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이식의 은퇴와 을지문덕의 막리지(莫離支) 임용
돌궐에서 돌아온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영양태왕(嬰陽太王)에게 양제(煬帝)를 만난 일을 상세히 보고했다. 영양태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왕은 수국(隨國)이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할 경우 돌궐(突厥)은 이번 전쟁에 중립을 지킬 것으로 짐작했지만 거란(契丹)이 걱정스러워 을지문덕에게 요서(遼西) 지역으로 가서 거란족들을 회유, 고구려 편으로 끌어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을지문덕은 여독을 풀 여가도 없이 다시 요서로 말을 달려 송막(松漠)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는 거란의 부족을 찾아갔다.
거란족의 지도자인 오사물(悟砂物) 막하불(莫賀弗)은 고구려에서 사신이 온다는 통보를 받고 여러 추장들을 대동한 채 송막을 떠나 무려라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하불이란 거란족의 부족장에게 붙여주는 칭호였다.
“그대가 수주(隨主)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을지문덕 공(公)이시오?”
“그렇소. 고구려의 북부욕살(北部褥薩) 을지문덕이라 하오.”
“돌지계(突地稽)를 돌려보내라고 오셨나본데, 그는 이미 수국에 귀부(歸附)하였소. 괜히 헛걸음을 하셨구려.”
노회한 오사물은 을지문덕을 떠보았다.
“내가 돌지계같은 소인이나 찾으러 여기까지 왔겠소? 여러분들께 긴히 드릴 말이 있소.”
“보아하니 고구려에 귀부하여 같이 수국과 싸우자고 말하러 온 모양인데 우리는 그럴 힘도 없고 의욕도 없소이다. 수국과 고구려가 겨루어 누가 이기든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이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오사물이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을지문덕은 인내를 갖고 설득했다.
“막하불께서는 사세를 잘못 판단하고 계시오. 수국이 당장은 고구려를 두려워해서 거란에게 잘해주고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고구려와 수국 사이의 전쟁에서 수국이 이기게 되면 저들은 거란인들을 노예로 삼을 것이오. 예전 돌궐의 예를 잊지 마시오.”
을지문덕은 십여년 전에 서돌궐에게 패배한 동돌궐 사람들이 수국에게 투항한 후에 벌어졌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 당시 동돌궐인들은 수국으로부터 노예와 다름없는 멸시를 당했다.
오사물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을지문덕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하자면 고구려가 수국을 이겨야만 하오.”
“그래도 수국은 우리에게 곡식과 재물을 원조하고 있소. 그에 비해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소?”
오사물 휘하의 추장 아율계(耶律契)가 나서며 을지문덕에게 따졌다.
을지문덕이 그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고로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도 있지 않소? 수주 양광도 무언가 이득이 있으니 재물을 보내는 것이오. 수주는 지금 고구려와의 전쟁에 앞서 주변세력을 정지하는 작업을 하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얼마 전에 유성으로 쳐들어왔던 거란이 뭐가 예쁘다고 그처럼 선심을 쓰겠소? 수국이 고구려를 제압하고 나면 거란족은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오.”
605년에 거란족이 유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수장(隨將) 위운기(韋雲起)는 수국에 복속된 돌궐족의 병사 2만명을 동원하여 거란족을 격파했다.
을지문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술율적포(述聿赤抱)라는 젊은 추장이 나섰다.
“그렇다면 차라리 돌궐에 복속하는 것이 낫소.”
을지문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돌궐은 가난한 부족이므로 그대들에게 소와 말 등의 가축들을 요구한 것이오. 그에 비해 고구려는 물자가 풍요로운 부국(富國)이오. 그러니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곡식과 철제품을 지원해 주겠소. 그분만이 아니라 거란이 원한다면 예전에 우리가 사로잡았던 수인(隨人) 포로들도 보내줄 수 있소.”
을지문덕의 파격적인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때 소우창(蕭禹彰) 막하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을지문덕을 도왔다.
“삼년 전 저 괘씸한 수주가 돌궐을 꼬드겨 우리를 짓밟았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오. 그때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소? 수주 양광도 알고보면 양털 냄새나 풍기던 자였는데 중원을 차지하고 나더니 올챙이 시절을 잊고 난리를 치고 있소. 나는 고구려에서 오신 을지문덕 욕살의 말씀을 따르겠소. 그러니 수국이 좋은 사람들은 수국에 붙고, 돌궐이 좋은 이들은 돌궐로 가시오.”
소우창은 수국과 돌궐 모두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 둘씩 을지문덕의 편에 서더니 결국 고구려에 귀부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을지문덕은 다시 한 번 외교적 역량을 훌륭히 발휘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통해 을지문덕의 외교수완을 이렇게 칭송했다.
"…고구려의 지형을 보면, 동남쪽으로는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수국(隨國)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거란(契丹)·말갈(靺鞨)·돌궐(突厥)·선비(鮮卑) 등의 나라들이 있었다. 무슨 높은 산이나 큰 강도 없었고, 무슨 변경의 요새나 사막 같은 것도 없었으며, 그 강역(疆域)이 서로 이웃하여 가까이 붙어 있기가 마치 개의 어금니처럼 이어져 있어서 사방으로 적의 침입을 받는 곳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이때에 이르러서는 수국의 기세가 열국들을 억누르고 굴복시켜서 모두 다 좌(左)로 돌라 하면 좌로 돌고 우(右)로 가라 하면 우로 갈 뿐 거역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라도 수국의 일부였고 백제도 수국의 일부였으며, 거란·말갈·돌궐도 또한 다 수국의 일부였으므로, 수국을 위하여 일하고 수국의 종 노릇하는 자들이 사방에 벌려 있으면서 수(隨) 천자(天子)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생략)
아, 기이하구나, 을지문덕의 외교수완이여! 손뼉을 치면서 한 번 칭찬해줄 만하도다. 결국 말갈도 우리가 이용하는바 되었고, 거란도 우리에게 이용되는바 되었으며,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날마다 청하던 백제도 결국 양다리를 걸치고 국경에서 관망만 할 따름이었으며, 일찍이 수국(隨國)을 두려워하여 고구려의 사신을 붙잡기까지 하였던 돌궐도 수국을 도와서 같이 치는 일이 없었으니, 그 사이에 사신을 보내어 오고 간 비밀스런 꾀와 기이한 계책들은 역사상 전하는 바가 없으나, 한 모퉁이에 홀로 서서 훌륭한 외교수완으로 적국의 무리들이 서로 돕는 것을 와해시킨 것만은 분명하니, 오호라, 진정한 위인(偉人)이로다."
이듬해에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영양태왕에게 고령(高齡)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주청했다. 영양태왕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강이식은 한사코 떠나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태왕도 강이식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강이식은 평양을 떠나며 을지문덕을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했다. 영양태왕도 을지문덕의 능력을 잘 아는 지라 쾌히 그러겠다고 약조했다.
강이식은 수레를 타고 부여성을 방문하여 을지문덕에게 자신이 은퇴했음을 알리고 오직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데 힘써 달라고 당부한 뒤 백두산으로 떠났다.
강이식이 도성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양태왕은 을지문덕을 막리지(莫離支)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오늘날 국방부장관의 직책을 함께 내린 것이었다. 그러자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를 비롯해 태대형(太大兄) 부명호(扶明好),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 의후사(意候奢) 어문도(魚文道) 등이 격렬히 반대했다. 병권을 한 손에 거머쥔 막중한 자리를 근본도 알 수 없는데다가 관급이 대형(大兄)에 불과한 애송이에게 내어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영양태왕은 옳다고 여길 때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강단을 지니고 있었다. 태왕은 끝내 귀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을지문덕을 막리지에 임명했으며 오늘날 육군참모총장 격인 병마원수의 직책도 겸직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을지문덕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을지문덕을 막리지로 임명하고 얼마 후, 영양태왕은 전국에 전시체제를 선포했다. 이때부터 고구려 사람들은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을지문덕은 먼저 전쟁에 쓰일 다량의 무기를 확보해야 했으므로 각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에게 명을 내려 무기 생산량을 늘리게 했다. 이때부터 관청의 장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소속 관청에서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두 배의 급료를 지급하여 사기를 끌어 올렸다. 관청에 속한 장인들 뿐 아니라 귀족들이 거느린 장인들도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해야 했기에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기의 생산이 늘어나자 자연히 철의 수요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 철의 생산량이 가장 많은 광산은 철산의 철광산이었다. 을지문덕은 철산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광부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사기를 고취시켜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광부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자 국내는 물론 멀리 말갈이나 실위에서까지 사람들이 광부가 되겠다고 몰려왔다. 이리하여 생산량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나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매일같이 철괴(鐵塊)를 싣고 광신을 떠나 무기를 생산하는 군기처로 가는 소가 끄는 수레들이 줄을 이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 못지않게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스러운 군사들이라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을지문덕은 각 지방 관청에 명을 내려 곡식의 수확량을 늘릴 방책을 강구하고 전쟁을 수행할 때, 장기간 보관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건량(乾糧)을 연구하게 했다. 농부들은 수확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나락 하나라도 소흘히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아껴 군량미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곡식을 말려 미숫가루를 만들고 고기를 제염처리하거나 건조시켜 육포를 만들었아. 이때 동해안에서는 명태를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이 역시 군사들에게 더없이 좋은 건량이 될 것이었다.
장인과 농부 및 광부들이 이처럼 애쓰는 사이 상인들 역시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은 사방 곳곳에 닿아 있는 그들의 교역망을 이용해서 수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상인들을 통해서 북방의 말을 비롯한 국내에서 부족한 전쟁 물자들을 입수했다.
{계속}
첫댓글 감사히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체가 그때에옆에서 보고있는 듯한 문체라서 .....! 소설을 읽는듯한 기분입니다.
잘 보아네요 을지문덕 이야기 전부 찾아내어서 보아는데요 감사 합니다 고구려 명장이 강이식 장군 을지문덕 장군 연개손문 장군 그렇게 이어지나요 그리고 대명이 대모달 인데 대모달은고구려의 큰장군 요즘같으면 참모총장 쯤 되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