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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11회
순림보(荀林父)는 극옹(郤雍)을 임용하여 도적을 잡아들였는데, 양설직(羊舌職)이 극옹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순림보가 그 까닭을 묻자, 양설직이 말했다.
[양설직은 제71회에 진문공(晉文公)이 秦나라에서 귀국할 때 곡옥으로 와서 영접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주(周)나라 속담에 ‘연못 속의 물고기를 잘 알아보는 자는 상서롭지 못하며, 남의 비밀을 잘 엿보는 자는 재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극옹 한 사람이 아무리 잘 알아낸다 하더라도 그 많은 도적을 다 잡을 수는 없는 반면에, 여러 도적들이 힘을 합치면 극옹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흘이 지나지 않아, 극옹은 교외로 나갔다가 도적 수십 명의 공격을 받았다. 도적들은 극옹의 머리를 잘라서 도망쳤다. 순림보는 울화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경공(晉景公)이 양설직을 불러 물었다
“그대가 예견한 대로 극옹은 죽었소. 이제 어떻게 하면 도적이 그치겠소?”
양설직이 대답했다.
“무릇 지혜로 지혜를 막는 것은, 돌로 풀을 누르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틈을 비집고 다시 자라나게 됩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금하는 것은, 돌로 돌을 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양쪽이 다 깨지게 됩니다. 도적을 그치게 하려면, 그 마음을 교화하여 염치(廉恥)를 알게 해야 합니다. 많이 잡아들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주군께서 조정의 선인(善人)을 택하셔서 위에서부터 善을 드러내면 不善한 자들이 장차 저절로 교화될 것이니, 어찌 도적을 걱정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31회에, 관중이 제환공에게 말하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국가의 사유(四維)입니다.”라고 하였다. ‘예의염치’는 예절·의리·청렴·부끄러움이며, ‘사유’는 국가를 지탱하는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지금 晉나라에서 가장 선한 사람이 누구인지, 경이 천거해 보시오.”
“사회(士會)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말에는 신의가 있고 행동에는 의리가 있습니다. 그는 화합을 하되 아첨하지 않고, 청렴하되 교만하지 않으며, 강직하되 고집스럽지 않으며, 위엄이 있되 흉포하지 않습니다. 주군께서는 반드시 그를 등용하셔야 합니다.”
[사회는 제71회에 진문공(晉文公)이 秦나라에서 귀국할 때 곡옥으로 와서 영접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제80회에 진문공이 초나라 성득신과 성복에서 싸울 때 사회는 순림보와 함께 좌우익이 되어 공을 세웠다. 제94회에, 진양공(晉襄公)이 훙거하고 공자 옹을 군위에 옹립하기 위해 사회는 선멸과 함께 秦나라로 갔다가, 조돈이 세자 이고(진영공)를 군위에 옹립하는 바람에 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제96회에, 유병의 계책에 의해 수여가 秦나라로 가서 사회를 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다. 제107회에, 晉軍이 필성에서 초군과 싸울 때 사회는 상군원수로 참전했으며, 제108회에 초군이 쳐들어올 때 오산에 군사를 매복하여 초군을 물리치고 군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 귀환하였다.]
사회가 적적(赤狄)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경공은 적적의 포로들을 주왕실에 바치고, 사회의 공을 주정왕(周定王)에게 아뢰었다. 정왕은 사회에게 예복을 하사하였다. 사회는 상경(上卿)이 되어 순림보를 대신해 중군원수가 되었고, 태부(太傅)의 직을 겸하였다. 범(范) 땅에 봉해져 범씨(范氏)의 시조가 되었다.
[제2회에, 두백(杜伯)이 주선왕(周宣王)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의 아들 습숙(隰叔)은 晉나라로 달아나, 후에 형벌을 맡은 사사(士師) 벼슬을 살았다. 그래서 그 자손은 사씨(士氏)가 되었는데, 범(范)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다시 범씨(范氏)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회는 도적에 관한 법률 조항을 모두 삭제하고, 오직 백성을 교화하고 선(善)을 권하는 일에만 힘을 쏟았다. 그러자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秦나라로 달아나, 도적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晉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진경공은 다시 패업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모신(謀臣) 백종(伯宗)이 아뢰었다.
“선군 문공(文公)께서 처음 천토(踐土)에서 회맹했을 때 열국이 모두 따랐으며, 양공(襄公) 재위 시에 신성(新城)에서 회맹했을 때에도 열국이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호(令狐)에서 신의를 잃고서 秦과 우호가 단절되기 시작하여, 齊와 宋에서 시역(弒逆)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산동(山東)의 여러 나라들이 마침내 晉을 경시하고 楚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鄭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宋도 구원하지 못함으로써, 다시 두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晉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는 衛와 曹를 비롯하여 겨우 서너 나라밖에 없습니다. 齊와 魯는 천하의 명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주군께서 다시 맹주의 대업을 복원하시려면 齊·魯와 친선을 맺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사신을 두 나라에 보내 정세를 파악하고, 楚나라와의 틈을 엿보아야만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경공은 그 말에 찬성하고, 상군원수 극극(郤克)으로 하여금 많은 예물을 가지고 魯와 齊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제82회에, 진문공은 천토에서 주양왕을 모시고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고 패자가 되었다. 제97회에, 진영공(晉靈公) 때 조돈이 신성에서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였다. 백종은 양공 때라고 했는데, 착오가 있다. 제94회에, 진강공(秦康公)이 晉나라 공자 옹을 군위에 옹립하기 위해 晉나라로 보냈는데, 영호에 주둔하고 있을 때 조돈이 기습하여 秦軍을 패퇴시켰다. 제97회에, 제소공이 훙거하자 공자 상인(제의공)이 세자 사를 죽이고 군위에 올랐다. 조돈은 제후들을 모아 제나라를 토벌하러 갔다가 제의공에게 뇌물을 받고 그냥 돌아갔다. 제97회에, 송나라 공자 포(송문공)가 송소공(宋昭公)을 죽이고 군위에 올랐다. 조돈이 순림보를 보내 송나라를 토벌하게 했으나, 순림보는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그냥 돌아갔다. 제98회에, 병촉과 염직이 제의공을 시해했는데, 그때도 晉나라는 방관하고 있었다. 제107회에, 초장왕이 정나라를 정벌했을 때 순림보가 구원하러 갔다가 패전하였다. 제109회에, 초장왕이 송나라를 정벌했을 때 진경공은 해양을 사신으로 보내 말로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송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였다,]
한편, 노선공(魯宣公)은 제혜공(齊惠公)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랐기 때문에 제나라를 정성껏 섬기면서 항상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조공을 바쳤다.
[제98회에 노문공(魯文公)이 훙거하고 세자 악(惡)이 즉위했는데, 제99회에 동문수(東門遂; 중수)가 세자 악과 공자 시(視)를 마구간에서 시해하고 공자 왜(노선공)를 옹립하였다. 그때 동문수는 제혜공이 도와주면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제혜공이 훙거하고 제경공(齊頃公) 무야(無野)가 즉위한 후에도, 노나라는 제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면서 예물 보내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제106회에, 초장왕이 陳나라를 침공하여 하징서를 처형했을 때 제혜공이 훙거하고, 세자 무야(제경공)가 즉위하였다.]
극극은 노나라에 당도하여 수교(修交)하였다. 예를 마치고 제나라로 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자, 노선공 역시 제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가 되었으므로 상경(上卿) 계손행보(季孫行父)로 하여금 극극과 함께 가게 하였다.
[제99회에 동문수가 노선공을 옹립하고, 숙손득신(叔孫得臣)·계손행보와 함께 정권을 잡았다. 동문수와 숙손득신은 4촌 형제이고, 두 사람은 계손행보에게는 당숙이 된다.]
극극과 계손행보는 제나라 교외에서, 역시 제나라에 사신으로 온 위나라 상경 손량부(孫良夫)와 조(曹)나라 대부 공자 수(首)를 만났다. 네 사람은 상견하고 각자 제나라에 온 이유를 말했는데, 모두 같은 뜻을 갖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네 대부는 함께 공관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입조하여 각기 주군의 뜻을 전하였다.
예를 마친 후, 제경공(齊頃公)은 네 대부의 용모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기면서 말했다.
“대부들께서는 공관으로 돌아가 쉬고 계시오. 곧 연회를 열어 대접하겠소.”
네 대부는 공관으로 돌아갔다.
경공은 내궁으로 들어가 모후인 소태부인(蕭太夫人)를 뵙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소태부인은 소군(簫君)의 딸로서 제혜공(齊惠公)에게 시집왔는데, 제혜공이 죽은 후로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경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항간에 우스운 일이 있으면 흉내까지 내가면서 얘기를 하여, 어머니의 얼굴을 펴드리려고 애를 썼다.
그 날, 경공은 계속 웃기만 할 뿐 그 까닭을 말하지 않았다. 소태부인이 물었다.
“밖에서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기에, 그리 웃기만 하시오?”
경공이 대답했다.
“밖에 별다른 재미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晉·魯·衛·曹 4국의 사신들이 왔는데, 晉나라 대부 극극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애꾸눈이요, 노나라 대부 계손행보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요, 위나라 대부 손량부는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른 절름발이요, 조나라 대부 공자 수는 두 눈이 땅바닥을 쳐다보는 곱사등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각기 다른 장애를 지닌 네 사람이 동시에 우리나라에 와서 함께 당상에 올라 귀괴(鬼怪)한 집합을 이루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태부인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한 번 봐야 되겠소.”
경공이 말했다.
“사신들이 왔으니까 공식적인 연회를 연 후에, 관례에 따라 사적인 연회도 열 것입니다. 내일 제가 후원에서 연회를 열면, 대부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반드시 숭대(崇臺) 아래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숭대 위에서 장막 사이로 몰래 내다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날 공식적인 연회는 별일 없이 끝나고 사적 연회가 후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소태부인은 이미 숭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로부터의 관례에 의하면, 사신이 왔을 때 수레를 따르는 종자들은 주인국에서 제공함으로써 사신을 따라온 종자들은 잠시 쉬게 하였다.
경공은 오로지 모후를 한 번 웃게 하려는 생각만으로, 나라 안에서 애꾸·대머리·절름발이·곱사등이를 각각 한 사람씩 선발하여 네 대부의 수레를 몰게 하였다. 즉 애꾸 극극의 수레는 애꾸가, 대머리 계손행보의 수레는 대머리가, 절름발이 손량부의 수레는 절름발이가, 곱사등이 공자 수의 수레는 곱사등이가 몰게 했던 것이다.
[제경공은 군주의 본분을 망각했다.]
상경 국좌(國佐)가 경공에게 간했다.
“사신을 대접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로서 빈주(賓主)가 서로 공경하는 예로써 대해야 합니다. 결코 희롱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경공은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꾸 둘, 대머리 둘, 절름발이 둘, 곱사등이 둘이 각기 탄 수레 네 대가 숭대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소태부인은 장막 틈새로 내려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곁에 있던 시녀들까지 웃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 웃음소리가 곧바로 바깥에까지 들렸다.
극극은 처음에 어자가 애꾸인 것을 보고 우연이겠거니 생각하여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대 위에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다. 극극은 연석에서 술 몇 잔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황망히 일어나 공관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공관의 하인에게 힐문했다.
“대 위에 있던 사람이 누구냐?”
“국모인 소태부인입니다.”
잠시 후, 魯·衛·曹 세 나라 사신들도 돌아와 극극에게 호소하였다.
“제나라에서는 고의로 그런 자들을 어자로 뽑아, 부인을 웃기기 위하여 우리를 희롱하였습니다. 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극극이 말했다.
“우리들은 호의로 우호를 맺기 위해 왔는데, 저들은 우리를 모욕하였소. 이 원한을 갚지 않는다면,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소?”
다른 세 사람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대부께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정벌하시겠다면, 우리도 과군께 아뢰어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돕겠습니다.”
극극이 말했다.
“여러 대부들께서 과연 한 마음이라면, 당장 삽혈하고 맹세합시다. 제나라를 정벌하는 날, 힘을 다하지 않는 자는, 신명(神明)이시여 재앙을 내리소서!”
이튿날, 네 대부는 경공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좌는 탄식하였다.
“제나라에 환난이 시작되는구나!”
[晉·魯·衛·曹 4국이 齊와 우호를 맺으러 왔다가 도리어 원수가 되고 말았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主賓相見敬為先 주인은 손님을 맞이할 때 공경함이 우선인데
殘疾何當配執鞭 어찌하여 같은 불구자로 하여금 수레를 몰게 했던가?
臺上笑聲猶未寂 숭대 위의 웃음소리가 아직 끝나기 전에
四郊已報起烽煙 사방 변방에서는 봉화가 올랐도다!
그때 노나라에서는 동문수와 숙손득신이 죽고 계손행보가 정경(正卿)이 되어 권력을 쥐고 있었다. 계손행보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웃음거리가 되고 돌아온 후,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극극도 귀국하여 진경공(晉景公)에게 제나라를 정벌할 병력을 청했지만, 태부 사회가 반대하여 경공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계손행보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노선공에게 아뢰어 사신을 초나라로 보내 병력을 빌리게 하였다.
그때 초장왕(楚莊王)이 병으로 훙거하고 나이가 열 살밖에 안 된 세자 심(審)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초공왕(楚共王)이다.
사관(史官)이 시를 지어 초장왕을 칭송했다.
於赫莊王 빛나도다 장왕이여!
干父之蠱 간고지자(幹蠱之子)로다.
始不飛鳴 처음에는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나
終能張楚 마침내 초나라의 국세를 떨쳤다.
樊姬內助 안에서는 번희(樊姬)가 내조하고
孫叔外輔 밖에서는 손숙오가 보필하였네.
戮舒播義 하징서를 처형하여 의를 떨치고
衂晉覿武 晉軍을 물리쳐 무위(武威)를 드날렸네.
窺周圍宋 주왕실을 엿보고 송나라를 포위했으니
威聲如虎 위엄 있는 음성은 마치 호랑이 같았다.
蠢爾荊蠻 꿈틀거리던 형만(荊蠻)이
桓文為伍 제환공·진문공과 같은 반열에 섰도다!
[‘간고지자(幹蠱之子)’는 부모의 죄과를 보상할 수 있는 훌륭한 자식을 말한다. ‘삼년불비(三年不飛)’·‘일명경인(一鳴驚人)’은 제99회에 나왔다. 제105회에, 초장왕은 진영공(陳靈公)을 시해한 하징서를 처형하였다. 제101회에, 초장왕은 육혼 땅을 정벌하고 위로하러 온 주왕실의 대부 왕손 만에게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었다. 초장왕은 제환공·진문공와 함께 ‘춘추오패’로 일컬어진다.]
초공왕이 국상으로 인해 출병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계손행보는 한편으로 분노하고 한편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晉나라에서 온 사람이 말했다.
“극극이 밤낮으로 齊나라 정벌의 이익을 말하면서 齊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패업을 도모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晉侯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사회는 극극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늙었음을 핑계대고 국정을 극극에게 양도하였습니다. 지금 극극은 중군원수가 되어 晉나라의 국사를 주관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에 복수할 것입니다.”
계손행보는 크게 기뻐하며, 동문수의 아들 공손 귀보(歸父)를 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극극에게 축하 인사를 하는 동시에 제나라를 정벌하는 시기를 알아오게 하였다.
노선공은 동문수 덕분에 군위에 올랐기 때문에 공손 귀보를 다른 신하들보다 더 신임하고 있었다. 그때 노나라는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의 삼가(三家) 자손들이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선공은 자신의 자손들이 삼가에게 능멸당하지 않을까 항상 근심하고 있었다. 선공은 晉나라로 가는 귀보의 손을 잡고 은밀히 부탁했다.
[‘삼가(三家)’에 대해서는 제98회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삼환(三桓)은 나날이 번성하는데 공실(公室)은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음을, 그대도 잘 알 것이오. 공손이 이번에 가거든, 기회를 엿보아 晉의 君臣에게 은밀히 우리 사정을 호소한 후에 그들의 병력을 빌려 삼가를 축출해 달라고 청하시오. 그러면 해마다 조공을 바쳐 晉의 은덕에 보답하고 영원히 두 마음을 갖지 않겠다고 하시오. 경은 조심하고 결코 누설하지 않도록 하시오.”
귀보는 명을 받고 많은 예물을 가지고 晉으로 갔다.
그때 晉나라에는 도안가(屠岸賈)가 진경공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얻어 사구(司寇)가 되어 있었다. 귀보는 도안가를 찾아가 뇌물을 주고 삼가를 축출하고자 하는 주군의 뜻을 고하였다. 도안가는 조씨(趙氏) 가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난씨(欒氏)·극씨(郤氏) 가문과 친교를 맺고 긴밀히 왕래하고 있었다.
[도안가는 도안이의 손자이고 도격의 아들인데, 진영공(晉靈公)에게 아첨하여 함께 포학한 짓을 일삼았다. 제100회에, 도안가는 서예(鉏麑)를 시켜 조돈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고, 제101회에 조천이 도원에서 진영공을 시해한 다음 도안가를 죽이려 하자 조돈이 만류하여 살아남았다.]
도안가가 귀보의 말을 난서(欒書)에게 고하자, 난서가 말했다.
[난서는 난돈의 아들로서, 제107회에 晉軍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초군에 패전했을 때 하군부장이었다.]
“원수(극극)께서 지금 계씨와 함께 제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원수의 협력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한번 탐지해 보겠습니다.”
난서가 틈을 봐서 극극에게 귀보의 말을 전하자, 극극이 말했다.
“그 사람은 노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니,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극극은 밀서를 써서 노나라의 계손행보에게 보냈다. 계손행보는 크게 노하여 말했다.
“예전에 공자 악(惡)과 공자 시(視)를 죽인 것이 모두 동문수의 음모였다. 나는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그 일을 참고 그를 비호해 주었는데, 이제 그 아들이 도리어 나를 축출하려고 한단 말인가? 이건 호랑이 새끼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계손행보는 극극의 밀서를 숙손교여(叔孫僑如)에게 보여주었다.
[숙손교여는 숙손득신의 아들이다. 제94회에 숙손득신이 적(翟)나라와의 전쟁 때 교여라는 거인을 죽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이름을 ‘교여’라고 지었다. 숙손득신이 계손행보의 당숙(堂叔)이므로, 숙손교여와 계손행보는 6촌 형제이다.]
교여가 말했다.
“주군이 조회를 열지 않은 것이 한 달이 넘었습니다. 병이 났다고 하는데, 아마 핑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병문안을 가서 죄를 청하면서, 주군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교여는 사람을 보내 중손멸(仲孫蔑)을 불러 얘기하고 함께 가자고 하였다. 중손멸이 사양하며 말했다.
“君臣 간에 대질(對質)하여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같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맹손씨의 첫 번째 인물은 공손 오(敖)인데, 중손멸은 공손 오의 손자이다. ‘맹손씨’는 ‘중손씨’라고도 했다. 따라서 중손멸 역시 숙손교여·계손행보와 6촌 형제이다.]
계손행보와 숙손교여는 사구(司寇) 장손허(臧孫許)와 동행했는데, 세 사람이 궁문 앞에 이르자 선공의 병이 위독하다고 하였다. 세 사람은 선공을 알현하지 못하고, 안부만 묻고 돌아갔다.
첫댓글 그래,초장왕의 패권은 그가 죽음으로서 끝났다.
그러면,그 다음의 패권국은 어느나라인가?
이제 형만이라는 초나라보다 더 남방으로 가서
오나라가 아니던가.
오나라는 아직 비춰지지 않는데,어느 때 나오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