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八寺(109)- 파주 보광사
설날이라서 서울의 아이들이 대구로 오려면 대가족이 이동해야 한다. 내 손을 떠난지가 어제 같은데 손자 손녀들로 식구가 늘어나서 모두가 아홉 명이다. 우리 부부가 서울에 가기로 했다. 딸 아이 집에서 설날을 보내고, 시내 구경이나 가자고 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들네 집에 들리면, 서울 근교의 사찰을 찾아갔다. 대구에서는 쉽게 찾아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들 내외와 사찰 탐방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딸아이의 집에 머문다. 딸아이도 어디로 나들이를 갈까, 라고 물어왔다. 우리 부부는 서울 시내보다는 근교의 절집을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더니, 인터넷 검색 창을 열심히 뒤적인다. 조선 말의 불상을 볼 수 있다는 수종사를 염두에 두었으나. 수종사는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고 나온다면서, 파주에 있는 보광사를 추천했다. 보광사라는 절 이름은 낯설었지만, 우리는 절집 찾기가 목표이니, 보광사가 좋겠다고 했다.
서울의 북쪽으로 달리는 찻길은 낯설다. 의정부를 지나고, 들판의 곳곳에는 비니루 하우스가 햇빛을 받아 반사하면서 물너울처럼 춤을 춘다. 요즘의 시골 풍경이다. 포장은 되었지만 여전히 좁은 시골길이다. 굽이굽이인 고갯길을 넘는다. 길 주변의 산기슭에는 여기저기에 흰눈이 녹지 않아서 잔설을 만든다.
절집 바로 옆의 주차장까지 차가 올라갔다. 절의 규모가 꽤나 크다. 절집 옆으로는 등산로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산으로 오른다. 절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령산 보광사라고 쓰여 있다. 우리 부부는 딸의 내외와 절 안으로 들어갔다. 정월이라 아직은 겨울의 차가운 맛이 감도는 날인데도 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마당은 눈이 녹은 탓인지 질퍽거렸다. 이 절에서도 아내는 늘 하던대로 내게 돈을 달래서 법당으로 들어갔다.
서울서 멀지 않고, 절집을 찾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데, 대웅전, 그리고 여러 법당들과 요사체들이 단장하지 않아서 허름한 옛 모습이다. 더구나 단청은 색상마저 잃어버리고 바탕 나무가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까지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너무 요란하게 단장한 모습에 실망했는데, 이 절에서는 세월이 남긴 떼가 그대로 남아 있어 옛 맛이 소롯이 느껴진다. 어쨌거나 여러 채의 법당과 요사체며, 널직한 절의 터며, 내가 몰랐었다는 것뿐이지 서울에서는 이름이 꽤 알려진 절이라고 하였다.
절을 찾아다녀보면, 이상하게도 영조와 사연이 얽힌 절이 많았다. 조선조 후기의 억불사상이 만연해 있었던 때였음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왜’를 생각하게 해준다. 이 절도 영조와의 사연이 아주 많았다.
보광사(普光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 원진, 법민, 무학이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대에 다시 절을 세우고 1634년에 범종을 봉안했다. 1740년(조선 영조 16년)에는 보광사 가까이에 들어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昭寧園, 사적 제358호)의 능침 사찰이 되어 사세가 확장되었다.
대웅보전 바로 옆에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어실각이 있다. 그 옆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있다. 이처럼 보광사는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명복을 기리는 사찰이었다.
잘 아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영조의 어머니이신 숙빈 최씨는 장희빈에 밀려 폐비가 되었던 민씨 왕비의 무수리 였으나, 숙종의 눈에 띄어 은총을 받으므로 태어난 아들이 영조이다. 미천한 신분이었던 숙빈 최씨였으므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염원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말할 처지도 못 되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남모르게 기원하면서 부처님께 빌었다. 숙빈 최씨의 꿈은 이루어졌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영조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지은 능침사찰이 파주 보광사이다. 영조는 1753년에 어머니 묘를 소령원으로 추봉하면서, 원래는 고령사인 인근의 사찰을 보광사로 이름을 고쳤다. 오늘의 보광사가 태어난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보살핌인지, 부처님의 가호인지 영조는 82세의 수를 누리고, 52년 간 왕위에 있었다.
아내가 대웅전에 우리 가족을 보살펴 달라고 불공을 드리러 간 동안 나는 명부전을 기웃기렸다. 시왕들의 조각상도 도색이 벗겨졌고, 뒤의 탱화도 색이 바랬다. 나는 명부전 안에 오래 머물렀다. 쌀쌀한 날씨인데 명부전 안은 난로가 켜져 있어 따뜻했다. 그러나 시왕상과 탱화가 내 눈길을 끌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불교 미술을 공부할 때 조선 후기의 탱화에 서울 근교의 탱화와 전라-경상 지역 간에 차이가 있다고 들었으나 내 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내문에 조선 후기에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상규, 응석, 기행이라는 화승이 그렸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경기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가 여섯 점이나 있다고 하였으나. 내 눈에는 그게 그것이고 ---, 지정하였다고 하여 특별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여기저기의 절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집사람과 딸 내외가 함께 나왔다. 부근에 빵도 파고, 차도 파는 유명한 집이 있다고 하여 갔다. 주차장 안에는 차가 가득하다.
우리 부부와 사위 그리고 딸이 테이블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빵도 먹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의 이야기를 하였고,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듣는다. 지난 옛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를 하는 우리 늙은이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젊은 부부는 한마음이 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와 자식간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즘 부모-자식 사이에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서로 간의 대화가 없어서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우리 부부의 마음이 흐믓하였다.
이 절이 영조가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니, 우리 사위-딸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이 절로 데리고 왔으리라. 오늘은 기분이 좋다. 더더군다나 절집 답사를 시작할 때 백 여덟 절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 절이 목표를 넘어선 첫 번 째 절로서 백 아홉 번 째의 절이다. 또 다른 의미가 느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을 찾아갈 수 있을까.
첫댓글 제가 처음으로 수필공부한다고 30년대 활동하셨던 임선생님의 소개로 수필아카데미 강의실에선 이동민 학장님을 처음 뵈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