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문제로 위기 몰리자, 美北회담으로 방향 돌려
주한미군 감축·북핵 인정·전작권 모두 영향줄 듯
미·북 정상회담이라는 유령이 다시 동북아시아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란 문제 등 국내외 난제에 직면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외교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다시 띄운 이 유령은 올 하반기 내내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며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이번 회담설은 지난해 10월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때에 비해 트럼프가 저자세이고, 북한의 김정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하며 대한민국의 안보에는 불리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8일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트럼프가 참모들에게 이르면 올가을 김정은과의 회담을 성사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와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이 계기가 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미 국무부는 북한과의 ‘전제 조건 없는 대화’에 열려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도 북한과의 대화 재개와 긴장 완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재명은 트럼프를 ‘피스메이커’, 자신을 ‘페이스메이커’로 표현하며 미북 대화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런 흐름이 맞물리면 올가을 한반도에서는 남북한과 미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기묘하게 한 지점에서 만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난다면 2018년 싱가포르, 2019년 하노이와 판문점에 이은 네 번째 대면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두 차례 만났던 2019년과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당시 김정은은 전용 열차를 타고 베트남까지 가며 하노이 회담에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노딜’ 결과를 안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김정은으로서는 뼈아픈 외교적 실패였다.
이 때문에 하노이 때와는 확연히 다른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 한 다시 회담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중간선거 다급한 트럼프, 김정은에게 ‘핵 꽃놀이패’ 쥐어주나?
지난 7년 동안 북한의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을 크게 고도화했다. 북한이 이미 핵무기 100여 개를 보유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2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 이후 북러 관계는 사실상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했고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까지 현실화됐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지난 6월 7년 만에 북한을 국빈 방문했을 정도로 관계가 좋아졌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과거 자신들이 동의했던 대북 제재 체제를 무력화시키며 북한의 든든한 후견국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배경 하에 김정은이 다시 트럼프를 만난다면 ‘비핵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핵 보유국’ 인정을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2019년 하노이 회담 때보다 ‘판돈’을 훨씬 크게 올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다.
반면 트럼프에게는 외교적 성과가 절실하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하기에 트럼프가 회담 성사를 위해 기존 대북 원칙을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지 주목된다.
한미 연합 훈련을 대폭 축소시킨 데 이어 북한의 핵 보유 현실 인정, 주한미군 철수 또는 대폭 감축 등 한국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까지 협상 카드로 다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북 회담 시나리오
미북 회담의 성사 여부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강국 대통령의 거듭된 회담 제의를 계속 외면했을 때의 후과(後果)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해보다는 한층 회담 성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WSJ가 거론한 첫 번째 시나리오는 11월 중국 선전 APEC을 전후한 회동이다. 트럼프의 중국 방문 일정과 맞물려 미·북 회담이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 실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9~10월 중 전격적인 회동을 고려할 수도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반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이른바 ‘옥토버 서프라이즈’ 형태로 회담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APEC 회원국이 아니고 김정은이 다자 정상회의에 참석한 전례도 없다. 김정은이 APEC 무대에 직접 등장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중국 선전에서 회담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회담 장소로는 중국 내 별도 장소나 제3국에서 만나는 방안과 함께 트럼프의 평양 방문이라는 파격적인 시나리오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트럼프의 평양 방문은 그의 정치 스타일을 감안하면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카드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김정은의 영접을 받는 장면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트럼프로서는 ‘딜 메이커’ 이미지를 극대화하면서 자신만이 북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 유권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벤트가 된다.
미북 회담과 전작권 변수
미북 회담은 이재명 정부가 강력히 추진하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주한미군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주둔 비용과 한국의 방위비 부담 문제에 강한 불만을 표시해왔다.
주한미군을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뒷받침하는 핵심 자산이라기보다 한국 방위를 위해 미국이 부담하는 비용이라는 시각을 일관되게 드러내면서 전작권 전환 의사를 비쳐왔다.
이재명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주권의 문제로 강조하며 ‘환수’를 주장한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도 적극적이다. 트럼프 정부와 이재명 정부는 사상과 정책이 전혀 다른데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역할 확대와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부담 축소’라는 면에서는 통할 수 있다.
여기에 김정은의 요구가 가세하면 상황은 더욱 빠르게 진전될 수 있다. 김정은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미 연합훈련의 영구 중단,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단,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 변화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이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거래’로 받아들이고 이재명 정부가 전작권 전환을 ‘군사 주권 회복’ 차원에서 밀어붙인다면 트럼프·이재명·김정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다. 미북 회담이라는 거대한 정치 이벤트 속에서 북한 핵 보유국 인정, 주한 미군 철수 또는 대폭 감축, 전작권 전환이 한꺼번에 맞물려 대한민국의 안보 구조 자체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기존의 대북 원칙을 모두 무시한 채 추진하는 미북 회담은 겉으로는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모두 좋아지고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한민국의 억지력이 약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