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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는 무정한 유채색 소리다.
풀 뜯는 소 떼처럼 뉘엿뉘엿 놓여있는 산과 바닷가 마을의 초롱한 불빛들이 출항한 남정네들을 기다리느라 게딱지같이 엎드려 먼 바다를 바라본다. 그 불규칙 동사 같은 배열은 세속적 욕망을 초탈한 초분草墳의 자유스런 영혼처럼 멋 대로다. 너무나 멋 대로여서 언 듯 첫 시선을 끌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번 눈길을 주고나면 정을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외모다.
마을 어귀에 무심한 세월을 바치고 서 있는 나무에도 관상이 있듯 그리움과 슬픔을 안으로 다독이며 파도에 휩쓸리는 돌에도 관상이 있고 외로운 섬과 그 섬을 지키는 경계가 없는 바람소리에도 관상은 있다. 반만년 단일민족을 외치던 역사의 오일장에도 관상이 있고 수런거리던 뒤란 대나무 숲에도 관상은 있다.
그 밤 어둑발 내리던 장터 술집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화장끼가 있느냐고? 젊은 날은 싱싱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전혀 화장하지 않은 타고난 그대로의 검박한 모습이다. 광대뼈에 덕지덕지 많은 이야기가 묻어 있는 예쁘지도 젊지도 않은 그녀다.
한 칸 방에 마주 앉아 그녀가 과부인지 독신인지 아니면 레즈비언인지 물을 겨를도 없이 격식이 배제된 주안상 위로 잔은 오갔다. 술 몇 순배가 돌자 적절히 피곤해진 그녀는 혼의 소리로 나를 영접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몰아의 한량없는 자유로움과 비장미가 물씬 배어나왔다. 아무나, 마구 심부를 찌르는 인간의 소리가 아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별에 막 다녀오다 도마뱀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트린 소리, 눈을 뜨고 들으면 육자배기의 막걸리에 모로 꺾여 높이 튕겨 올라갔다 진저리를 치며 뇌하수체 어느 귀절을 살짝 밟고 내려서는 뒷소리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종시 분간할 수 없는 탁음과 경음의 절묘함으로 다시래기, 강강술래, 진도아리랑으로 넘어가는데 나는 그 황홀의 농담과 강약을 찬미하며 그 순간에, 왜 잊어진 이 여인의 인연이 자분자분 배어나왔는지, 막막하게 이 여인을 바라보았을 수많은 남정네들의 게슴치레한 담배연기를 떠올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정잡배의 눈 흘김에 동백꽃처럼 터진 젖은 상처로 남도창을 부르던 그 목소리는 분명 소래기와 김 오르는 시루의 질펀한 질곡을 넘어와 온몸으로 영혼을 두드리는 질그릇 숨결이었다. 내가 바짝 뒤 좇아 가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말씀을 지상에 털석 떨어트리고는 시침 뚝 떼고 앞장선다. 가장 자연스러운 진솔한 내어줌들, 모양이 다 다른 한 소리를 눈 여겨 보며 새로운 오류와 무심을 만회한다. 신들린 듯 시간과 공간의 외연을 확장하는 통쾌함이 녹아있는 그녀의 소리가 어떻게 편안함 속에서 이토록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절도가 전혀 없는 것 같으면서 도를 지닌 그녀의 남도 소리는 이‘절대시간’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추임새 사이로 흥겨운 학이 되어 덩실 덩실 춤을 추다 주저 없이 고요해지는 한때의 지음知音, 그 운림산방의 순금 빛 잉어의 유순한 눈빛을 닮은 소리를 보면서 그 소리의 성性과 성聖의 화엄가락에 도리 없이 나를 맞기고 말았다. 안의 안에서만 떠돌던 ‘나’와 밖의 밖에서만 떠돌던 ‘나’가 그날 밤 소리의 밀경密經에 든 건 당연한 코스였다.
사실과 상상이 교호하며 만들어내는 소리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다. 어디서 살고 있니, 애인은 있니 하는 식의 물음 또한 대단한 결례다. 새벽길을 쓰는 성자에서부터 집 없는 거리의 왕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감싸 안는 소리의 관상이란 별다른 게 있을 리 없을 터. 그저 소리 한입 베어 물 적마다 변함없는 온도를 지니며 필요한 곳에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위로라는 것. 이 지엄한 위안이 바로 봄을 앓게 하는 비백서라는 건 알겠다. 어디선가 영등할미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역임. 박사. 시인. 여행작가. 평론가.
시집 『북극여행자』외 다수
수필집 『태도가 뮤지컬이 될 때』외 다수
학술서 『에로티시즘 심리학에 말 걸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