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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시작 1,1-9>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9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4,42-5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5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앞의 23장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해 불행 선언을 하신 다음,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고, 가장 큰 재난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도적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곧 '깨어있으면서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3-44)고 하십니다.
재림의 때가 예측 불허할 뿐만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올 것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있다가 그 때를 돌발적으로 맞이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곧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주인이 자기 종에게 자기 집안의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마태 14,45)
‘충실함’이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 집안 식솔들’(마태 24,45)과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어주는 일’(마태 24,45)에 대한 충실함으로 묘사됩니다.
곧 ‘맡겨진 사람’과 ‘맡겨진 일’에 충실함이 주인에 대한 충실함이 됩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주님 집안의 식솔들, 곧 양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곧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님께 대한 충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슬기로움’이란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이요,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 양식이나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양식’을 내어주는 일, 곧 당신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일 자체도 그분이 맡기신 일이요, 그분의 일입니다.
이처럼 '깨어있음'은 의식의 각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일을 맡기신 ‘주인의 신뢰에 대한 깨달음’과 '깨어있음'에서 오는 종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종들’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인 행동으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해야 할 일이요, 결코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마태 24,45)
주님!
당신께 속해 있는 종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에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형제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시고, 그것이 당신께 대한 저의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풍요로워진 우리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이 여러모로 풍요로워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과 그렇지 않은 종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결하여 이런 성찰을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도 주님 안에서 여러모로 풍요로워졌는데, 이렇게 풍요로워진 제가 지금 슬기롭고 충실한 종인가?
그런데 오눌 복음을 보면 주인에게 충실한 슬기로운 종은 주인에게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식솔에게도 잘해야 합니다.
곧 주인에게만 딸랑딸랑 알랑방귀 뀌고 그 식솔들에게는 잘못하면 안 되고, 주인이 올 때 깨어 기다리다가 맞이할 뿐 아니라 주인이 없는 동안 그 식솔까지 잘 돌보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면 주님에게서는 사랑을 받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고, 주님 안에서 풍요로워지고 이웃에게 그것을 나누고, 주님 말씀을 듣고 이웃에게 그 영적 양식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깨어 있는 삶이란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의 관계 안에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늘 준비하고 삽니다.
사실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은 못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실행하고 나서는 ‘미리 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강의를 부탁받을 때 여유 있게 준비하지 못하고 날짜가 임박해서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다짐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날이 오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또 후회합니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깨어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시합이 이루어지는 날은 희망의 날이고 영광의 날입니다.
노력한 모든 것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땀이 함께 했으면 등수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이요, 최선을 다한 것이 보상입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경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속임수로 준비했다면 그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패배는 패배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을 향한 인생여정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면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드시 올 그날을 지금 준비하면 그날이 언제 오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여정의 모두가 구원의 날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심판자로 오신다 해도 깨어 준비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영광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됩니다.
인생의 연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선택의 기회에 옳고 바른 것을,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선택을 함으로써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으십시오.”(마태 24,42)
예수님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마태 24,46)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참 구원의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잠든 사람이 있고, 깨어나는 사람이 있으며,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깨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전능하시면서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가?>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들이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고 반항하고 때리고 심지어는 발에 오줌까지 싸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48화에 보면 10살 아이가 10개월째 등교를 거부하며 어머니 속을 썩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혼자 있을 때 공부를 집에서 합니다.
공부하기는 하는 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싫은 것입니다.
전에 나왔던 이지현 씨의 아이도 그랬습니다.
두 가정의 공통점은 이혼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없어서 엄마는 아빠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아이는 잔소리 듣고 무언가를 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데 하고 나면 다 엄마가 하래서 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엄마처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하인들에게 제때 양식을 주라는 소명을 주고 떠났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양식을 주고 있는 이들은 깨어 있는 종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입니다.
종은 명령받고 파견받습니다.
우리도 명령받았습니다.
파견받았다면 소명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일어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나를 주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분명 이웃에게 양식을 주라고 파견받았습니다.
양식은 은총과 진리를 말합니다.
은총은 살과 피를 내어주는 희생이고, 진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두 일을 할 기회를 분명 주실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이 소명을 수행해야 언제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느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당신이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고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봉사하면서 자녀임을 완전히 믿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지시하며 자신 때문에 자녀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자녀는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부모를 넘어서려는 욕구를 느낍니다.
태어난 아기도 엄마를 돌보는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니 부모는 더 낮아져서 자녀가 자신에게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처럼 온전한 인간임을 믿고 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당신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에게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혜인 씨는 지적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생겼습니다.
부모도 반대했고 주위 시선도 나빴습니다.
그래도 이혜인 씨는 예쁜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복덩이입니다.
엄마를 자신이 돌봅니다.
지켜줍니다.
아침 일어날 때부터 씻고 옷을 입고 출근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는 것까지 모두 자신이 관여합니다.
엄마가 학교에서 청소하는 일로 적은 돈을 벌어올 때까지, 연서는 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해 놓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퇴근하는 오후 2시쯤 되면 밖에 나가 엄마를 기다립니다.
마치 오래 못 본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엄마에게 안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왜 자신이 그런 부모를 만나서 이런 아이답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서는 자기가 엄마를 돌보아 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기뻐합니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충분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준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 해주는 게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약해지고 낮아져서 자녀가 부모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그렇게 진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당신 자녀가 되도록 하느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선교를 위해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 소명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께서 어떤 소명으로 우리를 파견하셨는지 묻고 우리가 하느님을 도울 수 있는 존재임에 크게 기뻐합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활의 로랑 형제의 생각과 단상, 편지들을 모은 <하느님의 현존 연습>(콩라 드 메스테르 엮음, 가톨릭출판사)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때로 부실하고 때로 밋밋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제게 매순간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 현존 속에 충만히 살아가라는 로랑 수사님의 권고 말씀은 큰 자극이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부활의 로랑 형제의 호적상 이름은 니콜라 에르망입니다.
1614년 프랑스 로렌 지방의 뤼네빌 근처 작은 마을 에리메닐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시기 그는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독일군에 체포되기도 하고, 스파이로 의심받아 처형될 위기에 빠지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6살 되던 1640년 파리에 있는 맨발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부활의 로랑’이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평수사 지망자였던 그는 1642년 8월 14일 서원을 하고, 그후 15년 동안 파리 공동체의 요리사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인 시절 전쟁터에서 얻은 다리의 상처가 깊어져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인 신발 수선의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에서 로랑 수사는 공동체 포도주 조달 담당자가 되어 왕복 8백킬로나 되는 거리를 왕래해야했습니다.
평수사로서 해야만 했던 수많은 잡다한 일들을 기쁘게 해나가던 로랑 수사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기쁜 얼굴로,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지금으로서는 웃기는 일이지만, 당시 평수사들은 잡다한 일들을 하느라 미사에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기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정도였습니다.
각자 맡은 일 때문에 아침 저녁 기도나 공동 묵상에도 참여할 수 없을 때가 잦았습니다.
그러나 로랑 수사는 언제 어디서든 깨어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통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의 삶 전체, 활동 전체, 하루 전체는 기도였습니다.
로랑 수사의 깨어있었던 삶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일맥상통합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24장 42~44절)
“저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부탁하는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속에 하느님을 모십니다.”
다음의 로랑 수사의 권고 말씀은 세상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함에 도달하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으시고, 그 일을 얼마나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는 “준비하고 있어라.”입니다(44절).
종말과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마태 24,36).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오고(마태 24,35), 또 ‘곧’ 올 것이기 때문에(마태 24,34) 그 날을 맞이할 준비는 ‘지금’ 해야 합니다.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게 말하면,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심판받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도 포함해서 ‘삶 전체’를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변화시키는 것, 변화된 다음에는 유지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4-36)
종말, 심판, 회개 같은 말들이 주는 인상 때문에 ‘깨어 있음’을, “전전긍긍 하면서 심판과 처벌을 기다리는 무서운 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신앙인들의 ‘깨어 있음’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기쁜 일”입니다.
만일에 ‘깨어 있음’이 심판과 처벌을 기다리면서 무서워하는 일이라면, 신앙생활 자체가 너무 무겁고 어둡고 힘든 멍에가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행복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에 ‘깨어 있음’도 행복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 ‘코헬렛’의 다음 말은 인생을 사는 방법, 또는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에 관한 좋은 권고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코헬 11,9-10)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인생입니다.
언젠가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되, 그 심판의 결과가 처벌이 아니라 구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도둑’이라는 말은 ‘갑작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1테살 5,2-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테살 5,9)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예수님께서 일부러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하지 않은, 즉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마태 24,45-47)
이 말씀에서 ‘종’은 좁은 뜻으로는 종교 지도자들, 성직자들이고, ‘집안 식솔들’은 교회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종’은 모든 신앙인이고, ‘집안 식솔들’은 각자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인생과 목숨의 관리자, 또는 집사입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은 자기가 맡아서 관리하던 인생과 목숨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돌려드릴 때 ‘좋은 상태’로 돌려드리는 사람도 있고, 깨지고 부서진 것을 돌려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상태로 돌려드리는가는 각자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언제’ 돌려드려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지금 즉시 반납하라는 명령이 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더 큰 책임을 떠맡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된다, 즉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는 인생과 목숨의 관리자일 뿐이고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 인생과 목숨을 책임지신다는 뜻도 된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과 목숨을 맡기고 나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돌보고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면 주님께 호소해야 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것이니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어제 배운 명상기도 등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주님 안에 머무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깨어 있을 때 참으로 영적 부요의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개방입니다.
깨어 있음은 경청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건강입니다.
깨어 있음은 자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부요입니다.
깨어 있을 때 텅 빈 충만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깨어 있을 때 존엄한 인간 품위도 빛납니다.
깨어 있을 때 일체의 유혹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 같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하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입니다.
모두 '깨'자 돌림입니다.
순수한 우리 말이 고맙습니다.
저절로 깨어 있음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훈련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나 미사 공동전례는 물론 일상의 모든 영적수행에, 영적훈련에 충실할 때 비로소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깨어 있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신도들은 그들이 살아 있던 당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재림이 지체되면서 종말론적 의식도 쇠퇴해가면서 이완되는 모습이 보이자 다시 깨어 있음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변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대신하여 언제나 종말론적 자세로 간절히, 절박하게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살 것을 강조했습니다.
궁극의 희망이 있을 때, 인내도, 기다림도 가능합니다.
언젠가 오실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기에 끝까지 깨어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이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한결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준비하며 기다림을 뜻합니다.
특히 공동체에서 중요한 책임이 맡겨진 형제들은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한결같이 깨어 사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 종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그러나 만일 불충不忠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님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괴롭히며 나태하게 살다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주님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방탕과 방종의 삶을 살다가 뜻밖의 사고나 병, 또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인생 얼마나 낭패스러울까요!
이래서 오늘 지금 여기서 늘 깨어 준비하며 책임을 다하는 삶이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바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여, 또 일년사계, 일년 사철로 압축하여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오늘 지금 여기서 종말론적,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젊음도 잠시입니다.
피정 시작한 날이 어제 같은 데 내일 모레면 끝납니다.
그러니 깨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나 코린토 교회 신도들은 참으로 깨어 있는, 유비무환의 사람들같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대로 깨어 충실히 살고자 하는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들립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은혜롭고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깨어 살고자 힘쓰는 우리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날로 깊게 해 주시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더욱 깨어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의 등잔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며>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로 묘사됩니다.(25,1)
여기서 신랑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요(9,15), 열 처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슬기로운 이들도 있고, 듣고도 지키지 않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7,21-27).
선인들과 악인들이 함께 사는 불완전한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내림을(24,48) 안타까움 속에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밤중, 뜻밖의 시간에 오실(25,6.13) 주님을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기다리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가 마중 나가야 할 것입니다(1테살 4,17).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늘 깨어(24,42; 25,13) 준비하고 실행한 이들은 마지막 날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이들은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25,11) 하고 청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7,21-23. 24-27).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누구이시며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주님을 맞기에 합당한 삶을 포함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내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여야겠지요.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잠들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깨어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돈으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올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자가 책임져야 할 신앙의 문제요, 하느님과의 고유한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한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요?
등은 주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과 주님의 영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인 깨끗하고 순수한 내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이란 인내와 희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는 몸짓이요, 그분을 갈망하는 거룩한 열정이며,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실행하는 태도입니다.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은 말씀의 실행을 말합니다.
곧 가장 작은 이,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모시는 사랑의 실천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기도요, 선이신 주님의 사랑과 정의 안에 머무는 행실을 말합니다.
사랑의 불꽃은 나의 어두운 영혼과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도록 합시다.
등도 기름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 곧 말씀을 듣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사람이 될 수야 없겠지요.
또 어정쩡하게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곧 말씀을 듣기는 하나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오늘도 불현 듯 나를 찾아오실 주님을 사랑으로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 행복한 날이 되도록,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영 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의 모닥불을 피웠으면 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불교에서는 ‘죽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비의 뜻은 대나무로 만든 길쭉한 매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이유는 작은 충격에도 큰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스님들이 참선할 때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피곤해서 졸음이 올 때 죽비를 치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잡념과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비로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참선하는 스님의 몸을 죽비로 치기도 합니다.
죽비를 맞거나, 죽비 소리를 들으면 참선하는 스님들은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참선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죽비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며칠 전에 수녀님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가 축하인사를 하면서 뺨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놀란 아들이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늘 이렇게 깨어서 지내도록 하세요.”
아들은 그 의미를 알고 어머니께 그렇게 살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시간에는 3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마치 햇살이 온 땅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루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부자라고 해서 시간을 더 많이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루 24시간은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8월 23일은 제게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서품기념일이기 때문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축일, 기일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날에 사람들은 선물을 주기도 하고, 피정을 가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님들이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듯이, 가치의 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가치의 시간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교리문답은 가치의 시간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원리와 기초에서 보다 상세하게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병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가치의 시간입니다.
진복팔단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던 이방인 여인, 백인대장, 하혈하는 여인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는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가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의미라는 디딤돌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에 가치라는 계단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미라는 디딤돌을 건너 천국의 계단으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1869∼1957)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아주 심한 근시여서 잘 보지 못했다고 하지요.
관현악단의 일원을 연주해야 하는데, 눈앞에 있는 악보도 보이지 않았으니 어떻게 연주할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악보를 완전히 외워서 연주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이 즐거웠을까요?
자기의 엄청난 근시에 대해 답답해하고 어느 정도의 불평불만도 간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연주회 바로 직전에 지휘자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지휘자가 없으니 연주회 자체가 무산될 위기였지요.
그런데 그 많은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 곡을 전부 암기하여 외우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토스카니니였습니다.
바로 임시 지휘자로 발탁되어 지휘대 위에 서게 되었고,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불평불만의 일들은 늘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일만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들다면서 자기 신세 한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또 자기가 가져야 할 것만을 떠올리며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한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부재중일 때, 그 집의 하인들이 늘 깨어 있으면서 주인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하나의 내용과 주인이 돌아왔을 때, 떠날 때 맡긴 직무에 대하여 충실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일처리를 했느냐에 대한 점검이 있을 것이라는 또 다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가 종말론적 비유를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과 연결되기에 종말의 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는 잘못된 판단에서 불충실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올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 판단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만을 내세우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충실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충실한 종이 과연 종말의 순간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원하는 모습을 지금 당장 실천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충실한 종일까요? 불충실한 종일까요?
종말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충실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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