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으로 배달된 우리 동기 남위호 시인의 시집 ‘안망실’을 받아 들고 나는 충격이 아니라 경악했다. 병고를 치르느라 응급실로 요양병원으로, 정신을 놓았다 들었다 한 인고의 세월이 몇 년인가? 코로나를 핑계로 친구를 찾아보지도 못하고 빈둥거리다 지난해 후반기 들어 친구와 통화를 할 수 있어 그나마 위로를 삼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다오”
그때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이었고, 친구는 동기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다. 나는 사모님께 내가 댁에 가서 친구를 데리고 모임에 가는 것이 가능하냐고 친구의 상태를 타진했다.
“고마운 말씀인데 어려울 거 같습니다. 부축해야 걸을 수 있고 화장실 관계라든가, 도리어 친구분들에게 폐만 끼칩니다.”
사모님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던 중에 친구의 시집을 받아 들었고, 음미하던 중 ‘기다림’이란 시가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가슴에 솟구쳐 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기다림
사람을 기다리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사람을 기다리다
본 하늘 또 쳐다보며
사람을 기다리는
긴 하루
하늘에 해는 선 듯이
미끄러져 가고
빛바랜 도시의 고요함은
기다림처럼 적막하다
이 시는 나로 하여금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조그만 일상이 그저 한편의 꿈 같은 생각이 들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했다. 그래서 염려하시는 사모님을 설득하여 3월 대구 동기회에 남 시인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친구를 데려오고, 동기들과 담소를 나누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도 두 손으로 셀 친구들이 남아 우리의 영원한 호동왕자 김시조가 사주는 커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하였다. 시조는 젊은 날 경산에서 이웃 학교에 근무하였다면서 못내 반가워했다.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가면서 위호가 말했다.
“정말 오늘 기분 만땅이다. 동기들을 다시 만나니 날아갈 것 같다. 다음 달에도 또다시 만나고 싶다.”
“걱정 부뜨러매라. 내가 있잖아. 이 정도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
군대서 제대하고 복직하는 학교에 신고하러 가는 길이었다. 지금은 포스코가 들어선 그곳이 학구인 대송초등학교였다. 짐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끙끙거리며 가을 들판을 걸어가는데 누가 날 불렀다. 돌아보니 가시나처럼 생긴 앳된 청년이 날 톱아보았다. 나는 감이 오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그가 거푸 말했다.
“내 남위호다, 니 제홍이 맞지?” 그는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이끌며 말했다.
“반갑다. 우리 술 한잔하러 가자.”
날 끌고 간 곳은 아예 술도가였다. 도가 귀퉁이에 술 마시는 허름한 탁자와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위호는 주인과 안면이 있는 듯 마시는 시늉을 하자 종업원이 큰 주전자와 큰 사발을 내왔다. 그는 주전자를 두 손으로 겨우 들어 내 앞에 놓인 사발에 넘치도록 막걸리를 붓고, 자기 잔에도 부은 다음 턱으로 나에게 마시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입을 쓱 닦으며 사발에 담겨있는 누런 소금을 안주 삼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껏 그렇게 호쾌(무지막지)하게 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거절하기엔 난감할 정도로 친화력이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위호 덕분에 비틀거리며 복직 신고를 해 훗날까지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다.
“갈데 없으면 내 하숙집으로 와라”
위호는 같은 면내 다른 학교에 있었는데 하숙집은 내 학구였다. 우린 그렇게 1년 반 정도 같은 이불을 덮다 헤어졌다. 위호는 그 후 경산 진량으로 학교를 옮겼다가 교직을 떠났고, 그 후 술도가를 무릉에서 운영하더니 택시회사도 경영하다 나중에는 다방까지 운영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곁에서 지켜보며 간혹 술잔을 기우리며 기억창고를 공유했다.
나는 동기회의 날 위호와 헤어져 돌아오며 가뭇가뭇한 정호승의 시「수선화에게」를 읊조려 보았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첫댓글 덕분에 잊고 있었든 아름 다운 수채화를 잘 감상 하노라
나이가 들면 건강과 외로움을 잘 견뎌내는 것이 중요한데,
자네 덕분에 잊었던 옛 친구들을 만난 남위호 참 다행일세.
우리 모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길에 행복하게 살아 보세
잘 먹고 잘 놀고 99 88 234 오늘도 팔팔하게 위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