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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오 쿠키'로 유명한 크래프트(Kraft)는 2010년 초콜릿 명가 캐드베리(Cadbury)를 인수ㆍ합병했다. 합병 후 캐드베리 직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제품 품질은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보통 인수 기업이라면 합병회사 직원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향후 월급과 복지 인상을 약속하거나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을 법하다. 그러나 크래프트가 캐드베리 직원을 끌어안기 위해 들고 나온 방법은 '역사'였다.
크래프트는 사내 인트라넷에 두 회사의 역사를 타임라인으로 정리해 올렸다. 최고의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캐드베리 역사에 경의를 표하면서 크래프트도 최고의 과자를 위해 노력하던 역사가 있다고 설득했다. 대형마트의 선반을 꽉 채우고 있던 크래프트 과자와 캐드베리 초콜릿 사진은 제과 업계를 이끌어 가던 쌍두마차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다. 크래프트는 창업자인 제임스 크래프트와 존 캐드베리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다고 선전했다. 둘 다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맛있는 과자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으며 공동체 활동에도 열심이었다고 전했다.
두 회사 간의 '닮은꼴' 역사가 직원들에게 회자되자 크래프트와 캐드베리의 화학적 결합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란 생각을 가지게 하려고 회사의 기록물 저장소를 뒤지던 임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끊임없이 성장과 발전을 역설해야 하는 기업의 리더라면 필연적으로 미래에만 집중하기 쉽다. 과거는 딛고 지나가야 할 유산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현명한 리더들은 기업 역사에서 소속감과 동기 부여의 원동력을 찾는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혁신과 변화 사례를 찾는 리더들은 직원들에게 혁신의 필요성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얘기할 때보다 경험했던 과거 역사를 얘기할 때 구성원들은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리더들이 역사를 이야기하며 조직을 이끌어간 사례를 연구해온 조지 데이비드 스미스(George David Smith)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최근 매일경제 MBA팀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정체성의 원천이며 미래를 위한 전략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리더들이 기업 역사를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다음은 스미스 교수와의 일문일답.
-대부분의 기업들은 창립기념일처럼 지나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하며 기업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기념일은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할 기회를 만들어주지만 일회성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캘린더 행사와는 별도로 기업들은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구성원들이 공유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기념일은 감정적인 이벤트일 뿐이다. 정말로 리더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역사에 매달리게 되면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해진다. 이는 결국 혁신과 변화를 저해하지 않나.
▶그 반대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혁신을 돕는다. 자신의 회사가 과거 어떠한 방식으로 혁신했는지를 보면 지금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혁신을 시도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기업 역사는 그 자체가 변화와 혁신에 관한 역사다. 그러니 과거의 혁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앞으로의 혁신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택배회사 UPS 역시 역사를 통해 구성원들이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1990년 말 UPS는 치열한 시장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리스크를 감당하느니 그냥 운영상의 효율성만 높이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자 당시 최고경영자(CEO)인 짐 켈리는 UPS 역사는 끊임없는 신사업의 역사라고 직원들에게 반복해 강조했다. 트럭 배송, 화물비행기를 이용한 화물 운송, 웹 기반의 배송추적 시스템 같이 쉴 새 없는 신사업 개척으로 UPS는 시장 선도자가 되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켈리 CEO는 "물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새롭고 힘들고 지금과는 다른 과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과제를 몇 십년간 계속해왔다"며 직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리더들은 자기가 젊고 개혁적인 사람으로 보이길 원한다. 그런데 역사나 지나간 일을 계속 강조한다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앞서가는 리더로 보이게 할 수 있다. 시대에 관계없이 통용되는 교훈을 줄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개발하면 누구나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젊었을 적엔…'이란 식의 회상만 되풀이한다면 당연히 고루한 리더로 보일 것이다. 리더들은 익숙한 이야기를 낯설게 이야기하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느끼도록 자신만의 통찰력을 이야기에 녹일 필요가 있다.
KKR의 공동창업자 헨리 크래비스와 조지 로버트는 LBO펀드를 개발하고 시장에 전파하던 과정을 모두 기록화해서 구성원에게 전파했다. 실수와 실패담을 비롯해 당시 금융업계 관계자, 학자들의 인터뷰까지 곁들여 KKR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냈다. 이들이 남긴 유산 덕분에 KKR의 젊은 직원들은 저평가된 기업을 대상으로 설계하는 LBO펀드를 정교하게 개발할 수 있게 됐다.
-기업의 전통과 역사에 가치를 둔다면 이미 시장에서 유행이 지난 제품이나 효과 없는 프로젝트에 집착하게 될 위험은 없나.
▶역사적 교훈은 오히려 수익성을 잃은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 IBM이 좋은 예다.
2002년 IBM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새뮤얼 팔미사노는 전공이 역사학이었다. 그는 전공을 살려 회사의 기록물과 창업주 토머스 왓슨의 연설문을 보며 IBM이 중시해야 할 가치를 도출해냈다. 그건 고객만족, 장기적 관계 형성, 틀을 깨는 혁신 창조였다. 이 점을 들어 팔미사노는 IBM이 하드디스크와 PC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설득했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만 고객에게 큰 만족을 줄 수 없었고 장기적인 관계도 만들어낼 수 없는 사업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역사만 있다면 기업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회사의 역사를 내세우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의 역사라면 복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실패 이유를 잘 알고 이를 개선하도록 하는 것이 리더 역할이다.
한국의 현대ㆍ기아차도 초반 실패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성공한 좋은 예다. 현대ㆍ기아차는 1970~1980년대 의욕적으로 미국 진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가격은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품질이나 기술 면에선 준비가 덜 된 차들이라 평판만 나빠졌다. 그 평판을 회복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현대ㆍ기아차 임원들은 모두 그때의 빼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하고 있다. 그때의 교훈으로 그들은 계속 '품질경영'을 강조했고 이제 미국 소비자들은 현대ㆍ기아차를 달리 보고 있다.
-기업의 생존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창립된 지 몇 년 안 된 신생 기업은 공유할 만한 역사가 별로 없을 수도 있다.
▶백 년 기업이든 1년도 안 된 기업이든 모든 기업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몇 달 전 생긴 스타트업(신생회사)도 구성원들은 여러 가지 기억을 쌓고 있을 것이다. 창업 과정과 프로젝트가 성공적이었든 실패였든 그 경험은 앞으로 들어와 일할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젊은 기업일수록 오히려 역사를 공부하기가 더 좋다. 왜냐하면 임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많고 공식적인 문서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업에선 창립 멤버들이 죽거나 이미 회사를 떠난 경우가 많은데 젊은 기업은 그 점에서 유리하다.
-인력 교체가 잦은 곳에선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런 경우에도 역사가 구성원의 소속감을 고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나.
▶사람들이 잘 바뀌는 조직에서도 역사는 소속감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잦은 인력 교체는 기업이 역사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다. 조직이 안정되고 사람들이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하는 곳이라면 대부분의 직원이 기업 역사를 꿰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직이 잦은 곳이라면 역사를 전승해줄 사람들 역시 회사를 쉽게 떠난다. 그러니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에 상관없이 항상 정확한 역사가 축적될 수 있도록 모으고 기록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강조하고 공부하려는 기업들은 어떤 작업부터 시작해야 하나.
▶먼저 기업 역사에 관한 기록물(서류ㆍ사진ㆍ기사 등)을 모아라. 그리고 여기에 퇴직 임원이나 장기근속 직원의 인터뷰를 더해 기록물을 보다 다양하게 해라.
CEO라면 직원들이 당연히 회사 역사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회사에선 리더들과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직원이 의외로 적을 수도 있다. 그러니 회사 역사에 대한 직원들의 이해도와 인지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조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후엔 사실을 토대로 스토리를 만들어라. 사람이든 제품이든 브랜드이든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이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역사 기록을 찾아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리더는 다른 회사의 역사도 직원들에게 이야기해볼 수 있나.
▶그렇다. 교훈을 주는 스토리가 꼭 자기 기업에서만 나올 필요는 없다. 모범적인 케이스스터디 기업은 어디서나 인용할 수 있다.
내 수업을 들은 뉴욕대 MBA 학생들이 다시 기업으로 돌아가 많이 인용하는 사례 중 하나가 웨지우드라는 도자기 회사 이야기다. 도자기 회사 같은 특수한 경우가 자기 회사에 무슨 교훈을 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18세기 위대한 창업가 조슈아 웨지우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산층과 매스마켓(mass market)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도입한 선구자였다. 그가 제시한 제품 진부화, 유명인 광고, 쇼룸 같은 현대 마케팅 개념은 기업들에 보편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인용할 만하다.
-CEO 역할 중 하나로 역사의 기록과 해석을 꼽았다. 그러면 이런 역사가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CEO는 누가 있는가.
▶사모투자펀드 회사 KKR의 공동 창업자인 헨리 크래비스와 조지 로버트를 들고 싶다. 두 사람은 1970~1980년대 LBO펀드를 개발하고 시장에 전파하던 과정을 모두 기록화해서 구성원에게 전파했다. 실수와 실패담을 담은 것은 물론이며, 조직 내부 사람뿐만 아니라 당시 금융업계 관계자와 학자들의 인터뷰까지 곁들여 KKR 역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냈다.
이들이 남긴 유산 덕분에 KKR의 젊은 직원들은 저평가된 기업을 대상으로 설계하는 LBO펀드를 좀 더 정교하게 개발할 수 있게 됐다.
맥킨지컨설팅 대표 도미니크 바턴도 역사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며 역사를 조직 운영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상황은 몇 십년 전과 다를지라도 이전 세대 임원들이 기회와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역사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고 종종 말한다.
-한국 기업이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어떠한 점을 염두에 둬야 할까. 한국 기업들은 단시간에 급성장했지만 이제는 시장이 성숙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한국 기업의 리더들은 지금보다 혁신적이고 발 빠른 기업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개발도상국의 기업 발전 역사를 보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과 신생기업 쪽으로 성장의 축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 급성장기에 각국 정부는 규모의 경제를 노려 몇몇 대기업에 자금을 집중하며 지원해줬다. 그러나 시장이 성숙하면서 이젠 보다 다양한 제품을 빨리 내놓을 수 있는 신생기업과 중소기업이 새로운 성장 엔진을 달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기업들이 규모보다는 유연성과 혁신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료제적 프로세스를 줄이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를 미화·왜곡하고 싶다고? 리더의 신뢰성만 떨어져
역사를 강조할 때 가장 경계해야 될 위험은 '역사왜곡'이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수많은 팩트 중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역사만을 가져와 제멋대로 해석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조지 데이비드 스미스 뉴욕대 교수는 기업이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아 역사를 잊는'역사 치매'는 '역사 왜곡'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리더라면 구성원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미화된 역사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팩트를 왜곡하더라도 원하는 효과는 얻기 힘들다. 기업의 역사 교육은 국가의 역사 교육과 다르다. 특정사관이나 왜곡된 사실관계를 주입하도록 교육을 독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업 주변에는 투자자나 애널리스트와 같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있다. 물론 회사 직원들도 기업의 역사를 함께 보아온 목격자들이다.
이들은 리더가 회사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비판적이다. 리더가 자기에게 유리한 역사만을 얘기하더라도 직원들은 이런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미화된 역사는 리더에 대한 신뢰도와 리더십만 해칠 뿐이다.
자신감 있는 리더와 조직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스토리를 찾는다. 현상 유지가 아니라 변화를 추진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리더는 팩트를 개방적인 태도로 성실히 다룬다.
-그렇다면 리더가 제대로 된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뭔가.
▶역사를 잊어버리는 기업들의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선 일단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올바른 해석은 올바른 기록에서 나온다. 기록고(아카이브)를 만들 때 자기의 얘기만을 담지 말고 다른 회사나 업계 종사자, 전문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모아라. 퇴직 임직원이나 핵심 종업원들의 이야기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모으는 과정에서는 신뢰도와 전문성 조사도 함께해야 한다.
역사를 기록할 때는 전문 역사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그들은 전문적인 리서치 능력을 갖고 있으며 기업 역사에 독립적인 견해를 제시해줄 수 있다.
■ He is…
조지 데이비드 스미스 교수는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컨설팅 회사인 윈드롭 그룹(Winthrop Group)을 설립했다. 저서로는 '기업전략분석(Anatomy of Business Strategy)' '독점에서 경쟁으로(From Monopoly to Competition)' 'KKR 스토리(원제:The New Financial Capitalists)' '경영불변의 법칙(원제:Wisdom from the robber barons)'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