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흥남철수대작전 때, 당시 미10군단 통역이었던 28세 의사 청년 현봉학이
미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에게 “장군,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국민을 도와주세요.
그냥 떠나 버리면 피란민들은 중공군에게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라고 애원하였고,
현봉학의 눈물겨운 호소에 알몬드는 빅토리아호에 실려 있었던 군수물자를 모두 버리고
대신 9만2천여명의 피란민들을 빅토리아호에 태운 후 철수하였고,
결과적으로 현봉학은 오랑캐들로부터 압살당할 뻔 하였던 9만2천여명의 백성들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리스도들인은 현봉학을 가리켜 ‘한국의 모세’라고 칭하였다.
여기서 소식을 하나 전하면,
빅토리아호에 승선하였던 피란민들 중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와 어린 누나도 함께
승선하였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53년에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인 6월 2일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빅정희 의장이
하남 가나안농민학교를 방문하여 김용기 장로에게 “가나안농군학교 교육방식으로
하면 나라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고,
김용기 장로께서는 “안 도와주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당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도와주겠다는 성의에 대해, 최고의 권력자의 면전에서
“안 도와주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라고 한마디로 거절할 사림이 몇 명이나 될까?
60년 전 우리는 김용기 장로님과 같은 용기있는 분들이 계셨기에 대한민국이
오늘날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잠시나마 되새겨 봅니다.
1944년 1월, 대구법원에서 박연세 목사가 재판을 받고 있었다.
판사가 박연세 목사에게 “천황폐하가 높은가, 예수가 높은가?”라고 물었다.
이에 박연세 목사는 “나는 육체적으로 천황폐하를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박연세 목사는 왜놈 판사 앞에서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천황을 모욕하며 일제침략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1929년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방애인 교사가 고아와 문둥병자, 그리고 알콜중독자 등 빈민굴의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다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열병을 얻어 하늘나라로 간 방애인의 이야기입니다.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정신병자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서는 목욕시키고 새 옷을 입히며
봉양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광기가 발작되어 통제 불능일 때마다 방애인은 일기장에,
“나는 너무 할머니가 가엾어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아 이는 나의 짐이다.
그러나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라고 썼다.
1930년대 당시에는 여성의 나이 24살에 시집을 안 가면 노처녀라고 할 때이고,
1933년도에 여름방학에도 집에 오지 않고 시집도 안 가는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편지를 받고 방애인이 부모에게 답장하는 편지에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였었는지,
“불효한 딸을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저는 주님을 위해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독신으로 병이 나더라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외롭지 아니합니다.”
라는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그 해 9월 16일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수십 명의 여인들이 나서서 상여를 멨고, 그에게 사랑받았던 고아, 문둥병자,
학생들이 뒤를 따랐다.
당시 배은희 목사는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이라는 책을 발간하였을 정도로
방애인을 "조선 성자"로 우대하였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 어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목일신 소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자전거〉라는 동요가사를 지어
1932년에 기독교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한 동요입니다.
아마 50년대와 60년대에 초등학교에 다녔던 분들은 모두 다 학교 운동장에서
깡총 깡총 뛰면서 힘차게 불렀던 동요이기도 할 것입니다.
목일신 선생님의 또 하나의 동요를 소개하면 〈누가 누가 잠자나〉 동요이지요.
넓고 넓은 밤하늘엔/ 누가 누가 잠 자나/
하늘나라 아기별이/ 깜박깜박 잠자지/
내가 목일신 선생님의 동요를 올리는 이유는,
목일신 선생님의 아버지 목치숙 목사는 3‧1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고,
고문휴유증으로 1928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셨다.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에 의하면,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기획하고 작성한 선언문에
⌜조선혈족동맹태업⌟이라고 쓰고 조선의 독립을 기하는 시위운동을 책동”
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목일신 선생님께서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목일신 선생님께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 항일운동⌟ 시위에 참여하여
‘격문’을 썼다는 죄로 투옥되어 옥살이를 하였던 것이다.
부자지간 모두 항일투쟁을 하다가 감옥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서로 네 탓 타령만 하며 싸움질이나 해대는 정치권은 모두 많은 반성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목일신 선생님의 이야기를 올려보았습니다.
경동제일교회 영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마부 엄귀현이 왕손 이재형에게
“나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그래야 나리도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라고 권하였고,
아무리 왕권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일개의 고용한
마부로부터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으라는 말에 왕손 이재형이 큰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산을 탕진하고 집에 돌아온 이재형이 아내 정씨부인과 숭동교회
교인들의 요구에 의해 교회를 나갔고, 회심후 신학공부를 마치고 남대문교회
초대목사와 숭동교회 목사를 지냈고,
당시 마부 엄귀현과 왕손 이재형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숭동교회 사경회에 참석한 마부 엄귀현을 본 왕손 이재형이 엄귀현에게,
“형님,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려. 내게 전도하던 엄가 아니시요.”라고 그를 반겼고,
이에 당황한 마부 엄귀현이 “나리, 저를 형님이라 부르다니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도 예수를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마부 엄귀현과 왕손 이재형의 일은 금새 퍼졌고, 이 교회 양반출신 박승봉 장로와
교회 천민들은 이 기적같은 일에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왕손이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평등의 시대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왕손 이야기가 나온 김에 70년대 유행하였던 대중가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가요제목 : 비들기 집/ 가수 : 이 석〉
비들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헤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 터에
비들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가수 이 석은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의 아들로서 왕손이었다.
아마 가수 이 석은 왕족에 대해 관심이 멀어진 국민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왕족의 후손들이 다 함께 한 곳에 모여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고,
그 곳이 바로 장미꽃 넝쿨이 우거지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옹달샘터에 궁궐과 같은
집을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당시 비들기 집 노래를 들으며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이 석 가수는 꿈을 이루지 못하였고, 대중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심란한 소식만 언론에서 보도되는 현실에서, 회원님들께서 잠시나마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줄 이야기를 올려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이나마 더위를 식히셨으면 하는
바램이며, 좋은 글이었다고 칭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보름입니다. 보름동안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