물론 손상시키기도 어렵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전투방식이다.
<핀투 여행기>에 쌍방 열 척 이하의 소규모 해전 장면이 자주 묘사되는데, 양상은 거의 비슷하다. 포격 3회에서 5회를 실시하고 나면 바로 적함에 올라 백병전이다. 영불해협 해전을 제외한 16세기 여러 해전에서 화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킨 사례는 레판토해전 극초기 대형 캐논으로 터키 갤리선 다섯 척을 격침시킨 것밖에 없다. <핀투 여행기>에서도 대포를 쏘아 단층이며 노를 젓는 소형 중국 해적선을 격침한 사례가 있으나 극히 예외적이고, 대부분은 대포로 배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을 노린다.
무적함대와 영국함대가 맞붙은 1588년 영불해협 해전에서는 레판토해전에 비해 함포전 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병사들의 단병접전 능력이 강하고 사거리가 짧지만 강력한 캐논 위주로 함포를 탑재한 에스파냐 함선에 영국 함선들이 의도적으로 접근을 회피한 까닭이다. 17세기 중반은 물론 19세기 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여차하면 백병전을 실시한 영국 해군 역사에서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하지만 열흘에 걸친 포격전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함대의 피해는 단 16척에 불과했다. 가장 치열한 해전인 그래블린 앞바다 해전에서 화약과 포탄이 떨어진 에스파냐 함선에 100미터까지 접근한 영국 함대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컬버린과 소수 보유한 캐논을 퍼부었어도 격침된 에스파냐 함선은 단 세 척밖에 없었다. 열흘 동안 무적함대는 124척 중에서 16척을 잃었는데, 전투 중 격침된 배가 세 척, 전투 이후 침몰한 배가 한 척이고 나머지 12척은 좌초하거나 표류된 이후 포기하거나 나포되어 잃은 배다. 에스파냐 함대가 모든 해전 과정에서 잃은 피해 중 나머지 50척 가까운 배는 도주 과정에서 악천후와 폭풍으로 난파했다. 결국 컬버린을 비롯한 함포 사격은 적선 격침 자체가 아닌 갑판의 전투원을 노릴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재화포는 고려 말의 화포 개발 초기 단계부터 상대방 선박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려고 사용됐다. 사용목적에서 서양과 큰 차이가 있으며, 19세기 말 이후 서양 함재화포의 발전방향도 여기에 있다.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지금까지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투장면을 묘사하면서 종종 왜선이 격침되는 장면을 서술했다. 조선 화포로 허술한 왜선을 상대할 때는 충분히 격침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실제로 왜선이 해전 중 포격에 의해 격침된 사례가 다수 실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이 대형 화포로 장군전과 대형 석환, 철환을 발사해 왜선의 구조물을 부수고, 또한 조란환을 발사해 상갑판에서 조총을 쏘는 왜군들을 휩쓰는 장면들도 묘사했다. 그리고 임진년 해전에서는 소형 화포로 직접 적장을 노려 명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대형 화포, 특히 화살형 발사체를 쏘는 것은 적함의 격침이 목적이다.
이렇게 포격으로 적함을 격침하는 장면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현대 해전에서도 대함미사일이나 함포로 적선의 격침을 노리거나 구조물을 파괴해 상대방 함선의 전투력과 기동력을 상실시키는 과정에서 승무원 살상이 부차적인 결과로 전개된다. 이것이 현대 해전의 상식이다.
그러나 서양의 함대전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16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의 유럽 해전에서는 당연히 승무원 살상이 우선이고, 돛과 마스트를 노림으로써 적선의 기동력을 빼앗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당시 서양 화포의 위력과 배의 외판 두께, 그리고 크기를 감안하면 어색할 것은 없고,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16세기 말의 주력 함포인 18파운드 컬버린으로는 격침은커녕 적선의 선체를 손상시키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목선이라 격침이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당시 함포로는 현측 외판, 즉 선현船舷을 관통하기도 어려웠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17세기 중반 이후 해전에서는 컬버린보다 훨씬 대구경의 화포가 대량 동원됐다. 32파운드 데미캐논이 대표적이고 24파운드포도 많이 사용됐다. 그러나 치열한 포격전으로 함선이 큰 피해를 입어도 침몰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혹시 침몰하더라도 해전이 벌어진 그 다음 날, 또는 전투가 끝나고 나포 후 예인 중에 침몰할 정도였다.
그래서 유럽 어느 나라든 함재화포는 상대방 함선의 상갑판에 늘어선 전투원들을 우선적으로 노렸다. 주갑판 아래에 포갑판이 설치되고 함포가 집중 배치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배에서 가장 높은 선미루에 함포가 일부 배치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명중률 때문에 화포를 직사로 쏴야 하고, 높은 곳에서 발사해야 적선 상갑판에서 활동하는 적 병력을 명중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직사로 인명살상을 노렸으니 유럽 군함의 대포는 사거리가 긴 소총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정조준이 가능한 직사 사거리를 높이기 위해서는 화포의 위력을 강화해야 하고, 포신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러나 배를 관통할 성능은 되지 못했다.
함재화포가 적선의 상갑판 아래를 노린다면 적함의 격침이 목적이 아니라 포갑판에 일렬로 배치된 화포 및 포수들이었다. 포탄이 포문과 함포 사이 틈으로 들어가 포갑판에 배치된 포수들이 죽어도 좋고, 드문 경우이지만 포구 안에 정확히 포탄이 날아 들어가 유폭을 일으킨다면 운이 지극히 좋은 경우였다.
16세기 이후 발전이 거의 없던 유럽 화포는 1850년대에 이르러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한다. 조선에 불랑기라는 이름으로 수입된 15세기 후장조립포보다 훨씬 안전한 후장포가 개발되고, 포신 내부에 강선을 파는 형태가 채용되며, 기타 포신 제조에도 급격한 발전이 있었다. 그래서 보다 대구경 포를 만들 수 있었고 1880년대에는 사거리와 관통력 및 명중률이 기존보다 훨씬 증가한 장포신 후장강선포가 함포의 대세를 점했다. 원통형 작열포탄은 이미 1820년대에 채용됐고, 그 이후 장약도 흑색화약에서 니트로글리세린계 완전연소성 약품으로 크게 발전했다. 현대 함포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이 정도면 해전에서 적함을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대포가 강해진 만큼 군함의 장갑도 무지막지하게 증가하고 작렬탄에 견딜 수 있는 장갑함이 탄생한다. 같은 장갑함의 대포로 적함의 격침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1860년대 해전에서 괜히 포탄을 얻어맞으면서 돌진해 충각으로 적함을 들이받은 것이 아니다.
철선은 적 함포의 포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목재로는 더 대형 군함을 건조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채용됐다. 철선은 작열탄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진다느니, 피탄시 파편이 확산돼 승무원들에게 더 위험하다느니 하는 이유로 철선 건조를 중단하고 기껏 건조한 철제 프리깃함마저 수송선으로 개조한 것은 1850년대 영국 해군이다.
1860년대에 완전한 철선 시대로 접어들자 흘수선 주변의 선현과 포 주위에 집중적으로 장갑을 두른 장갑함이 등장한다. 1870년 포탑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무게 중심이 높아져 군함이 엎어지고, 보다 중장갑과 보다 대구경 함포로 무장하는 거함거포 건함경쟁이 벌어지고, 기껏 만든 거대한 전함은 속도가 느려 전투에 참가할 기회 자체가 적고, 하지만 적 전함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거함거포 위주로 건조해야 하고, 실전에서는 함포보다 어뢰나 기뢰에 의한 함선 피해가 더 많고 등등의 각종 뻘짓거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전개된다.
2.
사관은 논한다.
16세기 말에 조선과 유럽 군함이 해전을 벌인다면, 상식적으로는 강력하고 우수한 화포를 다량 보유하고 선체도 큰 유럽 군함이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 유럽 해전에서의 주력 함선은 대부분 상선에서 징발된 것으로 판옥선보다 오히려 작다. 그리고 당시 유럽 군함은 화포를 많이 보유하지도 못해 영불해협 해전에서 평균 10문 위아래였다. 20문 정도를 보유한 판옥선보다 보유 함포 수가 훨씬 적다.(<----이것은 임진년 당시를 생각하면 16문의 함포수로 바뀝니다. 아래에 자료 나옵니다.)
그리고 당시 영국 해군의 주력 화포인 컬버린, 즉 18파운드 함포로는 소형 상선도 격침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주로 느릅나무로 만든 유럽 상선이나 군함에 비해 적송으로 만들고 안쪽에서 가룡목으로 받치며 나무못까지 박은 판옥선이 훨씬 튼튼할 가능성이 크다. 티크원목으로 군함을 만든 것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장악한 18세기 이후의 일이며, 3층 포갑판을 갖춘 대형 전열함도 17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했으니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조선의 배는 동양 3국 중에서 외판을 가장 두껍게 만든다. 예외적으로 명나라 초기의 3중 외판을 갖춘 사선이 더 두껍지만, 이런 선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영조 때 기록으로 각종 배의 외판 두께는 12~18cm였는데, 외판과 저판이 두꺼운 것은 잘 굽혀지지 않는 적송을 주 재료로 삼은 한선의 기본 제작 방식이다. 다만 시대와 용도에 따라 외판 두께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충무공전서>에 기록된 거북선의 외판 두께는 4치 즉 12cm 약간 넘는다. 정확히 어느 시대 거북선의 설계도인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다른 배에 비해 거북선 외판이 특별히 두껍게 설계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판옥선의 규격에 관한 기록은 많아도 외판 두께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은 7장의 삼판마다 두께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과 판옥선은 상장을 어떻게 꾸미느냐 차이일 뿐 하부구조 설계상의 차이가 아니고, 쉽사리 다른 선형으로 전환 가능한 쌍둥이다. 그래서 판옥선과 거북선의 삼판 두께는 비슷하게 평균 4치로 볼 수 있다.
판옥선의 전면 이물비우는 임란 당시에는 널빤지가 아니라 통나무나 곡목曲木으로 만든 경우도 있으니 훨씬 두꺼울 것으로 추정된다. <각선도본>에 명시된 읍진전선의 이물 폭은 12자 5치, 이물비우는 15개이므로 통나무일 경우 직경은 대략 25.8cm이다. 물론 이물을 통나무로 만들 때는 널빤지보다 더 많은 이물비우가 소요될 수 있고, 그렇다면 조금 더 얇아질 수 있다. 그러나 해안에 정박할 때 자갈밭이나 갯벌을 향해 돌격하는 한선 특성상, 그리고 적의 공격 대부분이 전면에 집중되는 판옥선 전투 특성상 이물이 측면 선현보다 훨씬 튼튼하게 제작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판옥선은 종이공작물이나 레고가 아니다. 주갑판 아래의 선현 외판 두께와 판옥선의 상장, 즉 격군갑판 벽의 두께는 다를 수 있다. 김육의 <잠곡유고 8권>에 따르면 인조 때 판옥선 방패, 즉 상장 기둥을 제외한 벽의 두께는 1촌 5푼 즉 5cm 이하였으니 선현보다 훨씬 얇다. 방패판을 4촌 5푼 이상으로 두껍게 만들자는 주장에 대해 김육은 그럴 경우 판옥선이 둔해지고 또한 무게중심이 높아져 난파될 우려가 있다고 반대하면서 방어력을 강화하려면 기존 방패를 젖은 천으로 덮자는 주장을 한다. 17세기 중반 당시에 무게중심과 선박 항행성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뜻이며, 복합장갑 개념도 어렴풋이나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 판옥선 방패판 두께가 1촌 5푼이란 뜻은 아니다. 김육처럼 임진왜란 기간 동안 10대를 보내고 1598년에 수군만호도 지냈던 조익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포저선생집 16권>에서 조익은 임란 때는 방패판이 매우 두꺼워 왜적의 철환이 뚫을 수 없었는데 해마다 깎아내서 얇아졌다고 우려했다. 또한 전체 판옥선을 놓고 봐도 임란 때는 앞부분(문맥상 이물비우가 아니라 상장 앞부분)을 통나무로 만들어서 매우 두껍고 견고했으며 판옥선 전체 높이도 높았는데 나중에는 장수들이 빠른 배를 선호해 갈수록 배가 낮아지고 얇아졌다고 비판했다.
논쟁은 최종적으로 애국자이며 철학자이며 건망증쟁이인 조익이 승리한 것 같다. 판옥선이 너무 크고 둔중해 도저히 작전에 투입할 수 없다는 불만이 수군 장수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임란 당시 판옥선 상장의 벽 두께가 명확한 기록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사료를 종합 검토하면 4촌에서 4촌 5푼으로 추정된다. 물론 군함은 적의 공격을 많이 받는 부분을 더 두껍게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니 방향에 따라 벽 두께가 다를 수도 있다. 조익 기록처럼 임란 때 판옥선 상장 앞부분을 통나무로 만들었다면 왜군의 공격력에 비해 지나친 과잉 방어력을 보유한 셈이다. 판옥선이 성채에 비유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판옥선에 비해 유럽 군함의 외판이 더 두꺼운가? 유럽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18세기 영국 해군의 주력 전열함인 3등함, 즉 2층 포갑판을 갖추고 640명이 탑승하는 74문 전열함의 외판 두께는 4인치, 즉 10cm 약간 넘는 정도였다. 영국 함선의 3등함이 17세기 중반 150명 이상 탑승 기준에서 18세기 중반 74문함 기준으로 네 배 이상 대형화된 이후가 이 정도였다. 치열한 함포전을 감안하고 제작된 18세기 전열함의 외판이 16세기 유럽 군함이나 무장상선의 외판보다 더 두꺼우면 두꺼웠지 얇을 수가 없다.
중국 정크선이나 외판 두께가 10cm에 불과한 가녀린 18세기 중반 유럽 전열함, 혹은 그보다 약한 소형 상선이나 16세기 군함의 외판을 관통하지 못하는 18파운드 컬버린으로는 판옥선 선현이나 상장을 관통할 수 없다. 방어력이 집중된 이물이나 정면 상장은 더더욱 관통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판옥선은 전투 중에 돛을 접고 돛대는 아예 누워있다. 유럽 군함은 판옥선 상갑판 외에는 목표로 삼을 게 없다.
그러나 56근 무게인 대장군전이나 29근인 장군전에 유럽 선박이 맞는다면 여지없이 관통된다. 재현 실험에서 화강암 석축을 80cm나 뚫고 박힌, 그것도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한 각도에서 튕기지 않고 돌을 찢듯이 박힌 대장군전을 10cm 두께인 유럽 군함의 느릅나무 외판이 막을 방법이 없다. 화포 위력 차이가 아니라 발사체 모양과 무게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 조선 수군이 둥근 철환에 비해 무거워 결과적으로 사거리가 길지도 않은 장군전류를 보유한 것은 이런 무지막지한 관통력 때문이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기함인 1등함 빅토리호는 32파운드포 30문 등 함포 100여 문을 보유했다. 그러나 가장 큰 32파운드포의 포탄으로도 판옥선의 외판을 과연 관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판옥선의 주요 방어부위인 정면 이물비우나 통나무로 만든 상장 전면이라면 관통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장군전이나 장군전은 전열함의 주 공격 및 방어부위인 측면 외판 관통이 가능하다.
1778년 이후 유럽에서는 사정거리가 짧지만 단포신 대구경을 채택한 캐러네이드포로 68파운드 포탄을 날려 적함에 큰 피해를 줬다. 데미캐논에서 쏘는 포탄이 32파운드이니 68파운드라면 그 두 배나 되는 엄청난 포탄이다. 그러나 이 엄청나다는 68파운드 포탄도 대장군전보다 약간 가볍고, 형태상 관통력도 약하며, 캐러네이드포는 전열함이든 프리깃이든 단 1, 2문만 보유했다. 소수 캐러네이드 포탄이 이 정도 위력을 발휘했으니 판옥선이 발사하는 대장군전과 장군전, 차대전 3종 세트로는 유럽 함선을 상대로 훨씬 큰 전과를 올릴 수 있다. 또한 판옥선에서 퍼붓는 화공을 돛단배 전열함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임진왜란과 트라팔가르 해전이라는 200여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유럽 함선이 대형화되고 함포를 다량 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유럽 전열함이 16세기 말 조선 판옥선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일반 상식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결론이지만, 16세기 말에 평균적인 유럽 군함과 판옥선이 싸운다면 결과는 판옥선의 압승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허구적 상상에서 비롯된 잘못된 상식은 깨져야 한다.
3.
어느 정도 중복되지만 다시 사관은 논한다.
일반적인 유럽의 함재화포는 갑판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날려버리는 핀 포인트 공격무기이다. 대형 캐논으로 중형 갤리선, 컬버린으로 소형 선박 격침이 가능하나 기본적으로 화포는 인명살상 및 적선의 기동력 박탈 위주로 운용됐다. 사거리와 위력 차이가 있다 뿐이지 머스킷과 운용방침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포 위력이 3백여 년 동안 별로 증가하지 않은 반면 선박이 대형화되는 속도가 훨씬 빨라 19세기 초까지 화포 공격으로 인한 선박 침몰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반면에 조선 화포는 포탄 종류에 따라 선박파괴를 노리거나, 인명공격용일 때는 화포 및 포탄 종류에 따라 핀 포인트 공격과 지역제압사격이 선택 가능하다. 특히 작은 철환이나 조란환 종류는 탄착군을 형성해 일정 부분을 쓸어버리는 대량살상무기다. 서양과 조선의 화포는 이렇게 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당연히 유럽 화포는 탄도특성에 민감하다. 17세기 말에 탄도학이 태동하기 전까지는 일정한 명중률을 얻으려면 최대한 수평 사격하는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화포의 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갑판에 수평으로 늘어선 사람이나 돛대를 명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컬버린의 최고사거리에 비해 유효사거리가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정조준 직사를 하는 한 최고사거리는 의미가 없고 그 짧은 유효사거리만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다.
반면에 선박 자체의 침몰, 또는 지역제압 사격을 위주로 하는 조선 화포는 명중률 향상을 위해 화포 위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사람보다 배가 훨씬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약한 삼나무로 건조된 일본 선박이기 때문에 더더욱 화포 위력을 강화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운용목적과 전장환경에 차이가 있으므로 조선 화포의 위력이 서양에 비해 약하다고 무시할 이유가 없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함재 화포의 발전 방향은 결국 선박 자체의 파괴로 나아갔으므로 당시 조선의 선택은 옳았다. 조선 화포에서 발사하는 장군전 종류 발사체의 형상이 현대 대함미사일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둘 다 목표 선박을 관통하는데 목적을 둔 외형 디자인이라는 뜻이다. 현대 전차에서 상대 전차를 격파하는 주력무기인 대전차철갑탄도 두터운 전차 장갑 관통을 위해 가느다란 화살 모양이다. 그리고 서양의 함재화포도 직사 위주에서 나중에는 곡사로 변했으므로 곡사 위주인 조선 화포의 사격방식이 뒤떨어진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당시 서양에 비해 작고 위력이 약한 조선 화포이지만, 왜선을 상대로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반면에 크고 위력이 강한 화포를 운용하는 서양인들은 그것만으로 부족해 탄도학을 발전시키고 대인공격에서 대함공격으로 운용방침을 바꾸면서 탄의 형체도 원형에서 유선형으로, 그리고 미사일시대가 되면서 화살형으로 계속 바꿔야 했다.
화포의 위력 자체는 분명히 서양 것이 강하다. 그러나 운용방식은 조선이 서양에 비해 몇 세기나 앞섰다. 당시 서양에 비해 조선의 함재화포 운용방식이 앞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가? 우연이더라도 사실 자체는 사실로써 인정해야 한다. 서양 화포가 구경이 크고 위력이 강하며 화포 자체가 크고 무거워도 조선 화포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대형 소총과 다를 바 없는 원시적인 운용방식 때문에 서양 해군은 수백 년 동안 많은 것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서 조선 화포가 서양에 비해 스펙상 작고 위력이 약하다고 무시할 이유가 없다. 화살 모양 통나무 발사체를 사용했다고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 무엇이든 필요에 의해 발전하는 법이다. 그리고 조선 함재화포의 발전은 임진왜란 이후 대형화가 아니라 방패판을 깨기에 적합한 소형화 및 정확도 향상에 집중됐다. 어차피 상대는 왜선이다. 그런데 에도막부에서는 일본 다이묘들이 아다케후네와 500석 이상 대형 군선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막부에서 소수 서양식 배를 건조해 무역에 투입한 외에 19세기 중반까지 일본 군선의 발전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조선 육군의 대포는 대형화의 길을 걷지만, 조선 수군은 함재 화포의 포신을 대형화하고 위력을 강화할 이유가 없었다. 임진왜란 때 전 세계적으로 유별나게 강한 조선 수군을 만난 것이 일본의 불행이었지만, 이후 일본 선박과 공격무기가 수백 년 동안 전혀 발전하지 않아 조선 수군의 발전도 더불어 더뎠다는 것이 또한 조선의 불행이었다.
(이건 석모도주님 블로그 출처)
천자총통 :구경:13cm 무게 296Kg 길이 129cm 화약량은 30냥=810g
캘버린:구경:13.2cm 무게 2160Kg 길이 335.5cm 화약량 12파운드=5.4Kg
캘버린 유효사거리:1530m 최대사거리:6030m
천자총통 최대사거리: 1116m
무적함대vs영국함대 일전시 양측의 함정수와 함포수
영국 함정척수 172, 캐논포 55, 캘버린포 1,874, 페리어포 43, 개 1,972문
스페인 함정척수 124, 캐논포 163, 캘버린포 635, 페이어포 326, 개 1,124문
다음으로는 양군의 함포 비교.
먼저 함포 수를 비교해 보자.
스페인과 영국을 통털어 가장 거대한 함선이었던 The Great Harry호의 경우 1500톤의 배수량에 700명의 탑승인원, 43문의 중포와 141문의 경포를 탑재하는 등 그야말로 판옥선이 넘볼 수 없는 괴물이었으나 본디 평균을 내려면 상위 3%는 제외해야 하는 법, 갈레온의 평균적인 함포 수는 30문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약간 논란의 요지가 있는것이 화강암석축을 80cm관통했다는 부분인데 제가알기론 40cm로 알고 있으며 모 글에선 50cm등 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장군전의 관통력이 막강하다는것은 입증됩니다.
암튼 결국 17세기 서양함대와 판옥선의 순수포격전의 경우 대장군전을 제외한다면 양측은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힘듭니다. 위 글에서 보셨다 싶이 양측의 포격이 각함의 외판을 뚫기 힘들며 이 상태로는 사정거리와 파괴력에서 우위에 있는 서양함(특히 영국)이 좀더 우세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그러나 대장군전을 쓸 경우 함선파괴면에서 강력한 관통력으로 판옥선측이 더 우세하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하지만 모든 포탄이 대장군전이 아니었음을 상기한다면
역시 전투는 해봐야 결론을 알것 같군요.
첫댓글그렇지만 서양배들은 점차 전열전술로 발전하는데 말이죠. 17세기에는 서로간의 포격전으로는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기 힘든 것은 알겠지만, 스페인 같이 병사들이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선으로 뛰어드는 방식으로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또18세기로 발전할경우는, 판옥선 같이 민첩한 배를 그 육중한 전열함으로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판옥선이 전열함을 침몰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음...판옥선 대부분 150톤급 아닌가요?(찾아보니 100~250까지 다양해서 원...)...거북선도 150톤(복원함) 정도고...체급부터가 많이 차이가 날 거 같은데...너무 무기에만 초점을 맞추는거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조선까지 억지로 항해해 올 정도의 서양 군선은 적어도 그 3배는 될 것 같은데요? (판옥선이 유럽까지 가는건 생각하기 힘드니 논외로 하고..)
처음에 격류에서 신재호님 자료에 화강암 석축 50cm 관통으로 나왔다가 나중에 임진왜란에서 80cm로 나옵니다 그리고 배의 격파는 관통력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석모도주님은 천자총통 사거리는 어떤걸 보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대장군전의 경우 천자총통 최고 사거리라고 되있는 것보다 길거나 비슷하고 융원필비에는 수철연의환이 10여리 날아간다고 되있거든요(당시 10리는 4km보다 훨씬 깁니다)그리고 배의 경우 그 다양한 흔들림과 화포 자체의 정확도 문제 때문에 실제로 싸우는 거리는 수백m내지는 100m조금 넘어서입니다 괜히 초구포속,관통력이 캘버린보다 딸린 카로네이드가 캘버린을 대체한게 아니죠
그리고 고딕님 조선군의 경우도 산탄형 포탄은 많이 사용합니다 심지어 대형 원형 포탄과 산탄형 탄알을 같이 장전해서 쏘는게 확인됩니다(대형탄알 단독은 확인 안됨)그리고 조선판옥선은 돛대를 전투시에는 접어버리는데 이건 화공을 대비해서입니다 그리고 위에 2번에 전열함 선체의 두께는 김경진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입니다 사실 위에 2번 글 자체가 원래 토론용이라고 올려놓으셨죠 잘못된거 있나 지적하게 하셨는데 윤민혁님께서 전열함 두께가 잘못?다고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기동력에서 판옥선이 월등히 앞서죠(속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움직임에서)심지어 발라도는 180도 회전(16점 회두였던가?)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적 앞에서 함대단위로 그런 짓을 해낸 이순신의 해군에 대해서 감탄하죠 실제로 조선수군은 이런 함대기동과 그를 뒷받침한 체계적인 신호 체계가 확인되고 있는데 당시 영국은 이게 제대로 확인이 안됩니다 물론 17세기 후반으로 가면 확실히 영국쪽이 우세라고 생각하고 경진님글도 잘못된게 있어 수정을 해야하지만 단순히 배의 크기,화포의 위력만으로 논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포탄의 종류와 실전에서의 배치 방식을 완전히 별개로 하고, 단순히 같은 구경의 포탄을 사용했을 때의 화포의 정확도와 위력만을 놓고 따졌을 때는 서양의 컬버린 1문이 천자총통 1문을 훨씬 앞선다고 판단됩니다. 사정거리, 정확도, 그리고 포구 초속 등에 있어서는 '역학' 적으로는 컬버린이 천자 총통을 앞서는 것은 쉽게 계산된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이 화포에 어떤 포탄을 사용하여 어떠한 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서 전장의 승패는 결정되겠지요.
천자총통의 중량이 컬버린의 1/7 정도, 전장이 1/3 정도 되는 것을 볼 때, 두께도 약 2배 가량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천자 총통에 많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여 사격을 하게 된다면 파열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위의 전상용햏의 말씀에 동감하고 있구요. 이 천자 총통은 어찌 본다면 근거리에서의 포격전에 특화된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적군의 사정거리가 천자총통의 사정거리에 극히 미치지 못하자, 최소의 화약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화포를 최대로 실을 수 있도록 중량을 줄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정확도 문제도 좀 그런게 최석남 장군이었던가?그 사람 실험에서는 조선 총통들의 표적편차가 400m정도에서 1m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자세히 확인해보니 거리상 오차는 40~50m 좌우가 1m였다고 하더군요(물론 더 추긍해봐야겠지만)그리고 천자총통 보다는 더 작은 지자와 현자로 비교하는게 낳을 것입니다 천자총통은 판옥선 1대당 2문 정도 있었던 것 같거든요
첫댓글 그렇지만 서양배들은 점차 전열전술로 발전하는데 말이죠. 17세기에는 서로간의 포격전으로는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기 힘든 것은 알겠지만, 스페인 같이 병사들이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선으로 뛰어드는 방식으로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또18세기로 발전할경우는, 판옥선 같이 민첩한 배를 그 육중한 전열함으로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판옥선이 전열함을 침몰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그렇다고 까딱하다 전열함에 붙을경우, 일반대포알처럼 둥근포탄이 아닌 포도탄이나 사슬탄을 쓸경우, 이야기는 달라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제가 내리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원양: 서양 승리, 근해: 조선 승리 포격전 원거리: 무승부? 근거리: 서양 승리
음...판옥선 대부분 150톤급 아닌가요?(찾아보니 100~250까지 다양해서 원...)...거북선도 150톤(복원함) 정도고...체급부터가 많이 차이가 날 거 같은데...너무 무기에만 초점을 맞추는거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조선까지 억지로 항해해 올 정도의 서양 군선은 적어도 그 3배는 될 것 같은데요? (판옥선이 유럽까지 가는건 생각하기 힘드니 논외로 하고..)
처음에 격류에서 신재호님 자료에 화강암 석축 50cm 관통으로 나왔다가 나중에 임진왜란에서 80cm로 나옵니다 그리고 배의 격파는 관통력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석모도주님은 천자총통 사거리는 어떤걸 보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대장군전의 경우 천자총통 최고 사거리라고 되있는 것보다 길거나 비슷하고 융원필비에는 수철연의환이 10여리 날아간다고 되있거든요(당시 10리는 4km보다 훨씬 깁니다)그리고 배의 경우 그 다양한 흔들림과 화포 자체의 정확도 문제 때문에 실제로 싸우는 거리는 수백m내지는 100m조금 넘어서입니다 괜히 초구포속,관통력이 캘버린보다 딸린 카로네이드가 캘버린을 대체한게 아니죠
그리고 고딕님 조선군의 경우도 산탄형 포탄은 많이 사용합니다 심지어 대형 원형 포탄과 산탄형 탄알을 같이 장전해서 쏘는게 확인됩니다(대형탄알 단독은 확인 안됨)그리고 조선판옥선은 돛대를 전투시에는 접어버리는데 이건 화공을 대비해서입니다 그리고 위에 2번에 전열함 선체의 두께는 김경진님이 잘못 판단하신 것입니다 사실 위에 2번 글 자체가 원래 토론용이라고 올려놓으셨죠 잘못된거 있나 지적하게 하셨는데 윤민혁님께서 전열함 두께가 잘못?다고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기동력에서 판옥선이 월등히 앞서죠(속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움직임에서)심지어 발라도는 180도 회전(16점 회두였던가?)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적 앞에서 함대단위로 그런 짓을 해낸 이순신의 해군에 대해서 감탄하죠 실제로 조선수군은 이런 함대기동과 그를 뒷받침한 체계적인 신호 체계가 확인되고 있는데 당시 영국은 이게 제대로 확인이 안됩니다 물론 17세기 후반으로 가면 확실히 영국쪽이 우세라고 생각하고 경진님글도 잘못된게 있어 수정을 해야하지만 단순히 배의 크기,화포의 위력만으로 논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포탄의 종류와 실전에서의 배치 방식을 완전히 별개로 하고, 단순히 같은 구경의 포탄을 사용했을 때의 화포의 정확도와 위력만을 놓고 따졌을 때는 서양의 컬버린 1문이 천자총통 1문을 훨씬 앞선다고 판단됩니다. 사정거리, 정확도, 그리고 포구 초속 등에 있어서는 '역학' 적으로는 컬버린이 천자 총통을 앞서는 것은 쉽게 계산된다고 생각됩니다. 단지, 이 화포에 어떤 포탄을 사용하여 어떠한 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서 전장의 승패는 결정되겠지요.
천자총통의 중량이 컬버린의 1/7 정도, 전장이 1/3 정도 되는 것을 볼 때, 두께도 약 2배 가량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천자 총통에 많은 양의 화약을 사용하여 사격을 하게 된다면 파열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위의 전상용햏의 말씀에 동감하고 있구요. 이 천자 총통은 어찌 본다면 근거리에서의 포격전에 특화된 형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적군의 사정거리가 천자총통의 사정거리에 극히 미치지 못하자, 최소의 화약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화포를 최대로 실을 수 있도록 중량을 줄인 것이 아닐까요?
소햏의 지식이 일천하여 조선이 천자 총통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는 화포를 개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역학적으로, 포 자체만 놓고 볼 때는 컬버린이 천자총통이상의 화력을 낼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판옥선과 서양함 이야기를 하셨는데, 소햏이 괜히 논점을 화포로 돌려 놓았군요.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당시 진형 등 전술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조선군이 앞서 있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정확도 문제도 좀 그런게 최석남 장군이었던가?그 사람 실험에서는 조선 총통들의 표적편차가 400m정도에서 1m였다고 하더군요 물론 자세히 확인해보니 거리상 오차는 40~50m 좌우가 1m였다고 하더군요(물론 더 추긍해봐야겠지만)그리고 천자총통 보다는 더 작은 지자와 현자로 비교하는게 낳을 것입니다 천자총통은 판옥선 1대당 2문 정도 있었던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