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보라, 너의 임금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너에게 오신다.>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9,9-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제2독서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9.11-13
형제 여러분, 9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뱀의 것이 되거나 예수님의 것이 되거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순결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참 지혜를 전해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멍에’를 매어 온유하고 겸손해지면 ‘안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곧 행복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복은 고통의 소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데 집착의 대상인 자아가 소멸하거나 그런 존재인 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해방되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 ‘삼사라’(2004)에서 이 논리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한 스님이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하고 혼인을 하여 남편이 됩니다. 책임이 생기니 돈의 욕심도 생기고, 결국 다른 여자가 좋아져서 결국엔 인간의 고통에 얽매이게 됩니다. 이에 다시 아내를 등지고 절로 돌아가고 싶어 갈등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고통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존에 대한 욕망입니다. 저는 그것이 창세기의 뱀이나 탈출기의 파라오로 봅니다. 뇌 과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편도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도체는 뇌의 가장 원시적인 부문이고 생존의 위협이 되는 상황이 있으면 이성의 작용 없이 몸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편도체 활성화를 제어하지 못하면 제어되지 못한 생존 욕구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영화 ‘곤지암’(2016)은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인 대한민국 공포 체험의 성지로 불리는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 영화입니다. 유튜브 조회수를 높여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젊은 청년들이 곤지암에 있는 폐 정신병원에 잠입하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을 방영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의 이기심이었습니다. 유튜브 조회수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귀신의 존재가 있는 줄 알면서도 친구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하와가 뱀의 종살이를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하였듯이 우리는 ‘나’라는 편도체에 종살이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소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집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처음에 들어있던 뱀이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뱀을 ‘나’라고 부릅니다. 내가 배고프고 내가 화가 납니다. 그러나 그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뱀이고 편도체입니다. 그런데 문밖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는 나다”(탈출 3,14)라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분이 들어오시면 내 안의 나와 대결할 것이 분명합니다.
생존 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먹히는 삶입니다. 마치 편도체와 전두엽의 역할이 그렇게 다른 것처럼 뱀이라는 나와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나는 완전히 반대 욕망을 나에게 제시합니다. 어떤 멍에를 선택하느냐는 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원숭이는 인간 안의 뱀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하게 되는데 석가는 그를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가둡니다. 석가는 그에게 벌에서 벗어날 기회를 줍니다.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은 결정해야 합니다. 금고아를 쓰면 자신이 삼장법사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 그 금고아가 자기 머리를 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면 자아의 종이 되어 원숭이 본능으로 지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는 금고아를 받아들이고 삼장법사와 함께 여정을 떠납니다.
이는 탈출기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곧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지혜로운 것이고 그리스도의 멍에인 십자가를 통해 자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입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한 시간을 내게 더 늘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정적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잘 활용할지가 관건입니다. 문제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입에서는 바쁘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 책보고 공부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딜 가봐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지금의 현대인은 하루 평균 2,600번씩 스마트폰을 터치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정작 다른 곳에 쓸 시간이 줄어든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지인과 식사하러 식당에 갔는데, 한 아이가 울어대는 것입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너무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니 갑자기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울음을 멈춥니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에 이 어린아이 역시 빠져있는 것이지요.
스마트폰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또 제대로 삶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시간만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다 보니, 이들 모두 하나같이 연락이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지만 무음으로 놓거나 꺼놔서 연결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보다는 세상의 것에 그냥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당신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듯이, 어렵고 힘들 때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 뜻에 집중할수록 주님의 위로 안에서 힘을 내어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도 철부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 사실(예수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닙니다)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감사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될 때, 분명 그분 안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아날로그에 가까운 삶을 살아보며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 찾을 필요가 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끄고 진정으로 우리 곁에 사람들을 발견하라(에릭 슈미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