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여관 (외 4편)
이병률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불가능한 것들
모든 열쇠의 방향은 오른쪽
열리지 않으면 반대쪽
우리가 인생을 조금 더 받아먹어야 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믿자
우리는 인생이 하나가 아니라고 믿는다
마음의 마음이여
내가 나로 망하는 것
모두로 인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 하나로 침몰하는 것
그리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 중간인 것
왔던 길 말고 돌아서 왔던 길에다 삽을 부러뜨려 놓는 것
그리하여 불가능한 것들을 읽고 쓴다
두 개의 다른 열쇠로 하나의 문이 열릴 것이지만
그 문 하나로
무엇을 무엇에게 넘겨줄 것이며
누가 누구에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열쇠는 주사위 위에 올려져 있다
모든 예약은 불가능하다
맞추어야 할 뼈가 맞지 않는 것
그것에 대해 한번 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의 마음이여
모든 세계는 열리는 쪽
그러나 모든 열쇠의 할 일은 입을 막는 쪽
모든 세계는 당신을 생각하는 쪽
모든 열쇠의 쓰임은 당신 허망한 손에 쥐여지는 쪽
면면
손바닥으로 쓸면 소리가 약한 것이
손등으로 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먹을 것 같지 않은 당신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열어본 당신의 가방에서
많은 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삶의 입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했던 간밤 꿈이
다 늦은 저녁에 생각나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것을 삶의 아랫도리라 생각한다
달의 저편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대면한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 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침묵여관
나는 여기에 일 년에 한 번을 온다
몸을 씻으러도 오고 옷을 입으려고도 온다
돌이킬 수 없으려니
너무 많은 것을 몰라라 하고 온다
그냥 사각의 방
하지만 네 각이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제 마음에 따라 여섯 각이기도 한 방
물방울은 큰 물에 몰두하고
소리는 사라짐에 몰두한다
얼룩은 옷깃에 몰두할 것이고
소란은 소문에 몰두할 것이다
어느 이름 없는 별에 홀로 살러 들어가려는 것처럼
몰두하여
좀이 슬어야겠다는 것
그 또한 불멸의 습(習)인 것
개들은 잠을 못 이루고 둥글게 몸을 말고
유빙이 떠다니는 바깥
몰려드는 헛것들을 모른 체하면서
정수리의 궁리들을 모른 체하면서
일 년에 한 번 처소에 와서
나는 일 년에 한 번을 몰두한다
혼자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시집『눈사람 여관』(2013)에서
--------------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 「그날엔」 두 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