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강화 교동도에 갔다. 1914년 이전까지 독립된 현이었던 교동도의 읍내리는 교동현청이 있었던 곳이고, 연산군이 유배되었다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그런데, 그 사이 연산군의 유배지가 화개산 전망대 쪽으로 옮겨가고 우물터만 남아 있었다. 어째서 백주대낯에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李瀷은〈성호사설〉에서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찌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고 말한 것을 잊었단 말인가?
교동도는 육지와 격리된 섬이므로 고려 중엽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고위층의 유배지로 단골처럼 이용되었던 곳이다. 고려 희종이 유배되었었고, 조선시대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유배를 왔던 곳이다. 한편 이곳 교동도는 조선 전기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던 안평대군이 유배를 왔다가 사사되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安平大君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용瑢이고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또는 매죽헌梅竹軒이라고 하였고, 1428년에 안평대군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그는 식견과 도량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 한 뒤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베풀며 호방한 생활을 하면서 김종서金宗瑞 등과도 자주 어울렸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이 사건에 연루시켜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가 교동도로 옮겼고, 좌의정 정인지鄭麟趾 등이 임금에게 안평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강박하여 마침내 사사의 명을 내렸는데 그 죄목에는 “양모인 성씨와 간통하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안평대군의 뒤를 이어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사람이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연산군인데, 그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의 불행은 성종의 왕비였던 어머니 윤씨가 질투심으로 인해 폐비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던 연산군은 임금으로 등극하면서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되자 눈이 뒤집혔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어머니 윤씨를 내쫒거나 죽이는데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부름을 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대역죄에 걸려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는 그들의 친척들까지 그냥두지 않았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한명회. 정창손 등 그 사건에 관여했던 중요한 인물 12명은 십이 간奸이라고 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사람들은 목을 베고 죽은 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쳐 뼈를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그의 어머니 윤씨를 헐뜯었다는 죄목으로 성종의 후궁 엄숙의와 정숙의를 궁중 안뜰에서 손수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그것을 말렸던 인수대비마저 머리로 부딪쳐서 죽게 만들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12년 동안 연산군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등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던 전형적인 독재자였으나 그 자신의 말로는 비극적이다. 연산군 재위 12년인 9월 초 하루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등이 밤을 틈타서 창덕궁을 포위하고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며 연산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장 그르니에의 말과 같이 선왕인 성종의 <조선왕조실록> 부분을 본 연산군에게 역사가 내린 준엄한 심판이었다.
연산군이 이 교동도에 유배를 올 때 그의 차림새는 붉은 옷에 띠도 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행인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했으므로 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평교자에 실려 갔는데, 그때 나인 4명에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 등 합계 7명이 수행했을 뿐이라고 한다. 바다 가운데에서 큰 돌풍이 일어서 배가 뒤집히려 하자 연산군은 ‘하늘이 무섭다‘고 떨었고 그것을 지켜본 호송대장 심순경이 “이제야 하늘이 두려운 줄 아셨습니까?” 하였다는데, 그때부터 연산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이 뱃길을 지날라치면 한번 씩 풍파가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이곳 적소에서 그로 인해 희생당했던 수많은 원귀들의 환상에 쫒긴 채 미치광이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그해 12월에 ‘부인 신비愼妃를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병들어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 뒤 이곳 교동도 사람들은 연산군의 환영이 두려운 나머지 그가 죽은 바로 뒤편에 당집을 짓고 연산궁의 화상을 모셔놓고 진혼鎭魂굿을 벌렸다. 연산군이 죽은 섣달에는 섬 처녀를 한 사람씩 등명燈明을 드렸다. 등명을 드린다는 것은 당의 신堂神에게 섹스 서비스를 하는 것으로 일종의 처녀봉공處女奉供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등명 드는 처녀는 반드시 달(달거리)을 보기 이전이어야 하고, 몸에 상처가 없어야 했으므로 되게 까다로웠다고 한다. 한번 등명을 들고나면 연산각시라 하여 귀신이 붙었다는 이유로 혼인을 하려고 들지를 않아서 뭍으로 나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고
이 교동도를 두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남긴 사람이 고려 말과 조선 초기를 살았던 대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었다.
바닷물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꽃 그림자 나직하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 뜯고 회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 하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이러한 역사를 지닌 교동현의 읍내리를 답사하는 사람은 석달 가뭄에 콩하나 나기고, 대룡리에만 관광객들이 북적북적하니, 이를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