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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죽기까지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장면을 대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가난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고, 바리사이와 같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병든 사람은 무조건 죄인이라고 치부하면서 핍박하던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행적 자체가 복음이었고 행복의 선포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해방이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고 핍박하고 구속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용한 의사라고 하여도 고칠 수 없는 난치병자들을 고쳐줄 분은 예수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병에 걸려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면 나도 모르게 죽음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제 1독서에서 욥이 푸념하는 것과 같이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욥기 7, 4) 죽음의 직전에서 죽음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아들과 아내에게 하는 말이 다 들립니다. 진통제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있지만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이 빠질 것 같이 아파서 견딜 수 없지만 귀로는 모든 대화가 들립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한 경위나 지금의 상황을 얘기하면서 고비가 언제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고비를 혼자서 느낍니다. 인생의 고비를 하나씩 넘어왔으니 ‘이번에도 넘어가겠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겪는 고비가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참아내려고 마음을 독하게 먹습니다.
‘이제 죽기밖에 더 하겠나? 죽기 아니면 살겠지!’라는 생각에 지금이 최대의 위기상황일 것이라고 마음먹고 고통을 버텨냅니다. 그 고비를 버텨내는 내 모습을 주님께서 대견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습니다. ‘주님! 저 정말 잘 참고 있는 거지요?’ 아마 주님께서 “그렇다. 그래. 너 정말 용하다. 용해!”라고 칭찬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린애처럼 우쭐대는 마음으로 견뎌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중환자실에 누워서 혼자 머리를 굴리고 있는 때도 있습니다. 아직 의식불명인 때가 아닌 때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참 지독한 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 일렁거립니다. 그 희망이 없으면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온다고 하여도 이 지긋지긋한 아픔을 빨리 끝내고 주님의 품에서 편안하게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큰 두려움이 조금씩 물러납니다. 그런데 그런 때 두렵고 괴롭고 외롭고 힘든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마귀가 내게 틈새를 노리고 쳐들어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픔이 사정없이 밀려오고, 짜증이 나는 것은 악마가 내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기 시작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두렵고 괴롭고 외롭고 힘들 때 하느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원망이 되고, 의사도 간호사도 아이들과 아내도 내가 짐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갈 때 내게는 악마가 벌써 완전히 진을 치고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내가 기도도 되지 않고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때입니다.
내가 기도하지도 않고,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주님을 떠나 있을 때 그 틈새를 악마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가 막히게 노려서 나를 유혹합니다. ‘믿지 말라! 믿지 마! 네가 지금 이렇게 아프도록 그냥 내 버려 둔 게 누군 줄 아느냐? 바로 예수고 하느님이다. 기도로 아프지 않을 줄 아느냐? 진통제를 놔 달라고 해! 지금은 네가 약으로 안 아픈 거야!’라고 유혹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냥 심리적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마귀의 간교한 유혹이고 마귀의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작전임을 간과합니다. 기도의 큰 힘을 우리는 간과합니다. 그냥 기도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마를 쫓아내시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있으시면 언제나 기도하십니다. 기도하시면서 하느님의 성령을 가득히 담아 당신을 채우십니다. 그리고 충전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일을 하시러 다른 고을로 여정을 계속하십니다. 마치 휴대폰의 배터리를 충전하시듯 시간만 있으시면 기도하십니다. 환자로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기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기도가 기도문을 외우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중병에 걸린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그냥 감사드리는 것도 아름다운 기도라는 생각입니다. 투병하면서 감사하십시오. 그 순간의 감사함이 아름다운 기도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살아 숨쉽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옴니버스 옴니아' : OMNIBUS OMNIA "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축일2월 4일 성녀 요안나 (Jane)
신분 : 왕비, 설립자
활동 지역 : 발루아(Valois)
활동 연도 : 1464-1505년
같은 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발루아의 성녀 요안나(Joanna de Valois)는 1464년 4월 23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당시의 왕인 루이 11세(Louis XI)와 왕비인 사부아(Savoie)의 샤를로트(Charlotto)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더욱이 곱사등이에 마마 자국까지 있었기 때문에 국왕인 그녀의 부친은 그녀를 매우 냉대하였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오를레앙(Orleans)의 공작인 루이(Louis)와 결혼하기로 정해졌기 때문에 성녀 요안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정황에 따라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오를레앙의 공작은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했으나, 이러한 모진 대우들을 그녀는 고결한 성품으로 이겨냈다. 후에 루이 12세로 왕위에 오른 오를레앙의 루이 공작은 자신의 결혼은 루이 11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그의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결국 혼인무효와 함께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베리(Berry)의 공작으로 봉해진 성녀 요안나는 자신의 영지를 왕국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운영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병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작은 형제회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사제였던 가브리엘 마리아(Gabriel Maria,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신심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관상 수도원인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1504년에 가브리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남모르는 고행과 여러 번의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한 후 1505년 2월 4일 부르주(Bourges)에서 사망하였다. 성녀 요안나는 1742년 4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2월 4일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Maria de Mattias)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연도 : 1805-1866년
같은 이름 : 마띠아스, 메리, 미르얌, 미리암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는 1805년 2월 4일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프로시노네(Frosinone) 지방에 위치한 교황령의 최남단 마을인 발레코르사(Vallecorsa)에서 태어나 그날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아버지 조반니 데 마티아스(Giovanni de Mattias)와 어머니 오타비아 데 안젤리스(Ottavia de Angelis)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비록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신앙의 진리뿐만 아니라 성경의 일화와 인물들에 대해 배우고 내면화시킨 이 모든 일들은 발레코르사와 그 주변 지역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고통 받던 시기(1810-1825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정신 안에서는 증오와 복수를 야기하는 인간의 피와 사랑과 구원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피의 존재가 대비되었다.
10대 초반까지 세상과 접촉하지 못하고 집안에 박혀 지내던 그녀는 한때 종교보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16-17세에 이르러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무한한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내면의 어두움을 걷어내던 그녀는 신비로운 환시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명백해졌다. 또한 이 체험은 마리아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과 천상 아버지의 감미로운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원천이요 힘이자 동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어떻게 주셨는지를 알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체험이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녀가 17살이 된 1822년 보혈 선교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가 그녀의 마을을 방문했다. 자기희생의 모범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보배로운 피)의 신비를 제시한 성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결국 가스파르 성인의 동료 중 하나인 가경자 조반니 메를리니(Giovanni Merlini) 신부의 지도 아래 그녀는 1834년 3월 4일, 그녀의 나이 29살에 프로시오네의 아쿠토(Acuto)라는 작은 마을에서 학교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원장은 30년을 넘게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여러 곳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수녀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가정생활의 성화를 위해 기혼 여성을 위한 강좌를 여는 등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걸어서 여행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느 마을에서든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구속의 사랑을 이루신 성혈의 신비를 선포하길 원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녀는 ‘설교하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설립한 공동체는 매우 가난했고 종종 먹을 것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무엇이든 나누기를 원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가 설립한 수도 공동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이미 70개를 넘어섰다.
그녀는 1866년 8월 20일 로마(Roma)에서 선종하여 로마의 캄포 베라노(Campo Verano)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선종 이후에 더욱 널리 퍼져 30년이 지난 1896년 그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그 열기는 1950년 10월 1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그녀의 시복이 선포되었을 때 최고점에 올랐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수녀원 총원의 보혈 경당 내로 옮겨 모셨다. 그녀는 2003년 5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예전부터 기념해 오던 2월 4일 또는 선종일인 8월 20일에 기념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안나 (Jane), 마리아 데 마티아스 (Maria de Mattias)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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