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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인 (2005-06-23 02:00:17, Hit : 1145, Vote : 28)
이상한 내용이 있어서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글을 읽으노라면 황영희란 분은 머리가 상당히 좋은 분이라는게 느껴지더군요!
첫줄을 읽으면 엉뚱하고 이해되지 않다가도
둘째줄을 읽으면 첫줄을 왜 말했는지가 생각나는 그런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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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본명은 백안첩목아였다.
한국사 2005/06/20 16:05
http://blog.naver.com/chunson_.do
http://blog.naver.com/chunson_/60014137507
글쓴이 : 황영희
공민제의 몽고식 이름이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한자를 사용한지 2천년이 가까운 나라에서 맏이, 얼굴, 문서, 나무, 아이라고 열거해 통치자의 이름을 짓는가? 공민제는 숙제의 둘째아들이므로 설령 몽고식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顔帖木兒는 돼도 伯顔帖木兒는 될 수 없다.
->차남인 공민왕에게 장남이란 이름을 붙일수없겠죠!
伯顔帖木兒는 원래 문자를 모르던 미개 종족에게 한국이 공문서(인구통계 등) 작성을 위해 붙여주었던 이름의 하나로 시간이 흐르자, 미개 유목민족 스스로 애용하게 된 것이다. 伯顔帖木兒는 상식적으로 顔帖木兒의 형보다는 자손일 확률이 높다. 아들을 더 낳을 계획인 몽고인이 첫아들을 伯顔帖木兒라고 했다면, 둘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첫 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름에 장남이라고 넣으려면 차남이 생겼을때나 가능한 이름이고, 차남이 생길때까지는 이름도 없었다는 소리임...(이성계는 차남이라는 말도있음)
안첩목아(顔帖木兒 ; 앤티무르)는 성계의 증조 춘의 본명이었다. 그런데 안첩목아의 아들 즉 자춘의 몽고식 이름은 오서사불화(吾暑思不花)다. 伯顔帖木兒는 자연히 한 대 건너뛴 성계의 본명이었던 것이다. 한족으로 둔갑하면서 제 이름을 공민제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성계는 몽고식 이름을 반드시 사용했겠지만, 황족인 공민제까지도 몽고식 이름을 사용했을런지...
설령 그렇다해도 자기 몽고이름은 숨기고 망국 왕의 몽고이름을 광고하고 다니다니...
성계는 이두란과 결의형제를 맺었다지만, 원래 친형제간이다. 두란의 본명은 帖木兒(티무르)다. 성계는 伯顔帖木兒(빠이앤티무르)니까, 이 둘이 형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계는 帖木兒가 태어날 때까지 伯顔帖木兒라는 비천한 이름조차 없이, 이 새끼, 저 새끼로 불리던 종자였음이 분명하다. 7살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伯顔帖木兒는 그 사실을 고추모에게 슬쩍 떠넘겼다. 그런 천하디 천한 노예 종자가 유언비어를 유포해 고려황제를 제거한 뒤 9999개의 방을 가진 자금성을 짓고, 전세계에 군림하며 황제노릇했던 것이다.
->십몇년 차이에서 의형제를 맺지말라는 법은 없지요!
친형제간이라서 한족으로 변신한 성계는 예맥족 帖木兒와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날조했다. 帖木兒는 성계의 둘째 처 강씨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모와 조카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 고종, 이종 누이들은 물론 이모, 조카를 가리지 않고 처로 삼은 것은 신라가 아니라, 예맥족 포함한 몽고족이었던 것이다.
-> 그러면 그 강씨가 이성계의 이모였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군!
첩목아(두란)는 백안첩목아(성계)와 오서사불화(자춘)이 귀화한지 16년 뒤인 1371년(공민제 20)에 고려에 귀화하지 않았다. 첩목아는 백안첩목아의 동생이고, 오서사불화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비 오서사불화가 동족을 팔아 고려에 동녕부를 넘긴 대가로 고려에 귀화할 당시, 제 아비를 따라왔다.
동녕부 정벌이 1357년 11월에야 완료되었으므로 오서사불화가 고려로 귀화한 것은 1357년 말 내지 1258년이었다. 백안첩목아(성계)의 나이가 23살이었으니, 첩목아는 10살 전후였다. 그러므로 첩목아는 천호는 커녕, 백호조차 아니었다. 한족으로 둔갑한 백안첩목아와 예맥족 첩목아가 형제간임을 부인하기 위해서 첩목아가 오서사불화(자춘)이 귀화한지 16년 뒤에 고려로 귀화했다고 날조했다. 첩목아가 이씨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伯顔帖木兒와 주원장 사이의 연락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주원장은 명을 세운 이후였을 겁니다.
顔帖木兒의 아들은 吾暑思不花, 오서사불화의 아들은 伯顔帖木兒와 帖木兒였다는 사실에서 성계 집안은 성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사의 원래 이름은 뭘까. 한단고기에 나온다. 야사불화(埜思不花)다. 埜思不花와 吾暑思不花는 조부, 손자간이고, 伯顔帖木兒와 帖木兒는 형제간이니까, 야사불화의 아들 행리의 진짜 이름은 暑思不花나 思不花쯤 될 것이다.
-> 사람 이름을 가지고 장난치는것처럼 보이네요! 우리는 자식에게 제일 좋은 이름을 붙여주기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않나요?
날조사에서 성계의 할아비는 春, 아비는 子春이다. 그러나 누가 부모 이름에 子자 하나 붙여서 이름을 짓는가. 한국에서는 없었다. 항렬에 따라 돌림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성계는 제 조상의 이름을 날조하면서 무심코 예맥족의 버릇을 모방한 것이다.
야사불화는 본국이 아니라 번국사람이었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의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라, 1274년에 죽은 인간이다. 야사불화는 향사도, 삭방도병마사도 아닌, 동녕부의 다루가치로 횡포를 부렸다. 천사 즉 천자의 사신 정지상을 맞아 “다시는 고려를 섬기지 않는다.”며 거만하게 굴다가 철퇴에 맞아죽은 종자다. 야사불화가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능력껏 출세에 도움 될 몽한 여자와 결혼했음에도 만호인지 천호(상상 속에서 천호가 된 첩목아의 예에서 보듯이 백호, 십호 혹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인지 외에는 동녕부에서 직위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고려가 동녕부를 공격하는 기회에 오서사불화는 제 동족을 팔아 고려로 전향했던 것이다.
-> 만호, 천호였다면 배반을 하였을까?
-> 한번 배반한 자는 두번, 세번...아니 천번인들 배반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중용하면 어떻게 된다는것을 보여주는 예라 할것입니다.
글쓴이 : 황영희
-> 중원에 명나라가 겨우 들어서서 혼란한 틈에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했던 우리민족의 마지막 시도가 좌절되고, 중국에대한 사대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본인은 이성계에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산들바람 (2005-06-23 02:30:35)
음~제가 아는 상식의로는 중국식의로 불리면 그리 되는걸루 압니다..오노불사화 << 이름처럼여..재밌는 사실은 미국의 켈리포니아 중국식 이름이 금산 이라고 얼핏 본거 같네여..
미국을 아매리과 라고 할걸여?? 한문의로요...
중국식 한자로 표기하면 우리가 알아먹기 힘들겁니다...그 이름은 몽골식의로 해석해야 될거 같습니다...
저의 짧은 의견 이었읍니다.......
김화식 (2005-06-23 10:58:30)
화살표 치고 써놓은 글은 관심인님이 따로 적어놓으신겁니까?
글이 올라올 때만 해도 없었는데, 지금 보니 있군요.
관심인 (2005-06-23 15:06:46)
황영희란 분의 글에대해 본인의 의견이 없다면 문제가 있을겁니다.
그래서 뒤에 화살표글을 붙여놨습니다.