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 필자(筆者)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몽골식 이름 중의 하나인 “帖木兒”(첩목아)를 검색하여 보니까, 원문(原文) 기준으로 총 330건이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정종 1건, 태종 122건, 세종 141건, 문종 2건, 단종 15건, 세조 35건, 명종 1건, 선조 1건이다.
특이한 점은, 세종과 태종 때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광해군 때부터는 단 1건도 나오지 않는다. 즉 비교적 골고루 나오는 게 아니고, “帖木兒”(첩목아)라는 용어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태종, 세종 때에 대다수 나오고, 한첩목아(韓帖木兒)는 태종 때 많이 나온다.
그리고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는 단종, 세조 때 자주 나온다.
17세기 초엽, 광해군 때부터 몽골(蒙古)의 잔재(殘在)가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몽골식 이름’만큼은 사라졌다고 해석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帖木兒”(첩목아) 관련 이름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 이성계(李成桂)의 할아버지(祖父)=도조(度祖)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 고려(高麗) 제31대 공민왕(恭愍王)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
최첩목아(崔帖木兒)
양첩목아(楊帖木兒)
한첩목아(韓帖木兒)
장우견첩목아(張于見帖木兒)
김대첩목아(金大帖木兒)
고탑해첩목아(高塔海帖木兒)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
최고시첩목아(崔古時帖木兒)
이첩목아(李帖木兒)
사이첩목아(謝伊帖木兒)
자안첩목아(者安帖木兒)
퇴첩목아(堆帖木兒)
아이첩목아(阿伊帖木兒)
아실첩목아(阿失帖木兒)
이야실첩목아(李也失帖木兒)
도론첩목아(都論帖木兒)
백안첩목아(白安帖木兒)
복안첩목아(卜顔帖木兒)
동완자첩목아(童完者帖木兒)
우자안첩목아(禹者顔帖木兒)
임첩목아(林帖木兒)·
동소노첩목아(童所奴帖木兒)
동소로첩목아(童所老帖木兒)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
어리첩목아(於里帖木兒)
아인첩목아(阿仁帖木兒)
사연첩목아(沙延帖木兒)
사영첩목아(沙迎帖木兒)
올로첩목아(兀魯帖木兒)
연첩목아(燕帖木兒)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
위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그 당시에 실제로 지구상 어느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대륙사관(大陸史觀)>에 따른 이런 저런 학설(學說)들을 볼 때마다 생기는 의문들 중의 하나이다.
현재 우리들은 <조선왕조실록>이 이성계(李成桂)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정사(正史)라고 알고 있다.
그럼, 이성계(李成桂)와 첩목아(帖木兒)는 어떤 관계였을까?
혹자(或者)는 여러 자료를 비교 검토한 결과, 이성계(李成桂)는 중앙아시아 티무르(Timur; 帖木兒) 제국(帝國)의 건설자(建設者)이며 초대(初代) 황제(皇帝)인 “티무르”(재위 기간: 1369년∼1405년) 즉 “첩목아”(帖木兒)라고 주장한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사례(事例)가 일본(日本)에도 있다.
‘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経; みなもとのよしつね; 源 義經, 1159년 출생~1189년 6월 15일 사망)가 몽골제국(蒙古帝國)의 초대(初代) 황제(皇帝) 칭기즈칸(成吉思汗; 1162년? 출생~1227년 8월 18일 사망)과 똑같은 인물(人物)이라는 주장이다. 나름대로의 근거(根據)도 갖추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省略)한다.
[참고=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7%BE%A9%E7%B5%8C%EF%BC%9D%E3%82%B8%E3%83%B3%E3%82%AE%E3%82%B9%E3%82%AB%E3%83%B3%E8%AA%AC]
일본(日本) 추리소설계(推理小説界)의 거장(巨匠) ‘타카기 아키미츠’(高木彬光; たかぎあきみつ, 1920년 9월 25일 출생~1995년 9월 9일 사망)가 쓴 “칭기즈칸의 비밀”(成吉思汗の秘密; じんぎすかんのひみつ)이라는 작품(作品)도 매우 유명하다.
그럼, 지금부터 첩목아(帖木兒)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료 1>
티무르 [帖木兒(첩목아), 1336~1405.2.19]
중앙아시아 티무르제국의 건설자(재위 1369∼1405). 해마다 사방으로 원정하여 코라즘을 병합하였고 동차가타이 한국을 복종시켰으며 카르토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침입하여 델리를 점령하였다. 학자·문인을 보호하고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원어명: Timur
국적: 몽골 티무르제국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자료 2>
티무르[Tīmūr/Taymūr,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 영어로는 테멀레인(Tamerlane; 절름발이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 1370년~1405년)이다.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는 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로서, “테무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말의 뜻은 "쇠"(鐵, iron)을 의미하며 이 이름을 가진 투르크계, 몽골계의 인물은 상당히 많았다.
몽골 부족의 일파인 발라스부 출신으로 언어적으로는 이미 투르크화, 종교로는 이슬람화된 몽골 귀족의 가문에 속한다. 계보에 따르면, 5대 전 선조 카라챨 노얀은 칭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를 섬긴 유력한 무장이었으나, 티무르가 샤프리사브즈의 근교에서 태어날 때쯤에는 몰락하여 겨우 소수의 하인만을 갖고 있던 작은 귀족이었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http://ko.wikipedia.org/wiki/%ED%8B%B0%EB%AC%B4%EB%A5%B4]
<자료 3>
[사람이름] 터물·더믈
세종 3년(1423년), 김가물·김사안·김내거(金加勿·金沙安·金乃巨) 등 남녀 다섯이 요동에서 도망쳐 왔다. 본디 강계 사람으로, 요동으로 달아나 동녕위(東寧衛) 군대에 들어갔다가 고향이 그리워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임금은 이들이 비록 우리 사람이나 중국 군대에 이름을 올렸으므로, 구실아치와 함께 그들을 요동으로 보냈다. 이름 표기에서 加勿(가물)은 ‘더믈’을, 高時加勿(고시가물)은 ‘고시더믈’을 적는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夾溫猛哥帖木兒(협온맹가첩목아)·賽因帖木兒(새인첩목아)·兀魯帖木兒(올로첩목아)·高時帖木兒(고시첩목아) 따위 사람이름이 ‘갸온멍거터물·사인터물·우로터믈·고시더믈’로 적혀 있다. 帖木兒(첩목아)를 적는 ‘터물·터믈·더믈’ 가운데, 앞서 본 바와 같이 ‘더믈’은 우리나라 말로 바뀐 것이고 ‘터물’은 몽골말 소릿값, ‘터믈’은 그 중간 꼴이다.
‘터물’은 몽골 사람 이름에 자주 쓰이는 밑말로, ‘쇠’를 뜻한다. 그 자취는 야인과 우리나라 사람이름에 남아 있다. ‘부허’(不花)는 ‘부개·보개’로, ‘오부카/오부허’는 ‘어부개’로, ‘노하이’는 ‘노개’, ‘코이시터물’은 ‘고시더믈’로도 자리잡았다. 그 밖에 ‘바얀, 바두/바두리/바토/바토이, 사안/사얀, 돌치, 보라/보로, 야수개’ 따위 이름이 쓰였다. ‘돌치’는 티베트말로 도르찌(다이아몬드), 보로는 볼로르(수정)다. 몽골 사람 이름에는 지금도 티베트말이 자주 쓰인다. 이렇듯 사람이름에는 이웃과의 역사 관계에서 함께 쓰는 이름들이 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이런 영향은 자취를 감춘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출처=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6475.html]
위 <자료 1, 2, 3>을 살펴보면,
첩목아(帖木兒)는 몽골(蒙古)과 깊은 관계가 있다.
현대 중국어(中國語) 발음으로는 “티에무얼”[tie(3성) mu(4성) er(2성)]이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는 “터물 > 터믈 > 더믈”로 나온다고 한다.
지금의 한국식(韓國式) 한자(漢字) 발음으로 읽으면 “첩목아”인데,
다른 발음인 “티에무얼”, “터물”, “터믈”, “더믈”과 비교하면 좀 차이가 난다.
이성계(李成桂) 왕조(王朝) 때의 발음은 <용비어천가>를 따르면 무방할 것이다.
세종 때(1423년)의 “김가물”(金加勿)이란 이름에서, “加勿”(가물)을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는 “더믈”이라고 표기하였으므로, 이두식(吏讀式) 표현이 조선(朝鮮) 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두(吏讀)는 오랜 전통이라는 게 틀림없다.
우스갯소리를 한다면, “티무르”(帖木兒; 첩목아)는 “쇠”(鐵, iron)라는 뜻이므로,
우리말인 “마당쇠”, “돌쇠”, “변강쇠”, “곰쇠”를 각각(各各) “장첩목아”(場帖木兒), “석첩목아”(石帖木兒), “횡부첩목아”(橫夫帖木兒), “웅첩목아”(熊帖木兒)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티무르”(帖木兒; 첩목아)라는 이름은 몽골(蒙古)에 관련되므로 고려(高麗) 시대에도 흔히 사용되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帖木兒, 1336년 출생~1405년 2월 19일 사망)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름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고유명사(固有名詞)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 당시에 이미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보통명사(普通名詞)에 불과하다. 그 당시 신분(身分)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이 된 것이다.
다만, 서로 구별되도록 “첩목아”(帖木兒)라는 이름 앞에 별도(別途)의 호칭(呼稱)을 추가(追加)하였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황제(皇帝) “티무르”(帖木兒,)의 이름 앞에도 무언가 다른 호칭(呼稱)이 덧붙여 있었을 것이다.
만약 중앙아시아의 티무르(帖木兒)가 이성계(李成桂)라면, 그를 이성계첩목아(李成桂帖木兒), 이첩목아(李帖木兒), 성계첩목아(成桂帖木兒) 등으로 불렀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근거를 역사기록에서 전혀 찾을 수 없기에, 그것은 필자(筆者)의 단순한 추측(推測)이다.
사실상, “이첩목아”(李帖木兒)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데, 태종 때 단 1건이 나온다.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과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또 다른 이씨(李氏) 가문(家門)의 몽골식 이름일 것이다.
<자료 4>
태종 26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0월 9일(을묘) 1번째기사
용구 사람 이첩목아에게 쌀을 하사하다
용구(龍駒) 사람 이첩목아(李帖木兒)에게 쌀을 5석 하사하였다. 이첩목아는 나이가 86세이었는데, 길 옆에서 알현하고 전토를 달라고 호소하니, 호조에 명하여 주도록 하고, 또 쌀을 하사하였다. 그가 늙은 것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乙卯/賜龍駒人李帖木兒米五石。 帖木兒年八十六歲, 見於道傍以訴田, 命戶曹給之, 又賜米。 憐其老也。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과연, 이성계(李成桂)에게도 몽골식 이름이 있었을까?
아래의 <자료 5, 6>을 살펴보면, 일단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때 기사까지 첩목아(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이 계속 등장한다. 또 다른 몽골식 이름인 탑사불화(塔思不花)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는 태조 때 기사에만 등장한다.
그 밖에 “불화”(不花)가 들어가는 이름으로는,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박고리색목불화(朴高里色目不花), 백안불화(伯顔不花), 고독불화(古獨不花), 남불화(南不花), 맹가불화(孟哥不花), 동두리불화(童豆里不花), 어적어산불화(於赤於山不花), 아을다불화(阿乙多不花), 호시불화(好時不花), 찰한실라불화(察罕失剌不花), 망가불화(莽哥不花), 이불화(李不花), 온불화(溫不花), 최합아불화(崔哈兒不花), 최사안불화(崔沙顔不花), 동불화(童不花), 소이옹불화(所伊雍不花), 아이불화(阿伊不花), 최백안불화(崔伯顔不花), 협온불화(夾溫不花), 왕탈환불화(王脫歡不花)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할아버지는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이성계의 아버지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이성계의 큰 아버지는 탑사불화(塔思不花)라고 불리었다. 다만, 첩목아(帖木兒) 또는 불화(不花)가 들어가는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의 몽골식 이름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료 5>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중국 내몽골대 교수는,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는 몇 대에 걸쳐 성장한 고려계 몽골 군벌 가문 출신으로 원(元)의 직할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서 거의 100년간 몽골 관직을 맡아 세력을 쌓았기 때문에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타르 교수는 이성계 가문은 직계 4대조까지 모두 몽골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성계 자신도 몽골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http://polch.tistory.com/1434]
<자료 6>
당시에 몽골에 살던 고려인(高麗人)들은 몽골식 이름을 갖었던 것이니,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아버지의 몽골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는데 이성계의 조선 개국으로 인하여 뒤에 환조(桓祖)라고 묘호(廟號)가 붙여졌으며, 이성계 할아버지의 몽골 이름은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였는데 뒤에 도조(度祖)라는 묘호가 붙여졌고, 종조(從祖)의 몽골 이름은 탑사불화(塔思不花)였다.
[출처=http://www.kwangsankim.or.kr/bbs/view.php?id=a001&no=933]
한편, 아래의 <자료 7, 8>을 살펴보면,
이성계(李成桂)의 몽골식 이름은 “아기바토르”(阿其拔都; 아기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래의 <자료 9, 10>을 살펴보면,
고려(高麗) 말기(末期) 1380년 이성계(李成桂)가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出戰)하여 무찌른, 소년(少年? 매우 젊은?) 왜구(倭寇) 적장(敵將)의 이름인 “아키바츠” 또는 “아기바투”(阿其拔都=아기발도; 阿只拔都=아지발도)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 전투(戰鬪)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하는데, “아기바투”(阿只拔都)와 그 왜구(倭寇)는 서로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아래에 인용된 <위키백과(한국어)>와 <한겨례신문>의 이성계(李成桂) 관련 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한편, 1382년 이성계(李成桂)는 동북면(東北面)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女眞人) “호바투”(胡拔都; 호발도)를 소탕(掃蕩)하였다는 역사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호발도”(胡拔都) 또는 “호파두”(胡波豆)라고 나온다.
[출처=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kyujanggak.snu.ac.kr/TREE/YDG_HEJ.jsp?ptype=hej&subtype=01]
왜인(倭人)과 여진인(女眞人)의 이름에도 “바토르” 또는 “바투”(拔都; 발도)라는 몽골식 이름이 들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에 여러 지역 또는 나라에서 몽골식 이름이 대유행(大流行)하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보통명사(普通名詞)가 된 것이다.
참고로, “발도”(拔都)라는 이름은 ‘용감하다’는 뜻의 몽고어(蒙古語)이고, 칭기스칸의 손자 이름이기도 하다.
현재 몽골(蒙古)의 수도는 “울란바토르”(Ulaanbaatar)인데, 중국어(中國語)로는 “乌兰巴托”[우란빠투어; wu(1성) lan(2성) ba(1성) tuo(1성)]라고 한다. 몽골어로 “붉은(Улаан; 울란) 영웅(баатар; 바타르)”이란 뜻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울란바토르”(Улан-Батор)는 ‘러시아어’이다.
그리고 몽골제국 킵차크 한국(金帳 汗国)의 칸(汗)<재위: 1242년~1255년>으로서, 칭기즈 칸(成吉思 汗)의 손자(孫子)이며 쥬치(朮赤) 칸(汗)의 둘째 아들인 “바투”(Batu, 1205년~1255년)를 중국어(中國語)로는 “抜都”[빠또우; ba(2성) dou(1성)], “巴禿”[빠투; ba(1성) tu(1성)], “八都罕”[빠또우한; ba(1성) dou(1성) han(3성)]라고 표기한다.
[출처=위키백과(多國語)]
또 하나를 언급하면, 일본(日本) 역사 속의 인물인 ‘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経; みなもとのよしつね)가 몽골(蒙古)의 칭기즈칸(成吉思汗)과 똑같은 인물이라면, 왜구(倭寇) “아기바투”(阿其拔都=아기발도; 阿只拔都=아지발도)는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후손(後孫)일 가능성도 있다.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에서 사용하던 첩목아(帖木兒), 불화(不花)라는 몽골식 이름은 어디로 사라지고, 무슨 이유로 “발도”(拔都)라는 몽골식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其拔都)가 무용(武勇)이 남보다 뛰어났고,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흰 말을 타면서, 창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로,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도 응상백(凝霜白)이라는 “하얀 부루말”을 탔다고 한다.
혹시, 이성계(李成桂)와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其拔都)는 똑같은 인물(人物)이었을까? ‘흰 말’(부루말)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그 당시의 유행(流行)이었을까?
왜장(倭將) 아기발도(阿其拔都)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업적(業績)을 찬양(讚揚) 내지는 과장(誇張)하기 위해서 사가(史家)들이 만들어낸 가공(架空)의 인물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아래에 인용된 <위키백과>의 내용처럼, 이성계(李成桂)의 몽골식 이름은 “아기발도”(阿其拔都)일 가능성도 인정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성계(李成桂)가 왜장(倭將)을 소탕(掃蕩)하고 하나의 전리품(戰利品)으로서 그의 이름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稀薄)하다고 본다.
필자(筆者)가 일본(日本)의 대표적 인터넷 포털에서 아기발도(阿其拔都) 또는 아지발도(阿只撥都) 관련 자료를 검색한 결과, 이미 위에 인용된 자료와 같은, 한국(韓國) 측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 밖에 없었다. 즉, 일본(日本) 측의 역사 자료는 없었다. 따라서 일본(日本)의 역사기록(歷史記錄)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된다.
그 아기발도(阿其拔都)는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직접 싸운 왜장(倭將)이었고, 그 전투(戰鬪) 또한 매우 유명한 것이었는데, 일본(日本) 측에 관련 역사기록이 없다는 것은 정말 이상할 정도이다.
필자(筆者)가 생각하기에는, 나이 어린 왜장(倭將)의 이름인 “아기바투”(阿其拔都; 아기발도)는 왜구(倭寇) 스스로 부른 이름이 아니고, 그가 매우 용맹(勇猛)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보인다. 그 왜구(倭寇)의 실제 이름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성계(李成桂)의 할아버지는 “첩목아”(帖木兒),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 형제(兄弟)는 “불화”(不花)라는 이름을 실제로 사용하였으므로,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은 구별을 위해서 또 다른 것으로 바꾸어 “발도”(拔都)라는 이름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推測)된다.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1504년 2월 7일) 기사에서, 태조(太祖)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성계(李成桂)를 “이발도”(李拔都)라고 호칭(呼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바투”(拔都; 발도)라는 몽골식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유(固有)한 이름은 아니고, 어떤 인물(人物)을 높이 찬양(讚揚)하기 위한 호칭(呼稱)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성계(李成桂)에게 “아기바투”(阿其拔都; 아기발도)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아무튼 이성계(李成桂)가 중앙아시아의 “티무르”(帖木兒, 1336년 출생~1405년 2월 19일 사망)와 똑같은 인물이라고 가정(假定)한다면,
설령 이성계(李成桂)가 몽골식 이름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하여도, 적어도 “첩목아”(帖木兒)라는 이름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첩목아(帖木兒)로 끝나는, 이성계(李成桂)의 몽골식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그러한 이름이 전혀 없다면, 이성계(李成桂)와 중앙아시아의 황제(皇帝) “티무르”(帖木兒)는 별개(別個)의 인물(人物)이라고 생각된다.
<자료 7>
조선 태조(太祖,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이다. 사후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7년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양주(楊州)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4%B1%EA%B3%84]
<자료 8>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나오는 이성계의 이름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의 ‘아기’는 황제나 귀족의 아들에게만 붙이는 ‘갓난애’란 뜻의 높임말이고, 흔히 ‘아가’라고 하는 말은 여성, 특히 처녀에 대한 경어로 쓰이던 몽골어다.
이런 몽골어는 대부분 고려 왕실로 시집온 원나라 공주와 그 일행들이 궁중어로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궁중어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흘러나와 마치 우리 고유어인 듯이 굳어진 것이다.
[출처=한겨례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336165.html]
<자료 9>
태조 1권 총서 66번째기사
태조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니 한산군 이색 등이 시를 지어 치하하다
(前略)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 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이성계)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이성계)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後略)
<자료 10>
중종 15권,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2월 13일(무자) 1번째기사
집의 민원 등이 박세건이 백성들에게 끼친 폐단을 들어 탄핵하다
(前略)
전조(前朝; 고려)가 방어할 때에 진(鎭)을 설치한 것은 신이 잘 알지 못하나, 그때에 아지발도(阿只撥都)가 20세 가량으로 적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 만인(萬人)을 대적한다고 일컬었습니다, 태조(太祖)께서는 모략(謀略)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며, 이두란(李豆蘭)이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늘 수종(隨從)하였는데, 발도가 얼굴과 목에 모두 갑옷을 입어 쏠 틈 하나가 없었습니다. 태조(이성계)께서 두란과 약속하기를 ‘내가 투구끈을 맞혀 끈이 끊어지거던 너는 그의 얼굴을 쏘라.’ 하고서, 태조(이성계)께서 투구끈을 맞히고 이두란도 약속과 같이 하였습니다. 발도는 무용(武勇)이 남보다 뛰어나 우리 나라 사람들 역시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국가가 당당하지만 왜인을 접대하는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실수가 없어야 하니, 소소한 폐단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의 이해(利害)를 널리 의논하여 좋은 계책을 취해야 합니다.”하였다.
<자료 11>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2월 7일(기해) 3번째기사
의금부의 종 팽손이 임금을 비난하였다고 김수명을 고발하다
의금부(義禁府)의 종 팽손(彭孫)이 고하기를,
“전라도 부안현(扶安縣) 기병(騎兵) 최중손(崔仲孫)의 이웃집 사람 김수명(金守明)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번 번(番)들러 올라왔을 때 인정전(仁政殿)에서 시위(侍衛)하며, 위에서 명(明)나라 사신 접견하는 예절을 보니, 명나라 사신은 우뚝 서서 잠시 읍만 하고 주상께서는 몸을 굽혀 예하는데, 허리와 몸이 매우 가늘어 그다지 웅장하고 위대하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중손의 사촌 형 전주(全州)사는 자가 역시 일이 있어 중손의 집에 왔다가 수명의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왕은 바로 전주 이씨이다. 이 발도(李拔都)를 하늘이 세워 왕을 삼은 것이니, 너 그런 말하지 말라.’ 하였는데, 수명이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즉위한 이래로 해마다 흉년이 들고, 〈조세(租稅)를〉 조운(漕運)하다 파선한 것이 해마다 40여 척이나 되는데, 그 건진 쌀을 백성들에게 주고, 새 곡식을 가져다 바치게 하며, 또 베를 제주(濟州)에서 사들여 백성에게 주고 곡식으로 바꾸므로 백성의 곤난과 고생이 너무도 심한데, 이는 모두 신하들의 말만 따르고 정사에 부지런하지 않은 때문이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의금부에서 김수명 등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하라.”하였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
첫댓글 티무르 가 이성계라면 그가 인도 무굴제국에서 부터 지나대륙까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니 그게 어디 가능한 일 이 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일 입니다 / 그리고 이씨조선 만 있고 명은 허구라고 보는 시각 도 윗글 에 나온 명나라 사신 이야기 와 배치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